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노예제도에 대한 전문 연구가인 모시스 핀리에 따르면, (로마서가 기록되던 당시의 경우에 해당될 수 있는) 네로 치하 로마시의 행정장관인 루키우스 페다니우스 세쿤두스는 그의 시내 저택에서만 400명의 노예들을 소유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로마시는 그 수도의 관리를 위해 <건축가들>을 포함하여 700여 명의 노예들을 상비 직원으로서 보유하였다[각각 Demosthenes 27.9-11, Lysias 12.19, Tacitus, Annals 14.43, Frontinus 96-118].
타키투스가 얼마간 상세하게 전하고 있는 한 사건(Annals 14.42-5)은 당시 도시들의 혼란스런 사회적 상황에 의해서 야기된 갈등은 물론 그 모호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기원후 61년에 로마시 행정장관인 페다니우스 세쿤두스 Pedanius Secundus가 침실에서 그의 노예들 가운데 한 명에 의해서, 아마 개인적인 원한관계로 살해되었다. <조상전래의 관습 vetus mos>에 따라서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포함한 <같은 지붕 아래의> 모든 노예들이 그 벌로서 처형되어야만 했다. 그 수는 400명 이상을 헤아렸으며 반대여론이 비등하였다. 즉 평민들은 처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원로원은 공식적인 논의를 가졌다. 법률 면에서의 어떠한 변화도 반대하는 쪽이 과반수를 득표하자, 처형을 막기 위한 가두시위가 있었다. 결국 네로가 개입, 군대를 출동시켜 형의 집행이 이루어졌다. 정확한 법률적 상황에 관한 증거 면에서 난점들이 있다[M.I.Finley, Ancient Slavery and Modern Ideology, Chatto & Windus, 1980].
모시스 핀리가 소개한 바와 같이 노예들의 운명은 바로 주인의 손에 달려있는 단면을 볼 수 있다. 노예들의 경우, 여러 부류로 나뉘어 지지만, 주인의 뜻에는 절대 복종해야 하는 운명에 속해 있음을 블랙우드가 소개한 글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노예들이 노를 젓는 갤리선(Galley)이나 채석장의 노예들의 상태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였으나 가정의 노예 생활은 상당히 편안할 수도 있었다. 어떤 노예들은 신임을 받아 중책을 맡는 위치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모든 노예들이 해야 했던 혹독한 노동이나 잔혹한 고통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의 뜻에는 절대 복종해야 했다"[Andrew W. Blackwood, Jr., The Epistles to the Galatians(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 House, n.d.).
바울서신에서 '종'이라는 용어는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 용어는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의 '종'됨에 대한 경우를 마치 로마제국의 '노예'와 같은 경우로 취급할 때가 많이 있다. 이는 바울이 '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의도하는 바의 일부만을 담지할 수밖에 없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규정하고 자신 외에 다른 대상들도 종으로 규정한다. 로마서를 중심으로 '종'이라는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롬 6: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롬 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롬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로마서에서 바울은 '자신'과 '우리' 그리고 '너희'를 종으로 규정한다. 과거에 바울 자신이나 '우리'(화자인 바울을 포함한 로마공동체 멤버들)와 '너희'(로마서 수신자들, 로마공동체 멤버들)가 죄의 종으로서 죄에게 종노릇하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의의 종이 되었다고 말한다. 로마서에서 '우리'가 죄의 종이냐 순종의 종이냐를 묻고서 순종의 종이되어, 결국 하나님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 영생을 얻게 된다고 확언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종의 영이 아닌 양자의 영을 받았음을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자신과 로마공동체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 마땅함을 확증하고 있다.
바울-예수 그리스도의 종
우리-과거: 죄에게 종노릇, 본래-죄의 종 --> 현재: 의의 종, 순종의 종
썩어짐의 종노릇 -->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름
종의 영이 아닌 양자의 영을 받음,
죄 해방, 하나님의 종,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와 영생을 맺음
로마시대의 노예와 바울의 종됨 사이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로마서 1장 1절에서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이라는 말로서 시작하고 있는 데, 종이라는 용어가 로마제국의 종이나 노예와 유사한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자발성의 차원에서 볼 때, 로마제국의 노예제도와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로마제국의 노예들은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노예가 되었던 사람들이었다. 무거운 쇠고랑이 노예의 목에 채워지곤 했다. 노예는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는 제거할 수 없었다. 노예로 머물러 있는 동안, 그 쇠고랑이 그가 노예의 신분임을 증거했다. 하지만, 바울이 그리스도와 맺은 종의 관계는 그것과는 아주 달랐다. 그는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 말하자면 바울은 스스로 원해서, 즉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노예의 쇠고랑을 목에 둘렀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우리 또한 이러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프란시스 쉐퍼의 로마서 강해> 참고].
여기서 보듯이 로마제국의 노예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종으로서 살아가지만, 바울의 경우는 자신의 자발성에 기초하여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한 경우로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물론 바울이 최초로 그리스도를 만난 그 사건으로 인하여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변화되어 종이 되지만, 이 모든 것도 은혜를 경험한 이후에 시간이 흘러가면서 종의 그 길을 포기할 수 있지만, 끝까지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종의 길을 가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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