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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 이야기!

by 【고동엽】 2021. 10. 7.
가인과 아벨 이야기
(창세기 4: 9-16)
장 석 정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아벨이 죽음을 당한 이후에도 하나님과 가인의 관계를 통하여 중요한 메시지들을 전해준다. 구약논단 5집(1998)에 게재되었던 "가인과 아벨 이야기 I (창 4:1-8)"이라는 논문의 후속 편으로 창세기 4:9-16 의 본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물론 1-8절의 내용과 관계성 속에서 본문이 분석되겠지만 동시에 9-16절 나름대로의 독립성 있는 내용들도 심도 있게 다루어 질 것이다.
가인은 아벨을 죽임으로써, 하나님께 열납 되지 못한 제물을 드린 사람이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상황에 살인자라는 죄목을 하나 더 추가하게 되었다. 그가 바친 제물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께 열납 되지 않았던 것임을 깨닫지 못했던 가인은 자신의 동생을 죽이기까지 하는 패륜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자신의 죄를 자신의 입으로 고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지만 가인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아벨이 어디 있는지 자신은 알지 못한다고 버젓이 하나님께 고하고 있다. 오히려 화를 내고 있는 상황으로 보일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하고 있다. 이 상황은 자신의 죄를 기만하려는 태도인데 여기에는 가인의 커다란 착각이 숨어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더욱이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신데 어떻게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으며 거짓말이 통하리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물어보신다는 것은 그 답을 모르시기 때문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물어보시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입으로 고백되는 내용을 이미 알고 계시지만 그것을 우리의 입으로 고백하도록 함으로써 그 행동이나 말에 대한 우리 개인들의 책임이나 평가를 스스로 내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자 함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어떤 질문도 우리 인간들에게 던지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신 것이다.
따라서 가인이 하나님의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그가 동생 아벨을 죽였다는 것을 고백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의 죄를 숨기려고 했던 가인은 그런 의도만으로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죄를 한 가지 더 추가한 꼴이 되었다. 베스터만(Westermann)은, J기자가 이 구절에서 "죄"의 점진적인 심화(intensification)를 묘사하려고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주장들에 대하여, 그럴 가능성은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살인 행위를 저지른 다음에는 항상 그것을 감추려는 거짓말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제 가인은 이전의 가인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것이다. 살인도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이나, 하나님을 속이는 죄도 이에 못지 않은 중한 죄이다. 가인은 시간이 갈수록 죄의 목록을 더욱 늘려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가인만의 개인적인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누구나 인간이면 어쩔 수 없이 경험하는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가인은 우리 모두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누가 가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자신의 제물이 왜 열납 받지 못했는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동생을 시기하고 그를 죽이게 된 가인에게 이를 감추려는 본능적인 거짓말은 어떤 면에서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의 본능적인 욕심과 시기가 이 가인의 행동 속에 용해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10절을 살펴보자.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는 질문은 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가인이 정말 형제에게 할 수 없는 참혹한 일을 했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네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느냐?"라는 말씀이다. 10절 후반부의 하나님의 말씀은 놀라운 은유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핏소리"는 voice of blood의 의미인데 이는 피가 내는 소리라는 뜻이다. 피는 물질이며 시각적인 요소로 강조되는 것이다. 물론 피가 소리를 낼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도 여기에서는 "피의 소리"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각적인 요소를 청각적인 요소로 표현했으며, 이 청각적인 요소를 "호소"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사람의 행동으로 이입시키고 있다. 첫 단계는 공감각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으며, 두 번째 단계는 감정이입적 표현이라고 보여진다. "피의 목소리"가 호소하고 있다는 표현에서 가인에게 죽음을 당한 아벨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죽은 자가 어떻게 호소할 수 있는가? 이미 죽은 자인 아벨이라도 그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피와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또한 죽은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바로 이 구절에서 히브리 사상에서도 죽은 자에 대한 사상이 초기 형태이기는 하지만 이미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목숨을 잃은 아벨이 하나님께 그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고 성서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8절의 살인 행위가 가장 극적인 사건으로 외형상 이해될지라도, 성서 본문의 흐름은 이 살인 행위를 지나치리만큼 대략적으로 묘사함으로써 10절의 하나님의 말씀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에 무게중심이 옮겨가도록 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가인이 감추려고 했던 그의 살인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감추어 질 수 없는 사실로 부각되고 있으며 가인이 끝내려고 했던 아우 아벨과의 인연은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다시 이어지고 있다. 죽음을 당한 생명 즉, 아무 소리도 낼 수 없게 된 죽은 아벨이 외치고 있는 것이다. 호소하고 있다는 표현은 가인이 죽였다고 생각하는 아벨이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호소할 수 있는 생명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죽음과 삶이 아무런 차이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다. 베스터만(Westermann)은 여기에서 "내게"라는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아벨의 호소를 듣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것이다. 희생자의 호소를 듣는 분이 계시며 이 사실은 우리 각자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라는 질문은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서 들을 수 있는 목소리이며 그러한 목소리를 듣는 때는 이미 사건이 일어난 다음이기 때문에 이 현세에서 사람의 목숨을 보호해 주는 기능이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그러한 살인 죄를 저지른 사람이 그 이후에 마음 편하게 살 수 없으며 늘 쫒기며 고통받으며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이 하나의 형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11절 말씀은 히브리 사상에서 죽음이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피를 땅이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상황은 물론 사고로 피를 흘리는 경우가 아니라, 고의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를 말하고 있다. 사람은 죽으면 땅에 묻히기 마련이다. 사람은 땅에서부터 창조되었고 역시 땅으로 돌아간다는 평범한 진리가 여기에서도 적용되고 있다. 자신의 수명을 다 살고 흙으로 돌아가면 땅이 아무런 저주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처럼 자신의 동생을 무자비하게 죽인 가인의 경우에는 땅이 그의 행동에 대하여 저주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땅의 저주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땅은 역시 무생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땅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기는 하지만 땅 자체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 저주를 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 본문은 가인이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땅의 저주는 12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두 가지인데, 첫째는 땅을 갈아도 그 효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의 대가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3장의 내용과 연결해서 살펴보아야 이해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다. 창세기 3장17절에 보면, 아담은 하나님께로부터 저주의 말씀을 듣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은 땅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아담이 일을 하고 수고를 해야 땅에서부터 소산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땅이 저주를 받지 않았다면 땅은 아담이 수고하지 않아도 그 소산을 아담에게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아무도 수고할 필요가 없었으며 그저 땅에서 생산해내는 소산을 먹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아담은 땅에서 수고하고 그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4장에서의 가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수고하고 땀흘려 일해도 땅은 그 소산을 가인에게 주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바로 가인이 땅에서 저주를 받는 것의 의미이다. 열심히 일하여 땅에서 그 소산을 먹는 것도 사실은 아담이 지은 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은 결과이다. 그런데 이제는 일을 해도 땅은 아무 것도 소산을 주지 않게 된 것이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수고하지 않아도 땅은 소산을 주었고 (우호적 관계), 선악과를 먹은 후에는 수고를 해야 땅이 소산을 주고 (산술적 관계) 이제는 가인이 동생을 죽였기 때문에 수고를 해도 땅은 소산을 주지 않는 것이다(적대적 관계). 이렇게 세 단계로 땅과 인간의 관계가 변화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제 땅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다. 생명의 근원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대조를 발견할 수 있다. 땅은 입을 열어 아벨의 피를 받았으나 농사꾼 가인에게는 이제부터 효력(vitality)을 주지 않는다 (입을 닫는다). 농부가 그의 삶의 터전인 땅에서 아무런 소산을 받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그 땅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는 가인의 삶의 터전을 중심으로 내려진다. 삶의 모습 자체가 변화되는 저주이다. 땅이 없는 농부의 신세이다. 이것은 "효력"이라는 단어 때문에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즉, 땅이 온전한 상태에서 그저 아무런 소산을 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가인이 아벨의 피를 흘리게 함으로써 땅이 그것을 받아서 땅 자체가 가지고 있는 능력, 즉 소산을 낼 수 있는 생명력을 잃게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땅이 더럽혀진 것이다. 더럽혀진 땅이 다시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은 오직 그 더러운 죄를 저지른 사람이 떠나는 방법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레위기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땅과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는 레위기의 구절들을 분석해 보기로 하자. 먼저 레위기 18:24-25 구절을 살펴보기로 하자.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여러 가지 음란하고 혐오스러운 성 관계 등으로 족속들이 더러워졌고 땅도 더러워졌으며, 이제 땅이 거민을 토하여 낸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들을 행한 사람들은 그 자신들이 그런 죄를 범함으로써 더러워졌고 그들이 살아가는 땅도 또한 더러워졌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땅은 그 거민들을 그 땅에서 나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거민들이 포로 등으로 땅에서 나가며 다른 이방 땅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더러워진 거민들이 없는 땅은 깨끗하게 남아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레위기 20:22에 나오는 구절을 살펴 보기로 하자.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살수 있고 그 땅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토해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약속의 땅에 계속해서 살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는 것이다.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더러워지게 되며, 더러워진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더럽히는 것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신다. 이스라엘도 결국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는 것을 성서는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땅은 거룩한 땅이다. 모세도 하나님의 산에서 부름을 받을 때 그 땅이 거룩한 땅이기 때문에 신발을 벗도록 명받은 것을 기억한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약속의 땅 안에서 인간들이 죄를 지음으로 인하여 더러워졌다면, 그 땅을 거룩하게 보존하기 위한 방법은 더러워진 인간들을 그 땅에서 쫒아내 버리는 것뿐이다.
이제 땅에서 받는 두 번째 저주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2절 후반부는 가인이 땅에서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사람은 한 곳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집을 짓고 밭을 갈고 가족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정착생활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와 광야에서 40년간을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한 가지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신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정착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꿈꾸던 생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가인이 받은 두 번째 저주는 땅에서 유리하는 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가혹한 형벌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본문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피하며 유리하는 자"라는 번역은 "a fugitive and a wanderer"(RSV)라고 번역될 수 있는 것이다. fugitive는 죄를 짓거나 하여 사람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사람을 의미한다. 항상 그의 죄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떳떳할 수 없고 불안과 초조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wanderer라는 단어는 한 군데 정착하지 않고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는 방랑자를 의미한다. 물론 fugitive 라는 단어에도 떠돌아 다닌다는 의미가 들어 있지만, 육체적으로 돌아다닌다는 것보다는 정신적으로 쫒기는 생활을 하는 사람을 말하고, wanderer 는 육체적으로 옮겨 다니는 사람을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즉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고달픈 생활을 하게 될 것임을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두 단어 (피하며 유리하는 자)들은 결코 유목민들(nomads)의 생활방식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고 베스터만(Westermann)은 주장하고 있다. 각 단어의 의미들은 오히려 쫒기고 있는 삶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격리되어 죽음과 죄성으로 인하여 제약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 "저주 아래서의 삶"의 예외적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가인의 경우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이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 반드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죄를 지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저주의 심판을 받았다고 해도 그 내용이 죽음이 아니라 살아있으면서 그 저주의 형벌을 감내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본문은 가인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가인이 받은 저주의 내용들은 한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이러한 저주의 내용이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선악과 사건에서는 하나님께서 오직 뱀에게만 저주를 내리시고 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죄짓고 저주받은 아담의 아들인 가인이 죄를 짓는 것이나 저주를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해야 한다. 아담은 저주받지 않았다.
이렇게 하나님께 저주의 말씀을 들은 가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13절을 보면 가인은 자신의 "죄벌"이 너무 중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죄벌"이라는 번역은 우선 이해하기가 어렵다. 무슨 뜻인가?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이다. 물론 그 의미는 "죄"이다. 그러나 이 단어의 특징은 "죄"와 "벌"을 모두 포함할 수 있는 사건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문을 "벌"이라고만 번역을 해도 이미 그 벌을 가져오게 되었던 원인 즉, 죄를 전제하고 있다. 폰 라드(von Rad)도 가인이 말하고 있는 은 죄에 대한 벌(punishment)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스파이저(Speiser)도 본문을 번역할 때, "My punishment is too much to bear"라고 하였다. 따라서 가인은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그의 죄에 대한 벌이 너무 심하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뉘우치는 모습은 전혀 아닌 것이다. 동생을 죽인 것에 대하여 죄책감을 느낀다든지 하는 것은 아예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물론 을 "죄"로 번역하면 가인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는 장면이라고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내 죄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중하다"라는 본문의 내용은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저주의 말씀을 듣고 죄를 뉘우친다는 것도 의미가 없다고 보인다. 여전히 자신이 받게될 형벌 내용을 듣고 그 형벌을 자신이 감당치 못하겠다고 탄식하는 소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나님의 처분이 너무 심하다는 항의로 들릴 수도 있는 대목이다. 크니어림(Knierim)은 이에 대하여 이 부분의 가인의 말은 탄식소리(lament)이며 선포된 저주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가인은 그가 지은 죄에 대한 가책이나 뉘우침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받게될 형벌에 대한 탄식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나라 개역번역 성경의 "죄벌"은 두 가지 의미를 한 단어에 함축시킨 좋은 번역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14절 전반부에서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내리신 형벌을 자신의 입으로 다시금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곳에서 쫒아 내시므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내가 숨어있게 될것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관계에서 이제는 직접 하나님과 대면할 수 없는 관계로 전락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차이가 나는 부분을 두 군데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우선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쫓아내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들어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왜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까?
성서기자는 하나님의 저주의 말씀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가인이 홀로 당하는 저주의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당하는 형벌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는 듯하다. 하나님께서 쫓아내신다는 것과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된다는 것 모두가 가인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완전히 상관없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주관하시면서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말한다.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인의 생명이 하나님의 관장 하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관계가 있던 것을 하나님 편에서 관계를 단절시키시는 것이지 가인이 관계를 끊을 수 없음을 본문에서 성서기자는 강조하고 있다.
13절에서 가인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형벌을 받게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 14절 후반부 말씀에서 자신을 만나는 자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신이 지은 죄를 뉘우쳐서 그것에 대한 죄 값으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 아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어떠한 후회도 없이 그저 하나님의 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게 해달라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러한 심한 형벌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편할 것이라는 논리가 들어 있는 듯하다. 형벌을 당하는 고통에서 해방되는 방편으로 죽음을 택하고 있는 가인의 모습으로 이해될 수 있다.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부분을 분석해 보기로 하자. 모든 형벌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다. 더구나 죽음을 당하게 되는 형벌일 경우에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도 가인은 자신의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젖혀두고 자기 자신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형벌을 정하고 있는 교만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땅에서 피신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는데 가인을 만나는 자가 왜 가인을 죽인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가인이 살인자인 것처럼 상대방도 살인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한 명의 살인자가 더 늘어나는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형벌을 우리 인간은 누구나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이 그의 죄에 대한 벌이기 때문이다. 가인은 죽음을 당하면 감당할 수 없는 형벌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나, 실제로는 전혀다른 양상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 이 모두를 관장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가인의 말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인은 마음대로 죽을 수 없고 설사 죽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이 본문의 해석사에서 계속해서 제기되었던 질문을 던져보자. "가인은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를 제외하고 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는가?" 창세기 1장부터 본문의 내용에 충실하게, 즉 축자적으로 읽어보면,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이라고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 뿐이다. 그렇다면 가인을 만나게 될 사람이 누구라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는 창세기 1-11장의 내용이 창세기 12장 이후의 내용과는 구별된다는 점을 먼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 구별은 원역사(primeval‎ history) 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가능하다. 즉, 창세기 1-11장의 내용은 바로 이 원역사에 속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historical) 사건들과는 구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역사에 등장하는 개인은 반드시 한사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담도 한 개인으로 볼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 밖에 없었다는 수학적 통계나 계산은 이러한 원역사 기록에는 적합하지 않은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가인은 그의 아내를 얻을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가 아내를 얻어 자손을 낳을 수 있었다는 것인가?
자기 마음대로 죽음을 당하기 원하는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15절에 보면, 오히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게 되리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우선적으로 관찰되는 것은 사람을 죽이면 어떤 형태로든지 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창세기 4장의 상황에서는 획기적인 사실이라고 보여진다. 그리고 그 벌이라는 것이 사람을 죽인 경우에도 사형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형을 당하는 것이 형벌이라면 그것의 일곱 배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즉 일곱배의 형벌이라는 경고가 가인을 죽이지 않게 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창세기의 기록 자체가 상당히 후기의 산물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된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땅에서 살아가면서 상대방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들을 하고 그에 대한 형벌을 규정해 놓은 법률이 있는 정착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구약성서에서 살인자에 대한 형벌은 죽음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출애굽기 21:12에 보면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의로 죽인 경우가 아니라면 그는 도피성으로 가서 목숨을 건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살인에 대한 형벌은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가인은 누가 보더라도 고의로 그의 동생을 죽였다. 살인도 무서운 죄이지만, 그의 친동생을 죽인 죄는 절대로 용서받지 못하는 패륜적인 죄임에 틀림없다. 그런 죄에 대한 형벌은 죽음 밖에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저주만을 내리시고 오히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계신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도 명쾌한 해결책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라는 말씀은 소위 필연법(apodictic law)의 범주에 포함되는 규정이다. 그런데 이 규정의 중요성을 베스터만은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where Cain is cast out into a world where he is an outlaw, he is protected by a legal ordinance." 가인은 죄를 지어서 저주를 받고 법을 피해 도망 다니는 삶을 살아야 하는 자이다. 그런데 그를 살려주시는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법규정을 만드심으로 가인은 오히려 법에 의해 보호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가인처럼 동생을 죽인 경우가 아니라도 살인 행위를 저지른 사람을 다른 사람들이 복수심이나 기타의 이유로 죽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규정이라고 볼 수 있다. 임의로 사람들이 피의 복수를 한다면 그 사회의 질서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요즘이야 재판제도가 잘 되어 있지만 고대의 경우에는 그러한 제도가 자리를 잡지 못하던 시기였으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규정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피의 복수는 금지되고 하나님 한 분만이 저주를 내리실 수 있다는 것이다.
15절 후반부는 가인과 아벨의 성서 본문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가인을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그가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해 주셨다는 내용이다. 도대체 어떤 표를 주셨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표를 가지고 다니면 누구를 만나든지 그 표 때문에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요즘에도 이러한 표는 없다. 어떤 표도 그의 목숨을 안전하게 보호해 줄 수 없다. 이 성서 본문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이런 제도가 시행되었던 적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특정한 사람이 표를 보여주면 그가 가던 길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그를 죽일 수 없도록 하는 제도 말이다. 그런 제도가 있었다고 해도 사람들이 그것을 잘 지켰을까? 무슨 권위가 그런 제도를 시행되도록 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면 그렇게도 지키지를 않았던 이스라엘이 이런 규정을 예외 없이 지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을 것이라는 내용과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죽임을 면케 하셨다는 내용은 서로 상충되는 면이 있어 보인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는 표를 주셨다면 누구도 가인을 죽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게 될 것이라는 규정이 필요하단 말인가? 아무도 그런 벌을 받을 자가 없는 셈이라는 것은 표를 주셨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이라고 보여진다. 따라서 여기에서 칠 배라는 것은 어떤 종류의 벌칙을 의미하는 표현이 아니라, 가인을 죽이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고대에 살인자를 마음대로 죽이면 받게되는 형벌에 대한 논의는 물론 개괄적으로 볼 때는 필요할지 모르나, 이 본문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작업에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이 본문에 대한 해석사를 살펴보면 많은 학자들이 이 가인에게 주어진 표에 관심을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도대체 어떤 종류의 표였을까? 몸에 어떤 문신을 하거나 머리카락에 표를 하는 것과 같은 표시인가? 그러나 이러한 궁금증들은 이 본문이 원역사에 포함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별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성서기자 자신도 이것이 어떤 종류의 표인지를 알고 있지 않으며 또 그것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을 전제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기록하고 있는 이 원역사 이야기에 나오는 것들을 통하여 성서기자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반영하도록 하려고 의도하지 않았다면, 이 가인의 표도 성서기자가 속했던 사회의 관습적인 표를 의미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인이 받은 표의 구체적인 형태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그러한 표를 주시는 하나님의 심정과 의도에 관한 부분들에 더욱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또 한가지 문제에 관하여 논의해 보기로 하자. 이 문제는 한 가지 질문에서 시작된다. "왜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표를 주셨을까?" 자기의 동생을 죽인 패륜아 가인을 왜 살려두시는 것일까? 자기 자신이 죽음을 당하기를 원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하나님께서는 그가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고 계신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고 이러한 공평한 일을 수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일까? 가인은 아벨을 죽인 것에 대하여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저주의 말을 듣는 것 이외에는 다른 형벌을 받지 않는다. 물론 그가 받은 저주는 분석해 보면 굉장한 형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목숨을 잃거나 하지는 않는다.
저주받은 가인과 하나님께 표를 받은 가인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저주의 내용은 죽음과는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가인이 그러한 저주를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저주가 그대로 가인에게 효력을 가질 수 있도록 가인을 살려두시는 것이다. 저주하시는 하나님과 표를 주사 가인을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 사이에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가인은 여기에서 일반적인 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모든 인간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누구나 가인처럼 그의 동생을 죽일 수 있다. 물론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을 지 몰라도 마음으로는 그가 없어졌으면 하고 바라는 경우가 한 번쯤은 있게 마련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간음하는 마음을 품기만 해도 이미 간음한 것이다. 마음 속으로 자신의 친구나 형제를 미워하거나 없어졌으면 하고 바랬던 사람은 이미 그를 죽인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이 성서 본문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설사 가인처럼 실제로 그의 동생을 죽였다고 해도 가인은 자신의 목숨을 마음대로 다른 사람이 죽일 수 있도록 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가인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무거운 저주를 받았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고통이 살아있는 동안에 계속될 것임을 그는 분명히 깨달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생활이 계속되도록 그를 살려두셨다. 그의 죄에 대한 형벌은 그가 살아가면서 받아야 하는 그의 몫인 것이다. 죽음을 당함으로써 이러한 고통에서 해방되려는 가인의 소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형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가인을 살려두시는 하나님의 처사에 관하여 다른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죽으면 땅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따라서 죽음이란 결국 땅이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인은 동생을 죽임으로써 죄를 지었다. 그리고 가인도 더러워졌다. 이렇게 더러워진 가인의 육신을 땅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인은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가인의 목숨을 살려주신 것은 그에게 자비를 베푸셨다거나 사랑으로 용서해 주셨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가인은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한 회개를 전혀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죽고싶은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게될 저주의 형벌이 너무도 중하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 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가 그의 동생을 죽인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 뉘우침의 모습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렇게 자신의 죄를 전혀 뉘우치지 않는 가인을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다는 것은 성서 전체의 일관된 메시지에서 벗어나고 있다. 누구나 가인처럼 죄를 짓고도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쉽게 죄를 짓고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가인을 살려두시는 하나님의 처사에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첫째, 가인은 그렇게 간단히 죽음으로써 자신이 받아야 할 고통의 형벌로부터 도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형벌을 인간이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죽음으로써 도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큰 죄를 지은 사람이 그것이 들통나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살하는 모습을 우리는 간간이 신문에서 읽어보았다. 그러나 지금 가인에게 벌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죽음까지도 그분의 손안에 있으며 죽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권능의 영역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살아있음으로 해서 그의 죄에 대한 형벌을 다 받으면서 살도록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의 행동이라기 보다는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인 것이다. 가인은 계속해서 살아 있으면서 그가 저지른 패륜적인 죄값을 치르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형에게 억울하게 죽은 아벨은 하나님께 공평하지 못한 대우를 받은 셈이 되기 때문이다. 죽은 것도 서러운데 그를 죽인 형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죽음을 당하지 않는 표까지 하나님께 받아서 버젓이 활보하고 다닌다면 공의는 거기에 없는 것이다.
둘째, 땅에서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수고하고 일해도 그 소산을 얻지 못한다고 되어있는데, 이것과 연결하여 생각해 본다면, 죄로 더러워진 가인을 땅이 받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더러운 죄인이 그 땅에서 죽을 경우에 그 땅도 더러워지게 된다. 그러므로 가인은 그 땅을 떠나야 하는 것이고 어떤 특정한 땅에 속박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가인이 떠돌아다닐 때도 죽지 않도록 표를 주셨기 때문이다. 이 땅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 죽는 것은 상관없다는 것이 아니다. 어느 땅이든지 가인의 더럽혀진 시신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가인은 하나님의 형벌을 받으면서 자신을 깨끗하게 성별 해야 한다. 그렇게 성별 되었을 때 그는 죽음을 허락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의 가인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다음 구절(4:16)에 한 번 나오고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 등등에 관한 내용은 성서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지 않다.
4장 16절에 보면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효력이 있는 것인가? 그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만 떠나면 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사실 논의의 초점을 흐리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놋 땅"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표현은 "the land of Nod"를 말하고 있는데, 히브리어 동사 (=move hither and thither)에서 나온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놋(Nod) 땅이라는 것은 지리적인 위치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본문의 맥락에서는 "land of the restless life" 혹은 "land of misery"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안식이 없고 비참한 삶의 땅을 뜻하는 표현인 것이다. 또한 거하였다는 문구도 자칫 가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저주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거한다는 것은 모순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동사 는 "거주하다"는 의미외에도 "...을 깊이 생각하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받은 저주의 내용인 피하며 유리하는 생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였다고 이해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가인의 저주의 내용과 모순되지 않게 된다. "에덴 동편"이라는 것도 지리적인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격리된 자의 삶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저주의 내용대로 하나님과 떨어져서 살아가는 비참한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이다.
셋째, 가인은 살아서 그의 행동에 대한 보상을 해야한다.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삶을 살았던 아벨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그는 깨달아야 한다. 우리 각자가 생명을 부여받은 것은 우리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룰 때까지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우리의 생명을 끊을 수 없다. 따라서 가인도 살아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가인은 우선 그의 평소의 생활이 하나님께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잘못을 저질렀으며, 그 자신과 그의 제물이 왜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했는지 깨닫지 못하는 죄를 범했으며, 그의 동생을 죽이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추가했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살인행위를 숨기는 어리석은 거짓말로 또 한가지의 죄를 지었으며,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의 의지대로 목숨을 포기하려 했던 행위 속에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죄를 범했다. 가중되는 가인의 죄상을 보면서 우리 인간들의 죄된 모습의 상징으로 가인이 그려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매일 매일 죄를 더해 가면서도 그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우리 마음대로 목숨을 끊을 결심까지도 손쉽게 해버리는 무책임한 우리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음성을 이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통해서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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