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에 나타난 공동체의 갈등과 해결 - 마태복음서에 나오는 구와 절의 의미파악을 통해 안 성 일 - Ⅰ. 서 론 Ⅱ. 마태복음서에만 나오는 구와 절 Ⅲ.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에 동시에 구와 절 - 동시에 나오나 의미상 차이가 있는 구와 절 Ⅳ. 결 론 참고문헌 초 록 지금까지 주기도문에 관한 연구는 각 저자의 명확한 신학적 입장이나, 각 공동체의 정황에 주목하지 못했다. 본 소고는 1차 적으로 마태복음서의 구와 절의 특징을 유추해 내고, 이를 통해, 공동체 내의 갈등의 정황을 유추하며, 이 갈등을 해결하고자 하는 마태의 소망을 찾고자 했다. 이것은 마태 공동체가 유대교 공동체에서 아직 분리되기 이전에 그들이 서로 하나되기 위한 위해 "의" "하늘"과 같은 개념을 도입했음을 전제하고 그 의미가 어떤 것인가를 밝히고자 한 것이며, 이 개념들은 마태 기자가 공동체의 문제를 자신의 공동체 내의 부유한 그룹을 향해서는 경고의 메시지로 가난한 그룹에게는 소망의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것임을 유추한 것이다. Ⅰ. 서 론 지금까지의 주기도문에 관한 연구는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에 나타난 주기도문이 어느 것이 더 순수한가?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 졌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모두 당시의 상황을 배제한 작업이었다. 본 소론은 이러한 연구에 있어 지침이 될 만한 서중석 교수의 복음서해석의 주기도문을 기초로 마태복음서만의 주기도문의 특징을 찾아서 그 속에 나타나는 공동체의 정황을 위기의 정황으로 보고 그 위기가 어떠한 위기였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마태의 전략이 무엇인가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기도문 전체의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내용연구는 다루지 않을 것이며, 단지 공동체의 정황을 추적할 단서를 찾을 수 있는 문단, 단어만을 취사선택하여 파악할 것이다. 또한 이 연구는 주기도문에 있어서 구체적 형태로 나타는 본문들 즉,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서의 주기도문 중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는 문단, 단어를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는 마태저자의 의도를 추적하는 초보적 작업이지만 효과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또한 두 복음서 주기도의 비교 작업에 있어서 헬라어, RSV, NIV, 개역한글을 비교 작업 하고자 한다. Ⅱ. 마태복음서에만 나오는 구와 절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레미아스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누가복음서의 "아버지"와 비교할 때 팔레스타인의 경건의 호칭에 적응하기 위한 방식으로 마태가 수정했다고 본다. 이에 대해 서중석 교수는 오히려 마태복음서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누가가 이방세계에 적응하기 위한 방식으로 수정했다고 본다. 본 소고는 누가 수정했는가 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서는 누가복음서와 달리 "하늘에 계신 우리"라는 문구가 더 있다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최소한 마태복음서에만 나오는 것으로 마태의 의도가 함의되었을 것으로 가정하기 때문이다. 이에대해 살펴보기전 먼저 예레미아스의 주장은 타당한가? 만일 그의 견해를 따른다면 마태복음서에 나타나는 주기도문은 두 가지 면에서 부딪히게 된다. 첫째 유대인들에게 맞지 않는 칭호이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에 맞도록 변형했다면 그것은 마태공동체 내부에 이방인이 없거나 마태기자가 이방인 그룹을 무시하는 성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마태공동체 내에는 이방인 그룹이 있을 뿐 아니라 마태기자는 이방선교에 대한 관심이 있다. 둘째 마태 기자는 아버지란 단어를 엄격히 구분하여 사용한다. 한 예로 예수의 입을 통해 인간의 아버지 요셉에게는 아버지란 단어를 쓰지 않으며, 동시에 주변 인물에 의해서도 요셉에게 예수의 아버지란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예수의 부모란 칭호도 사용치 않는다. 반면 누가복음서 에서는 유아기 때 성전에서 예수를 잃어버린 부모에 대해 언급 할 때 눅 2:27-48에서도 5번이나 요셉에게 아버지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결국 마태는 아버지란 단어를 사용할 때 누가에 비해 신중히 사용하며, 예수와 관련해서는 하나님에게만 아버지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아버지란 단어 앞에 하늘에 계신 우리라는 수식어를 마태가 사용할 때 그것은 단순히 팔레스타인의 경건 호칭에 맞추기 위한 의도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것은 마태의 어떤 다른 의도를 가진 수식어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하늘에 계신 이란 말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슈바이쳐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즉 "마태오 공동체는 (하늘에 계신)을 부가함으로써 하나님께 말을 걸 수 있게된 선물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했으며, (우리 아버지)라고 말을 거는 것이 결코 자명한 것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고집"하기 위해 마태가 편집한 것으로 말한다. 헤링턴은 "하늘에 계신"에서의 하늘은 6:10b의 탄원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할 때 "하늘"을 준비하기 위한 단어로 본다. 즉 그는 주기도문 내에서 하늘을 각각 연계성을 가지고 봐야함은 지적하고 있다. 또 스미스는 현실적 아버지란 용어를 하늘의 실제에 적용함으로 하나님의 인격적인 면을 강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작업들은 여전히 아버지에만 초점을 맞춘 작업들로 "하늘에 계신 우리"라는 수식어 대한 구체적인 대답들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먼저 마태복음서의 하늘 대한 언급을 살펴보면 마태복음에서 39회 나온다 이것은 마가복음에서 15회, 누가복음에서 26회, 요한복음에서 17회와 비교할 때 1.5-2.6배 정도의 잦은 횟수를 보여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마태복음서 에서의 하늘에 대한 사용에 있다 할 것이다. 먼저 마 5:16 마 5:45, 마 6:1, 마 7:11등 계속해서 언급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이란 말속에서 하늘을 무려 15번이나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막 11:25절 단 한번을 제외하고는 복음서 내에서 "하늘에 계신"을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마태의 특수한 용법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늘에 계신"의 사용은 인간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하시리라 할 때 사용된다. 이를 조금 강조하면 인간이 할 수 없거나 하기 힘든 것이지만 그것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 사용한다. 그렇다면 마태가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을 삽입한 의도는 마태복음에서 주기도문의 목적이 적어도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 라고 말하기 위해 썼고, 그러한 하나님의 의도는 인간이 할 수 없거나 하기 힘든 것임을 짐작케 하기 위해 삽입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2)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것은 마태에 나오는 세 번째 탄원이며 누가에는 없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왜 마태는 이 부분을 추가했을까? 이를 위해 먼저 여기서 뜻이란 무엇일까? 가드너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과 우리의 삶을 위한 윤리적 삶 이 두가지 모두를 포함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당위성에 근거한 것이지 마태의 정황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마태의 정황속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먼저 다음의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산상수훈은 새로운 율법을 제시하며, 그 율법 제시에 있어 마태는 예수의 입을 통해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어법을 통해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마 5:43-48에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자를 위해 기도하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고 언급하며, 하나님은 선인 악인에게 햇빛과 비를 주시는 분임을 언급하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와 같이 온전 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원수는 정치적이거나 대외적인 적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지역 공동체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의 개인적인 적들을 뜻한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은 공동체의 원수로 지칭되는 다른 멤버(그룹)을 사랑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중석 교수는 본 구절에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할 때 같이 라는 hos가 몇몇 사본에서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hos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다만 hos를 포함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시간적인 문제를 제외하면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 하늘과 땅 모두를 포함한 만물 전체가 된다는 사상이 똑같이 반영되어 있으므로 브라운의 견해 곧 하나님의 영광의 우주적 차원의 강조를 위한 사용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hos를 제외해도 저자의 의도를 손상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의 용법과 똑같이 의도적으로 사용했음을 봐야 할 것이다. 즉 저자는 hos kai를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hos를 제외하고 해석해서는 마태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다. 그렇다면 hos를 강조하고자 하는 마태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은 방식으로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늘과 땅은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되는가? 즉 하늘은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된 곳이고, 상대적으로 땅은 불의한 곳인가? 마 5:34-35에서 보면 땅을 하나님의 발등상으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이미 땅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있는 곳으로 표현된 것인가? 히 10:13, 행 2:35, 시 66:1에 보면 "하나님의 발등상"과 "원수"라는 단어를 함께 쓰고있고 동시에 그 사용은 "원수가 하나님의 발등상이 되기까지"라고 사용한다. 즉 마태가 hos를 사용해서 하늘과 땅을 언급하는 것은 결국 이 땅(현실)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는 마태의 간절한 소망이 들어있는 것이다. 3)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건드리는 "시험"을 아버지께서 시험을 만나지 않게 유지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험에 굴복하지 않게 하옵소서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시험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시험에 들지 말게"에 대한 해석을 시도한다. 또한 헤이레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것을 해석하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시도들은 시험을 당시의 위급한 상황에 대한 전제로 출발하고 있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위급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험은 무엇일까? 이에대해 정양모는 다섯째 간구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와 관련하여 하나님과의 화해 이웃과의 화해를 거부하는 불목의 유혹으로 본다. 이러한 해석은 필자가 위에서 마태복음서의 주기도문은 공동체 내의 그룹간의 불화와 관계되어 있음을 살펴 본 것과 연관하면 아주 적절한 해석이다. 또한 우리는 이것을 "악에서 구하옵소서"와 연결해서 보아야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Not but으로 연결된 문장이기 때문이다. 이를 규명하기에 앞서 먼저 "악에서 구하옵소서에서" 악으로 사용된 ponerou를 남성명사 poneros 로 볼것인가, 아니면 중성명서 poneron으로 볼 것인가? 만일 중성명사로 보아서 악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유혹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 공동체의 화목을 깨는 짓이 될 것이다. 오히려 본문이 Not but으로 연결되었음을 감안할 때 이것은 남성명사로 보아서 악한자로 보는 것이 보다 현실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악한자는 공동체의 친목을 깨는 자가 되고, 유혹은 공동체의 친목을 깨고자 하는 유혹이 될 것이다. 결국 유혹은 공동체를 깨고자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은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고자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Ⅲ.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에 동시에 구와 절 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 어구와 관련된 연구들은 "일용할"에 해당되는 "epiousios" 의 해석문제에 관련되어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epiousios의 해석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신약 전체에 오직 마태와 누가 각각 이곳 주기도문에만 나타나며 당대의 그리스 문헌에도 병행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미래적 의미로 해석을 해나갔었다. 그러나 서중석 교수는 이것을 현재적 차원의 절박한 현실로 해석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 있어 마태복음서과 누가복음서의 현저한 차이는 보이는 단어 오늘과 날마다의 차이를 관과 하고 있다. 이것은 현실적 절박함의 정도를 보다 크게 해주는 단어임을 주목해야 한다. 누가의 날마다는 kad hemeran (each day)으로 쓰였고, 마태복음서의 오늘은 semeron (today)로 쓰였다. 두 복음서를 비교하게 되면 누가는 매일 매일의 양식을 걱정하게 되는 것으로 오늘과 내일을 포함하고 있지만, 마태는 바로 오늘의 양식을 걱정하게 된다. 다시 말해 그 절박함의 정도는 마태에게서 더욱 크게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한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만일 서중석 교수가 지적하는대로 마태공동체가 경제적으로 부유한 공동체라면 왜 누가공동체 보다 더 간절한 오늘의 양식을 구하고 있는가? 이의 해결을 위해 다음을 살펴보자 마 6:19절에서 마태기자는 예수의 입을 통해 이런말을 한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이말은 너희로 구분되는 공동체 안의 배부른 자들에 대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하늘에 쌓아두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계신 곳에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 보물을 쌓아 두라는 말로서 하나님의 뜻이 공동체의 분열을 막는 것이고, 원수로 대변되는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 의미는 한 공동체 안에서 부의 분배를 원하는 자들에게 나누어주기를 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건은 급식기사(마 15:32-39)에서도 볼 수 있다. 마태복음의 급식기사와 타 복음서의 급식기사의 차이점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요구하지 않고, 떡이 몇 개나 있느냐고 묻는다. 다만 무리를 불쌍히 여기고자 한다. 그때 제자들은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을 수 있겠느냐 반문을 한다. 여기서 이런무리는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사천명이나 되는 무리였다. 이 급식기사에서도 마태기자는 제자로 대변되는 배부른 무리에게 가난한 공동체의 멤버와 먹을 것을 나누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때 이 배부른 무리들의 반응은 가난한 자가 너무 사람이 많아 도저히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는 너희들이 가진 떡이면 된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결국 마태 공동체 안에는 부유한자도 있지만 극히 가난한자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의 이 부분에 있어서 차이는 죄를 사하여 줬다는 말을 마태는 단순과거형의 abpekamen을 사용하고 누가는 현재형인 abpiomen로 사용한 것이다. 문제는 마태에서 이것이 과거라면 인간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에서는 왜 문제가 안되는가? 첫째 누가는 현재형으로 썼기 때문에 인간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앞설 필요가 없다. 둘째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라고 할 때 같이 해당하는 hos를 누가는 gar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hos는 A 처럼 B도 라고 해야 한다면 gar는 A 했다는 이유에서 B도 라는 의미이다. 즉 hos는 A가 원인이 되어 또는 모델이 되어 B를 행해야 한다는 것으로 인간의 용서가 원형이 되어 하나님은 인간을 용서해야만 한다는 뜻이고, gar는 우리가 용서를 했으니 용서해 달라는 말이다. 결국 hos를 사용하면 필연적인 것이 되고, gar를 쓰면 요구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태는 하나님께 인간이 서로의 죄를 용서했다는 이유로 반드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간구를 하고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해결로 서중석 교수는 마태공동체에는 하나님의 용서가 인간의 용서에 앞선다는 주장을 하는 그룹과 인간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앞선다고 주장하는 두 그룹이 있다고 전제하고 근거로 마 6:14-15, 마 18:23-27, 마 18:28-35절의 3가지 구절을 든다. 그리고 앞의 두 구절은 인간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앞선다는 사상으로, 마지막 구절은 하나님의 용서가 인간의 용서에 앞선다는 사상을 반영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마 18:28-35절을 하나님의 용서가 인간의 용서에 앞선다는 사상을 반영하는 구절로 보기는 어렵다. 만약 그렇다면 일만 달란트 빚진자의 이야기는 토막이 나게되며, 일만 달란트 빚진자를 통해 마태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상실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 본문은 베드로가 형제를 몇 번 내게 범죄하면 몇 번 용서해 주리이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나온 것으로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 18:28-35의 내용은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은 하나님의 용서가 인간의 용서에 앞선다는 모델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용서를 받은 자들이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gar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먼저 마태복음서에는 debt를 사용하였고, 누가복음서에는 sin을 사용했음을 보아야 한다. 굳이 죄와 의무의 구분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그너는 누가복음서 에서 죄라고 사용한 것은 빚으로 해당되는 단어를 이방인 독자들이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빚을 죄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또 정양모는 아람어 "호바"는 빚과 죄 두 가지 뜻을 다 지니고 있다고함으로 이 문제를 넘어가고자 한다. 만약 이것을 공동체 내부의 현실적 문제로 연관지어 해석한다면 어떨까? 즉 현실적인 문제가 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재물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라면 죄 대신 빚이란 단어를 쓰는 것이 어울릴 것이다. 또한 마태의 주기도문이 공동체 내의 부자들을 향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요구한 것이라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는 공동체 내에서 빚진자를 용서해야만 너희 부자들도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빚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할 수 있다는 마태의 메시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와 연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두문장이 모두 hos kai를 사용하여 댓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마태의 의도적 사용이라고 본다면 마태는 자신의 공동체내에 부자들에게는 가난한자와 이미 나누었다고 말하지만 진정으로 나누지 않으면(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너희를 용서치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가난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땅에서도 이루어 질 것임을 통하여 위로를 주고자 하는 시도라 할 것이다. 즉 이중적 의미를 내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Ⅳ. 결 론 본 소고는 마태복음서에 나타난 주기도문은 공동체 내의 현실적 문제 즉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마태가 의도적으로 하늘, 뜻 과 같은 개념들과 그 외의 구, 절을 삽입했음을 밝혔다. 그렇다면 마 6:5-8에 나오는 외식하는 자의 기도는 왜 제시했는가? 그것은 바로 그러한 공동체 내부에서 분리하고자 하는 악한자 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로 쓰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되고자 하는 소망은 현실에 불가능하다고 보기에 하나님의 뜻(delema)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마치 마26:42에 겟세마네 기도에서 예수의 기도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와 같이 현실적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 원하신다면 하나님 계신 하나님 나라에서 성취된 것같이 이 곳에서도 성취될 수 있음을 구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Gardner, Richard B. Believer Church Bible Commentary. Pennsylvania: Herald Press, 1991. Harrington, Daniel J. The Gospel of Mattew.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91. Hare, Douglas R.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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