6월 16일 주일설교 1부 _ 요한복음 12장 20-36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당국자들을 피해 고의적으로 숨는 장면을 많이 보여주고 있죠. 예수님과 종교당국자들 사이에 살기어린 추격전을 요한복음은 여러 차례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읽었던 것처럼 요단 저편에 가서 숨으셨고, 에브라임 빈 들에 가서 숨으셨고, 지금 또 숨었죠. 이 말은 예수님과 유대인 종교당국자들 사이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역학, 살기가 그 사이를 채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4절 정말 중요한 구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때 사랑하다는 필레오라는 동사입니다. 이때 자기의 생명은 프시케입니다. 이 프시케가 우리가 누리는 생명, 생물학적 생명 또는 감정적인 모든 에너지의 총체를 생명이라고 말하죠. 자기 생명은 프시케, 프시케는 영어로 psychology 할 때 psyche죠. 프시케를 사랑하는 자는 생물학적 목숨에 집착한다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무얼 잃어버려요? 그 프시케 까지도 잃어버릴 것이요,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대구절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생물학적인 생명, 혼적인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영원한 생명을 조에라고 말합니다. 조에는 프시케와 다릅니다. 하나님과 공존이 가능한 생명을 조에라고 말하고, 이 세상에서 한 번 불타다 없어지는 생명을 우리는 프시케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생물학적 자기 생명을 미워하면 그 프시케를 보존하여 지켜서 영생으로 질적 전환하도록까지 보존한다, 프시케 생물학적 생명은 하나님과 영원히 같이 사는 생명으로 진화하고 전진하고 발전하도록 돼 있다는 것입니다. 참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생물학적인 목숨, 보통 사람 만민에게 다 주어진 목숨 그 자체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은 천국에서 생물학적인 모든 에너지도 보존합니다. 영생이라는 틀 안에서 보존합니다. 우리가 프시케,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집착하고 그것을 너무 사랑하다 보면 영원한 생명까지 나가는 것을 막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결국 생명에 관한 두 가르침입니다. 이 세상에서 압구정동과 파주 아울렛 같은 데서 소비하면서 넘치는 생기는 프시케를 사랑한 겁니다. 우리가 명품 가방을 들었을 때 기분 좋아진 것은 프시케입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프시케를 사랑한 겁니다. 그런데 그 프시케를 사랑하다 보면 그 프시케를 잃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잃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그 프시케를 미워하면, 성경에서 사랑한다 미워한다 할 때 미워한다는 것은 증오심을 갖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미워한다는 말은 덜 우선적으로 취급한다는 뜻입니다. 증오심에 부글부글 끓어서 배척한다는 뜻이 아니라 덜 우선시할 때, 이런 뜻입니다. 상대적입니다. 무얼 덜 우선시합니까? 조엘 아요나, 영생을 위하여 이 생물학적 목숨을 잠시 상대화하는 삶을 살 때 영생까지 이 프시케를 보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삶이 영생까지 보존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생명이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것까지 다 거부하는 겁니까? 먹고 마시고 예뻐지려고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영생입니까? 영생을 얻기 위해서 지상생애의 모든 기쁨을 박탈하고 부정한다면 그것도 영생이 아니죠. 그건 너무 살벌한 잔혹한 거래가 되는 거죠. 그래선 안 되겠죠. 영생을 얻기 위해서 지상의 삶의 모든 기쁨을 포기하고 연애도 포기하고 산에 올라가서 기도만 하고, 얼굴이 나비처럼 바뀔 때까지 기도하는 것 아니죠. 제가 볼 때 이 세상에서 자기 프시케를 미워하면, 즉 세상적 잉여욕망과 우리를 비인간화시키는 욕망을 배척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런 욕망을 가졌을 때 우리 자신이 비인간화되고 우리가 더 나빠지는 욕망이 있거든요. 우리 생명이 본질적으로 요구하는 욕망이 아니거든요. 사단과 죄와 육신의 세계가 우리한테 거짓으로 강요한 욕망이라는 말이에요. 그런 욕망을 부정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죠. 그러면 영생할만한 가치 있는 내 모습만 남게 되는 겁니다. 그걸 영생까지 보존하는 거죠. 예수님은 매우 상식적인 말씀을 하신 것이고, 예수님은 무시무시한 수도원적 금욕주의를 절대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 마을 사람들이 평균 한 끼밖에 먹지 못하는데 내가 세끼를 먹는다? 제가 보니까 기초 대사량이 1562kcal 더라고요. 제 몸무게와 키를 재보니까, 제가 2200kcal를 계속 먹으면 어떻게 될까요? 700kcal를 소화하지 않으면, 심악산을 왕복 4번 왔다 갔다 해야 700kcal가 없어집니다. 제가 1562kcal를 빼고 2200kcal를 계속 먹으면 살이 찌는 거겠죠. 살찐 사람이 됩니다. 하루에 한 끼밖에 먹지 못하는 사람이 프시케를 영생하도록 보존하려면 자기가 두 끼 먹거나 1.5끼 먹으면서 남는 걸 주면 되겠죠. 왜냐하면 그렇게 양식을 적게 먹는다고 죽진 않거든요. 오히려 다이어트가 되죠. 지금 미국 사람 럼스펠트와 부시 대통령 때 체니 부통령이 지금 미국 사람들의 삶의 스타일을 바꾸려고 하지 마, 그건 오산이야, 미국은 이대로 영원히 살 거야, 이게 체니 부통령과 럼스펠드 미국무부장관이 한 이야기입니다. 이것과 똑같은 말이 북한에 있습니다. 북한에 가면 카드섹션이 있는데, 우리가 바뀌기를 기대하지 마, 이대로 살래, 북한 12만 명이 카드 섹션으로 만드는 말이 아주 장난스러운 말입니다. 미쳐도 보통 미친놈들이 아니죠. 그래서 북한과 미국은 정신적으로 쌍생아입니다. 왜냐하면 바뀌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심각한 타락이죠. 미국 사람 럼스펠드와 체니가 보존하기를 원했던 미국의 삶은 3200kcal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3200kcal를 먹습니다. 그런데 걷지 않고 차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부자 외에는 전부 다 몸이 엄청나게 부하게 돼 있습니다. 가보면 알지만 일반적으로 상상을 초월할 만큼 몸이, 왜 그렇습니까? 이건 제가 생각할 때 미국 사람들은 영생하도록 자기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칼과 총과 힘으로 다른 사람의 자원을 착취해서 싼 석유를 확보해서 자동차를 3대씩 굴리고 에어컨을 22도씩 틀면서 사는 거죠. 지금 우리가 에어컨을 26도로 틀어야 합니다. 26도도 매우 시원합니다. 30도 땡볕에서 26도면 너무 감사한데, 26도에서 계속 양복을 입고 있으면 덥습니다. 그런데 보통 서울시내 사무실에 가면 사기업에 가면 긴 와이셔츠를 입고 23도 틀어놓고 있습니다. 신세계백화점 지하에 가면 22도 23도 틀어놔서 사람을 냉장고로 만들어서 정신을 잃게 만들어서 돈을 쓰게 만듭니다. 이런 전력수요를 초과해서, 전력이 모자라면 어떤 두려움이 옵니까? 원자력 발전소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원자력 대안론이 나오겠죠? 결국은 모든 국민으로 암전실험을 하죠. 9월 24일 9시에 서울은 불 끄는 날입니다. 이렇게 시험하고 한전에서 약간 장난을 치고 나서 정전이 돼 엄청 고생을 하게 만든 후 그 다음날 칼럼이 실립니다. 그래도 원자력이 대안이다, 두산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의 돈을 받은 사람들이 쓰는 글입니다. 이런 악한 자들이 전국토를 핵폐기물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영생하도록 자기 생명을 보존합니까? 우리 후손들이 핵폐기물이 없는 이 땅에 안전한 이 땅에서 살도록 절제하고 불편을 약간 감수하고 웬만하면 걸어 다니고 일상에 누적된 불편감수, 고난의 감수, 이런 것이 누적되면 후손들이 오랫동안 이 땅을 건강하게 향유할 수 있겠죠? 이게 바로 영생하도록, 이런 삶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만한 가치 있는 훈련된 삶이 되기 때문에 영생이 되는 겁니다. 오늘 핵심은 어떤 삶이 하나님과 충돌 없이 공존할 수 있는 생인가? 자기의 거짓되고 부풀려진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이다, 이걸 사도바울은 십자가에 죄의 몸이 멸하여, 또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이런 말입니다. 이걸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 죄의 몸이 멸하여, 그냥 우리 생사람을 하나님이 죽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영생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왜곡되고 날조된 욕망들을 표적하여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우리는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삶이 부정되면 영생할 것인가는 분별해봐야 합니다. 이웃의 행복을 파괴할 정도로 부풀려진 욕망에 복무하는 삶, 이웃의 삶을 파괴할 정도로 편리한 삶을 추구함, 이웃의 삶을 파괴할 정도로 급속도로 부자가 되어감, 급속도로 성장하는 세포를 무슨 세포라고 하죠? cell growing extra speed, 암세포, 암세포의 특징은 정상적으로 공급받는 영양분 통로 외에 자기가 몰래 몰래 세포외 다른 기관으로부터 영양분을 확보합니다. 암세포는 어떤 충격을 받아 암세포가 되느냐?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14장에 보면, 암세포가 되는 길, 어느 순간 정상적인 영양분 보급통로가 작동하지 못했을 때 다른 세포들은 참고 있습니다. 몸이 정상적으로 돌아와서 영양이 공급될 때까지 참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영약한 세포들 영물적 세포들이 이러다 우리 죽는 것 아니야? 하면서 땅굴을 파서 전혀 정상통로가 아닌데 비밀 양식을 가져오는 통로를 확보해놓고 거기서 몰래 양식을 먹고 있습니다. 다른 세포들은 금식 당하고 있습니다. 다른 세포들은 자라지 못하고 있는데 암세포가 될 놈들은 몰래 몰래 영양분을 가져오니까 남들은 빈사상태에 빠지고 죽겠다고 소리치는데 암세포들은, 옷이 1100만원 밖에 안 해? 한 3천만 원짜리 없어? 차가 왜 이리 싸, 한 2억짜리 없어? 쓰레기 같은 차 아반떼, 다 쓸어버려, 남과 전혀 공감할 수 없고 남의 허기와 남의 불안과 남의 앙망하는 기다림과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유기체의 조직 바깥에서 활동하는 세포가 암세포입니다. 몰래 몰래 영양분을 섭취하던 세포인데, 정상적인 보급통로가 작동합니다. 그러면 이 암세포는 정상 칼로리 플러스 자기가 몰래 확보한 비밀 양식공급로, 그래서 암세포가 됩니다. 암세포는 평균시민의 고통을 피해가려고 하는 자, 예를 들어 교육이 죽겠습니다, 공교육이 망했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온 국민이 소리칩니다. 그런데 그때 소리치지 않고 휘파람 부는 사람은 누구죠? 자기 자녀를 유학 보낸 사람입니다. 그 사람만 이렇게 합니다. 그게 암세포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세입자 때문에 전세금 폭등한다고 죽겠다고 하는데, 휘파람 불면서 세상 공평하구나, 할렐루야 하나님, 하면서 다니는 사람은 누굽니까? 이 사람은 아파트 수십 채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날 현대의 지주는 천문학적인 고이율로 임대료를 받아먹는 임차소득자입니다. 이들이 바로 지주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최참판댁 같은 사람이고 이들이 바로 오늘날 지주입니다. 지주는 본질적으로 소작인의 슬픔에 동참할 수 없는 겁니다. 어떤 사장님은 지주의 마음으로 어떤 사장님은 종업원과 똑같은 마음으로 회사를 경영합니다. 이 회사 망해도 내가 비상 낙하산이 있고, 버진 아일랜드에 숨겨 둔 비자금 640만 불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튈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암세포적 사장은 사원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자금도 하나도 없고 우리 사원이 나를 도와주지 않고 수위아저씨 청소하는 아줌마가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 회사는 망할 수도 있다, 완전히 유기체적 일체감을 가지고 회사종업원과 하나가 된 사장님이 있습니다. 어떤 사장님이 암세포 사장님입니까? 버진 아일랜드에 돈을 갖다 놓은 사람이죠. 이 사람은 사원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겠죠?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깨닫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하나님의 생명, 영생을 말하려면 기독교인이 모름지기 영생을 살아내야 합니다. 영생을 믿는 자가 되면 안 되고 영생을 살아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합니다. 이 미워한다는 말은 자기 목숨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에 그 당시 헬라어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그리스 사람, 헬라어를 쓴 사람이 예수님을 요청했을 때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말입니다. 구약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구약성경의 배경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이런 농사비유를 가지고 구약성경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축적된 1500년 구원사의 핵심진리를 딱 한 마디로 정의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지혜 앞에 찬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건 아무라도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밀알도 봤고 땅도 봤고 씨도 봤습니다. 이 모든 경험들의 종합을 이런 멋진 말로 종합할 수 있는 사람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왜? 밀알은 예수님 자신에 관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밀알이라는 존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 번 보십시오. 밀알이 땅에 떨어졌는데, 땅에 떨어진 밀알과 땅에 떨어지지 않은 밀알을 비교합니다. 잘 보면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뵙자고 하는 말과 이 말은 동문서답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 대답은 완벽한 대답입니다.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자고 하고 헬라인 공동체로 데려가고자 했기 때문에, 헬라인 공동체가 예수님을 만나자고 한 이유는 예수님을 외국에 와 달라고 그 요구가 있는 것을 아시고, 내가 갈 것이 아니라 내가 맺은 열매가 갈 것이라는 대답을 해준 것입니다. 헬라인들은 누구를 만나야 합니까?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맺은 복제 예수를 만나야 하는 겁니다. 세계 만민이 예수님을 찾습니다. 왜 찾습니까? 세계 만민은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는 왕을 원합니다. 세계 만민은 유능하고 지혜롭지만 압제하지 않은 왕을 원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이런 왕에게 행복한 통치를 당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인간은 압제적인 지배자 밑에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은 처음 고귀한 하나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기를 섬겨주고 자유케 한 후에 통치하시는 예수님 같은 왕에게만 복속하도록 돼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같은 왕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잠재적 반역 상태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겁니다. 예수님 같은 왕이 우리를 통치하기 전까지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과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창조됐기 때문에, 우리 존엄을 파괴하고 우리 생명력을 박탈하고 착취하는 왕 밑에 절대로 못 사는 존재입니다. 예수님 같은 왕만 우리를 지배할 수 있어요. 세계 만민이 예수님을 찾을 수밖에 없어요. 헬라인이 찾았다는 말은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찾는 왕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찾는 왕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내가 한 알의 밀알처럼 떨어져 죽어서 맺는 열매들이 세계 만민 가운데 확산되어야 한다는 대답을 해주신 겁니다. 우리 한 번 읽어 볼까요? 12장 19절, 바리새인의 절망을 보세요.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여러분 온 세상이 저를 쫓아야 한다고 합니까? 쫓는도다, 입니까? 예수님을 바로 알려만 주면 온 세상이 예수님을 쫓게 돼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0-11절은 중요한 구절입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모든 입이 예수를 주라 고백했죠? 이유는 왕이신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자기 왕의 지배권은 zero로 만들고, 자기에게 통치 받는 백성들의 인권과 자유는 100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다스린다고 합니다. 이때 다스린다는 말은 100% 자발적 동의와 복종을 얻어낸다, 다스린다의 정의는 100% 자발성과 기꺼운 복종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그런 개념으로 우리 하나님께서 때 묻지 않은 말로 아담과 하와에게 동물과 식물을 다스리라고 말하셨습니다. 이렇게 때 묻지 않은 순수한 개념, 창조 첫 순간 타락 이전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이때 다스린다는 말은 자발적 복종을 유발시켜라, 자발적 복종과 동의를 얻어내라는 뜻입니다. 아담 너는 자기 부인하는 피조물의 왕이 돼야 한다, 너는 으뜸이 되려고 할 때 섬겨야 한다, 이런 뜻입니다. 만고불변의 법칙입니다. 으뜸 되는 자가 섬기는 자가 되고 자기의 권력을 비특권화 시키면 그 조직은 영원무궁토록 존속합니다. 역학적으로 무게 중심이 훨씬 더 아래 있는 조직은 절대로 전복되지 않습니다. 어떤 조직이 전복됩니까? 지배하려는 자가 지배당하는 자보다 훨씬 수가 많을 때, 역삼각형 구조가 될 때 세상은 전복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헬라인들이 즉 세계만민이 그를 쫓고 있는 현상에 대답했습니다. 나는 가지 못한다, 나는 세계 만민에게 내가 맺은 열매를 보낼 것이라는 답변을 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24-25절입니다. 26절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이때 예수님을 섬긴다는 말은 한 알의 땅에 떨어져 죽는 예수를 섬긴다는 말이죠.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여 가장 귀한 것을 쏟아냈던 그 여인은 한 알의 썩는 밀알로 떨어지기로 작정한 예수를 섬긴 것입니다. 여러분 땅에 떨어진 밀알은 감정적인 동요가 없습니다. 밀알이 떨어지면서 슬프다 나의 운명이여, 이렇게 시적 영탄을 하지 않습니다. 27-28절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한다는 말은 아들의 복종이 완성된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해달라는 말은 제 복종을 제 순종을 완전케 해주십시오, 제가 순종하는 이 걸음에서 뒷 걸음치지 않게 해주십시오, 제가 순종함으로 아들이 순종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100% 성취함으로 아버지 당신이 영광 받아 주십시오, 우리가 매 순간 생각해야 합니다. 한 알 그대로 있게 될 것인가, 땅에 떨어져 죽게 될 것인가, 매순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매순간 땅에 떨어져, 위치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바뀌는 일련의 자기 하강운동을 하면 열매가 맺힌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각 분야 영역에서 땅에 떨어진 밀알처럼 결단하면, 민망한 죽음의 순간을 받아들이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이 말은 네 순종이 완성되었다, 네 순종은 이미 내게 열납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죽기로 결단했습니다. 이제 뒷걸음치지 않겠습니다, 이게 바로 겟세마네 기도였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7-31절이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겟세마네 기도와 똑같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을 때 31절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이제 드디어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복종하기로 결단했기 때문에 모든 입이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순간, 지금 주와 왕노릇 하는 세상 임금들은 폐위됩니다. 실제로 좋은 목사님이 많이 일어나면 나쁜 목사님은 자연히 표가 납니다. 좋은 선생님 몇 분이 나쁜 선생님을 폐위시킵니다. 좋은 사장님이 나쁜 사장님이 사장 아닌 것으로 쫓겨나게 만듭니다. 불가피합니다. 32절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 말은 아까 빌립보서 2장 10-11절과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죽기까지 복종하여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만민의 종이 되는 그 순간 만민을 이끄는 왕이 된다, 십자가에 들려서 만민의 죄를 지고 가는 순간, 어린 양이 되는 그 순간 만민을 영적으로 이끄는 향도자 주가 된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것을 아신 주님, 예수님은 이번에 죽는 방식에 로마제국이 깊이 관여할 것을 아셨다는 겁니다. 자기가 어떻게 죽을 것인지,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행정절차가 개입될 것을 아셨다는 겁니다. 이 세상 임금은 로마제국의 최고 지배권, 헤롯분봉왕 체제등, 압제하고 약탈하고 착취하는 군주는 더 이상 사람들의 지배자로 군림하지 못한다, 이 말은 그들이 실권을 잃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사람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일은 더 이상 못한다, 왜? 내가 참 통치의 도를 시범보이고 나서는 다시는 이 모든 권력의 장악자들은 다시는 자기가 왕처럼 군림하지 못한다, 마가복음 10장 41-45절 보시기 바랍니다. 중요합니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여기서 '소위'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혁성경에 소위라는 말이 있었거든요. 그게 왜 정확한 번역이었느냐? 호이 도케인 아르케인, 아르크 하면 왕이죠. 플루타커, 돈을 가진 왕입니다. 모노 아크 모나키 하면 왕이 한 명인 군주제, 올리가키 하면 왕이 여러 명인 군주제, 아르크는 왕입니다. 도케인은 ~인 것처럼 보인다, 호이는 관계대명사 복수대명사입니다. 호이 도케인 아르케인, 소위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입니다. 진짜 다스리는 것 아닙니다. 진짜 다스리려면 호이 아르키메노스, 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쓴 말은 호이 도케인 아르케인, 도케인이라는 말을 쓰면서, ~인 것처럼 보인다, 소위 직권자 이렇게 말합니다. 소위라는 말이 들어가야 하는데 개혁이 개악번역이라고 합니다. 840군데 개악번역이 일어났습니다. 너무 나쁜 번역이 일어났어요.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개악번역이라고 해요. 이것도 너무 나쁜 겁니다. 임의로는 아닙니다. 임의로는 카타 큐리오, 카타 엑소시아주, 1부 예배는 성실한 사람이기 때문에 좀 더 특혜를 주고 싶은데 괴로워합니다. 카타 큐리오스, 카타는 강세접속사, 큐리오스는 주님입니다. 키르케는 독일말로 church, 다 같은 말이에요. church, 큐리오, 주님, 카타 엑소시아주, 권력 남용입니다. MB라는 사람이 권력남용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MB는 국세청 검찰 국정원에서 수천 번 법을 어겼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지상에서는 편히 살 수 있습니다. 전두환처럼, 테니스 칠 수 있고 골프도 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심판합니다. 조지 W부시가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이겼다고 좋아하지만 하나님은 카타 큐리오 카타 엑소시아주, 강제로 주노릇하다 ,강제로 권력남용하다, 예수님께서 딱 저 두 단어를 가지고 로마제국의 통치의 본질은 카타 큐리오 카타 엑소시아주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로마제국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겁니다. 이 두 단어는 로마제국의 본질 헤롯분봉왕 통치의 본질을 비신화화시키고 완전히 가짜다, 우리 주님이 저런 단어를 쓰심으로 우리 주님의 마음속에는 모든 기존 질서는 다스리는 것이다, 다스리는 것은 복종과 동의를 자발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내가 들리면 모든 사람을 이끌겠다는 것은 내가 십자가에 못이 박힐 때 사람들은 진실로 마음속에 승복하여 복종할 것이다, 진짜 나에게 아무런 혜택 없이 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가향교회 교인 같은 사람들을 원한다, 그런 사람이 나는 내 백성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내가 들리면 이끌겠다는 원리입니다. 32절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내가 십자가 못 박히는 비특권적 왕이 되기로 결단하면 나의 비특권적 결단 때문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감화 감동을 일으켜서 그들을 이끌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내가 십자가에 달린 것 때문에 나를 따를 것이다, 어떤 목사를 따라야 할까요? 특권을 요구하는 목사를 따르지 마십시오. 희생하는 목사만이 복종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어떤 아파트 동반장 따라야 해요? 결탁해서 관리비 올려 먹는 악독한 부녀회 대표를 따라야 합니까? 여러분 지금 너무 어리석게도 많은 아파트, 부조리한 아파트 관리비를 내고 있죠? 최근에 뉴스 봤죠? 얼마나 이것이 부풀려졌는지, 제가 볼 때 이명박 대통령은 법은 어겨도 된다, 성과만 올리면 된다, 아주 고도의 성과주의를 온 세상에 퍼트려서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는 법이 제대로 지켜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원전 부품 검사하는 JS 전선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부조리하기 때문에, 제가 정말 요즘 죽림칠현이 되고 싶습니다. 체 게바라가 되고 싶은 마음밖에 없습니다. 이건 설교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전복이 필요할 만큼 너무 오염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신적 방사능 피폭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도덕성의 붕괴, 공평과 정의의 반감기가 너무 짧습니다. 반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또 5년을 지배하게 됩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악독한 지도자, 호이 도케인 아르케인이 북한에 와 있습니다. 미국에 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카타 엑소시아주 카타 큐리오, 호이 도케인 아르케인이라는 말을 쓰심으로 그 당시의 체제가 얼마나 거짓된 임금들의 압제적 체제인가를 통렬하게 고발하셨습니다. 이 세상 임금은 언제 쫓겨납니까?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 내 마음의 보좌에는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 주님을 영접한 동아리 안에는 압제자가 없어집니다. 옛날에 고대 테리클리스 시대 때, 고대 그리스 시대 때 참주추방제도라는 게 있었죠. 우리 공동체에서 참주,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내는 겁니다. 김회권, 많이 이름이 나오면 그리스를 떠나 있어야 합니다. 매우 살벌한 겁니다. 대통령을 뽑는 게 아니라 막걸리 한잔씩 사주고 회비 내, 회비는 5만원이야, 축구하러 와, 이런 식으로 다스리다 보면 다음 중 누가 참주가 되겠습니까? 김회권, 김회권, 김회권은 가향을 아예 떠나야 합니다. 그게 도편추방이고,ostracism 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 거짓된 왕들은 ostracism 당하고 발을 못 붙이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주님을 영접하는 개인의 마음에, 개인들의 소규모 동아리 안에,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이 주도적 시민이 돼 있는 국가와 사회 안에 카타 큐리오 카타 엑소시아주 하는 거짓 임금들이 추방되는 원리로 이 세상 십자가를 지셨다, 마무리 하겠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단순히 구원론만 발견하고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철학 경영학 신학 경제학 정치학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말씀 안에 다 있기 때문에 모든 지식과 보화가 주님의 말씀 안에 있다는 골로새서 말씀을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공부할수록 주님은 정말로 만민을 다스리는 주가 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이 주님을 영접하십시다. 나귀 타고 오신 주님을 영접하면 내 몸 안에는 한 알의 밀알이 떨어지는 자기 하강, 욕망부정 등이 잘 일어나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내가 주님의 열매인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주관적으로는 주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 주관적 기쁨 주관적 신앙 주관적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객관적 열매가 나타나야 합니다. 세 번째로 내가 주님의 열매되는 공동체와 붙어 있어야 하며 공교회와 붙어 있어야 합니다. 네 번째로 내가 부풀려진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상적으로 실천되는 현장이 있어야 합니다. 즉 내가 이 사람을 볼 때 내 부풀려진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드는 구체적인 이웃 사랑의 현장이 있어야 열매입니다. 열매는 주관적으로 깊은 인격적 교제와 기적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 객관적으로 열매를 맺는 사람, 세 번째로 공교회 안에 붙어 있는 사람, 네 번째로 구체적 고통과 불편감수를 요청하는 이웃 사랑의 맥락과 현장에 파송돼 있는 사람, 이것이 우리가 주님의 열매인 것을 입증합니다. 그런 사람은 십자가에 달린 주님이 왕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을 따라가게 됩니다. 오늘 들린 주님을 따라가는 참 열매되는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너무나 찬탄할 수밖에 없는 이 짧은 메시지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슬픔을 보았고 주님의 격렬한 슬픔과 고뇌를 보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는 과정은 격렬한 슬픔과 격렬한 고통과 격렬한 두려움과 맞섰던 싸움이 있었던 것을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가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는 과정도 매순간 결단이 필요하고, 매 순간 고뇌어린 숙고가 필요한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부풀려진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결단할 때 용기주시고 지혜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도 주님처럼 만민이 찾는 주님의 열매가 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사는 일이 우리 도덕성을 훼손시키고 우리의 주체성을 감가시키는 것을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저희입니다. 양심의 오염 없이 나쁜 직속상관의 반윤리적 반도덕적 명령 지시 받지 않고 사는 직장이 없을까요? 많은 국정원 직원들이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직장 상사가 시켰기 때문에 전원 기소유예 처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공무원법에 양심에 반하는 명령을 거절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검찰과 이 땅의 사법부가 정의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세상 임금들이 그들의 압제적 보좌를 떠나고 주님만이 우리 마음에 보좌에 오는 세상을 사무치게 그리워합니다. 주님 교회도 주님 세상 임금이 지배하는 거짓 보좌의 처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현장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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