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로마서 3:24-26
제목: 이신칭의의 핵심
3장 24절부터 26절을 만일에 우리가 단숨에 깨달을 수 있다면은 신구약 모두를 다 깨달았다고 할 수 있죠. 자, 로마서 3장 24절부터 26절에는 언약사상,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언약관계가 존재하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는 언약관계가 존재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갑자기 죄를 묻는 이유는 우리가 동의 한 게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언약관계가 존재한다는 걸 전제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늘날 논문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논문식으로 설명하지 않고 언약사상을 전제합니다. 논문형식으로 글을 쓰지 않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 전부다가 전제를 하고 있는 것, 알고 있는 것을 서론 없이 바로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약을 맺었다는 말뜻은 뭐냐면은 하나님 홀로 이 세계를 통치하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과 더불어 같이 통치하겠다. 즉 하나님은 전능하신 원맨쇼의 세상 통치보다는 하나님이 피조하신 인간과 동역하면서, 협력하면서 인간을 매개하여, 인간을 통하여 세계를 통치하기를 원하시는 언약통치 또는 매개통치를 하려고 하는 거죠. 언약적 통치 또는 매개통치가 같은 말인데 창세기 1장 26-28절에 하나님이 자기 권한을 분산하는 행위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땅을 통치하고 다스리라고 위임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을 맺는 행위입니다. 이 말은, 아버지 왕이 아들 왕에게 국방과 재무와 인사 이런 것을 나누어줍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영조께서 사도 세자에게 국방, 수도경비 국방을 맡겼습니다. 아들 왕이 앉아 있는 자리가 아버지 우편 보좌입니다. 아버지가 큰 보좌에 앉아 있고 아들은 아버지보다 약간 작은 보좌에 앉아 있는데 이것을 섭정제도 또는 co-regent 이렇게 말합니다. 고대의 모든 왕들은 항상 왕 옆에 왕의 아들 또는 부왕, 그 부왕을 늘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이 고대의 왕들도 혼자 통치한 것이 아니라 대개 양두체제로 통치했거든요. 이런 고대의 제왕의 통치를 비유로 지금 쓰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 우편의 보좌에 앉혔습니다. 우리 이수원 형제님, 시편 80편 17절 좀 읽어주시고요, 김조은 자매님 시편 8편 4절 읽어주십시오. 자, 두 분이 지금 ‘인자’라는 말을 읽습니다.
17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와~~ 주의 오른편에 있는 인자, 주의 오른편에 있는 인자가 누구냐 하면은 다윗 왕을 가리킵니다. 다윗 왕, 그러니까 다윗과 같은 왕을 주의 오른편에 있는 인자라고 그런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인자라고 그랬을 때 그 인자는 하나님의 왕명 출납을 하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하는 부왕을 인자라고 그런 거예요. 그런데 이 인자를 많은 신약학자들은 말뜻을 가지고 자꾸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인자의 뜻은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서 하나님 아버지를 대신하여 통치하는 부왕, 버금왕을 인자라고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시편 8편 4절 한 번 읽어주십시오.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예, 이때 인자가 바로 아담을 가리키거든요. 이때 인자가 아담을 가리키고, 자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셨을 때 부왕으로 만드셨어요. 단순히 인간으로 만든 거 아니에요. 하나님은 아담을 만들 때 우리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바 된 인간을 만들 때 부왕적 존재, 그러니까 우편 보좌에 착석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대신할 사람으로 우리를 만든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아담을 창조했다는 말은 ‘계약’을 창조했다는 말이에요. 어떤 계약입니까? 지구를 대신 통치하는 위임통치 계약을 맺으셨죠. 위임통치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 언약적 관계를 책임질 의무가 있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가 동의 한 것이 아닌데 하나님이 우릴 그렇게 만드셨어요. 그래서 아담의 후손 모든 인간은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서 지구를 통치할 사명을 받고 그 언약 조항을 상속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죄라는 말은 뭐냐면, 이 언약 조항을 어겼기 때문에 죄라는 말을 하는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요구를 안 했죠? 우리가 하나님께 우편 보좌에 앉는 그런 피조물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를 안 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죄라는 그 일이 발생하게 만든 것도 하나님 책임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보다 더 큰, 법적 책임보다 더 무시무시한 창조주의 책임감을 느끼거든요. 우리가 잘 못 되었을 때…….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으로 이끄시며 에덴동산을 관리하고 다스리라고 했을 때 그것을 하나님은 언약 사건에 초청했다 라고 말해요. 쌍방속박적 언약 사건. 그러니까 결국은 로마서는 창세기 문법, 창조와 언약 사건이라는 이 기본적인 문법을 모르면은 로마서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3장 23절 볼까요.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기대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부왕적 통치 사명을 잘 수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를 창조한 목적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뭐냐 하면은 끝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거예요. 아! 믿을 수가 없는데, 정말 하나님께서 멋지신 생각을 가졌는데, 우리한테는 너무 부담스러운 거죠. 우리는 그냥 오랑우탄이나 침팬지나 약 93종의 그 파푸아뉴기니에 있는 그런 영장류 정도의 삶을 살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굳이 인간을 하나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셔 놓고 우리에게 그 언약적 요구를 하시거든요. 그래서 그 언약적 요구에 실패할 때 그것을 죄라고 말하는데 문제는 3장 24절입니다.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문제는 아담과 그 후손이 하나님의 부왕적 통치 사명을 실패한 결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끊어졌죠? 끊어지니까 이 부담감을, 무시무시한 창조주의 부담감을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아버지랑 자녀가 싸움을 해서 아들이 가출하면은 정상적인 아버지는 아들보다 책임감이 클까요? 적을까요? 정상적 아버지는……. 정상적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는 싸리문을 나간 탕자보다 훨씬 더 자기가 책임감이 크다고 느끼겠죠?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그 탕자의 아버지 마음을 보세요. 이 아버지는 탕자가 집을 나간 그 순간부터 아버지는 문을 열어놓고 아들을 기다립니다. 그러니까 법적 책임보다 더 무시무시한 자기 책임적인 그런 책임감이 아버지의 책임감이고, 창조주의 책임감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 즉 아담의 인류가 실패한 이 부왕적 책임감을 만회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고요, 그 미안한 마음을 ‘힐라스테리온’이라고 합니다. ‘힐라스테리온’을 화목제물이라고 번역되었죠? 이 화목제물은 ‘힐라스테리온’인데요, 여러분 제가 가향교회에서 했던 설교 중에 ‘하나님은 왜 화목제물을 받으시는가?’ 이것을 꼭 한 번 읽어주세요. 정말 중요한 설교문입니다. 이것은 그냥 하나의 논문처럼 썼는데 찬찬히 읽으면 다 납득되도록 써 놨어요. 자세히 썼어요. 로마서를 알기 위해서는 이것을 꼭 읽으셔야 돼요.
자 ‘힐라스테리온’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언약관계의 당사자가 언약관계의 다른 당사자에 대해서 내가 미안하다는 마음을 표현할 때, 그 미안하고 쓰라린 마음, 뉘우치는 마음, 이 관계가 파탄난 것에 대한 쓰라린 마음을 표현할 때 그걸 ‘화목제물’ 그렇게 해요. 다시 말해서 상대방의 섭섭한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그러니까 화해를 초래하는, 상대방이 나에 대해서 품었던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그런 걸 갔다가 우리는 화목제물이라고 하는데 문제는 이 화목제물을 누가 보냈냐 하면은 인간이 보낸 게 아니에요. 인간이 보낸 게 아니라 우리 화목제물은 하나님께서 인류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신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죄를 짓는 인류를 보고 심판할 생각만 하는 게 아니고, 죄 짓는 인간을 보고 세리와 창녀처럼 사는 사람을 보고 하나님 마음은 찢어지는 거예요. “내가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이 미안한 마음을 하나님 우편 보좌에 있는 한 번도 타락한 적이 없는 독생자 예수님에게 아버지 하나님의 미안한 마음이 100% 상속 되어서, 아버지는 싸리문에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탕자의 동네로 아들을 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이 죄짓는 인간의 이 현상에 대해서 갖는 총체적 미안한 마음을 예수님이 대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서구신학이나 많은 사람들은 덜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에 대해서 갖는 책임감을 덜 강조하고, 자꾸 죄짓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죄인의 대표라고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미안한 마음을 대신하는 중보자일 뿐만 아니라 이 예수님은 또한 이스라엘의 마음을 대신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민족이 그동안에 너무 많이 잘못 했죠? 이스라엘의 마음을 대신한다는 말은 아담 인류의 마음을 대신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 제가 탕자였습니다. 이제 돌아갑니다. 이제 제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이 박혔습니다. 저는 새사람 되고 싶습니다” 하면서 탕자의 마음으로 돌아와서 “죄, 이 탕탕한 탕자의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주세요. 저는 새로운 아들로 살고 싶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마음, 이런 아담 후손의 마음을 또한 대신 하는 것이 예수님이니까, 이번에는 예수님은 인간 편에서 하나님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쓰라린 마음 “정말 죄송합니다” 이 마음을 표현하는 중보자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표현하고, 인간의 마음도 표현해 주는 참 중보자입니다. 이걸 여러분이 깨달으시면은 너무 장엄한 감동에 도달할 것이고 저처럼 감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사실 때문에 줄기차게 감동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복음을 전하는 거거든요. 제가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이유는 이 감동이 있기 때문이거든요. 저는! 이거는 지어낸 감동이 아니라 장엄한 감동이고, 지속적 감동이고,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감동이고, 죽은 사람을 소생시키는 감동이고, 세상 만민이 들어야 할 소식이에요. 이것은……. 너무 놀라운 거예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이렇게 잘 못 사는, 엉망진창으로 살아가는 인류의 이 진창과 수렁 같은 삶을 보고 아버지가 느끼는 미안한 마음, 아버지가 인간한테 “잘못했습니다” 와 같은 그런 느낌들을 표현하는 것, 그게 바로 독생자의 마음이고 또한 예수님은 인간 편에서 부왕적 사명을 다 하지 못하여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아담의 마음을 대신해서, 아담의 마음을 대신해서 “잘못했습니다”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담의 마음을 대신하는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하는 마음을 성경 구절 읽고 마칩니다. 여러분 로마서 제가 설교한 본문을 꼭 좀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부탁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화면에 얼굴이 안 나타나고, 이름만 나타나기 때문에 제가 설교하기가 왜 힘드냐 하면은 자꾸 반복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해가 되는지, 이걸 따라오는지를 모르겠어요. 그래서 우리 교수들이 온라인 강의를 하면서 목이 다 나간다고 하는 이유는 표정이 안 보여요. 여러분들이 강의를 해보면 알지만 표정이 안 보이는 사람 앞에 강의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자, 빌립보서 2장 6절부터 11절, 요한복음 3장 16절부터 21절 두 군데 읽습니다. 자 먼저 신애영 권사님 빌립보서 2장 6절부터 11절 읽어주시고, 장로님 요한복음 3장 16절부터 21절 읽어주십시오. 이걸 읽고 마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화목제물을 보낼 때 하나님 마음은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자, 하나님의 미안한 마음 3장 16절부터 21절 읽어주십시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잠깐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란 말은 ‘엉망진창이 된 사람, 엉망진창이 된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유지하기로 결단하사’ 이런 말입니다. 이때 ‘사랑하사’란 말이 그런 말입니다. 엉망진창이 된 저 내 아들, 아버지 돈을 탕진하는 저 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탱하기로 결단하사…….그게 바로 ‘사랑하사’ 입니다. 그 다음 16절의 독생자 괄호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미안함 마음을 100% 구현하는 아들을 보내사’ 아버지 하나님의 세상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열정과 미안한 마음, 쓰라린 마음, 언약 관계가 파탄 나서 아버지 하나님이 우주적 황량함에 사로잡혔다는 그 감정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독생자를 보내사’……. 그 다음요. 빌립보서 2장 6절부터 11절이요.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봐요.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됨을 강탈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게 ‘취한다’는 말은 ‘강탈한다’는 강한 용어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범죄를 상징합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강탈하려고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범죄를 만회하려고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아담과 정반대의 행동을 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대신하는 쓰라린 마음, 미안한 마음입니다. 이것이 화목제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화목제물입니다. 이 화목제물을 믿으면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쓰라린 인간의 마음을 대신 표현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은 우주적 화해를 가져옵니다.
아버지 하나님
너무나 기독교 진리를 깨닫기가 힘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주님 둔탁한 저희 마음에 계시의 조명을 비추어주셔서 줄기찬 감동, 50년, 100년까지 가는 감동, 성령의 감동을 쏟아 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본문: 로마서 4:1-8 /제목: 이신칭의의 산 증인:아브라함과 다윗 (0) | 2022.01.15 |
---|---|
본문: 로마서 3:27-31 /제목: 율법과 믿음의 상호지지와 견인 (0) | 2022.01.15 |
본문: 로마서 3:21-23 /제목: 율법의 의와 다른 하나님의 의 (0) | 2022.01.15 |
본문: 로마서 3:9-20 /제목: 율법을 행함으로 의에 이를 수 없는 인류 (0) | 2022.01.15 |
본문: 로마서 3:1-8 /제목: 이신칭의 교리 오해 논박 (0) | 2022.01.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