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9일 주일예배 1부 _ 요한복음 12장 9-19절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 왕 만세!)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
지난 한 주간 동안도 무더운 여름 날씨에 건강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직장에서 가정을 위해서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피땀 흘린 우리 성도들을 우리 하나님께서는, 주일마다 하나님 이름으로 오는 순례객들을 환영합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것처럼 초막절에 레위지파는 예루살렘 성전 성벽에 서서 지방에서 올라오는 순례객들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이 맞이하는 방법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의 집에 오는 복된 자들이여, 이런 식으로 했습니다. 호산나 하면 이사야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야사아 하면 구원하다는 뜻입니다. 호가 붙었다는 말은 청원, 호와 나가 붙은 것, 사나 호사나, 나는 마지막에 붙은 please, 이런 뜻입니다. 호는 우리를 deliver us please, 구원하소서, 이런 말입니다. 그건 예루살렘에 올라오는 지방민을 축복하는 말입니다. 시편 118편 25절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 이스라엘 왕이여 라는 말은 118편을 비스듬히 인용한 것으로서 지방민 순례객을 환영하던 수사가 특별한 순례객인 예수에게 왕이라는 이름을 부여함으로 예수의 호칭으로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러 오는 모든 사람들은 초막절에 레위 지파가 음악을 들려주면서, 하나님의 성전에 잘 왔습니다, 환영을 해주는 그런 인사를 받을 만합니다. 지난 한 주간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게 하시고 자녀를 섬기게 하시고 또 우리가 원한 만큼 이루지 못한 허무한 일정을 보낸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굶주려서 오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엄청난 업적을 남기지 않아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초막절에 호산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들이여, 불러주는 환영의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기 전 정확하게 일주일 전입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 이 말은 유월절에 모여든 큰 무리라는 뜻입니다. 유월절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운집하는 때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종교적 축제에 가보지 않아서 잘 모를텐데 성경공부를 위해서도 대형집회에 가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종의 견문입니다.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가보고 큰 종교집회를 가보면, 멀리 가지마시고 오산리 가보면 됩니다. 오산리 기도원 가면 하루에 세 번씩 예배를 드립니다. 종교적 감수성은 분명히 자랍니다. 거기 메시지는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을지 몰라도 가면 저절로 기도가 됩니다. 종교적 대형집회가 갖는 포스는 아무리 완악해도 오산리에 가서 엄청난 인파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손이 올라갑니다. 아무리 안올리려고 해도 뭔가 홀린 것처럼 올라갑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에 가서 4부 예배를 드려보십시오. 가향교회가 표준이 아닙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4부 예배에 가면 아무리 내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앞에 찬양 인도하는 사람들과 30열정도 되는 사람이 이렇게 찬양합니다. 깊은 바다의 산호초와 같습니다. 산호초가 찬양을 하는데 가면 그렇게 됩니다. 안하려고 해도 역동적인 분위기가 그렇게 만듭니다. 종교적 축제 때문에 50-60만 명 정도 모여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해보십시오. 예루살렘 구역이 얼마나 좁은지 생각해보면 50-60만 명이 왔다, 요세푸스의 기록이 과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100만 마리의 양이 도살됐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이 꼭 상수리 고깔모자 쓰고 있는 것처럼 깊은 계곡 위에 아이스크림처럼 솟아 있는 땅입니다. 그리고 깊은 계곡이 싸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려면 베다니에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내려갔다가 골짜기를 지나서 다시 올라가니까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그 길 자체가 매우 힘들어서 방어에 매우 유리합니다. 그 좁은 경내에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들었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그 열기는 아무 내용물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격앙될 수 있는 분위기라는 뜻이죠.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이 큰 무리는 최근에 예수께서 일으키신 부활사건, 표적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에스겔 37장 11-14절의 실연이었습니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집단적 부활과 갱생을 약속하는 부활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에서 사람들은 에스겔 37장 에스겔 마른 골짜기에서 이스라엘 큰 군대가 부활하는 환상을 본 겁니다. 나사로의 부활 안에서 에스겔 37장이 약속한 이스라엘 민족의 부활을 봤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부활을 보았던 이들, 누가복음 24장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할 사람이라고 믿고 기다렸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예수를 나사로의 부활 사건 안에서 에스겔 37장의 예언이 즉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상대로 부활과 갱생이 일어날 것으로 예기하고 기대했다는 것으로 볼 때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나사로의 부활은 민족적인 집단적 갱생과 부활을 약속할 것처럼 보였다는 말이에요. 누가복음 24장 21절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정규전으로 로마를 이길 길은 없습니다. 보통방식으로 로마를 추방하여 로마제국의 영토로 돌아가게 만들 힘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제국을 이길 길은 예수에게 집적되고 집중되고 있는 신적 권능을 가지고 로마사람들을 굽지르게 해서 로마사람들의 이스라엘 통치를 끝내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게 바로 속량할 자입니다. 이 유월절에 대한 축제 분위기 중 예수에 대한 기대를 고조시킨 사람은 나사로의 부활을 증언한 사람입니다. 17-18절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한 번 보십시오. 예루살렘 3대 표적, 38년 된 병자의 부활, 소생, 요한복음 9장 태내소경 거지 영적개안,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의 부활, 이 세 사건입니다. 38년 이라는 숫자가 구약에서 딱 한 번 나옵니다. 구약성경에서 38년 숫자는 어디 나옵니까? 민수기와 신명기 2장에 나옵니다. 38년은 광야에서 방황하던 38년을 가리킵니다. 38년 동안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는 이 사람은 38년 동안 식물인간적인 전적무기력 상태에서 광야에서 영적 생명력을 박탈당한 채 하나님과 동행할 능력을 잃어버린 채 누워있는 이스라엘민족 집단을 가리킵니다. 개인이면서 동시에 집단입니다. 태내부터 소경된 거지, 소경된 이 거지는 이사야 42-46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킵니다.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흑암에 갇혀 있는 종은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개인도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개인, 38년 된 병자도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무기력 상태와 영적죽음상태를 대표하는 개인, 나사로의 죽음, 무덤에 갇힌 채 죽은 지 나흘 되어 썩어가는 나사로는 바로 정확하게 에스겔 37장에 있는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우리는 희망이 멸절됐고 무덤에서 탄식하는 이스라엘 뼈들, 말라버린 희망이 멸절된, 민족자존을 회복시킬 희망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집단적 정체성을 대표하는 사람이 나사로입니다. 이 3대사건은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을 소생시키시고 부활시킬 것을 확신시키는 그런 표적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알고 있는 무리들, 이 세 가지 사건의 표적이 갖는 누적적인 의미를 알고 있는 무리들이 예수를 누가복음 24장 21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을 해방할 자라고 믿고 기다렸다, 여기서 제일 무서운 말이 무엇입니까? 헤롯왕과 대제사장과 로마총독 당국은 무리들의 입에서 어떤 말을 제일 무서워했을까요? 왕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거짓된 왕들의 압제체제 안에서는 무서운 말입니다. 지금 왕이 있는데 또 왕을 불러내면 어떻게 됩니까? 기억납니까? 마태복음 2장 2-3절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헤롯이 그 당시 분봉왕이었죠. 분봉왕이 왕적 역할을 하고 있는데 또 유대인의 왕을 기다리니까 놀랐죠. 지금 이미 대제사장과 분봉왕과 유대총독은 삼분해서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예루살렘 일대는 대제사장이 다스렸습니다. 갈릴리의 분봉왕이 다스렸습니다. 갈릴리의 분봉왕 체제와 대제사장의 종교적 지배체제를 위에서 원격조종 하면서 모든 속주를 약탈하는 사람은 총독빌라도였습니다. 그 총독빌라도는 로마제국의 하수인이었죠. 누가복음 3장 1-6절을 보면 이해가 될 겁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이것 보십시오. 디베료 황제 통치 밑에 총독 빌라도, 빌라도 밑에 분봉왕들 분봉왕들 밑에 대제사장들, 이렇게 층층시하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층층시하로 통치체제가 확정된 세상에서 이렇게 부르면 안 되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자기 남편을 옆에 놓고 이런 노래를 부르면 안 되죠. 모닥불 피워놓고 내 님은 어디에, 내 님이 옆에 있는데 유행가 부를 때 조심해야 하죠. 자기 님을 찾는 사람, 모든 기혼자는 그 노래를 부르면 안 되죠. 미혼자만 부를 수 있고, 내 님은 어디에, 우리는 그 노래를 부르면 안 되죠. 님은 이미 결정 됐습니다. 왕이 있는 사람들,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 머릿속에는 우리는 로마황제의 종입니다, 로마 황제 외에는 왕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들이 바로 예루살렘 종교 당국자들입니다. 예루살렘 권력자들의 머릿속에는 로마황제만이 왕이었죠. 그런데 이스라엘 민중에게, 이스라엘 왕이라는 말은 갈릴리 농민들에게 이런 뜻입니다. 왜 갈릴리 농민들이라는 말이 나오느냐? 왜 이스라엘 왕이라는 말이 중요하냐? 갈릴리 지방에서 올라온 순례객들이 주도했다는 뜻입니다. 갈릴리 지방에서 올라온 농민들이 주도했던 노래가 이스라엘 왕이여, 이 말은 수탈과 압제체제로 시달림 받는 사람들에게 왕이 되소서, 제발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정말 중요한 정치적 함의가 풍성한 말을 한 겁니다. 너무 위험한 말을 한 겁니다. 바로 이 말 때문에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는 이름으로 죽여 버립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왕이라는 말은 이 순례객의 중심이 유대인이 아니라 갈릴리 지방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말은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은 오래 전에 사라진 말입니다. 유대지방과 예루살렘은 총독과 종교당국자들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종교당국자들은 속주세를 내지 않았습니다. 갈릴리 지방민들은 로마제국에게 10분의 1의 세금을 냈습니다. 우리는 로마제국의 신민입니다, 신하입니다, 로마제국의 속주민이라는 뜻으로 10분의 1씩 세금을 낸 것이 속주세입니다. 그 속주세를 줄리어스 시저가 예루살렘 종교제사장들에게는 면제했습니다. 그래서 8장에 가면 우리는 종이 아니라는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이라고 외치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응답했느냐? 예수는 한 어린 나귀 새끼를 탔습니다. 이것은 성경 아는 사람에게는 의미심장한 퍼포먼스였습니다. 이건 정확하게 스가랴 9장 9절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스가랴 9장 9절 말씀은 메시아가 올 때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를 예기했던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스가랴 9장 9절 전후에 나오는 메시아는 활과 병거를 파괴하고 세계 평화를 주도하는 왕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력과 총칼에 의해서 지배하지 않고 자기 왕권을 극단적으로 부인함으로, 나귀새끼를 탐으로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왕입니다. 왕의 사전적 의미, 자기를 부인함으로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자가 왕입니다. 왕의 real 사전, 요즘 코미디 real 사전이 있잖아요. 커피숍, 남자가 돈 내는 곳, 그런 이상한 코미디 있죠. 왕의 real 사전, 왕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여 자기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증가하는 자, 왕의 성경적 의미, 자기 권익을 극단적으로 부인하여 만민을 자유케 하는 자, 이게 왕입니다. 어린 나귀 새끼를 탔다는 말은 보통 고대 orient의 제왕과 너무 다른, 모든 orient의 제왕과 로마제왕은 무시무시한 철병거를 타고 있습니다. 마차를 탑니다. 무시무시한 호위와 무장병력을 거느리고 행차하는 게 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이스라엘 왕이라는 말을 접수한다, 그런데 너희가 배반감을 느낄지도 모르는 이런 왕이다, 이렇게 또한 예수도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어린 나귀 새끼를 탐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극단적으로 부인하는 왕, 다른 사람을 자유인이 되어서 주체적인 자기 결단과 자기 책임 하에서 인생을 살아가도록 자유케 하는 그런 왕이 되도록 결단했습니다. 여기가 참 중요합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제2부 5권 대심문관이라는 chapter가 있는데, 그 자체가 하나의 소설입니다. 이 주제가 자유입니다. 14세기 세발리아 대심문관, 종교심문관이 재림한 예수를 감옥에 가둬놓고 둘이서 논쟁합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대심문관과 예수의 대화를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은 아하스페르츠와 예수의 대화로 그대로 옮겨놓았습니다. 핵심은 자유입니다. 예수, 당신은 인간이 자유롭기를 원한다고 기대하는가? 인간은 절대로 자유롭게 되기를 원치 않는다, 인간은 노예가 되기를 원한다, 이것이 우리가 보았던 인간이다, 예수 당신은 인간을 너무 고상하게 생각한다, 당신의 기독적 약점은 인간이 자유롭게 되기를 원한다고 믿는 그 허망한 믿음이다, 내가 단언컨대 이 지상의 인간은 가톨릭교회 우리가 다 관할할 수 있다. 기적과 표적 종교적권력 두 가지 앞에 고분고분 순종한다, 그러니까 제발 지상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다시 천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밤사이에 이루어진 대화입니다. 대심문관 chapter를 읽어보십시오. 실제로 사람이 자유롭게 되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럽느냐면 내가 내 모든 행동을 내 마음대로 하고 책임지는 게 자유입니다. 이건 성령이 도와주지 않으면 자유로운 것 자체가 짐입니다. 내가 성령의 도움 받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살면 내 모든 행동은 외상으로 돈을 쓴 것과 똑같습니다. 외상을 많이 하고 나면 마지막에 무엇이 남죠? 빚이 남습니다. 제가 지난 번에 이야기했죠? credit card 쓰면 기분이 나쁘다고, 95만 원, 안 쓴 것 같은데 추적하면 다 썼어요. 롯데제과에 20만원, 안 쓴 것 같아 기분 나빠 전화해보면 몇 월 몇 일 당신이 썼습니다. 사인 보여드릴까요? 즉 다시 말해서 죄와 자유는 길항관계에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내 마음대로 하면서 내 마음대로 해도 죄 안 짓게 되는 상태를 우리는 성령 충만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충만하게 통제해주지 않으면 내 마음대로 하는 모든 것은 돈을 외상으로 쓰는 것과 똑같습니다. 너무 무섭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운전하면 speed ticket 날아오죠. 66무8869, 딱 날아옵니다. 4만 5천원, 4만원, 능곡 세제리, 몇월 몇 시, 기분 나빠도 내야 합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진짜 자유를 원합니까? 놀랍게도 인간은 자유를 원치 않습니다. 이것이 죄인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원치않고 죄를 원하기 때문에 실제로 자기가 마음대로 주체적으로 심사숙고 끝에 행동하여 책임지는 이런 고고의 자유를 인간은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종교적권력과 정치적 권력에 예속되기 원하기 때문에 파시즘이 나옵니다. 파시스트가 나옵니다. 파시스트는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 유럽여행을 갔습니다. 유럽여행을 갈 때 개인이 1천불씩 가져갑니다. 마음대로 쇼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명한 지도자가 당신은 1불씩 쓰고 999불은 다 나한테 양보해, 당신은 돈은 못 써, 당신들이 쓰는 건 낭비성 돈밖에 안 돼, 999불은 나한테 맡겨, 1불은 당신한테 있어, 이렇게 하는 게 파시스트입니다. 파시스트는 나혼자 심사숙고 끝에 의로운 선택할 능력이 박탈된 사람이 모조리 지배자한테 맡기면 전체주의가 일어나고 파시스트가 일어납니다. 한국교회가 왜 그렇게 나쁜 목사님이 나오느냐면 나쁜 목사님이 많이 나오는 조건은 성령 충만하지 않은 교회에서 어떻게 살지 모르는 무지몽매한 대중들이 담임목사와 당회에게 모든 것을 맡겼을 때 파시스트 당회와 파시스트 목사가 나타납니다. 파시스트 당회와 목사가 나타나면 오랫동안 그 교회는 성령충만이 없어야 합니다. 오랫동안 몇 년 동안 성령충만이 없어야만 파쇼적 목사가 나타나고 파쇼적 당회가 나타납니다. 그래야만 예속감을 느낍니다. 예수님이 어린양으로 오셔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했을 때 우리는 어떤 무서움을 가져야 하느냐? 우리가 성령충만 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주는 자유를 감당할 길이 없다는 절망감을 가져야 하고 안타깝게도 계속 성령충만을 기대해야만 예수를 영접하는 상태가 됩니다. 너무 슬프죠. 여러분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와서 우리를 통치하려고 시위하는 이 예수님은 자기 왕권을 극단적으로 축소하고 우리의 민권과 우리의 인권과 우리의 자유권을 극단적으로 늘려주는 왕입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해도 되는, 그런데 마음대로 하는 조건은 성령으로 우리가 자발적으로 충만케 되지 않으면 마음대로 하는 모든 것은 전부 다 죄가 되고 마이너스가 되니까 너무 무서운 겁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예속감, 강력한 표적을 행하는 자, 그 강한 자 밑에 자기의 자유를 맡겨버리려는 무지몽매한 무리들의 정치적 해방열기 안에 파시스트에게 넘어갈 수 있는 심리적 약점이 있는 것을 알고 예수님은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또 하나의 퍼포먼스를 합니다.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람이 쓴 책 중에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건 대학교 1-2학년 때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입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거나 만지거나 읽은 사람과 밥을 먹거나, 이걸 반복해야 합니다. 읽거나 만지거나 읽은 사람과 친하거나 해야 해요. 안 읽으면 안 돼요. 이건 유럽의 파시스트 무솔리니와 히틀러, 어떻게 계몽주의 세례를 받았던 독일 사람한테 어떻게 히틀러가 나타났느냐? 그겁니다. 히틀러가 나타나지 않을 조건, 1차 세계대전 1918년 파리강화회의 때 맺어졌던 독일 전쟁배상금을 우리는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우리가 아껴서 차곡차곡 저축해서 유럽 이웃 나라에게 우리 죄책금을 배상금으로 물겠습니다, 모든 독일국민이 주체적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파시즘이 안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기 싫은 독일대중들은 이 모든 빚 탕감 의무를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릴 강력한 사람, 600%의 인플레를 잡아줄 사람, 독일 사람들이 형제자매 우애로 돌파해야 할 엄청난 경제적 위기를 강력한 철퇴를 휘둘러서 경제문제를 일시에 해결해줄 메시아를 기다리는 독일 사람들의 마음이 파시스트로 귀결됐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 도깨비 방망이 같은 요술 같은 정치를 해서 독일문제를 일시에 해결해줄 메시아를 기다렸던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군중의 마음에 바로 히틀러가 강력한 파시스트의 곤봉을 들고 입성을 한 겁니다. 그러면 히틀러를 영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여러분 담임 목사를 히틀러처럼 영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일단 성경을 읽지 말아야 합니다. 무지몽매한 상태로 3년 이상 있어야 합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글을 읽고 이것이 데살로가전서 3장 1절이라고 하면 아멘 해야 합니다. <도덕경>을 읽고 고린도전서 3장에서 나왔습니다, 해도 아멘 해야 합니다. 내 아들이 곧 담임목사가 될 것입니다, 하면 아멘 해야 합니다. 이런 무지몽매한 상태가 연속적으로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일관성을 가지고 영적인 참담한 무지몽매 상태가 계속될 때, 드디어 세습 아젠다가 나올 때입니다. 가향교회 너무 초라하지 않습니까? 목사도 박사인데 우리 500평짜리 건물을 매입합시다, 돈은 200억 듭니다, 우리 전부 다 5천만 원짜리 통장 하나 만듭시다, 통장을 든 자만이 세례 교인입니다, 아닙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교회가 헛되게 크면 큰일 납니다. 교회 유명한 사람이 많이 와서 골프 치는 이야기 하면 교회가 크게 병듭니다. 교회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사람끼리 친인척이 되고 오순도순 사는 것이 진짜 좋은 교회입니다. 김밥도 얼마나 맛있습니까? 이렇게 하면 어린 나귀새끼를 타는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이 교회 너무 춥지 않습니까? 노숙자의 침이 늘 벽에 묻어 있습니다, 응아 냄새가 납니다, 우리 서초동으로 갑시다, 서초동 대법관 옆으로 갑시다, 물 좋은 곳으로 센 놈 몇 놈 잡아서 그 놈 헌금 시키자, 이렇게 하면 어린 나귀 새끼를 타는 왕을 영접하는 게 아닙니다. 표적은 일시에 나의 곤경을 요술적 또는 유사 요술적 힘으로 반전시키는 것, 그게 바로 유대인의 마음속에 있었고 이런 마음을 악하고 음란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핵심은 로마제국이 아닙니다, 동포가 동포를 노예처럼 부려먹는 이 엄청난 잔인함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오는 겁니다, 로마제국은 독수리입니다, 우리가 시체가 되었기 때문에 로마제국이 우리를 뜯어먹으러 온 겁니다, 우리가 시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동포애를 발휘하면 로마제국은 물러갑니다, 이게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우리 서로 채무를 탕감해줘야 합니다, 남녀차별하면 안 됩니다, 종과 노예를 차별하면 안 됩니다, 우리를 여호수아의 그 시절로 돌아가서 이스라엘 자유농민들의 공동체로 오순도순 살아야 합니다, 사랑만이 두려움을 이깁니다, 이스라엘 동포끼리 사랑을 많이 나눌수록 로마제국은 우리를 지배할 능력이 줄어듭니다, 이것이 참 성전이고 이것이 참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핵심사상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5천명에게 계속 양식을 나눠줌으로써, 제가 바라는 하나님 나라는 나누는 것입니다, 무진장 다함없이 끊임없이 나누어먹는 것, 이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분명하지 않습니까? 나는 내 살을 나누러 왔습니다, 내 살을 나누러 여러분에게 양식을 주러 온 것이 내 사명입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섬기러 왔고 내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살과 피로 주러 왔습니다, 로마제국이 근본모순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나누어주는 사랑 이웃을 압제하려는 로마제국의 작은 아바트 같은 나의 분신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가이샤라에 와 있는 로마 10군단을 무서워하지 마시고 내 마음에 와 있는 로마10군단을 무서워하시고, 로마인처럼 내 동포를 부려먹으려는 무시무시한 압제적인 에고의 자아가 참으로 문제입니다, 압제적인 에고의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참 자유고 해방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이게 진리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예수님입니다. 여러분 이해되시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셨을 때 그런 함축적인 메시지, 자기 모든 가르침의 핵심을 나귀 퍼포먼스에 다 드러냈습니다. 나귀타는 예수님을 영접해야 참 자유가 옵니다. 한 가지 약점,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는 대심문관이 조롱하듯이 <인간의 아들> 아하스페르츠가 광야에 있는 예수에게 조롱하듯이 인간은 자유를 싫어하고, 에리히 프롬이 걱정했듯이 자유로부터 도피하려고 하는 노예근성이 바로 죄입니다. 자유는 죄악된 본능을 십자가에 못 박는 숭고한 결단의 나날입니다. 자유는 내 본능이 요구하는 저능욕망, 열등한 욕망을 섬기도록 부추기는 내 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고 고등한 욕망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고등한 욕망,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소욕에 내 자아를 못 박는 것이 자유니까 자유롭기 쉽지 않죠. 예수님은 우리를 그렇게 자유롭게 하러 오셨죠. 로마제국이 물러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로마제국이 물러갔을 때 우리가 어떻게 사는 능력이 더 중요한 거예요. 로마제국 10군단과 6군단이 예루살렘과 유대영토 팔레스타인 시리아 일대에서 다 철수했을 때 과연 이스라엘 동포가 로마제국의 아바타처럼 또 갈릴리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엘리야 시대처럼 여호수아시대처럼 광야에서 만나를 먹던 그 시대처럼 돌아갈 것인가, 예수님은 우리 안에 로마제국의 아바타, 로마제국의 분신이 다 있고, 로마 제국적 착취유형이 우리 안에 다 있다고 봤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각자 져야 합니다, 왜? 우리 안에는 이미 로마제국의 권력정체에 영향받은 자아가 너무 깊숙이 있기 때문에 우리 각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으면 우리는 도저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중간 요약합니다. 자유, 로마 제국적 아바타, 로마제국 압제자적인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자유의 시작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에 못이 박힌거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속 깊은 진실은 군중들은 모르고 계속 이 군중들은 환호성을 질러댑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마카베오상 13장 51절 마카베오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시므온 이라는 사람이 들어왔을 때 정확하게 했던 짓입니다. 예수가 무얼 해주길 바라죠. 표적을 가지고 군중을 조직해서 무력항쟁을 통해서 마카베오 독립전쟁의 영웅의 전처를 밟아달라, 그런 뜻이죠. 마카베오 독립전쟁으로 선 정부를 하시몬 왕조입니다. 그걸 보통 영어로 하스몬 왕조라고 하는데, 하는 정관사입니다. 정관사 하 the 라는 말이고, 시몬은 the simon이라는 말입니다. 마카베오 항쟁의 지도자로 하스몬 왕조를 창건한 시몬이 들어올 때 막 종려나무를 흔들었던 그런 행위를 재현함으로써 예수에게 정치적 요구, 즉 군사적 행동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 달라는 요구를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은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응답했습니다. No, 시몬의 길, 마카베오 항쟁의 길은 대답이 아닙니다, 그것은 로마제국 대 유대인의 단순구도로 대결을 짭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로마제국과 로마제국적인 아바타 압제적 분신, 다른 사람을 압제함으로써 착취함으로써 나를 유익하게 만들려는 뱀파이어적인 본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못 박는 것이 로마제국을 추방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입니다, 항상 보세요. 민족 대 민족의 구도로 대결을 짜는 것은 항상 어떤 의식이 있습니까? 일본을 물리치는 것, 일본 사람이 물러가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일본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내 마음이 물러가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마무리 짓자면 예수님은 삼대표적 때문에 왕으로 추대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은 슈퍼갑인 로마제국의 슈퍼 을의 위치에 해당하는 절대 약자였습니다. 절대 약자에 처했던 이스라엘 농민들, 순례객들은 로마제국과 이스라엘 비대칭적 힘의 불균형을 급진적으로 반전시키기 위해서 표적 행하는 예수를 숭배했습니다. 이것은 예수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예수의 표적에 대한 숭배로써 악하고 음란한 신앙의 대표적인 것입니다. 힘 센 압제자를 더 힘 센 압제자가 됨으로써 이기겠다는 것, 이건 해결책이 안 됩니다. 여러분 회사 부장님이 나 괴롭힌다고 저 먼 친척, 가까운 선배한테 전무한테 전화해서 이 놈 좀 때려달라고 하면 그건 로마제국적 발상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부장님을 어떻게 감화시켜야 합니까? 내 안에 있는 십자가에 못 박고 그 부장님을 로마 백부장처럼 회개시켜야 합니다. 로마 백부장을 회개시켰다는 말은 로마군인의 기초명령단위를 회개시킨 거죠. 로마제국의 기초명령단위가 백부장 아닙니까?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로마제국을 무장해제 시켰죠. 로마제국을 무장해제 시킨것은 십자가를 진 예수밖에 없습니다. 표적을 행한 예수가 로마 군인을 무장해제 시켰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대속적인 죽음을 죽는 예수가 로마 군인을 무장해제 시켰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권세에 많이 굶주립니다. 저도 교목실장하면서 취업률 보고를 매번 받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계속 똑같은 내용, 취업률 13위, 수학과 취업률 18위, 기독교학과는 취업률 100% 학과로 신청을 해놨습니다. 그 이유는 종교지도자 학과는 취업률에서 면제한다는 특혜조항이 있습니다. 우리는 취업 안 해도 취업률 항상 100% 나옵니다. 영적지도자는 취업 100% 한 거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제가 그걸 매일 듣기 때문에 기업체에 힘이 센 사람을 내가 좀 안다면, 이런 유혹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와서 이렇게, 표적 숭배신앙 그런 생각이 듭니다. 기업체 CEO, 기업체 인사과장들 팀장들, CEO보다 더 중요한 것이 부장급 인사 실무자입니다. 그 사람들이 취업을 결정합니다. 한 50명 모아놓고 감화 감동 시켜버리면 숭실대가 취업이 잘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제가 합니다. 문제는 제가 그렇게 탄식을 하고 있으니까 다른 보직교수들이 교목실장님 취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혼을 구원해주십시오, 우리 모두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취업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런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힘을 누가 숭배합니까? 누가 표적을 숭배합니까? 표적숭배는 열등감이 심한 사람이 숭배합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슈퍼갑과 슈퍼을의 비대칭성을 깰 수 없는 사람이 숭배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깰 수 있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로마제국이 슈퍼갑이라면 로마제국의 존재방식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살면 로마제국을 실제로 이길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는 겁니다. 로마제국의 군대를 물러가게 만들려면 이스라엘 방식의 독특한 예언자적인 평등사상과 우애동포와 사랑의 능력이 극대화된 자유인들의 동아리가 되면 로마제국은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다, 예수님은 대안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서 나의 부풀려진 욕망을 약간만 부인하면 로마제국을 물리칠 수 있다, 이게 바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유인들, 로마제국으로부터 로마의 손아귀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 예수님이 알려주신 것은 나귀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나귀 타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는 슈퍼 갑에게 슈퍼갑의 방식으로 대항하지 않고 슈퍼 갑이 우리를 짓누르는 논리를 비신화화 시키고 아무 것도 아닌 것, 사랑과 우애가 가득 찬 세상을 만듦으로써 우리는 우리에게 내리누르는 슈퍼갑의 압제적 지위를 무시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기독교인으로써 용감무쌍하게 어린 양 예수, 나귀 새끼 타고 오는 예수를 영접하는 큰 자유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힘에 의존하는 힘 숭배적인 문화에 살기 때문에 당장 힘을 발휘하는 사람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어린 예수님, 나귀 새끼 타고 오는 예수님,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우리에게 숭고한 자유의 몫을 돌려주려는 예수님이 두렵고 무서울 따름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셔서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처럼 축소지향적인 자기부인의 삶, 감미로운 삶을 체질화시켜서 힘 숭배가 일어나고 권력이 예찬되는 세상에서 참 자유를 맛보게 도와주시고 사랑의 종노릇함으로 자유 맛 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이 개척한 왕의 길을 저희가 따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 왕 만세!)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
지난 한 주간 동안도 무더운 여름 날씨에 건강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직장에서 가정을 위해서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피땀 흘린 우리 성도들을 우리 하나님께서는, 주일마다 하나님 이름으로 오는 순례객들을 환영합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것처럼 초막절에 레위지파는 예루살렘 성전 성벽에 서서 지방에서 올라오는 순례객들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이 맞이하는 방법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의 집에 오는 복된 자들이여, 이런 식으로 했습니다. 호산나 하면 이사야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야사아 하면 구원하다는 뜻입니다. 호가 붙었다는 말은 청원, 호와 나가 붙은 것, 사나 호사나, 나는 마지막에 붙은 please, 이런 뜻입니다. 호는 우리를 deliver us please, 구원하소서, 이런 말입니다. 그건 예루살렘에 올라오는 지방민을 축복하는 말입니다. 시편 118편 25절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 이스라엘 왕이여 라는 말은 118편을 비스듬히 인용한 것으로서 지방민 순례객을 환영하던 수사가 특별한 순례객인 예수에게 왕이라는 이름을 부여함으로 예수의 호칭으로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러 오는 모든 사람들은 초막절에 레위 지파가 음악을 들려주면서, 하나님의 성전에 잘 왔습니다, 환영을 해주는 그런 인사를 받을 만합니다. 지난 한 주간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게 하시고 자녀를 섬기게 하시고 또 우리가 원한 만큼 이루지 못한 허무한 일정을 보낸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굶주려서 오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엄청난 업적을 남기지 않아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초막절에 호산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들이여, 불러주는 환영의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기 전 정확하게 일주일 전입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 이 말은 유월절에 모여든 큰 무리라는 뜻입니다. 유월절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운집하는 때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종교적 축제에 가보지 않아서 잘 모를텐데 성경공부를 위해서도 대형집회에 가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종의 견문입니다.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가보고 큰 종교집회를 가보면, 멀리 가지마시고 오산리 가보면 됩니다. 오산리 기도원 가면 하루에 세 번씩 예배를 드립니다. 종교적 감수성은 분명히 자랍니다. 거기 메시지는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을지 몰라도 가면 저절로 기도가 됩니다. 종교적 대형집회가 갖는 포스는 아무리 완악해도 오산리에 가서 엄청난 인파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손이 올라갑니다. 아무리 안올리려고 해도 뭔가 홀린 것처럼 올라갑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에 가서 4부 예배를 드려보십시오. 가향교회가 표준이 아닙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4부 예배에 가면 아무리 내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앞에 찬양 인도하는 사람들과 30열정도 되는 사람이 이렇게 찬양합니다. 깊은 바다의 산호초와 같습니다. 산호초가 찬양을 하는데 가면 그렇게 됩니다. 안하려고 해도 역동적인 분위기가 그렇게 만듭니다. 종교적 축제 때문에 50-60만 명 정도 모여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해보십시오. 예루살렘 구역이 얼마나 좁은지 생각해보면 50-60만 명이 왔다, 요세푸스의 기록이 과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100만 마리의 양이 도살됐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이 꼭 상수리 고깔모자 쓰고 있는 것처럼 깊은 계곡 위에 아이스크림처럼 솟아 있는 땅입니다. 그리고 깊은 계곡이 싸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려면 베다니에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내려갔다가 골짜기를 지나서 다시 올라가니까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그 길 자체가 매우 힘들어서 방어에 매우 유리합니다. 그 좁은 경내에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들었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그 열기는 아무 내용물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격앙될 수 있는 분위기라는 뜻이죠.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이 큰 무리는 최근에 예수께서 일으키신 부활사건, 표적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에스겔 37장 11-14절의 실연이었습니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집단적 부활과 갱생을 약속하는 부활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에서 사람들은 에스겔 37장 에스겔 마른 골짜기에서 이스라엘 큰 군대가 부활하는 환상을 본 겁니다. 나사로의 부활 안에서 에스겔 37장이 약속한 이스라엘 민족의 부활을 봤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부활을 보았던 이들, 누가복음 24장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할 사람이라고 믿고 기다렸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예수를 나사로의 부활 사건 안에서 에스겔 37장의 예언이 즉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상대로 부활과 갱생이 일어날 것으로 예기하고 기대했다는 것으로 볼 때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나사로의 부활은 민족적인 집단적 갱생과 부활을 약속할 것처럼 보였다는 말이에요. 누가복음 24장 21절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정규전으로 로마를 이길 길은 없습니다. 보통방식으로 로마를 추방하여 로마제국의 영토로 돌아가게 만들 힘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제국을 이길 길은 예수에게 집적되고 집중되고 있는 신적 권능을 가지고 로마사람들을 굽지르게 해서 로마사람들의 이스라엘 통치를 끝내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게 바로 속량할 자입니다. 이 유월절에 대한 축제 분위기 중 예수에 대한 기대를 고조시킨 사람은 나사로의 부활을 증언한 사람입니다. 17-18절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한 번 보십시오. 예루살렘 3대 표적, 38년 된 병자의 부활, 소생, 요한복음 9장 태내소경 거지 영적개안,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의 부활, 이 세 사건입니다. 38년 이라는 숫자가 구약에서 딱 한 번 나옵니다. 구약성경에서 38년 숫자는 어디 나옵니까? 민수기와 신명기 2장에 나옵니다. 38년은 광야에서 방황하던 38년을 가리킵니다. 38년 동안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는 이 사람은 38년 동안 식물인간적인 전적무기력 상태에서 광야에서 영적 생명력을 박탈당한 채 하나님과 동행할 능력을 잃어버린 채 누워있는 이스라엘민족 집단을 가리킵니다. 개인이면서 동시에 집단입니다. 태내부터 소경된 거지, 소경된 이 거지는 이사야 42-46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킵니다.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흑암에 갇혀 있는 종은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개인도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개인, 38년 된 병자도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무기력 상태와 영적죽음상태를 대표하는 개인, 나사로의 죽음, 무덤에 갇힌 채 죽은 지 나흘 되어 썩어가는 나사로는 바로 정확하게 에스겔 37장에 있는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우리는 희망이 멸절됐고 무덤에서 탄식하는 이스라엘 뼈들, 말라버린 희망이 멸절된, 민족자존을 회복시킬 희망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집단적 정체성을 대표하는 사람이 나사로입니다. 이 3대사건은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을 소생시키시고 부활시킬 것을 확신시키는 그런 표적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알고 있는 무리들, 이 세 가지 사건의 표적이 갖는 누적적인 의미를 알고 있는 무리들이 예수를 누가복음 24장 21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을 해방할 자라고 믿고 기다렸다, 여기서 제일 무서운 말이 무엇입니까? 헤롯왕과 대제사장과 로마총독 당국은 무리들의 입에서 어떤 말을 제일 무서워했을까요? 왕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거짓된 왕들의 압제체제 안에서는 무서운 말입니다. 지금 왕이 있는데 또 왕을 불러내면 어떻게 됩니까? 기억납니까? 마태복음 2장 2-3절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헤롯이 그 당시 분봉왕이었죠. 분봉왕이 왕적 역할을 하고 있는데 또 유대인의 왕을 기다리니까 놀랐죠. 지금 이미 대제사장과 분봉왕과 유대총독은 삼분해서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예루살렘 일대는 대제사장이 다스렸습니다. 갈릴리의 분봉왕이 다스렸습니다. 갈릴리의 분봉왕 체제와 대제사장의 종교적 지배체제를 위에서 원격조종 하면서 모든 속주를 약탈하는 사람은 총독빌라도였습니다. 그 총독빌라도는 로마제국의 하수인이었죠. 누가복음 3장 1-6절을 보면 이해가 될 겁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이것 보십시오. 디베료 황제 통치 밑에 총독 빌라도, 빌라도 밑에 분봉왕들 분봉왕들 밑에 대제사장들, 이렇게 층층시하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층층시하로 통치체제가 확정된 세상에서 이렇게 부르면 안 되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자기 남편을 옆에 놓고 이런 노래를 부르면 안 되죠. 모닥불 피워놓고 내 님은 어디에, 내 님이 옆에 있는데 유행가 부를 때 조심해야 하죠. 자기 님을 찾는 사람, 모든 기혼자는 그 노래를 부르면 안 되죠. 미혼자만 부를 수 있고, 내 님은 어디에, 우리는 그 노래를 부르면 안 되죠. 님은 이미 결정 됐습니다. 왕이 있는 사람들,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 머릿속에는 우리는 로마황제의 종입니다, 로마 황제 외에는 왕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들이 바로 예루살렘 종교 당국자들입니다. 예루살렘 권력자들의 머릿속에는 로마황제만이 왕이었죠. 그런데 이스라엘 민중에게, 이스라엘 왕이라는 말은 갈릴리 농민들에게 이런 뜻입니다. 왜 갈릴리 농민들이라는 말이 나오느냐? 왜 이스라엘 왕이라는 말이 중요하냐? 갈릴리 지방에서 올라온 순례객들이 주도했다는 뜻입니다. 갈릴리 지방에서 올라온 농민들이 주도했던 노래가 이스라엘 왕이여, 이 말은 수탈과 압제체제로 시달림 받는 사람들에게 왕이 되소서, 제발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정말 중요한 정치적 함의가 풍성한 말을 한 겁니다. 너무 위험한 말을 한 겁니다. 바로 이 말 때문에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는 이름으로 죽여 버립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왕이라는 말은 이 순례객의 중심이 유대인이 아니라 갈릴리 지방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말은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은 오래 전에 사라진 말입니다. 유대지방과 예루살렘은 총독과 종교당국자들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종교당국자들은 속주세를 내지 않았습니다. 갈릴리 지방민들은 로마제국에게 10분의 1의 세금을 냈습니다. 우리는 로마제국의 신민입니다, 신하입니다, 로마제국의 속주민이라는 뜻으로 10분의 1씩 세금을 낸 것이 속주세입니다. 그 속주세를 줄리어스 시저가 예루살렘 종교제사장들에게는 면제했습니다. 그래서 8장에 가면 우리는 종이 아니라는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이라고 외치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응답했느냐? 예수는 한 어린 나귀 새끼를 탔습니다. 이것은 성경 아는 사람에게는 의미심장한 퍼포먼스였습니다. 이건 정확하게 스가랴 9장 9절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스가랴 9장 9절 말씀은 메시아가 올 때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를 예기했던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스가랴 9장 9절 전후에 나오는 메시아는 활과 병거를 파괴하고 세계 평화를 주도하는 왕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력과 총칼에 의해서 지배하지 않고 자기 왕권을 극단적으로 부인함으로, 나귀새끼를 탐으로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왕입니다. 왕의 사전적 의미, 자기를 부인함으로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자가 왕입니다. 왕의 real 사전, 요즘 코미디 real 사전이 있잖아요. 커피숍, 남자가 돈 내는 곳, 그런 이상한 코미디 있죠. 왕의 real 사전, 왕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여 자기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증가하는 자, 왕의 성경적 의미, 자기 권익을 극단적으로 부인하여 만민을 자유케 하는 자, 이게 왕입니다. 어린 나귀 새끼를 탔다는 말은 보통 고대 orient의 제왕과 너무 다른, 모든 orient의 제왕과 로마제왕은 무시무시한 철병거를 타고 있습니다. 마차를 탑니다. 무시무시한 호위와 무장병력을 거느리고 행차하는 게 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이스라엘 왕이라는 말을 접수한다, 그런데 너희가 배반감을 느낄지도 모르는 이런 왕이다, 이렇게 또한 예수도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어린 나귀 새끼를 탐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극단적으로 부인하는 왕, 다른 사람을 자유인이 되어서 주체적인 자기 결단과 자기 책임 하에서 인생을 살아가도록 자유케 하는 그런 왕이 되도록 결단했습니다. 여기가 참 중요합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제2부 5권 대심문관이라는 chapter가 있는데, 그 자체가 하나의 소설입니다. 이 주제가 자유입니다. 14세기 세발리아 대심문관, 종교심문관이 재림한 예수를 감옥에 가둬놓고 둘이서 논쟁합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대심문관과 예수의 대화를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은 아하스페르츠와 예수의 대화로 그대로 옮겨놓았습니다. 핵심은 자유입니다. 예수, 당신은 인간이 자유롭기를 원한다고 기대하는가? 인간은 절대로 자유롭게 되기를 원치 않는다, 인간은 노예가 되기를 원한다, 이것이 우리가 보았던 인간이다, 예수 당신은 인간을 너무 고상하게 생각한다, 당신의 기독적 약점은 인간이 자유롭게 되기를 원한다고 믿는 그 허망한 믿음이다, 내가 단언컨대 이 지상의 인간은 가톨릭교회 우리가 다 관할할 수 있다. 기적과 표적 종교적권력 두 가지 앞에 고분고분 순종한다, 그러니까 제발 지상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다시 천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밤사이에 이루어진 대화입니다. 대심문관 chapter를 읽어보십시오. 실제로 사람이 자유롭게 되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럽느냐면 내가 내 모든 행동을 내 마음대로 하고 책임지는 게 자유입니다. 이건 성령이 도와주지 않으면 자유로운 것 자체가 짐입니다. 내가 성령의 도움 받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살면 내 모든 행동은 외상으로 돈을 쓴 것과 똑같습니다. 외상을 많이 하고 나면 마지막에 무엇이 남죠? 빚이 남습니다. 제가 지난 번에 이야기했죠? credit card 쓰면 기분이 나쁘다고, 95만 원, 안 쓴 것 같은데 추적하면 다 썼어요. 롯데제과에 20만원, 안 쓴 것 같아 기분 나빠 전화해보면 몇 월 몇 일 당신이 썼습니다. 사인 보여드릴까요? 즉 다시 말해서 죄와 자유는 길항관계에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내 마음대로 하면서 내 마음대로 해도 죄 안 짓게 되는 상태를 우리는 성령 충만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충만하게 통제해주지 않으면 내 마음대로 하는 모든 것은 돈을 외상으로 쓰는 것과 똑같습니다. 너무 무섭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운전하면 speed ticket 날아오죠. 66무8869, 딱 날아옵니다. 4만 5천원, 4만원, 능곡 세제리, 몇월 몇 시, 기분 나빠도 내야 합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진짜 자유를 원합니까? 놀랍게도 인간은 자유를 원치 않습니다. 이것이 죄인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원치않고 죄를 원하기 때문에 실제로 자기가 마음대로 주체적으로 심사숙고 끝에 행동하여 책임지는 이런 고고의 자유를 인간은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종교적권력과 정치적 권력에 예속되기 원하기 때문에 파시즘이 나옵니다. 파시스트가 나옵니다. 파시스트는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 유럽여행을 갔습니다. 유럽여행을 갈 때 개인이 1천불씩 가져갑니다. 마음대로 쇼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명한 지도자가 당신은 1불씩 쓰고 999불은 다 나한테 양보해, 당신은 돈은 못 써, 당신들이 쓰는 건 낭비성 돈밖에 안 돼, 999불은 나한테 맡겨, 1불은 당신한테 있어, 이렇게 하는 게 파시스트입니다. 파시스트는 나혼자 심사숙고 끝에 의로운 선택할 능력이 박탈된 사람이 모조리 지배자한테 맡기면 전체주의가 일어나고 파시스트가 일어납니다. 한국교회가 왜 그렇게 나쁜 목사님이 나오느냐면 나쁜 목사님이 많이 나오는 조건은 성령 충만하지 않은 교회에서 어떻게 살지 모르는 무지몽매한 대중들이 담임목사와 당회에게 모든 것을 맡겼을 때 파시스트 당회와 파시스트 목사가 나타납니다. 파시스트 당회와 목사가 나타나면 오랫동안 그 교회는 성령충만이 없어야 합니다. 오랫동안 몇 년 동안 성령충만이 없어야만 파쇼적 목사가 나타나고 파쇼적 당회가 나타납니다. 그래야만 예속감을 느낍니다. 예수님이 어린양으로 오셔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했을 때 우리는 어떤 무서움을 가져야 하느냐? 우리가 성령충만 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주는 자유를 감당할 길이 없다는 절망감을 가져야 하고 안타깝게도 계속 성령충만을 기대해야만 예수를 영접하는 상태가 됩니다. 너무 슬프죠. 여러분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와서 우리를 통치하려고 시위하는 이 예수님은 자기 왕권을 극단적으로 축소하고 우리의 민권과 우리의 인권과 우리의 자유권을 극단적으로 늘려주는 왕입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해도 되는, 그런데 마음대로 하는 조건은 성령으로 우리가 자발적으로 충만케 되지 않으면 마음대로 하는 모든 것은 전부 다 죄가 되고 마이너스가 되니까 너무 무서운 겁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예속감, 강력한 표적을 행하는 자, 그 강한 자 밑에 자기의 자유를 맡겨버리려는 무지몽매한 무리들의 정치적 해방열기 안에 파시스트에게 넘어갈 수 있는 심리적 약점이 있는 것을 알고 예수님은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또 하나의 퍼포먼스를 합니다.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람이 쓴 책 중에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건 대학교 1-2학년 때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입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거나 만지거나 읽은 사람과 밥을 먹거나, 이걸 반복해야 합니다. 읽거나 만지거나 읽은 사람과 친하거나 해야 해요. 안 읽으면 안 돼요. 이건 유럽의 파시스트 무솔리니와 히틀러, 어떻게 계몽주의 세례를 받았던 독일 사람한테 어떻게 히틀러가 나타났느냐? 그겁니다. 히틀러가 나타나지 않을 조건, 1차 세계대전 1918년 파리강화회의 때 맺어졌던 독일 전쟁배상금을 우리는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우리가 아껴서 차곡차곡 저축해서 유럽 이웃 나라에게 우리 죄책금을 배상금으로 물겠습니다, 모든 독일국민이 주체적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파시즘이 안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기 싫은 독일대중들은 이 모든 빚 탕감 의무를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릴 강력한 사람, 600%의 인플레를 잡아줄 사람, 독일 사람들이 형제자매 우애로 돌파해야 할 엄청난 경제적 위기를 강력한 철퇴를 휘둘러서 경제문제를 일시에 해결해줄 메시아를 기다리는 독일 사람들의 마음이 파시스트로 귀결됐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 도깨비 방망이 같은 요술 같은 정치를 해서 독일문제를 일시에 해결해줄 메시아를 기다렸던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군중의 마음에 바로 히틀러가 강력한 파시스트의 곤봉을 들고 입성을 한 겁니다. 그러면 히틀러를 영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여러분 담임 목사를 히틀러처럼 영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일단 성경을 읽지 말아야 합니다. 무지몽매한 상태로 3년 이상 있어야 합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글을 읽고 이것이 데살로가전서 3장 1절이라고 하면 아멘 해야 합니다. <도덕경>을 읽고 고린도전서 3장에서 나왔습니다, 해도 아멘 해야 합니다. 내 아들이 곧 담임목사가 될 것입니다, 하면 아멘 해야 합니다. 이런 무지몽매한 상태가 연속적으로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일관성을 가지고 영적인 참담한 무지몽매 상태가 계속될 때, 드디어 세습 아젠다가 나올 때입니다. 가향교회 너무 초라하지 않습니까? 목사도 박사인데 우리 500평짜리 건물을 매입합시다, 돈은 200억 듭니다, 우리 전부 다 5천만 원짜리 통장 하나 만듭시다, 통장을 든 자만이 세례 교인입니다, 아닙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교회가 헛되게 크면 큰일 납니다. 교회 유명한 사람이 많이 와서 골프 치는 이야기 하면 교회가 크게 병듭니다. 교회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사람끼리 친인척이 되고 오순도순 사는 것이 진짜 좋은 교회입니다. 김밥도 얼마나 맛있습니까? 이렇게 하면 어린 나귀새끼를 타는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이 교회 너무 춥지 않습니까? 노숙자의 침이 늘 벽에 묻어 있습니다, 응아 냄새가 납니다, 우리 서초동으로 갑시다, 서초동 대법관 옆으로 갑시다, 물 좋은 곳으로 센 놈 몇 놈 잡아서 그 놈 헌금 시키자, 이렇게 하면 어린 나귀 새끼를 타는 왕을 영접하는 게 아닙니다. 표적은 일시에 나의 곤경을 요술적 또는 유사 요술적 힘으로 반전시키는 것, 그게 바로 유대인의 마음속에 있었고 이런 마음을 악하고 음란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핵심은 로마제국이 아닙니다, 동포가 동포를 노예처럼 부려먹는 이 엄청난 잔인함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오는 겁니다, 로마제국은 독수리입니다, 우리가 시체가 되었기 때문에 로마제국이 우리를 뜯어먹으러 온 겁니다, 우리가 시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동포애를 발휘하면 로마제국은 물러갑니다, 이게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우리 서로 채무를 탕감해줘야 합니다, 남녀차별하면 안 됩니다, 종과 노예를 차별하면 안 됩니다, 우리를 여호수아의 그 시절로 돌아가서 이스라엘 자유농민들의 공동체로 오순도순 살아야 합니다, 사랑만이 두려움을 이깁니다, 이스라엘 동포끼리 사랑을 많이 나눌수록 로마제국은 우리를 지배할 능력이 줄어듭니다, 이것이 참 성전이고 이것이 참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핵심사상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5천명에게 계속 양식을 나눠줌으로써, 제가 바라는 하나님 나라는 나누는 것입니다, 무진장 다함없이 끊임없이 나누어먹는 것, 이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분명하지 않습니까? 나는 내 살을 나누러 왔습니다, 내 살을 나누러 여러분에게 양식을 주러 온 것이 내 사명입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섬기러 왔고 내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살과 피로 주러 왔습니다, 로마제국이 근본모순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나누어주는 사랑 이웃을 압제하려는 로마제국의 작은 아바트 같은 나의 분신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가이샤라에 와 있는 로마 10군단을 무서워하지 마시고 내 마음에 와 있는 로마10군단을 무서워하시고, 로마인처럼 내 동포를 부려먹으려는 무시무시한 압제적인 에고의 자아가 참으로 문제입니다, 압제적인 에고의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참 자유고 해방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이게 진리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예수님입니다. 여러분 이해되시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셨을 때 그런 함축적인 메시지, 자기 모든 가르침의 핵심을 나귀 퍼포먼스에 다 드러냈습니다. 나귀타는 예수님을 영접해야 참 자유가 옵니다. 한 가지 약점,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는 대심문관이 조롱하듯이 <인간의 아들> 아하스페르츠가 광야에 있는 예수에게 조롱하듯이 인간은 자유를 싫어하고, 에리히 프롬이 걱정했듯이 자유로부터 도피하려고 하는 노예근성이 바로 죄입니다. 자유는 죄악된 본능을 십자가에 못 박는 숭고한 결단의 나날입니다. 자유는 내 본능이 요구하는 저능욕망, 열등한 욕망을 섬기도록 부추기는 내 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고 고등한 욕망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고등한 욕망,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소욕에 내 자아를 못 박는 것이 자유니까 자유롭기 쉽지 않죠. 예수님은 우리를 그렇게 자유롭게 하러 오셨죠. 로마제국이 물러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로마제국이 물러갔을 때 우리가 어떻게 사는 능력이 더 중요한 거예요. 로마제국 10군단과 6군단이 예루살렘과 유대영토 팔레스타인 시리아 일대에서 다 철수했을 때 과연 이스라엘 동포가 로마제국의 아바타처럼 또 갈릴리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엘리야 시대처럼 여호수아시대처럼 광야에서 만나를 먹던 그 시대처럼 돌아갈 것인가, 예수님은 우리 안에 로마제국의 아바타, 로마제국의 분신이 다 있고, 로마 제국적 착취유형이 우리 안에 다 있다고 봤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각자 져야 합니다, 왜? 우리 안에는 이미 로마제국의 권력정체에 영향받은 자아가 너무 깊숙이 있기 때문에 우리 각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으면 우리는 도저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중간 요약합니다. 자유, 로마 제국적 아바타, 로마제국 압제자적인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자유의 시작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에 못이 박힌거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속 깊은 진실은 군중들은 모르고 계속 이 군중들은 환호성을 질러댑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마카베오상 13장 51절 마카베오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시므온 이라는 사람이 들어왔을 때 정확하게 했던 짓입니다. 예수가 무얼 해주길 바라죠. 표적을 가지고 군중을 조직해서 무력항쟁을 통해서 마카베오 독립전쟁의 영웅의 전처를 밟아달라, 그런 뜻이죠. 마카베오 독립전쟁으로 선 정부를 하시몬 왕조입니다. 그걸 보통 영어로 하스몬 왕조라고 하는데, 하는 정관사입니다. 정관사 하 the 라는 말이고, 시몬은 the simon이라는 말입니다. 마카베오 항쟁의 지도자로 하스몬 왕조를 창건한 시몬이 들어올 때 막 종려나무를 흔들었던 그런 행위를 재현함으로써 예수에게 정치적 요구, 즉 군사적 행동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 달라는 요구를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은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응답했습니다. No, 시몬의 길, 마카베오 항쟁의 길은 대답이 아닙니다, 그것은 로마제국 대 유대인의 단순구도로 대결을 짭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로마제국과 로마제국적인 아바타 압제적 분신, 다른 사람을 압제함으로써 착취함으로써 나를 유익하게 만들려는 뱀파이어적인 본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못 박는 것이 로마제국을 추방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입니다, 항상 보세요. 민족 대 민족의 구도로 대결을 짜는 것은 항상 어떤 의식이 있습니까? 일본을 물리치는 것, 일본 사람이 물러가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일본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내 마음이 물러가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마무리 짓자면 예수님은 삼대표적 때문에 왕으로 추대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은 슈퍼갑인 로마제국의 슈퍼 을의 위치에 해당하는 절대 약자였습니다. 절대 약자에 처했던 이스라엘 농민들, 순례객들은 로마제국과 이스라엘 비대칭적 힘의 불균형을 급진적으로 반전시키기 위해서 표적 행하는 예수를 숭배했습니다. 이것은 예수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예수의 표적에 대한 숭배로써 악하고 음란한 신앙의 대표적인 것입니다. 힘 센 압제자를 더 힘 센 압제자가 됨으로써 이기겠다는 것, 이건 해결책이 안 됩니다. 여러분 회사 부장님이 나 괴롭힌다고 저 먼 친척, 가까운 선배한테 전무한테 전화해서 이 놈 좀 때려달라고 하면 그건 로마제국적 발상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부장님을 어떻게 감화시켜야 합니까? 내 안에 있는 십자가에 못 박고 그 부장님을 로마 백부장처럼 회개시켜야 합니다. 로마 백부장을 회개시켰다는 말은 로마군인의 기초명령단위를 회개시킨 거죠. 로마제국의 기초명령단위가 백부장 아닙니까?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로마제국을 무장해제 시켰죠. 로마제국을 무장해제 시킨것은 십자가를 진 예수밖에 없습니다. 표적을 행한 예수가 로마 군인을 무장해제 시켰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대속적인 죽음을 죽는 예수가 로마 군인을 무장해제 시켰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권세에 많이 굶주립니다. 저도 교목실장하면서 취업률 보고를 매번 받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계속 똑같은 내용, 취업률 13위, 수학과 취업률 18위, 기독교학과는 취업률 100% 학과로 신청을 해놨습니다. 그 이유는 종교지도자 학과는 취업률에서 면제한다는 특혜조항이 있습니다. 우리는 취업 안 해도 취업률 항상 100% 나옵니다. 영적지도자는 취업 100% 한 거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제가 그걸 매일 듣기 때문에 기업체에 힘이 센 사람을 내가 좀 안다면, 이런 유혹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와서 이렇게, 표적 숭배신앙 그런 생각이 듭니다. 기업체 CEO, 기업체 인사과장들 팀장들, CEO보다 더 중요한 것이 부장급 인사 실무자입니다. 그 사람들이 취업을 결정합니다. 한 50명 모아놓고 감화 감동 시켜버리면 숭실대가 취업이 잘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제가 합니다. 문제는 제가 그렇게 탄식을 하고 있으니까 다른 보직교수들이 교목실장님 취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혼을 구원해주십시오, 우리 모두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취업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런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힘을 누가 숭배합니까? 누가 표적을 숭배합니까? 표적숭배는 열등감이 심한 사람이 숭배합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슈퍼갑과 슈퍼을의 비대칭성을 깰 수 없는 사람이 숭배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깰 수 있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로마제국이 슈퍼갑이라면 로마제국의 존재방식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살면 로마제국을 실제로 이길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는 겁니다. 로마제국의 군대를 물러가게 만들려면 이스라엘 방식의 독특한 예언자적인 평등사상과 우애동포와 사랑의 능력이 극대화된 자유인들의 동아리가 되면 로마제국은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다, 예수님은 대안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서 나의 부풀려진 욕망을 약간만 부인하면 로마제국을 물리칠 수 있다, 이게 바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유인들, 로마제국으로부터 로마의 손아귀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 예수님이 알려주신 것은 나귀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나귀 타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는 슈퍼 갑에게 슈퍼갑의 방식으로 대항하지 않고 슈퍼 갑이 우리를 짓누르는 논리를 비신화화 시키고 아무 것도 아닌 것, 사랑과 우애가 가득 찬 세상을 만듦으로써 우리는 우리에게 내리누르는 슈퍼갑의 압제적 지위를 무시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기독교인으로써 용감무쌍하게 어린 양 예수, 나귀 새끼 타고 오는 예수를 영접하는 큰 자유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힘에 의존하는 힘 숭배적인 문화에 살기 때문에 당장 힘을 발휘하는 사람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어린 예수님, 나귀 새끼 타고 오는 예수님,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우리에게 숭고한 자유의 몫을 돌려주려는 예수님이 두렵고 무서울 따름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셔서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처럼 축소지향적인 자기부인의 삶, 감미로운 삶을 체질화시켜서 힘 숭배가 일어나고 권력이 예찬되는 세상에서 참 자유를 맛보게 도와주시고 사랑의 종노릇함으로 자유 맛 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이 개척한 왕의 길을 저희가 따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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