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서의 율법과 삭개오 누가복음서의 삭개오 단락은 전통적으로 죄인의 회개 를 나타내는 단락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것은 잃어버린 자 및 억눌린 자 에 대한 누가 기자 특유의 관심을 삭개오의 직업에 연결시켜, 본 단락 역시 잃어버린 자의 구원 을 나타내는 것으로 상정한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삭개오가 회개를 하고 있다고 할 만한 단서를 제시해 주지 않고 있으며, 삭개오가 회개한 후 보상의 결심을 말하는 것으로 학자들이 해석한 19:8이나, 예수가 그의 구원을 선포한 것으로 파악한 19:10은 그들의 주장을 지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삭개오 단락은 예수와 죄인이 교제하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비난하는 것에 대하여 의인 의 전형인 삭개오를 내세워 그들을 반박함으로써, 이 교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즉 19:10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것 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라는 전통적 번역이 아니라, 공동체 안의 깨어진 교제 (to. avpolwlo,j)를 찾아 회복시키러 (sw/sai) 온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해석은 누가복음서가 단지 예수 시대의 사건만을 보도하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누가공동체라는 대상을 고려하며 저술한 것이라는 전망 하에서 가능하다. 소위 죄인 과 함께 하는 누가공동체의 식탁교제를 정죄하는 바리새인의 준거틀이 율법 이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들은 식탁교제의 문제를 주로 외부 공동체와의 대립 양상으로 받아들였으나 식탁교제의 정당성이 진정으로 제시될 필요가 있었던 대상은 공동체 내부에서 이 관행을 납득하지 못하는 이들이었으며, 누가 기자는 율법적인 견지에서 공동체 밖의 바리새인들을 능가하는 세리를 부각시킴으로써 이들의 불만을 무마하고 있다. 누가공동체의 구성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세리 그룹들과 함께 해 왔지만 온전히 화합하지 못하던 공동체 내부의 율법적 그룹에게, 누가 기자는 이 교제에 대한 가치 체계 상의 정당성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누가공동체에 있어 율법의 문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인종적 인 것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준수를 강조하는 율법적 그룹과 세리, 창기 등 비율법적 그룹 사이에도 첨예한 문제였다. 누가 기자는 이처럼 다양한 공동체의 구성원이 분열하는 상황을 화합하는 양상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공통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도록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핵심어: 누가공동체, 삭개오, 세리, 율법, 율법적 그룹, 비율법적 그룹, 분열, 공존, 식탁교제, 소유 헌납. I. 서 론 문제 제기 및 연구 목적 성서 본문에 대하여 획일화된 해석은 전통 이라는 이름 하에 더욱 공고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전통적인 성서 이해가 신앙의 골격을 이루고 교회의 근간을 유지하고 있음은 간과할 수 없는 점이겠으나, 다른 본문들이 이미 드러내고 있는 사항을 그 특정 본문 역시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서가 가지고 있는 다의성과 본문의 독특성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전이해에 근거하여 성서가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서가 말하고 있는 메시지에 따라 우리의 믿음과 실천이 규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기존의 이해에 대한 비판적인 점검은 언제까지나 필요한 작업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은 주로 잃어버린 자의 구원 내지는 죄인의 회개 로 이해되어 온 삭개오 단락(눅 19:1-10)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삭개오 단락을 죄인의 회개 로 이해하는 학자들의 해석은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개역)는 구절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이것을 15장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잃은 자 의 모티브와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였다. 이같은 전망은 19:8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개역)라는 진술을, 회개 후 결단의 표시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발견된다. 첫째, 삭개오가 자신의 회개의 표시로 구제를 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이해되는 19:8의 진술은 미래형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형(di,dwmi, avpodi,dwmi)으로 쓰여 있다. 결국 이 말은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밑에서 다루겠지만 전통적인 이해는 19:10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둘째, 삭개오는 예수가 자신의 초청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반응으로서 재산을 나눠주고 토색한 것을 갚겠다 고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와 자신이 함께하는 것을 수긍하지 못하는 뭇사람들의 힐난(19:7)을 듣고 이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보도된다(19:8). 선입관이 배제된 채 이 기사를 읽는 독자는, 만일 이 반대자들의 질책이 없었더라면 삭개오는 단지 예수와 식사를 같이하는데 그치고 말았을지 모른다는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셋째, 삭개오 단락을 죄인의 회개 및 구원 에 대한 것으로 보는 해석은 바로 앞 부자 관원 단락(18:18-30)과, 재산 헌납의 기준이 공정하지 않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소위 율법을 다 지켰다는 부자청년은 재산의 전부를 다 바쳐야 하고(18:22), 소위 죄를 지었다는 삭개오는 재산을 절반만 바치면 충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19:8). 부유한 율법적 그룹의 유대인 독자가 이 기사를 본다면 삭개오의 위법 행위를 먼저 생각할 것이므로 이를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잃은 자를 찾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면 차라리 부자 라는 언급없이 소개하는 편이 누가복음서의 전체 기조에 더 잘 부합되었을 것이다(1:53; 6:20; 12:15; 16:13). 넷째, 19:10에서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개역)는 원문이 h=lqen ga.r o` ui`o.j tou/ avnqrw,pou zhth/sai kai. sw/sai to. avpolwlo,j 로 되어 있다. 곧 원문은 잃어버린 자 가 아니라 중성 단수 명사, 잃어버린 것 (to. avpolwlo,j)이다. 유사하게 잃어버린 사람 을 언급하는 15:24, 15:32의 두군데 모두 이것을 남성(avpolwlw.j)으로 처리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누가의 기록은 특기할 만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19:10은 전면적으로 그 번역을 검토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이 19:10을 당연히 잃어버린 자 를 구원하다 로 해석하는 것은 15장 등에 의한 선입견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다섯째, 삭개오는 회개의 징표로 이해되는 바,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다. 본문에는 삭개오가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보고자 했다고 진술되어 있을 뿐 회심에 대한 어떠한 진술도 나타나지 않는다. 환언하면 본 단락에는 죄인이 회개한다고 할 만한 요소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23:39 이하에서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있고(23:40f.),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으며(23:42), 예수에 의해 구원의 선포를 약속받고 있다(23:43). 또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예수의 발을 닦았던 여자 죄인은, 죄가 있음이 예수에 의해 인정되고(7:47) 죄사함이 선포되는(7:48, 50) 등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언급이 있으나 삭개오의 경우는 이런 요소가 전혀 없다. 결국 삭개오 단락을 잃어버린 자 , 곧 죄인 의 구원으로 이해하는 해석은 많은 무리가 따른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전통적으로 죄인의 회개 로 이해되어 온 삭개오 단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여기에 담긴 누가 기자의 의도를 밝히고, 누가복음서에 나타난 율법 및 누가공동체의 내부 정황을 규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연구 방법 및 연구 범위 성서신학 분야에서 지금까지 개진된 여러 연구 방법론들은 나름대로의 장점과 기여하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전망 및 시각을 택했느냐 에 따라 그 해석의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지기 때문에, 각 연구자들은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앞서, 자신이 원용하고 있는 연구 방법론이 해당 주제에 가장 적절함을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환언하면, 단지 자신이 사용할 방법론을 미리 못박아 전제한 후, 다른 방법론을 택해 동일 본문을 해석한 학자들의 상이한 결론을 피상적인 수준에서 비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뜻이다. 삭개오 단락에 대하여 본 논문이 취할 연구 방법론을 선택하는데 있어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 누가 기자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중요한 보도에 앞서, 삭개오 단락을 배치한 것은 독자들의 어떠한 문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는가? 이러한 시각은 누가 기자가 무시간적 정황 가운데 복음서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일군의 독자들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저술 활동을 펼쳤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부언하면 누가 기자의 의도를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가 암시된 독자(implied reader)로 삼고 있는 대상들의 정체와 정황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 둘째, 삭개오 단락의 문제 상황은 삭개오의 죄와 회개 라는 가치판단 자체보다는 19:7에서 드러나듯 그에 대한 예수의 격리를 사람들이 요구하는데에서 먼저 비롯되지 않는가? 여기에서 기존의 연구가 삭개오 개인의 죄인됨 에 관심을 기울인 것과는 달리, 누가 기자가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는 예수 시대가 아니라 저작 시점의 특정 독자들이 서로 갈등하고 있는 상황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전망은 삭개오 단락에 대한 기존의 해석과는 다른,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도록 한다. 바로 이 독자들을 사회적 상호 작용 하에 놓여 있는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며, 이 가운데 누가 기자는 예수 라는 권위를 통해 독자들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II장 (1)절에서 언급하겠지만 고대 사회에서 세리 그룹을 배제하기 위한 가치체계는 율법 이었다. 본 단락이 이 율법에 의해 설치된 장벽에 대처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시각은 신학적 인 관심 뿐만 아니라 사회학적 인 지평에 이르기까지 살필 수 있게 해준다. 곧 신학적인 관점에서 율법 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에 주로 초점이 맞춰진다면, 사회학적 인 관점에서는 인간 사이의 문제 에 더 무게가 실리게 된다. 따라서 본 논문은 삭개오 단락의 의도 및 그 대상이 되는 배후의 독자들을 규명하는데 있어 사회학적 성서해석 을 그 방법론으로 채택하고자 한다. 사회학적 성서해석은 역사비평적인 범주에 해당되는 양식비평이나 편집비평과는 그 관심을 달리한다. 양식비평이 본문의 원전승이 생긴 삶의 정황을 추적하며 복음서의 저자를 수집가 로 보고, 편집비평이 그를 특별한 신학적 관심을 가진 편집가 로 이해하며 본문의 진술 상황을 추적하며 각 단락들의 역사적, 신학적 내용을 질문한다면, 사회학적 비평에서 복음서 기자는 공동체의 대변인으로서 특정 사회적 세계를 공유하고 있는 무리들과 긴밀한 상호 영향 아래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으로 이해된다. 즉 신약성서의 진술 이면에 놓여있는 인간들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추적하며, 그것을 텍스트의 주요한 산출 배경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서중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학적 신약해석이란 신약성서 본문에 나타나는 사상들이나 행위들을 그 본문 배후를 이루고 있는 팔레스틴이나 로마 제국 사회라는 폭넓은 사회적 준거틀 속에 위치시키거나,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작은 단위의 사회적 준거틀 속에 위치시킨 채 해석하려는 하나의 전망 혹은 상상력의 한 형태이다. 따라서 사회학적 신약 해석의 관심은 성서 본문의 신학적, 윤리적 진술들 자체에 있지 않고, 그 진술들과 그것들의 사회적 상황들과의 관계에 있다. 이것은 단지 문서가 생성되기까지의 정황을 밝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상호 관계는 한 주체만을 가지고는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키(H. C. Kee)의 말대로 본문 이면에 놓여 있는 논쟁의 다른 주체를 찾아내고 그 상황을 밝히는 주석작업 이 필요하고 하겠다. 곧 이러한 전망을 본 연구 주제에 적용해 보면, 누가 기자가 긍정적으로 채색하고 있는 삭개오 란 인물이 준거틀로 기능하는 집단은 누구이고, 이들이 대립하고 있는 대상 및 상황은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바로 누가공동체의 사회적 세계 안에서 이 단락의 의미는 보다 분명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망 하에서는 사회 집단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문제가 복음서 기자에 의해 답변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므로, 기존의 역사비평적인 전망보다 폭넓은 동기와 상황을 상정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만일 삭개오 단락을 양식 비평의 전망에서 본다면 그 양식은 순수 인물 전설 이며 이 사화에는 역사적 회상 이 들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시각 하에서는 본 단락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가령 본래 9, 10절은 8절이 아닌 7절에 연결된다는 해석 등 를 규명하는 공헌점이 있지만 누가가 삭개오 사화 를 단순히 수집한 인물로 받아들인다는 한계가 있다. 이 전승의 원래 생성 정황에 대한 분석은 가능할 지라도 복음서 기자가 왜 많은 전승 중에서 하필 이 사화를 택해서 이렇게 수집, 위치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편집 비평은 삭개오 단락을 예외없이 죄인의 회개 로 본다. 이 전망 하에서 그 저작 의도를 분석할 경우 복음서 기자로서 누가에 비중을 두어 연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누가 이해는 그가 전승을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초점을 두어 분석함으로써 누가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다루었다는 측면에서 기여한 바가 적지 않으나, 이것은 누가가 오로지 신학적 관심에만 근거하여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분석이다. 그러나 신학 이라는 개념만으로 누가가 당면했던 다양한 현실과 이에 따른 저작 의도를 다 담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볼 때 삭개오 기사를 전적으로 잃은 자의 구원 으로 이해하는 것은 방법론상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본 논문의 본론은 3장(II, III, IV)으로 구성되어 삭개오 단락을 중심으로 누가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율법에 대해 어떠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II장은 19:1-6을 주석함으로써, 누가공동체 안의 다양한 사회적 구성원과 복음서 저술 당시의 내부 갈등 상황을 규명하고자 한다. III장은 19:7-8의 사항을 반영하며, 삭개오를 새로운 인물상으로 부각시키는 누가의 의도를 파악할 것이다. IV장은 19:9-10에 대한 해석으로서 누가가 공동체의 내분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려 했는지를 종합적으로 제시하려 한다. 연구사 및 연구 동향 ① 삭개오 단락에 대한 연구 i ) 삭개오의 구원 이라고 보는 해석 삭개오 단락을 이와 같이 해석하는 학자들은 여기에 모두 나열할 수 없을만큼 많다. 이 대부분의 연구들은 삭개오 단락을 죄인의 회개 로 이해하였다. 이 해석은 극도로 부정적인 직업으로 간주되어 온 세리직 과, 본 단락에서 매우 긍정적인 채색되는 삭개오라는 인물상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세리 등 소외받던 계층에 대한 누가의 특별한 관심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의 난점은 그 해석자들 자신에 의해서도 감지되었다. 가령 크레머(J. Kremer)는 삭개오와 예수의 만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짧은 이야기는 죄인들에게 향하는 예수의 상을 적절하게 전달해 준다. 이 죄인들은 경건한 자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키는 사람들이다. 예수가 이미 삭개오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 등 이 장면은 부분적으로는 비현실적인 것이다. 예수 말씀이나 상황에 그다지 적절치 않은 삭개오의 해명의 요점은 이 단락이 본래 경구(Apophthegma)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크레머의 해석은 전통적인 범주를 뛰어넘지는 못하고 있으나 전통적인 이해가 본문의 구성과 정황을 적절히 규명하지 못한다는 점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를 만나 그가 구원 을 받게 된 것이라면 왜 집으로 모시며 소위 회개 의 결심을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비난에 직면하고서야 이 말을 하는지 어색한 여운을 남긴다. 크레머는 이것을 원전승의 편집 과정의 탓으로 돌리고 있으나, 이 전망 하에서 왜 누가는 전승구들을 매우 어색하게 연결시켜 놓았는지 해답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의도에 대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다. 동일하게 본 기사를 죄인의 회개 로 보더라도, 누가 기자의 의도가 어떤 대상 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학자로는 탄네힐(R. C. Tannehill)이 있다. 군중이 예수가 삭개오와 교제하는 것에 반대했을 때, 그들은 삭개오가 그렇게 고립될 것을 주장한 것이었다. 이 반대는 이야기 중에 긴장을 고조시킨다. 독자와 청중에게 삭개오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필요하다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권위의 근원으로부터 강력한 답변이 필요했다. 탄네힐은 누가 기자가 특정 부류의 대상에게 삭개오 교제의 정당성을 제시하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나, 그 지시 대상은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있다.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이 옛날 예수가 죄인과 교제한 것을 달갑게 여기거나 그렇지 않은 문제가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삭개오가 누구의 입장을 대변하는지, 그리고 누가가 이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 대상이 누구였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 죄인의 회개 로 이해하는 해석이 갖는 한계점은 그 자체의 부적절성을 차치하더라도, 삭개오의 구원을 공표하는 것을 통해 누가 기자가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려 했는지 거의 조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전망 하에서 누가의 관심은 신학적인 것으로 제한될 뿐 그 이상의 해석의 여지는 없는 셈이라고 하겠다. ii ) 삭개오에 대한 변호 로 보는 해석 본 단락이 전통적인 견해와는 달리 삭개오에 대한 변호 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소수 학자들이 70년대 말, 80년대 초 등장했다. 이 주장을 가장 처음으로 제기한 학자는 화이트(R. C. White)이다. 그는 자기 주장의 근거를 주로 19:8의 현재형 동사에서 취한다. 내가 준다 라는 말은, 내가 줄 것이다 나 이제부터 내가 준다 및 이제 내가 주고자 한다 는 말로 번역되어 왔다. 이것은 현재형으로 미래형을 대신하여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번역에 대한 단서를 우리가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는가? 화이트와 몇몇 학자들은 삭개오의 진술을 현재 행위로 보고 있다는데서 본 단락을 삭개오에 대한 변호 로 보는 주장을 강화하려 한다. 이들 주장의 문제점은 아래에서 상술하겠지만, 다음과 같은 화이트의 진술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비난에 대한 변호와 삭개오의 명예 회복을 보게 된다. 구원은 왔다 그는 아브라함의 진정한 아들이다 라는 언급은 그가 착취자요 이스라엘의 특권에서 탈락한 사람이라는 비난에 대한 답변이 된다. 화이트는 19:9의 번역에서 오늘 이라는 말을 생략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말이 자신의 주장에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삭개오의 진술을 들은 예수가 그날에야 (sh,meron) 삭개오의 구원 이 이뤄졌다고 선언하는 것은 매우 어색하다. 왜냐하면 19:7에서 모든 사람 의 불평은 삭개오가 죄인 인데도 왜 교제하느냐에 모아지고 있는데, 삭개오의 말을 들은 후, 그것도 오늘에야 구원받았다 고 선포하는 것은 불평하는 사람들에 대한 효과적인 반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삭개오가 선행을 하고 있었어도 그 날 이전에는 죄인 이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논리적이지도 않다. 이것은 19:9, 10의 진술을 구원 으로 해석하는데서 오는 문제이다. 화이트와 유사한 견해를 보인 학자는 피츠마이어(J. A. Fitzmyer)이다. 그는 di,dwmi라는 동사가 현재 행위를 나타내는 말이고, 미래적인 말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피츠마이어 자신도 19:8의 avpodi,dwmi를 현재형으로 번역하는 것은 어색하다며 주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기사가 결정적으로 무엇을 의도한 것인지를 명확하게 제시하는데는 미흡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또한 i )군 학자들의 견해 역시 어느 정도 수용하고 있어 변호 를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 보기도 어렵다. 이후 삭개오의 변호 를 주장한 학자는 미첼(A. C. Mitchell)이다. 미첼 역시 자기 주장의 핵심 논거를 19:8의 동사로 삼고 있는데, 그는 9절의 구원 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누가에 있어 구원 (swthri,a)은 1:17에서처럼 죄의 용서만을 의미하는 것 이상이다. 이 구절은 1:69의 다윗적 메시야를 언급하며 1:71의 적으로부터 구함 받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쪽도 죄나 회개와 관계가 없는 것이다. 미첼의 주장은 불평하는 모든 사람 을 대적자로 보고, 삭개오가 그들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말한다는 점에서 참신한 해석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는 5:27-32 및 15:1-32와 이 단락을 비교해 볼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등장하지 않고 레위의 기사처럼 분명한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본 단락에는 식탁교제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무리한 추론을 시도한다. 이것은 삭개오가 죄인으로서 식탁교제에서 함께 한다는 모티브를 탈색시키고 삭개오를 변호하는 것 이라는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5, 15장을 위시한 여러 곳에서 이미 바리새인의 반대 모티브를 언급한 후 모든 사람 (pa,ntej)을 일컬을 때는 당연히 율법적 그룹을 포괄적으로 가리킨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공동체원 전부를 가리킬 수 있을만큼 광범위한 지시어를 놓고 이들을 삭개오의 대적자로 처리해 버리는 것은 누가공동체가 세리로만 구성되었다는 가정 하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더구나 삭개오 단락에 밥먹는 장면이 없다고 해서 식탁교제가 아닌 것으로 보는 그의 추정은 식탁교제 가 누가복음서에서 왜 중요한지 자체를 무시하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본 기사를 삭개오에 대한 변호 로 해석한 마지막 학자는 라벤스(D. A. S. Ravens)이다. 그는 삭개오를 간접세를 걷는 세리(toll collector)로 보면서 그들이 회개할 경우 자기의 재산으로 지인(知人)들에게 보상하고 나머지는 공공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했으므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다는 것은 이 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가능하지 않다. 세리가 회개했다면 토색한 것을 갚기 전에 세리직부터 포기해야 했으나 예수를 만날 당시에도 그는 세리였기 때문에(19:2), 회개한 후에 이 보상 행위를 하고 있었다는 그의 주장은 견지될 수 없다. 결국 이 기사를 삭개오에 대한 변호 로 보는 해석은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화이트에 대한 비판에서 언급했던 바, 삭개오의 선행과 관련지어 왜 오늘 구원이 일어난 것으로 처리했는지를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상기 학자들의 주장대로 삭개오를 결국 잃었던 자 로 이해해야 한다면(19:10), 그들은 누가복음서 안의 잃은 자 가 과연 파격적인 선행을 하고 있었어도 율법적인 견지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사람이었는지를 입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가 15장에서 등장하는 소위 잃은 자 는 율법적 견지에서 명백한 죄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리새인들이 죄인 으로 정죄하는 세리 (15:1)는 율법적 그룹이 비난하는 항목들(15:13,30)에 대해서 반박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를 겸손히 수용하는 사람이다(15:17-20; 18:13). 오히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낯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8:14)의 언급을 토대로 추론해 볼 때, 누가 기자가 말하는 잃은 자 는 스스로를 변호하는 삭개오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삭개오의 행적이 현재 하는 행위라면 그를 잃은 자 로 보기는 어렵다. 셋째, 이 학자들의 견해들에서 삭개오가 정죄받는 것이 세리직 때문이라면, 단순히 토색한 것을 갚아주거나 재산을 나눠주는 행위를 통해 과연 적대자에 대한 변호가 이뤄지겠는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삭개오가 스스로를 변호하는 것이 맞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세리이다. 삭개오가 변호하려는 것은 무엇인지 여전히 불분명한 상황에서 죄인 이라는 그들의 비난이 불식될 수는 없다. 그들의 연구는 변호의 과정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 삭개오 기사를 변호 로 보는 학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는 전혀 답변할 수 없을 것이다. 이 학자들의 논지는 오히려 이들을 비판하고 있는 i )군 학자들보다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앞에서 언급한 2 갈래의 연구 동향은 모두 세리가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누가공동체 안에서 이 기사가 갖는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갖는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세리 등 소위 죄인 과 교제하는 관행을 표상하는 바, 누가공동체의 식탁교제 라는 관점으로 볼 때 삭개오 단락은 전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바리새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식탁교제가 첨예한 문제가 되도록 기능한 정결법 을 살펴보고, 식탁교제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 ② 누가공동체의 식탁교제에 대한 연구 누가공동체의 식탁교제는 주로 공동체 밖의 유대교, 그 중에서 특히 바리새 공동체 그룹과의 관계 가운데 부각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 점은 엘리엇(J. H. Elliott)에 의해서 지적되었다. 누가 행전에 따르면, 성전과 관계되어 있고 모세의 율법 및 바리새인의 구전 전승에 의해 합법화된 정결 체계는, 예수와 그 추종자들의 체계와 피할 수 없는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은 목스네스(H. Moxnes)에도 발견되는 부분이다. 누가는, 유대 사회가 식사에 관한 경계선(boundaries)에 있어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기술한다. 가장 잘 알려진 예는 15:2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들을 받아주시고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불평하는 것이다. 5:30에서도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한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유대 사회의 거룩함을 위협하고 부정한 외부인을 식탁교제에 끌어들임으로써 금기 사항을 깨고 있다. 물론 목스네스를 위시한 학자들 중 누가-행전의 저작 시점을 고려하여 이 문제를 다룬 학자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30년대 예수와 바리새인의 장면을 통해 누가 기자가 궁극적으로 전달하려 했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없다면 이것은 결국 예수가 왜 바리새인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분석하는 수준에 머무는 추정이라고 하겠다. 이에 반해 에슬러(P. F. Esler)는 식탁교제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첨예한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누가 행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식탁교제가 초대 교회의 열띤 논쟁의 주제였고 누가 당시에도 그러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몇몇 단락들이 있다. 그의 연구 범위가 누가-행전 이라는 것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에슬러는 식탁교제의 범위를 사도행전의 문제로 제한시켰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그는 사도행전 15장의 장면 등을 주요한 주제로 취급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서의 식탁교제 유대인들끼리도 함께 자리하는 것이 문제되었던 를 누락시킨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식탁교제의 문제를 바리새 공동체와의 관련 하에 다루지 않고 누가공동체 자체만의 문제로 처리하는 시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공동체의 결집(integration)을 꾀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수준에 머문다. 이러한 차원에서는 공동체 라는 개념을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모인 조직 의 개념 이상으로 부각되지 않기 때문에, 미시적인 관점에서 세부 집단간의 관계를 조망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 및 그 대상이 되는 공동체는 단순 조직 이 아닌 인간 의 모임이기 때문에, 식탁교제라는 민감한 관행을 구성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에 대한 연구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누가공동체 내부 역시 유대인들이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공동체 외부와의 첨예한 문제가 내부적으로는 완전히 정리된 문제였다고 가정하는 것은 매우 희박한 개연성을 가지는 추정일 것이기 때문이다.전술한 내용을 정리해 보면, 누가공동체의 식탁교제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이 식탁교제를 바리새 공동체 및 공동체 밖의 유대인 및 이방인과의 관계 가운데 파악했다는 점에서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환언하면, 누가공동체 내부의 율법적 그룹들이 이 식탁교제에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들 연구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I. 율법의 장벽과 죄인 삭개오 율법에 의해 차별받는 죄인 세리 복음서에 등장하는 세리 단락에는 이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자들이 죄인 으로 묘사되며, 예수가 이들과 가까이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이 제시된다. 세리는 왜 죄인이며, 이 세리에 대한 논의가 율법 의 문제와는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 세리의 죄인됨에 대한 논쟁은 페린(N. Perrin)과 예레미아스(J. Jeremias)에 의해서 촉발되었다. 페린은 세리들이 죄인으로 취급된 것은 의례적(儀禮的, ritual)인 것 외에도 그들이 이교도들과 접촉하며 이방 압제자들에게 고용된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서 예레미아스는 세리들이 자신들을 부정직으로 이끌게 만드는 직종에 종사했기 때문이라고 논박한다. 양자의 논리는 모두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세리들을 바리새인의 눈으로 보느냐와 일반 백성들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이유는 달라진다고 주장하는 예레미아스의 견해는, 세리에 대한 연구 자체가 복음서에 비친 세리像을 규명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측면에서 부적절하다. 세리는 복음서에서 정결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죄인 이라 불리우고 있는데, 탈무드에서 보듯 그들의 부정직으로 인한 백성들의 부정적 시각이 없었다면 일반화시킬 수 없었을 개념이기 때문이다. 특히 복음서에서 나타나고 있는 세리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예레미아스가 본 것처럼 바리새인이나 일반 백성의 시각 중 하나를 택한 것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긴밀하게 뒤섞여 있다. 공관복음서는 단지 바리새인들과의 율법적 논쟁을 위해 작성된 것이 아니라 유대적 가치관 아래 주변 세계와 충돌하고 있던 공동체를 위한 글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삶의 저변에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던 일반 백성들의 가치관을 배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세리는 율법적인 차원과 일반 대중의 부정적인 정서가 맞물려, 종교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측면에 이르기까지 죄인 이라는 이름 하에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실제로 이 세리들이 담당하고 있었던 일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도나휴(J. R. Donahue)는 주전 44년을 기점으로 직접세(tax)를 걷는 세리(publican)의 일은 로마 총독의 직접적인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주전 47년 시이저는 유대인의 과세 제도에 중대한 수정을 가했다. 폼페이의 징수 체제를 따르기는 했지만 그는 유대인들에 대한 세금을 줄였고, 안식년에는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중략) 주전 44년의 칙령에서는 더 나아가 직접세 세리제도(publican system)가 폐지되어 세금의 수령은 행정장관이었던 힐카누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중략) 주전 44년 이후에 고전적인 징수제는 팔레스틴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도나휴의 연구가 괄목할 만한 이유는, 세리에 대한 그 전의 연구들이 집중적으로 조명하지 못했던 바,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세리 는 주전 44년 이후 없어졌던 tax collector(즉 publican)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로마로부터 세금을 걷을 권리를 샀던 toll collector였고, 이들은 간접세만 징수했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신약성서의 모든 telw/nai는 toll collector로 번역해야 옳으며 이들은 개인적으로 할당분을 채우기 위해서, 또 자율적인 징세를 통해 자신의 부를 축적해 나갔다는 것이다. 도나휴의 연구는 세리에 관한 역사적 상황을 설득력 있게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헌하고 있으나, 문제는 세리라는 직업군의 다양성을 단지 개괄적인 역사 흐름 속에 묻어버렸다는데 있다. 과연 당시의 세리들이 모두 일관되게 간접세를 걷는데만 종사했는지, 또 이들의 부정직한 행위가 구체적으로 복음서에 어떤 양상으로 반영되어 있는지를 밝히는데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한편 여기에서 한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은, 당시 세리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던 관행의 원인과, 세리들을 죄인 으로 규정하기 위하여 필요했던 외형적인 명목상의 근거는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전자는 세리들이 외세와 결탁하여 동족들의 혈세를 징수한 것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고, 후자는 그 반감을 실질적인 구속력을 갖게 하기 위해 가치 체계를 사용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율법 이라고 할 수 있다. 환언하면, 종교적인 영역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율법이 가지는 기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측면은 단지 세리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가 누가의 율법관이라는 주제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누가복음서의 율법에 대해서는 그간 많은 연구들이 있었지만 그 초점은 주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문제에 맞춰져 왔다. 이러한 현상은 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이라는 연작(連作) 형식 때문에, 이후 사도행전에서 중요한 현안이 되는 이방인 선교와 율법의 문제를 중요하게 보는 저간의 관행에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하나의 누가공동체라 할지라도 두 문서가 동일한 상황과 목적을 가지고 저술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따르기 때문에 양자는 섬세하게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누가복음서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취급해야 하는 식탁교제 는 예수가 죄인 들과 함께 자리한다는 문제 정도로 제한될 것이 아니라,예수가 율법을 어떻게 보느냐라는 차원에까지 확대될 수 있는 것이므로 소위 죄인 들로 간주된 세리, 창기, 강도, 부정한 질병에 걸린 환자 등에 대한 문제는 반드시 언급해야 할 사항이라고 본다. 그 중에서 가장 간과하기 쉬운 대상은 세리 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들이 경원당하고 있었던 이유에는 상당히 복합적인 요소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정결법 이라는 율법 때문에 죄인 으로 간주되는 것과 누가의 율법관을 연결시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1세기 말 이미 유대교의 핵심분파로 남았던 바리새파와 세리는 공존 불가능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2세기의 랍비 문헌은 바리새인들과 세리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골이 패여 있음을 드러낸다. 바리새인 조합(guild)에 가입하려는 telw,nhj는 자기 직업을 포기하고 속였던 모든 사람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 주어야 했다. 이러한 측면은 세리에 대한 멸시가 단지 예수 시대에만 발견되던 관행이 아니라, 1세기 후반 이후에도 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누가복음서의 저작 시기로 추정되는 80년대까지도 이것은 가장 현저한 사회적 장벽의 한 실례(實例)로 제시할 근거가 마련된다. 아래 (2)절에서 상론하겠지만 공관복음서에만 등장하는 telw,nhj 란 단어는 누가복음서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고, 가장 긍정적으로 채색된다는 점은 누가공동체에게도 세리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방증(傍證)한다. 율법에 대하여 상당히 보수적으로 보이는 언급은 누가가 이 공동체 내의 율법주의 성향을 가진 멤버들을 고려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들이 세리 그룹과 장벽을 쌓았을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삭개오와 누가공동체의 구성원 앞서 말한 대로 세리들은 사회적인 장벽에 갇힌 상태에 있었고 주변의 멸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서에 반영된 예수와 세리의 관계는 어떻게 규명될 수 있는가? 이미 예수가 존재하지 않던 80년대 누가공동체의 현실에서 각 구성원은 예수를 핵심 준거틀로 삼는다. 사회학적으로 말하면 누가의 예수는 누가공동체 자체(= 준거틀)이다. 가령 11:42이하에서 바리새인과 첨예한 대립을 나타내는 예수의 과거 모습은 현재 바리새 공동체화 대립하고 있는 모습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누가공동체는 현재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투를 과거 예수의 모습을 회상하며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외부와의 관계 가운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 내부 안의 긴장관계와 대립의 해소를 위해서도 긴요한 것인데, 이 경우에 있어서도 가장 궁극적으로 제시되는 모델은 바로 예수라 할 수 있다. 만일 누가공동체 안에 사회적 신분에 있어서 차별받는 인물군이 과거 예수와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면 이것은 현재 그들이 받고 있는 차별이 정당하지 않음을 제시할 수 있는 근거가 되며, 이 현실을 통제하는 규범으로 기능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갈등 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는 바, 삭개오가 예수에게 나아갈 수 없는 이유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본문에 드러나는 이유는 2가지로서, 먼저 삭개오 자신의 키가 작은 것(19:3c)과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것(19:3b)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유가 누가공동체에게 어떤 상황을 의미하는지 추론하기에 앞서 한가지 전제해야 할 것은 본문이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은 바를 해석가의 주관에 근거하여 추정하는 것은 지나친 알레고리화를 범할 소지가 높다는 점이다. 예컨대 삭개오의 키가 작은 것 의 의미를 명백한 근거없이 해석 하는 것은 주관적인 판단에 치우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분명한 것은 예수에게 나아갈 수 없었던 직접적인 요인은 무리들로 인한 (avpo. tou/ o;clou)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키가 작다 하더라도 사람들로 인해 예수가 가려져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는 예수를 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도는 삭개오 단락의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는 소경 기사(18:35-43)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소경은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도움을 청하나(18:38) 앞서가는 자들 은 그를 꾸짖어 멀리하고자 한다(18:39). 마가가 꾸짖은 주체를 관사도 없이 단지 많은 사람 (polloi.)으로 처리한데 반해(막 10:48), 누가는 이것을 앞서가는 자들 (oi` proa,gontej), 즉 앞에서 이끄는 자 로 변경한다. 이는 누가가 공동체 내부의 주도적인 입지를 가진 그룹들을 가리키며 그들이 소외 그룹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비판하는 대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삭개오가 예수에게 나아갈 수 없는 것은 무리들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던 단절 에서 근거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식탁교제에 대한 저간의 논의는 주로 바리새 공동체와 누가공동체 사이의 대립 및 갈등 구도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 연구들이 죄인 들과 함께하는 누가공동체의 양상을 규명했다는 측면에서는 공헌했지만, 그러한 식탁교제를 공동체 내부의 유대적 배경을 가진 멤버들이 어떻게 이해했을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누가공동체의 식탁교제를 비난하는 사람이 공동체 외부에만 존재한다는 가정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예컨대 15:2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외부 사람들의 불만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외부 인물을 빗대어 죄인 을 용납하지 않는 내부의 율법적 인물을 지시하고 있다. 즉 큰 아들의 태도를 비판함으로써 공동체 내부에서 식탁교제를 꺼리는 그룹의 태도를 교정하려는 의도도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삭개오 단락의 반대자들도 동일하게 공동체 내부의 인믈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를 추종하며 예루살렘 입성에 동행하던 이 사람들은 삭개오가 접근할 수 없을만큼 밀접하게 예수를 수행하고 있다(18:39; 19:3). 둘째, 모든 사람 (pa,ntej, 19:7)이란 말은 누가공동체의 식탁교제를 당연히 비방할 외부인(5:30; 7:34f 등) 외에 다른 그룹들이 더 해당됨을 암시하고 있으며, 이들은 내부 멤버 까지 포괄하는 말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셋째, 이 모든 사람 은 바로 이어 19:11에서 비유를 듣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는데, 비유는 제자들에게 하는 교훈으로 이해되므로(8:9f; 12:41) 이 기사는 공동체 내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설득력을 더 얻을 수 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누가복음서의 어떠한 식탁교제 장면에서도 삭개오 단락을 제외하면 초대 나 함께 자리함 , 먹고 마시는 것 이상으로, 예수가 머물거나 쉬기로 하는 식탁교제의 형식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스트(A. A. Just)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가가 머무르다 (meinai)와 초대받다 (katalusai)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예수가 삭개오의 집에서 식사를 한 것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누구의 집에서 밤을 보내는 것은 필연적으로 식사를 했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예수가 삭개오와 식탁교제를 했다는 점을 강조하려다, 이 만남이 누가복음서에 발견되는 일반적인 식탁교제보다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은 간과하고 있다. 소위 죄인과 식사하는 것을 꺼리는 유대인들이 그의 집에서 밤을 보낸다는 것은 더욱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삭개오의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로우이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것이 신적인 계획 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종류의 일반적인 진술은 예수가 집에 머문다 는 것의 의미가 누가공동체의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해서는 면밀히 고찰하지 못했다. 이것은 공동체 내부에서 비율법적 그룹과 형식적으로는 함께 하고 있으나 진정한 교제를 이루지 못하는 율법적 그룹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한 누가 기자의 고안으로 볼 수 있다.공동체 외부에서 보면 율법적 그룹 역시 식탁교제에 참여(u`pede,xato, eivsh/lqen)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부적으로는 화합을 이루지 못한 상태이다. 7절의 진술은 예수가 삭개오의 집에( Para. a`martwlw/| avndri. ) 들어가 있지만( eivsh/lqen ) 아직 둘 사이의 교제( mei/nai, katalu/sai )는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임을 나타낸다. 그 이유는 7절 하반절에서 볼 수 있듯 공동체 내부의 율법적 그룹을 표상하는 모든 사람들 의 질책에서 비롯되고 있다. 만일 이들이 공동체 외부의 인물이었다면 5:30이하와 같이 그들의 주장을 무시하면 충분할 것이나 내부의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불만은 가치체계상의 설명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누가공동체에게 있어 그 구성원에 세리 나 창기 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하고 있는 정도를 토대로 가늠해 본다면, 단지 그와 함께 하고 있는 수준(eivsh/lqen)으로 형상화할 수 있다. 이들이 진정으로 화합(mei/nai, katalu/sai)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현재 공동체 내에서 비율법적 그룹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가치상의 정당성 이다. 삭개오의 현재적 진술(19:8)은 율법적 그룹이 비율법적 그룹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합법화 과정의 일환으로 기능하고 있다.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가 단지 삭개오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정도 이상의 긴밀한 교제(머묾)를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수준이 swthri,a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본문구조 및 누가공동체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swthri,a 의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예수의 머묾 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19:5과 19:6의 정확한 병행 관계를 나타내는 다음의 도식은 그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가 말하는 swthri,a가 삭개오의 집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식탁교제에 근거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누가의 예수는 삭개오의 선행을 보고 그의 집에 머물고자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삭개오를 볼 때부터 이미 교제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위의 본문상의 구조로 볼 때 예수가 삭개오의 집에서 머무는 것 자체가 이미 swthri,a이고 삭개오의 긍정적인 진술은 단지 이 예수가 머무는 것 을 가능하게 한 근거로 볼 가능성이 마련된다. 재언하면, 누가공동체의 중요한 부류를 형성했던 세리 그룹들은 사회적 통념과 종교적 기제가 맞물려 소위 율법적 그룹 에 의하여 멸시받고 있었던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율법적 그룹은 누가공동체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식탁교제를 일종의 관행 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심정적으로는 이에 동조하지 않는다. 이에 누가의 예수는 표면적인 식탁교제보다 깊은 의미의 교류를 할 수 있도록 그 정당성(dei/, 19:5)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당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III장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III. 율법의 정죄와 의인 삭개오 율법을 통해 정죄받는 의인 세리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세리는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공히 죄인 으로 간주되었다. 그렇다면 삭개오 역시 이런 통념에 의거하여 죄인 이었고, 본 단락은 이러한 죄인의 회개 를 나타내는 단락이라고 볼 수 있는가? 죄인 의 전형으로 간주되던 세리, 더구나 그 중에서도 세리장 이라면 더욱더 많은 죄를 저질렀을 것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삭개오의 긍정적 진술은 회개 후의 결단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렇다면 본문을 전통적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삭개오가 예수를 만난 후에야 신앙을 갖게 된 것이라는 복(D. L. Bock)은 19:3에서 예수가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여 라는 구절을 토대로 삭개오가 신앙이 없는 사람이었다 고 주장한다.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석은 우선 정교하지 못하다. 이 구절은 evzh,tei ivdei/n to.n VIhsou/n ti,j evstin 이지 evzh,tei ivdei/n ti,j o` VIhsou/j evstin 으로 되어 있지 않다. 즉 그가 어떤 사람인지 예수를 보고 싶어했다 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며, 이 문장은 삭개오가 예수를 보고 싶어했다 는 사실에 초점을 둔 것이지 예수를 모른다 는 점을 강조한 것이 아니다. 이같은 측면은 첫째, 누가가 19장 3절과 4절에서 예수를 보기를 원하지만 볼 수 없었던 삭개오의 상황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점과, 둘째, 19:5에서 예수가 삭개오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언급과, 셋째, 누가공동체원들은 당연히 예수를 직접 본 일이 없지만 그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뒷받침될 수 있다. 삭개오가 예수와 대면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신앙이 없는 것으로 보도하는 것은 누가공동체원 전체의 신앙적 기반 역시 부인하는 진술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기 이전부터 이미 그에 대한 말을 듣고 알았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삭개오가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음을 나타내는 근거가 될 수 없다. 크래독(F. B. Craddock)은 삭개오가 예수를 집에 영접한 것에 대한 의의를 강조한다. 그러나 11:37과 14:1에서는 나중에 혹독한 비난을 듣게 되는 바리새인도 예수를 식사에 초대하는 장면이 나온다는 점을 볼 때 예수를 집에 모셨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되었음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예수는 삭개오에게 몸소 그 집에 유하겠다고 말하며(19:5) 이 교제에 주도권을 쥔 것으로 보도된다. 한편 에른스트(J. Ernst)는 예수가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19:9)라고 선포한 것이 삭개오의 구원을 공표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누가의 사상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 (7:16)이나 예수의 제자 (6:13; 22:39)와는 달리, 아브라함의 자손 (ui`o.j VAbraa,m)은 누가복음서 안에서 인종적인 구분을 나타내는 지시어로 쓰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3:8에서 세례 요한은 무리에게 혈통적인 유대인임을 자랑하지 말라며 이 말을 쓰고, 13:16에서는 안식일에 허리굽은 여자를 고쳤다고 비난하는 회당장 에게 이 여자도 안식일의 혜택을 받아야 할 아브라함의 딸 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16:22 이하에는 아브라함의 자손 인 부자가 음부 에 가는 것으로 보도된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손 이라는 언급 자체가 구원에 대한 표지로 인식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그린(J. B. Green)은 부자 청년과 삭개오 단락이 나란히 배치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장 인상적인 대비는 부자 관원의 기사(18:18-30)와 삭개오의 기사이다. (중략) 관원은 그가 가진 것 모두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도록 충고받고, 삭개오는 자기 소유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양자는 모두 부자이다. 첫번째 경우 예수는 그러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라는 질문으로 끝나는 반면 후자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라는 선언으로 끝난다. 이러한 비교점은 19:1-10은 전자는 자칭 율법을 지킨 사람이고, 삭개오는 대중의 평판상 죄인 이다. 그렇다면 삭개오는 예수의 명령에도 재산 바치기를 거부한 부자 청년과는 달리 자발적으로 재산을 바친다고 한 것 때문에 칭찬을 받고 있는가? 물론 부자는 재산의 전부를 바치라 (18:22)고 요구되는데도 따르지 않았고, 삭개오는 스스로 재산을 바치고 있노라 고 말하는 것은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부자 관원과 비교하여 삭개오가 과연 재산을 스스로 바친다는 자발성 때문에 예수에게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눅 12:33; 18:25, 28에서 나타나는 소유에 대한 가르침이나, 21:4에서 두 렙돈을 다 바친 과부가 가난한 중에 전부 를 바친 것에 대해 칭찬을 듣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삭개오는 자발성 때문이 아니라 역시 재산 헌납의 정도 나 현재성 때문에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 때 만일 부자 관원에게 재산의 절반만을 헌납하도록 요구됐다면 그가 어떻게 반응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삭개오가 절반 을 나눠준다고 해서 그에게 구원 을 선포한다는 것은 누가공동체의 부유한 율법적 그룹이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부자 관원과 삭개오가 각자의 재산에 대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율법을 다 지킨 유대인 관원은 소유의 전부를 팔아야 하고(18:22), 소위 율법을 어겼다는 유대인 삭개오는 자기 소유의 절반만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면 충분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토대로 양자의 구원의 조건에 대한 비교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삭개오를 부자 로 설정한 것이 18:18-30에 나오는 부자관원 과 대칭시키며 그의 구원 에 대해 보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이 학자들의 주장은 그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공동체 내의 율법적 그룹의 입장에서 보면, 직접 비교하기 어려운 재산 헌납의 정도보다도 부자 관원의 율법 실천과 삭개오의 율법 위반을 먼저 생각할 것이 자명하므로 이 기사를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삭개오의 재산 헌납의 시점이 언제이냐의 문제이다. 이것을 미래형 으로 보는 학자들은 문맥상 삭개오의 회개의 결단으로 보아야 매끄러운 글의 흐름이 유지된다는 입장이고, 이것을 현재형 으로 보는 학자들은 동사의 문법적 형태가 반복을 나타내는 (iterative, customary)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의 행위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전자의 학자들은 이것을 미래 를 나타내는 현재형 이라고 주장하나 누가복음서 안에서 현재형이 미래의 의미를 갖는 실례는 한군데도 나타나지 않는다. 삭개오가 19:8에서 그의 소유의 절반을 이웃에게 나누어 준다는 이야기는, 예수와의 인격적 교제 때문에 그가 그렇게 할 것이라는 결심이 아니라, 그가 그렇게 하고 있다 는 말일 뿐이다. 따라서 본문 안의 다른 경우를 통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문장을 미래형 으로 번역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문맥상의 요인은 뒤에서 상론하기로 하고 이 진술 자체의 정당성에 대해서 살펴보자. 왓슨(N. W. Watson)은 소유 (tw/n u`parco,ntwn)라는 것은 수입 (income)이 아니기 때문에 이 진술은 미래에 대한 결심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수입이 아닌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늘 주고 있을 수 있느냐 라는 것이다. 그러나 왓슨은 누가공동체의 구제 행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면밀하게 고찰하지 않았다. 먼저 8:3에서 요안나와 수산나도 자신들의 소유(tw/n u`parco,ntwn)로 예수와 그 제자들을 섬기고 있었던 것으로 보도된다. 이것은 누가공동체의 구제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12:33에서 보다 명확하게 확인된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않는 배낭을 만들라. 심지어 부자 관원에게 했던 예수의 명령은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는 것이었다. 한편 행 4:34에서 집 있는 자는 팔아서 공동의 것으로 했다 는 언급에도 불구하고 행 12:12에서는 여전히 신도의 집 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으로 보도된다. 따라서 누가공동체의 구제 및 헌금 행태는 한가지 규약으로 고정되어 있지도, 반드시 한꺼번에 공유화 하도록 확정되어 있었던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왓슨의 견해와는 달리 소유 라는 포괄적 개념 속에는 당연히 정기적인 수입 도 포함될 것이라 생각되지만,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누가공동체의 상황을 토대로 추론한다면 삭개오가 그의 소유의 1/2을 지금 주고 있다는 표현은 전혀 이상한 표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삭개오는 재산의 1/2에 해당하는 부분을 정한 후 팔아서 나눠주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또한 19:8의 삭개오의 진술 중 두번째의 것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햄(D. Hamm)은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라는 구절을 분석하면서 삭개오가 일부러 토색한 것에 대해 현재 4배나 갚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회개한 후에라도 부지중에는 계속 토색할 것이란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논지 전개의 핵심은 evsukofa,nthsa 를 모르고 토색하였다 라는 말로 어색하게 해석한 미첼에 대한 비판에 근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햄의 주장은 미첼의 논리적 빈약함을 공격하며 논증하고 있는 것이지, 본문상의 지원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 율법에도 없는 파격적 보상을 결심하게 된 것이라면, 과연 그 예수에 대해 보도하고 있는 누가의 율법관 어디에 그런 초율법적 발상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누가는 예수 탄생 설화에서 엄격히 유대적 규례를 지키는 것으로 보도한다(1:6, 9; 2:22, 39). 누가가 율법의 구전법(oral law)은 다소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블롬버그의 견해를 빌어서라도 이 견해는 견지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보상에 대한 규례는 율법 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토라, 출22:1; 레6:5; 민5:6f. 등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해솔드(M. J. Hassold)는 율법에 20%를 더한 것만 배상하면 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4배나 갚겠다고 한 것은 율법을 초월하는 회개의 단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 역시 지극히 비논리적인 발상이다. 자신이 저질렀던 토색 행위를 그토록 뉘우치며 회개했다는 사람이, 해솔드의 논리대로라면 죄의 근원이 되었던 세리 직책을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보도된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그러면서도 철저히 회개했기 때문에 율법을 훨씬 초월하는 보상을 하겠다는 것은 매우 어설픈 추론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삭개오를 공격하는 진영과 변호하는 진영 역시 가장 간단한 대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삭개오의 세리직 때문에 그것을 간파하지 못했다. 그것은 나는 토색을 하지 않습니다 라는 것이다. 즉 삭개오는 갚겠다 는 말이 아니라 토색했다면 에 강세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만일 남의 것을 토색했다면, 나는 4배를 갚습니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삭개오의 진술은 미래의 결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정죄에 대하여, 위반시에는 4배나 갚는다 고 할 만큼 결연하게, 자신의 공정한 징세 원칙을 공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삭개오가 실제로 토색한 것이 아니라는 측면은 토색했다면 을 이끄는 조건절의 미세한 뉘앙스의 차이를 통해서도 뒷받침될 수 있다. 즉 eiv를 뒤따르는 동사가 직설법 과거형일 때 이 문장은 특별 가정 (Particular Supposition)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화자는 이 조건절의 내용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음을 암시한다. 19:7의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하는데, 이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 누가는 삭개오가 실제로 토색 행위를 했는지 안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언급을 안하는 것이다. 반대로 만일 누가가 일반 가정 (General Supposition)을 사용했다면 삭개오는 스스로 자신의 토색 행위를 인정하는 셈이 되고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근거가 될 것이나, 본문은 이와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세리는 자신의 직책을 이용해서 세금을 착복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그 통념에도 불구하고 요한이나 랍비 제라의 아버지와 같이 존경받는 세리도 있었고 직접세를 걷는 세리들은 제도적으로 세금을 유용(流用)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세리는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뭇 백성들의 힐난을 받았다. 바로 세리 라는 집단성 때문에 개별성 은 무시되었던 것이다. 삭개오는 이런 정황 가운데 일어서서 (staqei.j)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의로운 구제 행위에도 불구하고 직업에 대한 통념 때문에 자신을 정죄하는 무리들에 대한 항변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삭개오는 구체적인 사안에 대하여 가치 판단을 내려야 할 죄인 이라는 개념이, 고정관념이라는 굴레로 고착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 수용하지 못하는 누가공동체의 세리 그룹을 대변하고 있다고 하겠다. (2) 삭개오와 누가공동체의 의(義) 앞서 언급한 대로 삭개오 단락을 구원 이라는 맥락에서 바로 앞의 부자 관원 단락(18:18-30)과 연결시키는 것은 중대한 문제점을 야기한다. 그렇다면 누가 기자가 삭개오 단락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상정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누가복음서에서 세리만을 단독으로 다루는 소위 세리 단락은 레위를 부르심(5:27-32),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18:9-14), 삭개오 단락(19:1-10) 등 3가지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세리의 정체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단락이라 할 수 있다. 누가 기자는 바리새인의 입을 통해서 세리와 차별되는 바리새인의 특징으로 금식 과 십일조 를 제시하고 있다. 먼저 금식이야 본인이 원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율법의 견지에서 본다면 실제로 세리들은 십일조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미슈나가 부정한 돈으로는 십일조를 낼 수 없다고 규정하듯이 십일조를 하는데 있어 직업적인 문제가 미묘하게 뒤섞여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세리들은 십일조를 제대로 드리지 않는다고 사람들로부터 빈축을 샀다. 그렇다면 왜 이런 비난을 바리새인의 입을 통해서 누가 가자는 표현했는가? 이것은 공동체 밖에 있는 바리새인들 이들이야말로 율법주의의 전형이다 의 발화(發話)를 통해서 공동체 내부의 율법적 그룹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같은 측면은 18:14에서 비유의 결론을 예수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세리)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바로 누가는 공동체 밖의 전형적인 예를 통해서 공동체 내부의 목소리를 제어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누가복음서에는 바리새인에 대한 독특한 묘사가 나타난다. 바리새인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묘사되며(16:14),11:42에서 누가는 바리새인의 전형적인 행위로서 그들이 십일조 만 드리고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버렸다고 비난한다. 개역 성경의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라는 번역은 원문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행위에서 핵심은 십일조를 한다 는 것이고 나머지 물품들은 십일조의 내용을 설명하는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무엇보다도 18장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구별되는 자신의 특징으로 십일조 드리는 것 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누가공동체의 파격적인 구제 헌금의 행위와 대조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율법주의에 빠진 바리새인은 십일조에 만족하고 있지만 누가공동체는 전부를 다 드리는 모습으로 부각된다. 베드로가 여쭈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18:28) 심지어 부자 관원은 율법 ( 십일조)은 다 지켰으나(18:21) 누가공동체와 같은 구제 헌금은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도된다.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누가는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 있어 공동체의 구제(12:33; 18:22)와 대비를 이루는 십일조(11:42; 18:12)의 문제를 부각시키며, 사실상 세리인 삭개오가 바리새인보다 우월한 구제헌금을 하고 있다는 구체적 실례를 제시함으로써 공동체 내부의 율법적 그룹들이 가진 불만을 효과적으로 불식시키고 있다. 삭개오의 정체는 그의 이름에서도 어느 정도 규명된다. 그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yK;z:가 되며, 이것은 무죄한 (innocent), 의로운 (righteous)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놀랜드(J. Nolland)는 이 이름을 토대로 본래 삭개오가 죄인 이었는데 의인 으로 인정받게 되는 운명을 누가가 암시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삭개오를 잃어버린 자 로 상정하면서도, 삭개오가 왜 죄인 으로 인정받는지를 철저히 논구하지 않고 단지 이름만을 토대로 내린 추론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전제 하에서 삭개오는 여전히 소위 죄인 인데도 예수에 의해 의인 으로 선포되는 것을 누가가 의도했다는 불합리한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삭개오의 정체 규명과 함께 이러한 이름의 의미를 적용하면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 왜냐하면 바리새적 정결법의 잣대로 보면 삭개오는 죄인 으로 오해받을 수 있지만 그의 이름 자체가 본연적으로 암시하듯 그는 본래부터 의인 이다. 누가가 이례적으로 삭개오의 이름을 3차례나 언급하는 것은 이 이름에 모종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삭개오는 그의 구제의 행위에 있어서(19:8a) 의인 이며, 통상적인 세리의 토색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도(19:8b) 의인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바리새인을 능가하는 구제 활동을 펴고 있으며, 소극적인 의미에서도 바리새인들이 비난할 만한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누가공동체가 표방하는 의 의 개념은 보다 명료하게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누가가 말하는 의 는 정결법 이 규정하는 대로 분리와 단절을 통한 바리새적 성결의 획득이 아니다. 누가공동체는 의의 행실을 위선적으로 드러내지 않고(12:1-3; 20:46f.), 실제적인 구제 행위를 통해 참된 의 를 발현시킨다. 달리 말하면 로마와 접촉하며 세금을 걷는 행위로 인해 율법적인 정결을 보장받을 수 없었던 세리들은 소극적인 정결법 을 통해서가 아니라, 율법의 적극적인 근본 정신인 바 구제를 통하여 정결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10:41). 누가-행전에 빈번히 등장하는 부 (富)의 문제는 이러한 점을 잘 예시해 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의인의 전형으로 삭개오를 제시함으로써 누가가 궁극적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다음 단락에서 다뤄지게 될 것이다. IV. 율법의 초월과 의인 삭개오 율법을 넘어 교제하는 의인 세리 본 단락이 죄인의 회개 내지는 구원 을 나타내는 단락이 아니라면 누가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가? 삭개오는 예수와 대화하던 때 에 자신의 선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여기서 중요하다. 19:7에서 사람들이 예수가 죄인인 자기와 교제한다 며 수군거리자, 이에 일어나서(staqei.j de.) 자신은 율법이 규정하는 것을 실천하고 있다(19:8)고 말한다. 이것은 자신을 죄인이라 규정하고 예수와의 교제를 탓하는 사람들에게 항변하고 있는 것이며 예수는 이를 수용한다. 이것은 세리라는 계급 자체를 멸시하며 함께 자리하기를 꺼리는 움직임에 대해 예수가 그것을 교정해 주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본 단락을 죄인의 회개 로 보게 만든 19:10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기존의 학자들은 avpolwlo,j의 뜻을 너무 일면적으로 처리하였는데, avpolwlo,j의 원형인 avpo,llumi의 가장 1차적인 어의는 오히려 파괴하다 (destroy), 망가지다 (ruin)이다. 이것은 단순히 사전적인 의미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누가복음서 안에서도 그렇게 쓰이고 있는 어의이다. 예컨대 포도주가 쏘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destroyed, avpolou/ntai) (5:37)나, 죽임을 당한(perished, avpolome,nou) (11:51),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destroyed, avpw,lesen) (17:27, 29)와 같은 예들은, 누가가 2가지 어의로 사용하고 있는 이 단어를 일방적으로 잃다 란 뜻을 나타낸다고 확정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또 생각해야 할 것은 구원하다(save) 로 번역된 sw/sai 이다. sw,|zw 역시 이 뜻으로만 쓰이는 것은 아닌데 이 어의말고도 중요한 뜻으로 회복시키다 (restore, recover)라는 뜻이 있으며 이 용법 역시 누가복음서 안에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19:10은 전통적인 것과는 전혀 다르게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 인자는 파괴된 것을 찾아 회복시키러 왔다. 이와 같은 번역은 중성으로 쓰인 to. avpolwlo,j의 문법적 형태를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인자가 온 목적으로 일컬어지는 파괴된 것의 회복 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19:10를 이와 같이 이해하는 것은, 19:8의 현재형 동사에 대한 논란을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 현재형 동사를 미래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풀이할 근거는 전혀 없으므로 현재형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해석이 정당하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에 앞서 본문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 집으로 모셔온다(19:6). 그러나 모든 사람 (pa,ntej)은 그러한 사실을 수군댄다(19:7). 이 점은 세리 에 대해 멸시적인 태도를 취한 바리새인 기사(5:30; 15:2)와는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공동체 밖의 인물로 표상되는 바리새인 이 세리에 대해 비방하는 것과 공동체 내부의 사람들이 이 식탁교제에 대해 마땅치 않게 여기는 것은 문제의 크기에 있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의 예수는 이 집에 회복 이 일어났다 라는 말을 함으로써, 단지 자리만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멤버들이 진정으로 교제할 수 있다는 가치상의 정당성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율법적인 잣대로 죄인 으로 낙인 찍혔던 그도 경건한 유대인 이니 너희는 서로 함께 자리할 수 있게 되었다 라는 뜻이 된다. 한편 제라르(Jean -P. G rard)는 이 기사가 배제되었던 외부의 죄인을 받아들이도록 권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누가 기자에 의해 사용되는 논쟁이 되는 이야기는 부패한 사회상(세금의 징수, 또한 눅 13:16의 여인과 같은 장애)으로 인해 그동안 배제되었던 아브라함의 아들을 공동체로 재통합(r inclure)할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삭개오가 순수함을 상징하는 모습이 되도록 처리한다. 누가는 몇가지 각색작업을 시도하여 그의 메시지를 이어가는데, 그(=삭개오)는 재산이 많기로 소문난 세리로서 세금을 적절한 수준으로 책정할 책임을 지니는 것이다. 제라르는 이 기사의 의도를 공동체와의 관련 가운데 추정했다는 점에서 단지 죄인의 회개 로 보는 학자들보다 진일보한 해석을 내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가 공동체 내부로 세리들을 받아들이려 한다는 그의 주장에는 두가지 걸림돌이 있다. 첫째, 공동체 밖의 모든 세리들에게 삭개오와 같이 특수한 수준의 의를 가입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이 되어버리므로, 사실상 이들을 거부하는 처사가 될 것이다. 둘째로 그의 견해는 to. avpolwlo,j가 잃어버린 자 를 나타낸다는 전제 하에서 가능한 주장이다.오핸른(J. O Hanlon)은 19:9의 swthri,a라는 단어를 통해, 삭개오 기사는 구원 에 대한 것임을 확증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본문을 분석해 보면 swthri,a를 단순히 구원 으로 보는 해석에는 논리적 결함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kaqo,ti는 이유 (for, because)의 의미를 가지므로 본문은 그도 아브라함의 아들이기에 오늘 구원 이 이 집에 이루어졌다 라고 번역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도 유대인 이기에 구원 받았다 는 의미를 갖는 것인데, 이것은 이방인이 존재하고 있는 누가공동체의 상황에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진술이 된다. 무엇보다도 유대적 혈통 만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다(3:8; 7:9)는 누가의 신학 사상과는 양립할 수 없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오핸른은 첫째, 아브라함의 자손 이라는 어구의 의미를 논증이나 근거도 없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과 동의어로 가정하고 있으며 둘째, swthri,a의 의미를 당연히 구원 으로 받아들이는 논리적 빈약함을 보인다. swthri,a를 구원 대신 회복 (restoration, recovery)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하면 이 문제는 매우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그도 유대인 이니 이 집에 회복 이 일어났다 라는 말은 바리새적 관점에서 죄인 으로 거부되었던 그도 경건한 유대인 으로 드러났으니 너희는 서로 함께 자리할 수 있게 되었다 라는 뜻이다. 즉 함께 교제하기를 꺼렸던 삭개오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파괴되었던 공동체 내의 평등 과 공존 이 회복된 것으로 선언하는 것이 된다. 누가공동체의 현실에 민감히 반응하며 행간을 읽기 어려운 현대의 독자 및 번역본들은 이러한 내용을 간파할 수 없었겠지만, 누가 당대의 독자들은 율법적 그룹과 비율법적 그룹 사이의 분리가 첨예한 문제가 되고 있었던 공동체의 현실에 비추어 이 진술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것이다. 세리는 죄인이다 라는 율법적 그룹의 고정관념은 철폐되었다. 이러한 시각은 왜 삭개오가 구원받았다 고 이야기 하지 않고 삭개오의 집에 swthri,a가 일어났다 고 말했는지에 대해 쉽게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크래독은 누가에 있어 집 이라는 것은 가족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막연한 추정이라고 할 것이다. 삭개오의 집 은 식탁교제가 일어나는 영역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 곳에 회복 이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한 해석이라고 본다. 간과할 수 없는 부분 중의 하나는 누가복음서는 세리들이 그 직업을 포기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눅 3:13에서 누가가 보도하는 세례 요한은 정한 것 외에는 세리들에게 걷지 말라고 요구함으로써, 사실상의 정당한 징수 행위는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누가의 율법 이해를 통해, 세리라면 무조건 더러운 죄인으로 간주하던 관행은 누가공동체 안에서 거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달려 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한다 (16:14)라는 언급과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척 저지르는 위선 (16:15)을 연결시킨 누가의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그에게 있어 위선의 단적인 예는 소유에 집착한 나머지 구제하지 않으면서 의 를 내세우는 것이다. 누가공동체 안의 율법적 그룹이 자신들보다 흔쾌히 구제하는 비율법적 그룹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돈을 사랑하는(= 구제할 줄 모르는) 바리새인이나 다름없는 바가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누가는 소유의 출처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그 부를 통해 야기되는 태도를 주시할 뿐이다 라고 말한 슈나켄부르크(R. Schnackenburg)의 지적은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여기서 행간의 의미를 놓치기 쉬운 것은 kai. auvto.j ui`o.j VAbraa,m evstin의 kai. 이다. 삭개오도 아브라함의 자손 이라는 말에는 삭개오를 유대인의 하나로 긍정하는 뜻 이외에도 기본적으로 그 밖의 유대인까지 인정해 주는 뉘앙스가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삭개오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라고만 표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가 말하는 공존 과 평등 은 비율법적 그룹만을 배려하는 개념이 아니다. 기존의 율법적 그룹 또한 공동체의 유지와 선교적 사명을 위해서 포기할 수 없는 공동체원이었다. 율법적 그룹과 비율법적 그룹의 공존이 와해된 상황에서 누가는 한쪽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 모두의 화합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삭개오가 바리새인을 넘어서는 구제 행위를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부정한 외세와 접촉해야 하는 정결법 위반자 로 남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달리 표현하면, 삭개오의 항변이 바리새인들이 비난하고 있었던 항목에 대한 반박이 아니므로, 소위 율법에 의해서도 의인이므로 교제할 수 있는 사람이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누가의 율법관을 정교하게 분석함으로써 일말의 해결책을 강구할 수 있다. 누가 기자는 율법주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바리새인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정결법 과 구제 행위 의 관계를 명시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1:39-40은 바리새인이 겉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들의 내면은 더러움으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들이 정결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예기치 않은 형태로 제시된다.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11:41) 이러한 언급은 80년대 유대 사회의 주도적인 입지를 누리고 있던 바리새인의 배타적인 행위에 맞서, 정결 의 의미를 새롭게 재해석하고 있는 누가공동체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누가에게 있어서는 정결법 이라는 율법의 한부분을 지키는 것으로 성결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며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일 뿐이다. 누가 기자에 따르면 율법의 참 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더불어 구체적인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이다(10:27). 결국 누가공동체의 정결은 이웃 구제라는 율법의 핵심을 통해 성취되는 것으로 부각된다. 누가는 율법의 조항을 무용한 것으로 평가절하하지도, 정결법을 바리새인처럼 철저히 지켜야 정결을 유지한다고 주장할 만큼 경직된 태도를 취하지도 않는다. 그는 공동체의 구성상 정결법을 지킬 수 없는 멤버들에게, 율법의 근본정신을 구제 행위로 실천하도록 요구함으로써, 율법의 폐기 나 고수 가 아닌 초월 의 새로운 양상으로 전환시키고 있다고 하겠다. (2) 삭개오와 누가공동체의 공존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세리를 상당히 우호적으로 채색한다. 마태복음서에는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 도 이같이 하느니라 (마5:46)라고 되어 있어 세리가 마태공동체의 강한 집단 의식 밖에 위치한 것으로 이해되지만, 누가는 이를 죄인 들도 이같이 하느니라 (눅 6:32f)고 처리하여 이들의 입지에 대한 암묵적 배려를 하고 있다. 심지어 누가의 세례 요한은 무리 (o;cloij)를 가리켜 독사의 자식 이라 부르며 세례줄 것을 거부하지만(3:7), 모든 백성(pa/j o` lao.j)과 세리 는 요한의 세례를 받고 하나님을 의롭다고 찬양한다(7:29). 이것은 누가공동체 안에 세리가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삭개오가 이제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그를 비방하던 공동체 내 율법적 그룹들은 혈통적 유사성 뿐만 아니라 율법의 준수라는 부분까지도 동일하게 공유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율법적인 그룹과 비율법적인 그룹들이 식탁 교제를 할 수 없다는 편견 때문에 공동체 내부의 관계가 깨졌던 것이며, 이제 양자는 동일하게 아브라함의 자손 이라 선언함으로써 관계의 회복을 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제 공동체 내부의 율법적 그룹과 비율법적 그룹은 현실적으로 함께하고(eivse,rcomai) 있을 뿐만아니라, 진정한 하나로서 식탁교제(me,nw)를 할 수 있는 가치상의 합법화가 이루어 진 것이다. 물론 누가공동체의 세리들이 모두 삭개오와 같은 입지를 갖고 있지 않았을 것임은 자명하다. 삭개오와는 달리, 이들은 대부분 공동체 내외(공동체 안 19:7, 공동체 밖 5:30; 15:2)에서 여전히 죄인 으로 낙인 찍혀 있는 형편이다. 누가는 공동체 안의 이러한 상황을 감안, 죄인 이라는 개념을 재해석한다. 먼저 누가의 시각에 있어서 죄인 이라는 호칭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 누가공동체의 이상적인 모델 중 수장격인 베드로는 예수에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 이로소이다 (5:8)라고 고백한다. 또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 이로소이다 (18:13)라고 기도했던 세리는 바리새인과 대비하여 그 겸손으로 인해 의롭다 고 인정받는다. 여기서 죄인 이라는 칭호는 굴욕적이라기 보다는 겸손 의 표현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것은 공동체 안에 있는 세리들을 비롯하여 아직은 소외받고 있는 그룹들을 배려한 가치관인 것으로 생각된다. 만일 공동체 내에 세리들의 세력이 미미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면 숫자상으로 극소수였다면 삭개오와 같은 실례는 일반 세리들의 입지를 더 위축시키는 것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경우 일반 세리들은 삭개오와 같은 예외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그나마 왜소한 집단이 더욱 세분되는 결과를 갖게 될 것이고, 필연적으로 더 큰 소외감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집단 안에 일군의 특징을 가진 구성원이 충분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을 때, 자신들과 대립하고 있는 타집단 누가공동체 안에서는 율법적 그룹 이 될 것이다 이 공격할 수 없는 반례(反例)는 이들의 사회적 입지를 강화해 주는 범례가 된다. 본문에서 문제는 죄인 이라는 평가가 아니라, 죄인이라며 그와 함께 자리도 같이하지 않으려는 배타성 에 있었다. 누가복음서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식탁교제는 바리새인과의 논쟁 사이에서 두드러진다. 그러나 19:7은 이제 공동체 안에서도 세리를 죄인 취급하며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움직임이 있음을 예시하는 것이고 이에 대하여 누가는, 세리임에도 불구하고 의인 일 수밖에 없는 삭개오를 하나의 전형으로 내세운다. 누가의 의도는 세리들의 입지를 개선시킴으로써 공동체 내에서 와해된 교제 및 평등 (=파괴되었던 것)의 회복(19:10)을 꾀하는 것이다. 요컨대 누가에게 있어서 정결법 이라는 율법의 한 부분은 그 자체의 유효성 여부보다는 그것이 공동체원에게 미치는 파급효과가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재산헌납과 관련지어 누가공동체만의 제자도(discipleship)를 생각해 보자. 눅 14:25-35에는 누가공동체가 규정하는 제자의 자격 요건이 몇가지 등장한다. 이 중에서 소유의 포기에 대하여 강조하는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라는 구절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누가 기자가 언급하는 이 소유 의 전적인 포기는 본 삭개오 단락과 상치되는 것인가? 더구나 누가의 제자 (maqhth,j)라는 개념이 단지 믿는 사람 이라는 말을 가리킬 뿐이라는 점을 착안하면, 이는 더욱 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남게 될 것이다. 단지 예수를 믿기 위해서라도 재산을 다 포기해야 하는 것이라면 삭개오는 예수에 대한 신앙조차도 갖지 못했다는 것인가? 실제로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기 어려운 듯 보인다. 그렇다면 삭개오는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지되 미흡한 회개를 한 것인가? 복음서의 진술을 평면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으로는, 이처럼 삭개오를 왜 불완전한 긍정적 인물로 채색하는지 전혀 답변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상충은 복음서를 해석하는 전망상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서의 대상인 동시에 그것을 산출한 모체로서 하나의 공동체 를 상정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난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만일 누가복음서가 누가 기자 단독의 무시간적 정황의 저작이라면 상기 진술은 모순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공동체의 대변인으로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결될 수 있다. 누가공동체는 부 에 대하여 다양한 종류의 입장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들과 같이 거의 전적인 포기 가 요구되었던 그룹도 있었고(18:28), 부분적인 헌납을 고수했던 무리도 있었다(행 5:1f ). 전자의 그룹은 공동체 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당위적인 측면에서 재산 헌납을 요구하는 정도(Sollen)와 현실적인 측면에서 지금 헌납하고 있는 정도(Sein)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물론 누가 기자의 입장에서 가장 이상적인 것은 소유의 전적인 헌납일 것이나,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한 공동체원들을 치지도외(置之度外)할 수는 없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따라서 복음서 전면에 부각되고 있는 진술이 모두 해당 공동체의 현실로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주석 작업이다. 이는 본문의 이면에 놓여 있는 산출 정황을 획일적으로 단정지을 수 없고, 가능한 설명 중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을 취사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산 헌납에 대한 14:33은 누가공동체가 따라야 할 이상적인 수준으로 제시된 것이지, 현재 시행되고 있는 관행을 반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른바 분파 (sect)의 모습일 것인데, 누가공동체의 포괄적인 성격을 고려한다면 설득력을 확보할 수 없는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율법적 그룹 과 비율법적 그룹 이라는 범주를 토대로 누가공동체의 정황을 분석하는 것은 여러 신학적인 난제들을 해결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가령 율법적 그룹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바리새인들 이 과연 누가행전에서 어떻게 채색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브롤리(R. L. Brawley)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가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은 종종 세리와 죄인들을 대적하는 배타주의의 전형을 연상시킨다. 반대로 사도행전에서 이들은 사도들과 산헤드린 앞의 바울을 옹호해 줄 수 있는 인물로 부각된다. 일군의 학자들은 누가가 여전히 바리새인들을 부정적으로 채색한다고 할지라도, 마태와 마가에는 찾아볼 수 없는 식탁교제 가 나온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사도행전의 긍정적인 바리새인상과 화해를 모색한다. 그러나 이후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신랄한 비판을 받는다는 측면에서, 결국 이들은 부정적인 상으로 채색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식탁교제를 한다는 입장에서 다소 긍정적으로 부각된다고 할지라도 타협 불가능할 만큼 비난받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언급(5:33ff; 7:44; 11:39-54; 12:1-3)을 보며 이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바리새인들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요컨대 바리새인들이 누가공동체 안에 있거나, 선교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었기에 복음서 안에 이렇게 묘사된다고 추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누가복음서 안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와 함께 하고 있는 모습이 주로 식탁교제 장면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비율법적 그룹과 함께 해야 하는 현실을 납득하지 못하는 율법적 그룹을 경고하기 위한 공동체 밖의 모델이다. 비록 공동체 안에 있다 하더라도 배타적인 위선을 저지르는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되는 것이다(7:44-47; 15:31). 그렇다면 사도행전에서 바리새인상(像)을 긍정적으로 그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행 5:34-39에서,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사도들을 변호하며 그들의 선교활동을 추인하는 것으로 보도된다. 바리새인들은 나서서 바울을 변호할 뿐만 아니라(행 23:9), 바울 자신도 바리새인인 것으로 드러난다(행 23:6; 26:5). 이것은 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의 바리새인들을, 누가가 각기 다른 의도로 공동체 내의 율법적 그룹 을 지시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예수와 함께 있던 시절의 바리새인 기사를 통해 율법적 그룹의 배타성을 경계한 누가는, 예수의 부재시 선교의 중심부에 서있는 바리새인의 예를 통해서 율법적 그룹의 선교적 책임과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공동체의 율법적 그룹은, 바리새인들조차도 이방인을 선교하고자 돕는 구도를 통해 이방선교의 정당성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유대교의 가장 유력한 그룹인 바리새인이 사도들의 활동을 인정하거나 그 주체로 기능한다면 누가공동체의 합법성은 충분히 확보되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복음을 전파할 책임(눅 24:48f; 행 1:8 )은 공동체 내의 율법적 그룹과 비율법적 그룹 양자 모두에게 부여된 것이다. 만일 누가행전의 바리새인 단락이 과거의 인물에 대한 단순 보도로 보거나, 80년대 누가공동체와 대립하고 있던 바리새 공동체의 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한다면, 일관되지 않은 바리새인상은, 앞에서 예시한 학자들의 견해처럼 난제로 남게 될 것이다. 이것은, 누가행전의 바리새인 관련 보도가 30-60년대의 인물들에 대한 단순 언급인 것으로 보는 시각이나, 80년대 인물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하더라도 공동체 내부의 율법적 그룹 을 상정하지 않는 해석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항이다. 이러한 누가공동체 안의 세리는 누가의 율법 을 이해하는데 어떠한 단서를 제공하는가? 에슬러(P. F. Esler)와 저벨(J. Jervell)은 누가가 율법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율법에 대해 예수가 자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11:38과 13:10ff.의 구절을 감안할 때 반드시 확정적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또 윌슨(S. G. Wilson)은 율법에 대한 누가가 상당히 자유로운 입장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마태 및 마가와는 눈에 띄게 대조적으로, 율법에 대한 누가의 언급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명백한 견해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누가와 그의 독자들에게 율법에 대한 예수의 태도가 문제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최소한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할 때만큼은 말이다. 그러나 탄생설화에 나오는 율법에 대한 존중(1:6, 9; 2:22, 39 등)을 고려해 본다면, 누가의 이에 대한 문제로부터 자유로왔다고 추정하는 것은 누가가 공동체를 위해 복음서를 저술했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망들은 누가의 율법관을 신학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하려 했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누가의 율법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은 이처럼 율법의 문제를 신학적인 것이나, 유대인 과 이방인 사이의 인종적 인 문제로 제한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누가의 율법관 은 일관된 것이냐 일관되지 못한 것이냐라는 관심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율법 의 문제는 첨예한 사안(事案)일 수밖에 없었고 공동체를 바라보는 누가에게 이것은 정적인 신학적 공론(空論)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공동체원의 이해 관계에 의한 내분을 방치하는 것은 공동체의 와해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누가공동체는 9:50에서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라고 말하는 것처럼 밖 으로는 개방 적인 자세를 취하고, 안 으로는 11:23에서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고 말하듯이 결속 을 강조해야 했다. 결국 누가는 공동체의 상황과 필요로부터 유리(遊離)되지 않은 채 율법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V. 결 론 전환기에 놓여 있었던 누가공동체는 다양한 여러 그룹들의 입장과 견해를 조율할 필요가 있었다. 누가 기자가 포괄적인 전망 하에 인종, 빈부, 율법의 문제를 다뤘던 것도 공동체 내의 상이한 배경을 가진 멤버들을 통합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누가행전 연구가들은 이 인종, 빈부, 율법 등의 기준에 의거, 누가복음서의 신학을 조명했으며, 이중 율법 의 문제는 최근 들어 점증(漸增)하는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율법에 대한 이 연구들의 공헌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들의 관점은 주로 유대인과 이방인 이라는 인종 의 문제에 집착하여 율법 을 이해하는 한계를 보였다. 여기에서 율법 의 문제는 인종 문제의 부속 항목 정도로 제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은 주로 누가의 율법관이 일관되어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에 집중하여 그의 율법관 을 신학적인 전망에서만 해석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규범적 유대교가 자리잡던 주후 1세기 후반에 바리새적 정결법이 현저한 사회적 장벽을 형성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율법 의 문제는 유대인 사이에도 민감한 주제일 수밖에 없음이 드러난다. 누가공동체 안에는 율법의 견지에서 우월한 것으로 인정받는 율법적 그룹 이 있었고, 세리와 창기와 같이 멸시받는 비율법적 그룹 이 있었다. 그들은 동일한 공동체 안에 있으나 가치체계에 있어서는 식탁교제 로 표상되는 바 진정한 화합을 이루지 못한다. 이와 같은 시각은 누가공동체의 식탁교제에 대한 기존의 연구가 주로 바리새 공동체와의 논쟁 정황에 집중하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게 해 준다. 환언하면 이 식탁교제를 비난하는 주체는 공동체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에 있으면서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믿는 율법적 그룹 을 중요한 대상으로 상정할 수 있다. 누가공동체가 외부와 대립하는 가운데 내부적으로는 식탁교제에 대하여 획일화된 입장의 일치를 보이고 있었으리라 가정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복음서의 일차적인 독자가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누가 기자의 관심이 식탁교제를 꺼리는 공동체 내부의 율법적 그룹에 쏠렸을 것임은 쉽게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상황을 인지하고 삭개오 단락을 해석하면 전혀 새로운 결과를 얻게 된다. 삭개오 단락은 누가의 지배적인 주제 중의 하나인 잃은 자 내지는 죄인 의 구원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이런 해석은 본문 안에서 신학적인 충돌을 일으킨다. 무엇보다도 삭개오 단락의 모티브는 명백한 차별과 장벽의 정황 가운데 촉발되고 있으며(19:3, 7) 그가 회개하고 있다는 징표로 받아들여져 온 진술도 사실은 현재 하고 있는 행위일 뿐이다. 멸시받는 비율법적 그룹 을 상징하는 삭개오의 현재 구제 행위는 바리새인의 위선적인 율법 행위보다 한결 우월한 것이다. 더욱이 삭개오는 자신이 남의 것을 혹시라도 토색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을 4배로 갚는다고 장담할만큼 정직한 징수행위를 하고 있다. 결국 삭개오는 죄인 이 아니라 도리어 의인 의 표상으로 부각된다. 삭개오의 진술(19:8)을 미래의 행위로 파악하는 학자들의 해석은 명백한 근거없이 누가복음서의 전체 기조를 전제로 이 단락을 이해하기 위한 주석 작업에 불과하다. 본문의 특정 사상을 토대로 세부 단락을 해석하는 것은 누가복음서의 진술 배면(背麵)에 감춰진 새로운 양상을 발견하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시각은 19:7의 차별 정황과 19:9 및 19:10을 정교하게 주석할 경우 야기되는 신학적 충돌에 주목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한계는 누가의 의도가 누가공동체라는 대상의 문제 해결에 있었다는 전망을 철저하게 밀고 나가지 않았다는데 있다. 삭개오를 의인으로 제시하는 것은 단지 그를 변호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적 그룹과 비율법적 그룹이 대립하고 있는 공동체의 화해를 촉구하기 위한 누가 기자의 고안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기자가 의인 삭개오를 강조하는 이유는 세리라는 직책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모두 죄인일 것이라는 율법적 그룹의 판단을 거부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의당 의인일 것으로 생각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책망받는 장면(11:39ff; 12:1f; 18:9ff)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구도이다. 누가는 정결법 이라는 율법의 한부분을 지키는 것으로 성결이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보이고 있다. 남에게 보이는 행위만으로는 겉만 깨끗하게 할 뿐 속까지 정결하게 유지시켜주는 것은 아니다(11:39f.). 오히려 누가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율법의 참정신이라고 제시함으로써(10:27) 바리새인의 의의 실천은 위선에 머무는 것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환언하면 구제 행위의 실천이 이런 모습보다 정결을 확보하는 것이 된다(11:41). 결국 율법을 가장 잘 지키는 것으로 생각되던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비난하던 세리보다도 턱없이 부족한 의의 수준을 지닌 것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 밖의 율법주의의 전형을 제시하는 것은 공동체 안의 율법적 그룹을 제어하고 교도(敎導)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식탁교제는 이 바리새적 정결을 거부하는 범례이며, 공동체의 삶의 규범이 율법에 의한 질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예수에서 확보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공동체 내부의 율법적 그룹이, 이 새로운 규범보다는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준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종교적 안정감에 안주하려고 했다는데 있다. 이것은 비율법적 그룹과의 교제를 기피하는 모습으로 발현되었던 것이다. 누가는 세리 삭개오 단락을 통해서 공동체 내에 비율법적 그룹과의 교제를 꺼려하고 있는 율법적 그룹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고 있다. 비율법적 그룹에도 율법적 그룹 이상의 의인이 있을 수 있다면 이들이 식탁교제로 표상되는 하나됨을 이룰 수 있는 가치체계상의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비율법적 그룹의 입장만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 모두의 공존과 화합을 모색한다(19:9). 누가는 무엇보다도 공동체원들의 깨어진 교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부심(腐 )한다. 그 해결의 일환으로 율법에 의해 죄인이라고 간주된 세리를, 율법을 넘어 의인으로 선포하는 탄력성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누가의 율법관 역시 공동체의 사회적 정황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제국의 노예제도(주후 1세기) (0) | 2021.10.07 |
---|---|
가인과 아벨 이야기! (0) | 2021.10.07 |
사도행전의 성령론 (0) | 2021.10.07 |
대자보 (0) | 2021.10.07 |
심방의 이론과 실제 (0) | 2021.10.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