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로마서 3:9-20
제목: 율법을 행함으로 의에 이를 수 없는 인류
먼저 이 말들이 누구를 향하여 하는 말인가를 한 번 볼까요? 1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여기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의 입을 막는 거거든요. 지금요.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왜 갑자기 유대인을 지목하여 이렇게 말할까요? 자 1장 18절로 32절은 도덕적 슬럼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보통 국가기관이 감옥에 집어넣거나 사회적 형벌을 통해서 다스립니다. 1장 18절부터 32절은 하나님의 율법이 필요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있는 자연법을 일부 반영한 국가의 법들이 있죠? 국가의 형사법들, 형사소송법들이 1장 18절부터 32절에 나오는 죄인들의 죄를 다스립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죄악의 뿌리에는 단 한 가지의 죄가 있음을 1장 18절이 말해줍니다. 그 한 가지 죄는 뭘까요?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며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는 이 죄가 모든 인간의 죄 안에 담겨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 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은 굉장히 멋지게 꽃이 필 내적인 잠재력이 많았다는 거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꽃이 피기로 예정된 인간의 내장된 그런 잠재력, 잠재성, 은사와 재능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을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어 우상을 숭배하자마자 그 마음이 허망하여지고 어두워져서 그때부터 모든 사회적 범죄들을 저지른다는 겁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9절을 보세요.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 한복판에 가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공동체에 가서는 “나사렛 예수가 우리 조상들이 오랫동안 예언했고 예언자들이 오랫동안 약속했던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 그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 예수다”라는 그런 구약에 의존하여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데 주력을 했고, 이방인 회중들을 만났을때에는 “우상숭배를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라고 말함으로써 우상숭배가 모든 죄악의 근원적 죄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제가 전에 말한 것처럼, 우상숭배의 죄는 자기 욕망을 섬기는 탐심과 똑 같은 겁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은 욕망, 영생불멸을 누리고 싶다는 그 열망, 하나님과 동등 됨으로 자기를 여기고 싶다는 그 열망, 이런 자기 안에 있는 욕망을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을 우리는 탐심숭배 또는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보면은 우상숭배는 고대나 현대나 인간의 죄를 기본적으로 떠받치는 그런 토대적인 죄가 되는 거죠. 그래서 1장 18절부터 32절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죄입니다. 국가가 다스려 주는 죄입니다. 근데 2장 1절부터 2장 16절은 이방인 중에서 이런 도덕적 슬럼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심판하는 판관, 재판관 노릇하는 도덕적인 율법 교사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죄인들을 심판하면서 자기들도 똑같은 죄를 범하는 이방 세계에 있는 도덕적 우월론 자들인데 바울은 이들도 비판합니다. 2장 17절 이하는 이방인 도덕적 우월론자이건, 이방인 도덕적 슬럼지대에 사람이건 상관없이 이들을 한 수 아래로 보면서 “우리는 율법을 가져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야!”라고 주장하며 “우리는 완전히 하나님의 언약적 보호를 받고 있어. 우리는 할례 백성이야!”라고 자랑하는 유대인의 도덕적 슈퍼우월감, 그 상상할 수 없는 우월감, 그 우월감을 비판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 계층 중에서 누구만 비판하면 나머지 비판이 다 포함됩니까? 이 세 층위를 가진 사람들 중에서 누구의 죄만 비판하면 다 돼요? 이방인들 중에서 도덕적 개차반들, 도덕적 슬럼지대 사람들, 그 다음에 이방인 중에서 도덕적 우월론 자들, 그 다음에 이방인들을 아예 깔보는 유대인들, 할례받은 자들, 이 세 사람 중에서 할례받은 자들만 죄인인 걸 입증하면 나머지는 다 필요가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3장 9절부터 18절은 너무 비관적입니다. 한 번 보세요. 너무 비관적이에요.
여러분이 9절부터 18절을 보면은 여러분 주변에 이런 사람 거의 없을 거예요. 윤희자매님, 자매님 주변에 완전 총천연색으로 이런 죄를 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근접한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은 아니죠? 김은자 집사님, 이런 총천연색 죄인들을 교대 입구에서 많이 봤습니까? “아 보기 힘들죠.” 이렇게 총천연색 죄인들은 보기 어렵습니다. 쉽게 말해서 사도 바울은 좀 부당할 정도로 인간성을 비관적으로 보려고 마음을 먹은 사람이거든요. 여기 보면은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이것은 전도서 7장 20절에 나오는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나라 성경에는 시편 14편에 나온다고 하는데 시편 14편은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전도서 7장 20절에는 “완전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의를 행하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도대체 바울은 세상 만민을 다 만나보지도 않고 어떻게 이런 성급한 결론을 내렸을까요? 이것은 귀납법적인 관찰의 결과로 내린 결론이 아니라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내린 결론입니다. 안 그래요? 바울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만나봤습니까?. 만약 바울이 욥을 만났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욥은 진짜 완전체 의인이거든요. 욥은 죄가 없는 사람이에요. 욥은 내 인간성이 피조물의 유한성에 갇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내가 하나님과 천사보다 열등한 존재인 것은 인정하지만, “나는 죄를 범한 적이 없다”고 항변합니다. 이게 욥이 한 말이거든요. 그리고 하나님이 “욥 네 말이 맞다”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3장 9절부터 18절은 특수한 목적 때문에 인간성 중에서 제일 나쁜 인간성을 콜라주 형태로 모아가지고 쭉 총천연색으로 이렇게 비루한 인간성을 쭉 나열하는데 이렇게 나열하기 위해서 바울이 인용한 성경은 전도서 7장 20절, 시편 14편, 시편 5편, 시편 140편, 이사야 59장, 시편 36편 등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죠? 바울이 구약성경에서 인간성을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구절 일곱 군데 또는 여덟 군데를 찾아가지고 쭉 나열했어요. 여러분이 이런 본문을 조심해서 읽어야 되는데 인간성에 대한 원리적인 절대적인 하나의 선언이라고 보면 안 되고 바울이 자기랑 논쟁하는 할례주의자들과 논쟁을 하기 위해서 특수하게 동원한 논리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이런 본문 읽고 갑자기 원죄론에 빠지면 안 됩니다. 성경에서 바울은 원죄론을 많이 강조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을 행할 의무를 아주 강조하면서 원죄론이라고 할 만한 그것까지는 안 갔어요. 마가복음 7장에 보면은 예수님은 인간 안에 악이 가득 쌓여있다는 말은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원죄론에 빠져가지고 이렇게 비관적으로 인간성을 묘사하지 않고 우리 예수님은, 인간 안에 하나님의 율법을 행할 능력이 있음을 전제하면서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할례받은 유대인들, 자기랑 논쟁 중인 이 특수한 부류들, 율법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자랑하는 이런 특수한 유대인 랍비들, 이런 자들과 논쟁을 하면서 약간 비관적인 인간성에 관한 이론을 펼치는 겁니다. 제가 볼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첫째, 사도 바울의 언어를 가지고 성경 전체의 입장을 다 대변할 것처럼 하지 말 것, 두 번째로 바울이 지금 인간성에 대해서 심히 비관적인 이론을 펼치는 이 본문을 가지고 인간성에 대한 성경의 최후 발언인 것처럼 말하지 말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성에 대해서 다양한 입장을 개진하고 있고, 또 어거스틴의 원죄론을 믿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얼마든지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어거스틴의 원죄론을 너무나 교조적으로 경직되게 인용하여 하나님이 우리 인간 안에 원래 새겨주신 하나님의 형상의 고귀함,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으로의 인간 모습, 이런 걸 지나치게 멸시합니다. 여러분, 원죄론을 가지면 제일 왕노릇 하는 사람이 목사죠, 원죄론을 강조하면 목사가 제일 왕노릇 합니다. 목사가 보통 세상 사람들에게 샅바를 잡고 넘어뜨리기 할 때 이 원죄론을 많이 쓰는데 제가 볼 때는 꼭 그럴 필요 없습니다. 바울은 원죄론을 말하고, 신약성경의 일부는 원죄론을 말하지만 성경 66권 전체로 말할 때는 원죄론과 욥기 같은 견해가 병치 되어 있다, 이 정도로 우리가 이해하면 됩니다. 다만 바울은 오늘 좀 지나치다고 싶을 만큼 인간성에 대해서 비관적인 평가를 많이 하는데 그 이유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입을 막기 위해서 입니다. 어떤 입을 막기 위해서요? 할례받은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하면 얼마든지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율법을 행하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최은혜 교우님, 에스겔서 20장 11절과 21절 좀 읽어주십시오. 그러니까 지금 바리새인들, 사도 바울의 대적자들이 인용했던 성경구절입니다. 그 다음에 백성암 교우님 옆에 있습니까? 레위기 18장 5절 좀 읽어주십시오. 이 세 구절이 바울의 적대자들이 붙잡았던 말씀입니다. 그다음에 김은자 집사님 신명기 30장 11절로 16절이요. 이 구절이 바리새인들이 바울을 비판할 때 썼던 말입니다. 자 읽어주십시오. 에스겔 20장 11절과 21절 두 구절이요.
11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
21 그러나 그들의 자손이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지켜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따르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더럽힌지라 이에 내가 이르기를 내가 광야에서 그들에게 내 분노를 쏟으며 그들에게 내 진노를 이루리라 하였으나
예,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례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고 주셨지 율례에 대해서 이렇게 비관적으로 말하면서 율법이 마치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대적자들이 했던 말입니다. 그다음에 레위기 18장 5절요.
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예, 이게 바로 바리새인들, 바울의 적대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다음에 신명기 30장 11절부터 16절이요.
11 내가 오늘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생명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이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예, 제가 마지막 하나 더 읽습니다. 신명기 11장 26, 27절입니다.
26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27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그러니까 유대인 랍비들, 바울의 적대자들은 아담하고 똑같은 입장이라는 거예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동산 중앙에 놓았지만 선과 악을 날마다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선을 선택할 능력이 아예 없다, 인간은 반드시 악한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로마서 7장 21절에 나오는 거거든요. 바울의 적대자들은 인간에 대해 이렇게 비관적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이것을 인간성 일반에 관한 교리로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의 자신감을, 바리새인의 이 율법적인 준행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렇게 쓴다고 봐야지 진짜 바울이 인간성을 이렇게 부정적으로만 봤냐 그것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마무리를 지으면 바울은 모든 입을 막고 인간이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유대인들과의 논쟁 맥락에서 이런 비관적인 인간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바울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켜서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으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율법은 알고 보니까 죄를 깨닫게 할 뿐이다.” 이것은 굉장히 율법에 대한 어떤 축소된 해석인데 결과적으로 경험해 보니까 율법은 죄를 깨닫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 우리를 착하게 만들지 못했어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러니까 제일 마지막 단계에서 애를 쓴 사람이 그렇게 할 수는 있는데 처음부터 초를 치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명기, 레위기와 모든 성경이 전부 다 잘 못 된 거거든요. 예수님도 이 말씀을 듣고 행하라고 그랬는데 행할 능력이 없는 사람한테 예수님이 행하라고 했으면 예수님도 잘 못 된 거죠. 그러니까 바울과 예수님 사이에도 이런 점에서는 긴장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모두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하심을 입을 수 있다는 과도한 자신감에 처한 바리새인이라면 오늘 본문은 굉장히 우리에게 각성을 줍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가지고 모든 인간을 이해하는 유일한 금과옥조가 되게 해서는 안 되겠다, 이렇게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로마서 복음을 옳게 깨닫게 하셔서 날마다 하나님 율법법을 준행할 능력을 덧입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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