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일 주일예배 1부 _ 요한복음 12장 1-8절 (온 집에 가득 찬 향유냄새)
유월 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 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습니다. 한 30도까지 올라가고 있는데 하절기에 여러분 건강 잘 다스려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바랍니다. 여름에 기침하는 사람들은 우주적 민망함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겨울에 기침하면 일반적으로 휴머니즘 차원에서 동정심을 유발하지만, 왜냐하면 체온이 내려가지 않으면 감기 잘 안 걸리거든요. 주 안에서 건강관리 잘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부터는 마가복음 11장에 해당하는 passion narrative, 수난절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달력의 경과, 날짜를 의식하면서 쓴 책이 요한복음입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예수님께서 유월절 예비일에 최후만찬을 하시고 유월절에 돌아가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날이 일주일 남았다, 이 이야기의 긴장감 속에 들어가려면 설교 요약문에 올려놨듯이 예수님 마음속에 일고 있는 의식의 흐름을 잘 포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어디 있다 왔느냐? 11장 54절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다시 말해서 은신하셨습니다. 은닉하셨습니다.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지난번에는 예수님께서 요단강 저편에 가서 쉬셨다고 했죠. 10장 40절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39절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예수님의 동선은 강력한 영적 관심을 고조시키고 군중의 열기를 집적시켰다가 그 군중의 열기 때문에 놀란 당국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를 할 때 살기를 느끼고 다시 피하는 hit and run 작전입니다. 먼저 타격하시고 도망치십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셔서 이스라엘 종교 심장부에게 너희는 소경이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그런 메시지를 종교당국자에게 던진 거거든요. 결국 요한복음 9장은 단순히 한 개인의 치유사건이 아니라 이스라엘 종교의 핵심 부서였던 예루살렘 종교권력자들의 맹인 상태, 눈 어두운 상태를 폭로한 사건이란 말이죠. 그렇게 9장 사건을 일으키고 10장의 선한목자 논쟁을 일으켰는데 이 선한 목자 논쟁은 에스겔 예언자의 정통된 메시지거든요. 에스겔 34장에 나오는 종교권력자들을 거짓된 삯꾼 이리 강도떼라고 보는. 에스겔 34장을 순식간에 방불케 하는 논쟁을 했습니다. 이것은 전체적으로 볼 때 굉장히 공격적인 입장을 취하는 겁니다. 누구를 향해서? 예루살렘 종교권력자들을 향해서 타점 높은 공격을 하는 거거든요. 공격을 가했더니 회개와 각성의 응답이 아니라 예수를 죽여 버려야겠다는 반발이 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읽었을 때 우리 양심을 찢고 우리 옷을 찢고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우리 옛 자아가 죽는 것을 선택하는 방법이 있고, 우리 옛 자아를 못 박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죽이려고 한다면 종교당국자들과 똑같은 거죠. 말씀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내 옛 자아가 죽거나 각성된 회개로 응답하거나 아니면 말씀이신 예수님을 처단하거나 십자가에 못 박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말입니다. 종교권력자들은 지켜야 할 이익이 분명했기 때문에 좀 더 살기어린 응답을 했죠. 그럼 우리가 예수님 말씀에 의해서 적개심어린 응답을 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 말씀 때문에 잃어야 할 그 무엇이 없는 거죠. 권력자가 아니란 말이죠. 아니기 때문에 격렬한 적대가 없는 것이죠. 격렬한 적대감이 없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는 내가 예수님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하는데 그렇지는 않죠. 예수님과 우호적 관계를 맺는다면 예루살렘을 떠나서 요단저편으로 가서, <말테의 수기> 첫 장면에 이런 말이 나오죠. 파리에 살던 삼류작가의 고백입니다. 릴케가 쓴 <말테의 수기>, 사람들은 모두 다 살려고 이곳으로 몰려오는데 나는 정작 이곳에서 숨이 막혀 죽는구나, 이런 문장이 앞에 나와요. 우리가 예루살렘에서 살기 힘들다며 요단 저편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질식할 것 같은 존재의 부조화를 느끼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거죠. 예수님의 친구가 아니라는 말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예수님에게 살기 어린 포고령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하는 예루살렘 공기를 참아내고 탈 없이 산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친구가 아니죠. 모두 살려고 오는데 모두 살려고 쇄도하는 서울에서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며 <지원이의 수기>가 되는 겁니다. 말테의 수기처럼, 서울 도시에서 기독교인 존재로 살아가는 내가 얼마나 고단한 방해를 받고 있는가를 아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피신에 대한 공감이 일어나는 거거든요. 그건 자기가 보이지 않는 삶 가운데 누적된 일관성을 지키다보면 서울이라는 이 도시가 얼마나 천박하고 얼마나 예수님을 적대하는 공기로 가득 차 있고, 예수님의 가치를 멸시하는 공기로 가득 차 있어요. 서울은 어떤 도시입니까? 못난 사람은 좀 못나게 살아달라고 요구하고 좋은 집안에 태어난 사람, 좋은 대학 나온 사람, strong한 경쟁력을 갖춘 사람만 인간다움을 누리고 살아라, 나머지 모든 즉 11대 89다, 11%는 정규직, 에어컨이 24도 이하로 내려가는 곳에 근무하는 사람, 긴 와이셔츠를 입고도 춥다고 벌벌 떨면서 따뜻한 커피를 찾는 사람이 인간입니다. 26도 교목실장실에 사는 저는 반인반수입니다. 우려 학교 26도이기 때문에 항상 덥습니다. 저는 지하실이기 때문에 좀 낫습니다. 에어컨이 전혀 없는 곳, 제가 예날 ESF 목자 생활할 때 에어컨이 도무지 없는 빌딩, 다방 4분의 1을 빌려서 바이블 스터디를 했던 저 같은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거죠. 비정규직도 아닌 거죠. 이 세상은 그렇게 돼 있거든요. 그걸 당연시 여기면 예수님의 적인 거죠. 그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대한민국을 고치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거죠. 이건 날림공사와 같고 가건물과 같고 함바 공사집과 같은 대한민국을 그냥 참겠다? 예수님의 적대자입니다. 예수님은 그걸 고치려고 종횡무진하신 거거든요.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저렇게 살아선 안 된다, 존엄한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 암흑천지의 세계에 접촉을 통해서 손을 대신 거거든요. 예수님은 피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죽이겠다고 한 여러분의 속생각, 은밀한 속생각을 죽이겠다고 한 살기등등한 실체를 여러분이 안다면 여러분도 은닉할 수밖에 없고 피신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을 떠나 빈들 가까운 곳에 가서 쉬셨어요. 어제 여러분이 우리 집에 오니까 빈들 같죠? 야생의 습지가운데, 너무 부러워하더라고요. 1시간 30분씩 걸려 버스와 자동차 4번씩 갈아타고 다니는 출근길을 부러워하더군요. 4.5번 transportation 합니다. 운이 좋으면 3번이고 운이 나쁘면 5번 탑니다. 그런데 야생습지는 정말 멋있죠? 서울시민들이 저를 거부하는 것도 있지만 저 또한 서울시민을 거부합니다. 우리가 빈들에 거하고 예수님을 죽여 버리려고 다짐하는 예루살렘과 유대의 공기 질감을 감지한다면 우리가 피신할 수밖에 없고, 숨 막히는 메트로폴리탄 서울의 공기를 떠나 살고 싶은 마음이 많은데, 그런 사람이 많으면 아파트값이 어떻게 될까요? 100만 명만 서울을 떠나고 아파트를 포기하면 어떻게 될까요? 100만 명 갈 필요 없습니다. 50만 명만 각성된 그리스도인이 아파트를 포기하자, 아파트값 어떻게 될까요? 폭락하고, 태철 형제도 수유동 반지하에서 아파트로 올 수 있습니다. 저도 서울시민 될 수 있습니다. 50만 명만 아파트를 포기하면 아파트 자본주의 시장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습니다. 요동칩니다. 자발적 시장 폭락입니다. 예수님 같은 마음을 가지면 서울시 아파트를 부동산 정책에 호소하지 말고 그리스도인의 각성으로 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이 왜 피신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 선한목자를 감당할 수 없는 예루살렘 종교당국자들이라는 무서운 기득권의 완강한 요새 때문에 예수님은 피신했습니다. 예수님은 비무장 혈혈단신입니다. 자기를 보호할 수 있지만 보호하지 않기로 작정한 진리이시고, 예루살렘 종교당국자들은 자기를 보호하는 유사 전능한 방어체계를 가진 악입니다. 압도적 악에 비하여 혈혈단신 연약한 진리는 피해 다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피해있는 진리를 향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격동하셔서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예루살렘과 약 2km 떨어진 예루살렘 턱까지 왔습니다. 이번 유월절에 예수가 만일 예루살렘에 올 것인가? 이것이 순례객들의 모든 초점 잡힌 질문입니다. 11장 56절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12장 1절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이곳을 피했죠? 피한 곳으로 예수님은 다시 오신 겁니다. 다시 오신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신적격동, 너를 찾는 엄청난 군중의 열기가 비록 정치적으로 편향되었다 할지라도 너를 아우성치며 찾는 군중들 앞에 네가 나가는 것이 마땅하다, 네가 유월절에 올라가는 것이 마땅하다, 너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거룩한 도살을 경험할지도 모르겠지만 유월절에 올라가야 한다, 이런 격동을 받고 예수님께서 올라가신 겁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잔치가 벌어지는데 이 잔치의 그림은 두 가지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을 기념하여 감사하는 감사축제임과 동시에 또 하나는 예수님의 운명 앞에 드리워진 죽음의 실체를 감지한 특유한 직관적 통찰력의 소유자였던 마리아가 준비한 장례식, 두 가지입니다. 이것은 그림으로 포착하기 힘듭니다. 만일 어떤 화가가 있다면 나사로의 집에서 벌이는 요한복음 12장의 만찬을 굉장히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을 동시에 한편으로 감사의 축제이면서 한편으로 어두운 장례식을 예고하는 색상대비 같은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그림을 잘 그린다면 이 본문의 메시지 흐림을 포착해서 그림을 그려보고 싶습니다. 3D정도의 입체감을 가지고 그려보고 싶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열두 보좌를 설치해서 예루살렘 인자의 나라,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는 섣부른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번 예루살렘 여정이 지상의 공생애 종결을 의미하는 죽음을 의미한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순례객들은 예수가 종교당국자들 앞에서, 빌라도 앞에서 무언가 표적을 행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유대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랑의 진실을 만천하에 예수가 보여주지 않겠는가, 빌라도가 보는 앞에서 예루살렘 안나스와 가야바가 보는 앞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키지 않겠는가, 이런 고조된 suspense가 모아집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고조된 긴장어린 시선이 집중된 무대 앞으로 걸어오시는데 예수님 얼굴을 보니 죽음을 받아들인 자의 편안함, 놀라운 편안함, 죽음을 삼켜버린 침착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본 마리아가 잔치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 사람들의 말은 이겁니다. 나사로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사로의 모든 친구들은 예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신적인 기이한 사랑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 나사로 집의 방문이 예수님 생애 마지막 발걸음인 것을 알고,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슬픈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예수님이 없다면 더 이상 필요 없는 삼백 데나리온 나드향, 일 년 내내 월급 받아서 살 수 있는 로마의 황제와 부인이 쓰는, 클레오파트라 같은 사람이 썼던 향유를 터트렸습니다. 너무나 돌발적입니다. 누구도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향유는 너무나 작은 병에 담겼지만 터트려지면 엄청나게 멀리까지 퍼지는 향기입니다. 요즘은 라일락과 아카시아 향이 참 많죠. 멀리까지 퍼지죠. 너무 돌발적입니다. 감사의 축제가 넘치고 예수님의 능력을 떠받치는 열기가 가득 찬 이곳에 눈물로 예수님과 이별을 준비하는 이 그림은 너무나 부조화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닌 하나님 나라, 예수님을 도구로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 예수님 자체를 통한 가난한 사람 하나님 나라, 공적 사태를 준비했고, 마리아는 예수님 자체에 몰두했습니다. 예수님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이 표방한 모든 가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중요합니다. 특수한 예수 인격을 사랑하면 예수가 표방한 모든 보편적 가치를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사랑해야만 어린양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편적 가치 중 몇 가지를 사랑한다고 해서 예수님 사랑이 안 일어납니다. 예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사랑할 수 있고 정의를 사랑할 수 있고 동정심과 휴머니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것들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배반적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민중을 사랑하다보면 민중을 자기 권력기반으로 삼아버립니다. 이게 marxist입니다. 예수님 사랑에 투항하지 않는 가난한 사람, 그건 보통 자선사업가의 비참한 노동착취, 처음에는 사랑하죠. 고아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모든 예수님의 사랑을 경유하지 않은 자선 사업가들이 그 사랑으로 권력을 구축하고 배반하게 됩니다. 왜? 예수님 사랑을 거친 사랑만이 휴머니즘 사랑, 이웃 사랑, 고아사랑,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항구적인 유효성을 갖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 모든 민중사랑, 가난한 사랑이 다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그 논리적 순서를 알았습니다. 예수님 자체를 사랑한다면, 마리아가 볼 때는 예수님께 부은 향유는 가난한 사람에게 부은 향유랑 똑같은 겁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의 발에 부은, 죽음을 앞둔 슬픔의 감정위에 부은 사랑의 처절한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과 별도로 있는 가난한 사람에게 왜 이 향유를 팔아 돈 나눠주지 않느냐고 주장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계속 가난한 사람을 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기부금을 받아 계속 가난한 사람을 도운 겁니다. 그 도움에 앞장 선 사람이 유다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질문은 타당한 겁니다. 잘 보십시오. 예수님 죽음의 부조리성, 예수님이 악의 실체들 손아귀에 들어가서 죽으면 얼마나 슬픈가를 알고, 그런 예수님과 이별하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얼마나 눈물지어야 하는가를 아는 그 사람이 진짜 항구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이게 정말 중요한 원리입니다. 왜?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의 모든 멍에의 총화이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반드시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예수님과 이별에 공감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의 사랑은 그 사랑을 바탕으로 권력을 구축하고 자기 숙명에 빠지게 된다는 말이에요. 아무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절대화, 자기 권력화에 피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없지만 휴머니즘적 열정을 가진 순수한 사람, 절대로 순수하지 않습니다. 예수 사랑하는 것만 순수한 겁니다. 제가 오랫동안 관찰하다 보니까 예수님에 대한 사랑고백, 인격적 고백이 약한 사람의 활동은 아무 기초가 없습니다. 뿌리가 없고 열매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회의식이 진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못하고 운동권의식이 없어도 자신도 모르게 너무나 놀라운 급진적 사랑을 부단히 행합니다. 예수님 발 앞에 삼백 데나리온 나드향을 붓는 이 급진적 행위야말로 어떤 혁명적 행위보다 큰 가난한 사람에 대한 항구적 사랑행위라는 것을 예수님은 아신 겁니다. 마리아와 유다의 시선은 너무 다릅니다. 유다는 일견 타당해보입니다. 유다의 사고는 남성적 사고, 마리아의 시선은 여성적 사고입니다. 여성적 사고는 직관적 사고, 논리보다 더 앞선, 예수님의 의식 속에 들어가서 모성애적 일체감을 가진 논리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을 이용하여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이용하여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려고 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갑자기 무능한 자가 되고, 기적을 행하지 못하는 자가 될 때 버리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하면 무능한 예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도 사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마리아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까지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켰고, 무덤가에 가서 눈물로 예수님을 찾은 겁니다. 이 마리아 사랑이 의식의 진보보다 더 중요하고, 각성된 의식보다 더 중요하고, 이런 저런 교회 책 좀 읽고, 사회과학서적 좀 읽고, 사회를 농단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고 영속적인 사랑이라는 걸 꼭 기억해야 해요. 제가 좀 걱정하는 것은 복음주의 청년 중에서 책 좀 읽었다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책을 읽고 지식을 나불거리는데 5년도 안 돼서 다 사라집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약하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새벽에 기도도 안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예배드리는 것도 재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매일 예배를 드려도 매일 예배가 은혜롭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예배가 은혜롭고 아침마다 말씀이 충만해집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찬양도 좋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웬만한 사람들과의 차이도 쉽게 극복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사랑 없는 포말 같은 진보적 의식만 있는 사람들은 굉장히 선인장 같고 자기 배반적이고 혼자 있을 때 영성생활유지를 못합니다. 유다 같은 사람이죠.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잘 보세요. 유다는 굉장히 가난한 사람에 착념했습니다. 사회정의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 사랑, 예수님의 의식 속에 일치감이 들만큼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도적으로 바뀌어버립니다. 가난한 사람도 돕고 중간에 돈도 가로채고, 도적놈이라는 말을 듣고 유다가 무대에서 은퇴하지 않습니까? 돈 30을 받고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유다의 말을 들어보면서 공산당의 미래를 봅니다. 무신론의 기반위에 선 공산주의란 존재가 왜 필패할 수밖에 없나?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사랑의 화신이었던 예수님의 사랑을 부인하고 배척하면 가난한 사람을 아무리 사랑한다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저주하고 죽이는 일을 합니다. 실제로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여산회의라는 게 있습니다. 1958년 정도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여산회의 때 여산에서 공산당이 모택동의 대약진운동, 인민공사, 이걸 비판하는 회의입니다. 대약진 운동이라는 것은 농촌을 집단으로 묶어 세우고 농민들의 대부분을 철강생산에 바쳐서 영국을 15년 내에 따라잡겠다는 엄청난 야심을 품은 겁니다. 철강 생산량을 영국과 같은 수준으로 하겠다는 것이 모택동 사상입니다. 이때 농민들이 농사기술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7-8년 동안 철강 캐러 다니다가, 그래서 3200만 명이 굶어죽었습니다. 그때 회의에서 3200만 명이 굶어죽었다고 서류를 올리는 등소평과 팽득회라는 사람의 보고를 받고 싱글싱글 웃었습니다. 팽득회가 누구입니까? 한국전쟁 중공군 총사령관입니다. 모택동과 동급입니다. 팽득회가 이렇게 하면 인민을 다 죽인다고 하니까 싱글싱글 웃으면서 그 다음날 편지를 하나 썼는데, 팽득회를 제거하라는 편지입니다. 모택동은 절대로 성운, 영웅이 아닙니다. 한때 그는 혁명가적 카리스마가 있었습니다. 인민을 너무 많이 죽였습니다. 스탈린은 5천만 명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없는 자아 비판적 능력 없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우선적 관심은 반드시 가난한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저는 인류가 공산당의 대의명분에 일부는 찬성할지 몰라도 실제 권력 잡은 공산주의는 얼마나 위험한가, 공산주의는 유일하게 안전할 때는 권력을 잡지 못한 채 있는 상태, 이때가 제일 공산당이 아름다울 때입니다. 이념은 표방하지만 영원히 권력을 잡지 못한 채, 막심 고리키가 1907년에 쓴 <어머니> 주인공 공산주의, 그때가 좋은 겁니다. 권력은 잡지 못하고 공장에 다니면서 이상사회를 꿈꾸고 보드카를 마시면서 안개 낀, 그때가 공산주의의 가장 아름다운 미학적 모습입니다. 권력을 잡는 순간 공산주의는 프랑켄슈타인으로 바뀝니다. 유다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이념의 문제로 보자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일어난, 진짜 신앙적 기초가 있고 영성적 기초가 있다는 자기 비판적 능력이 있습니다. 간디 같은 사람도 있고, 라틴 아메리카 지도자가 있고, 호치민 같은 사람들은 사회주의적 의식을 가졌지만 너무나 철두철미하게 자기 비판적이었습니다. 호치민이 얼마나 놀랍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까? 일생동안 <목민심서>를 품에 끼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수상이 된 후 수상관저에 어린아이들이 떼거지로 몰려와서 호치민 수상의 수염을 가지고 장난을 쳐도 새떼처럼 어린아이들을 품고 해맑게 웃음을 지었던 사람입니다. 전설적입니다. 권력을 잡아도 자기 비판적 능력이 있고, 영성의 추구, 거의 불교적 영성입니다. 종교적 영성이 있는 사람들은 진짜 실현가능합니다. 우리 주님은 왜 이 마리아의 돌출적 행동을 용납하셨을 뿐만 아니라 의미를 부여했느냐? 자기 장례식을 준비한다, 정말 정확하게 이 오늘 예수님과 보내는 시간이 지상에서 거의 마지막이라고 직감한 사랑하는 여인 제자가 했던 이 행동을 내 장례식을 위해서 준비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예수님과 마리아 사이에는 공감, 직관적 예감이 있었다고 할 수 있죠.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이미 예비 장례식, 리허설을 했다는 겁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다시 말해서 마리아의 행동은 나에게 석별의 만찬을 베풀어준 겁니다,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유다형제님, 이렇게 한 겁니다. 우리가 주님 자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활동한 동선인 복음서를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읽었던 구약성경을 주야장천 읽을 수밖에 없고, 예수님이 기록된 성경을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읽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항상 재미있는 이유 항상 지루하지 않는 이유, 주님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읽었던 성경, 주님이 읽었던 다니엘, 주님이 읽었던 에스겔서니까 저도 정신을 차려서 우리 주님이 읽은 그 마음으로 읽는 겁니다. 또 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읽고 계속 읽는 이유는 주님에 관련한 단어 하나하나, 주님에 관련된 행동 하나하나의 묘사가 다 나에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무화과를 먹을 때마다, 제가 무화과를 너무 좋아합니다. 제 딸이 놀랍니다. 너무 naive 하다고, 주님이 드시려다 못 드신 무화과, 튀빙겐 도시에 고시가지에 큰 고성, 괴테가 앉았다는, 헤르만 헤세가 다녔다는 그 교회 앞에서 독일 농민들이 5월말에 때 이른, 예수님께서 드시고 싶었던 무화과를 팔더라고요. 그걸 사먹으면서 주님이 드시고 싶었던거라고 하니까 하은이가 얼마나 놀리던지, 저는 갈릴리에 가보면서 주님이 겪으셨던 아열대 기후, 주님이 드셨던 바나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자, 그것이 사랑하는 감정이 동반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런 것들은 가난한 사람과의 사랑과의 연관성이 없는가?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감동이 주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항상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도록 감동을 줍니다. 믿으시면 됩니다. 그런데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들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분리한 사람들은 끝까지 자기 신실성을 못 지킵니다. 마리아의 돌출적이지만 직관적인 주님에 대한 사랑고백이 온 집안을 가득 향기롭게 했습니다. 주님을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으면 그 공동체는 향기가 가득 찹니다. 집안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을, 학교, 직장,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깨뜨려 주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합니다. 여러분이 깨뜨릴 향유는 무엇입니까? 돈이 가장 많은 사람들은 돈이 향유라고 봅니다. 돈 많은 사람이 돈을 깨뜨리면 온 집안이 향기롭습니다. 그다음 재능이 많은 사람, 돈은 없지만 재능이 있는 사람은 그 재능을 깨뜨릴 때, 돈은 없지만 천상의 목소리를 가졌다,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재능기부차원에서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늘 주님을 찬양할 때 향기가 가득 찹니다. 시를 잘 짓는 사람은 시를 쓰고,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자기가 가진 가장 귀한 것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주님을 향해서 바칠 때, 주님께 바쳐진 그 공탁된 선물, 주님 발에 그 부어진 향유는 교회의 발에 부어진 향유이며 성도의 발에 부어진 향유라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의 메시지가 됩니다. 여러분 모두 먼저 우리 가향에 어떤 향기가 있는지 주님의 향기가 있는지를 잘 판단해보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각처에서 풍기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하는 저희들 되시길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가향에 주님 사랑하는 향기가 가득 차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은밀하게 아무도 모르게 사랑을 실천하는, 형제자매들이 우리 가향을 순식간에 공동체로 만들었습니다. 주님 우리는 반신반의하면서 독립된 공동체를 시작했지만 그리스도의 주님의 부르튼 발을 끌어안고 가장 귀한 것을 바쳐내는 하나님의 아들딸들 때문에 직장도 가정도 향기로 가득 차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튼 발, 십자가에 못 박힐 상처를 사랑하며 능력행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악인들의 손에 붙잡혀서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주님도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표적을 행하지 못하는 주님도, 침묵 속에 오열하는 주님도 저희가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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