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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7:7-13 /제목: 거룩하고 선한 율법이 죽이기만 하고 살리지 못하는 역설

by 【고동엽】 2022. 1. 15.

본문: 로마서 7:7-13

제목: 거룩하고 선한 율법이 죽이기만 하고 살리지 못하는 역설

 

8장을 보면은 에스겔 20장 11절, 13절, 우리가 로마서 공부할 때 이미 읽었던 본문들입니다. 레위기 18장 5절, 에스겔 20장 11절로 13절, 이런 등등 구절을 보면은 이 계명은 생명을 주는 계명, ‘이 계명을 지키면 살리라’ 신명기 21장 26절도 말했죠. ‘내가 복과 저주를 생명과 죽음을 네 앞에 두노니 네가 생명을 선택하라’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준수 가능하며 이 율법을 지키면은 하나님 앞에 언약적인 신실성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님과 언약적 친밀성을 유지하는 것을 우리는 ‘산다’고 말합니다. 이 ‘사는 것이 가능하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이론적으로 로마서 2장 13절에 따르면은 ‘아예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교조적으로, 원리적으로 율법을 아무도 지킬 수 없어! 어떤 사람도 율법을 지킬 수 없어!’ 라고 원리적으로, 교조적으로 그렇게 경직되게 말했다면은 그러면 구약 성경 논리 전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왜? 구약성경에서 그렇게 율법을 지키라고 호소했던 예언자와 하나님은 안 되는 사람에게 불가능을 요구한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절대로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원리를 교조적으로 부정한 게 아니라 지금 로마서라는 특수한 목회적 상황 맥락에서 그걸 상당히 부정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일종의 레토릭입니다. 그러니까 교리가 아니라 맥락이고 하나의, 일종의 지금 논쟁 문맥에서 자기 논점을 강화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 그걸 알아야 됩니다. 만일에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원천적으로’ 그래서 로마서를 가지고 아모스나, 로마서를 가지고 예레미야나, 로마서를 가지고 이사야나, 로마서를 가지고 모세오경을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이 모든 사람들은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는 인간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일종의 심리적 Dictator, 폭군입니다, 테러리스트입니다. 왜? 불가능한 것을 계속 요구했기 때문에요. 그런 식으로 바울을 가지고 모세오경을 읽거나 구약을 읽으면 큰 일 난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은 그래서 바울을 가지고 산상수훈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나님의 아들들로 부르심을 입을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이 보십시오. ‘율법으로 인하여 인간은 완전히 죄가 바글거리는 존재가 되었는데 어떻게 마음이 청결한 자가 있으며, 어떻게 마음이 온유한 자가 있으며, 어떻게 의에 주리고 굶주린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인간은 완전히 죄로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존재인데…….’ 라고 바울의 이 로마서 논리나 갈라디아서 논리를 가지고 산상수훈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을 하냐면은 ‘산상수훈 이거 불가능한 거야 이거! 이것은 진짜 불가능한 거야! 이것은 그냥 산상수훈대로 살 수 없으니까 제발 우리 좀 구원해 주십시오’ 라고 인간을 절망시키기 위해서 산상수훈을 줬다고 주장 합니다. 이게 아주 울트라초강력 극우루터란주의즘, 루터주의자들이 이렇게 해석합니다. ‘산상수훈은, 산상수훈은 실현 불가능한 거야! 그것은 불가능해! 인간을 절망시키기 위해 주신 계명이야!’라고 주장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석하면 큰일 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하는 이 내용은 로마서의 특수한 목적 때문에 이렇게 진술하고 ‘인간이 율법을 지킬 능력이 도무지 없다’ 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구약 성경 모두를 부정하는 것이고 율법을 지키라고 그렇게 애 타게 호소했던 하나님과 모세를, 예언자들을, 아주 값어치 없는 존재로 만들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뭡니까? 오늘 본문은 지금 바울이 말하는 ‘나’라는 말, 나처럼 바리새적 열심으로 가득 차서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엄청 썼지만 율법의 요구로 내가, 내 스스로 만족할만한 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 의는 뭐냐?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이 의,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이 의로운 수준에 나는 도달하지 못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는 내 마음의 율법을 활성화 시켜서 율법을 준행하는 것이 가능해진 이 성령 도래 이후에 온 내 기준과 비교해 볼 때 바리새인 시절의 나는, 또는 바리새인으로서 살면서 율법을 지키려고 애썼던 이런 일련의 모든 과정은 감히 율법이 나를 구원했다고 말하기 힘들다. 율법이 나를 구원했다고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와서 율법을 준행하게 했음으로 내가 구원 받았다. 로마서 8장 4절 우리 이성룡 형제님 읽어주십시오. 로마서 8장 4절요.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니까 육신을 따라 행하는 사람, 아직까지 속량되지 못한 몸을 갖고 있는 인간, 그 인간은 육신의 요구, 성령에 의존하지 않고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그 도덕심, 율법의 요구를 행하려고 하는 그 윤리적인 각성 상태, 이런 걸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 마음에 와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 따르는 사람들은 율법을 행할 수 있는데 이 기준, 자기가 볼 때 로마서 8장 4절의 기준, 이 기준으로 볼 때는 율법은 살리는 기능보다 정죄의 기능을 훨씬 더 많이 하더라. 율법은 거룩한, 선한, 의로운 선물인데 이 선물이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사는 엉망진창과 수렁과 진창에 빠진 나를 볼 때 율법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내 열심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잘 들으세요! 하나님의 영의 도움 없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고 하는 나의 윤리, 도덕적 분투가 무력하다는 겁니다. 율법이 무력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율법을 지키려고 할수록 역설적으로 나는 율법을 지킬 수 없는 무능력을 나는 더 절감한다. 율법을 축자적으로 정말 세밀하게 준수하려고 애쓰다 보니까, 나는 내 내면을 들여다보니까, 율법을 지키는데 근원적 장애가 내 안에 있음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율법을 지키려다가, 분투하다가, 내가 999 계단까지 올라갔습니다. 한 계단만 더 올라가면 천국입니다. 그런데 999 계단까지 올라가서 내가 마지막 1000번째 계단에 오르려고 하는 그때에 나는 추락하였다. 그러니까 내가 율법을 지키려고 애썼던 나의 도덕적 분투가 율법의 요구대로 사는데 한없이 역부족인 나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 바울은 여기서 바리새인으로서의 대표적인 자기 심리적 갈등을 말하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갈등을 말하는지, 아니면 보통 신자들의 갈등을 대변해서 ‘나’라고 말하는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다만, 확실한 것은 예수를 믿고 나서 내가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갈라디아에 있는 그 그리스도인들, 그러니까 갈라디아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뭐냐하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신으로 끝나려고 하는 사람들, 성령으로 거듭나서 의롭게 된 사람들이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고 다시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육체의 열심, 바리새인적 그 열심, 그 열심으로 살다가 보면은 이렇게 대 파탄에 이르게 된다. 지금 그래서 제가 로마서를 읽을 때 항상 갈라디아서를 생각하라고 그랬죠? 갈라디아서의 논쟁은 뭐죠? 갈라디아서의 논쟁 없이 바울의 로마서를 그냥 무시간적으로 맞는 교리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겁니다.

 

자, 갈라디아서의 핵심은 이겁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끝나는 갈라디아 일부 교인들인데 그들은 야고보에게서 온 형제들로 불리는 자들인데 그들은 뭐냐, ‘너희들이 예수 믿고, 성령 받고, 거듭났다 할지라도 할례를 받아야 되고 613가지의 율법 조문을 축자적으로 지켜야 한다!’라고 했을 때 성령을 따라 시작했지만 육체로 끝나는 그 갈라디아인들처럼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고, 은혜에 그 몸을 맡기지 않고, 은혜의 왕적 통치 앞에 나 자신을 바치지 않고 옛날 성령 받기 이전의 바리새인적 분투로 율법을 지키려고 애썼을 때 경험하게 되는 대 좌절을 지금 말하는 겁니다. 따라서 로마서 7장은 철두철미하게 갈라디아서라는 그 첫째 서신의 논쟁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그 논쟁 문맥의 핵심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끝나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대 영적인 곤경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만일에 예수를 믿고 의롭다함을 받은 우리가 다시 율법을 지키려고 벌거숭이 몸으로 덤벼들면 어떻게 되느냐? 로마서 7장 같은 대 좌절이 오게 된다. 그 7장은 뭐냐? 육체의 소욕을 성령이 억제해 주지 못하면은 벌거숭이 내 열심, 하나님께 의롭게 되고자 하는 나의 열심, 나의 도덕적 분투 이것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한 번 써 보아라! 그걸 써 보면 어떻게 되느냐? 역부족을 느낀다. 어떻게?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지 않고 율법의 낡은 조문에 집착하여 계속 율법을 축자적으로 지키려고 애썼더니 어떻게 됐습니까?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탐심을 이루고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내가 살았더니 오히려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니까 다시 내 안에 있는 율법에 저항하는 내성, 율법을 지키고 싶지 않는 내 마음이 막 격동되어서 끝내 율법을 이루지 못하고 612까지는 지켰는데 613번째 계명을 지키지 못해서 613가지 모두를 어긴 사람이 되어 버렸다. 여기가 아주 중요합니다. 이 논리입니다. 율법은 613가지인데 612가지를 지켰다 할지라도 한 가지만 어기면은 613가지를 다 어긴 셈이 되어버리니까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애초에 승산이 없는 매우 어처구니없는 불합리한 게임에 도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거죠. 왜? 야고보가 말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려다가 하나만 어겨도 모든 계명을 다 어긴 자로 간주되어 버리기 때문에요.

 

우리나라 형법, 우리나라 민법 법조문 수천 개의 법조문 중에서 죄인이 되기에 합당한, 전과자가 되기에 합당한 행위는 하나의 법조문을 어기면 진정한 의미의 전과자가 됩니다. 그죠? 형법 250조 살인죄를 범해도 전과자가 되고, 거짓 증거 해도 전과자가 되고, 배임죄를 범해도 전과자가 되고…….그러니까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은 너무 힘듭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여기서 힘든 것은 율법을 지키려는 너희들 열심, 그리고 갈라디아서 신자들에게 할례까지 행하여서 율법을, 613가지를 축자적으로 지키려고 가르치는 너희 바리새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아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추동되고, 영에 의해서 격동되고, 영에 의해서 감화 감동 되어서 율법을 지켜야지 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지 않고 낡은 법조문의 축자적 요구대로 살려고 애를 쓰느냐?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면은 로마서 8장 4절처럼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있게 되는데 왜 너희들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지 아니하고 율법의 낡은 조문들을 거들먹거리면서 그것을 축자적으로 지키려고 발버둥을 치느냐? 그렇게 하면은 어떻게 되느냐? 오히려 율법은 내 죄성을 격동시켜서 오히려 잠들어 있던 나의 탐심을 불러일으키고 오히려 내가 이제 이 문제는 해결됐다 라고 싶었는데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쓰니까 더 죽었다고 생각한 죄가 살아났다. 그래서 논리가 이겁니다. 계명이 나를 자극하니까 죄가 나를 격동적으로 지배하게 되고, 나는 죄를 행하는 자가 되고 현행범처럼 체포되어서 즉석 판결을 받았다, 나는 죽은 자가 되었다, 이런 논리입니다. 야~ 이것 너무 슬프고 참 안타깝죠! 이것이 바로 바울의 논리입니다. 여러분 혹시 이거 이해 안 되면은 녹취록 보시고요, 녹취록은 하나님나라 연구소 들어가서 회원 가입을 하시면 됩니다. 회원 가입하면은, 실명으로 회원 가입하면은 하나님나라 연구소 카페에 이 모든 것이 축자적으로 녹취가 되어 있습니다. 제가 다시 한번 그것을 녹취하는 이유는 우리 교우들이 이걸 자세히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겁니다. 제가 물론 요약본 올려놓습니다. 자, 이렇게 율법은 성령에 의지하지 않고 맨 몸으로, 육신으로, 죄성을 가지고 율법을 지키려고 애썼을 때 대 좌절로 끝난다. 핵심은 7장 6절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이때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뭐죠? 율법의 요구를 상향 준행함으로 율법의 요구보다 더 높다랗게, 더 높고 고결하게, 율법의 요구를 성취함으로써 율법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번제를 드리라고 하지 않죠? 보선형제님과 제가 아침마다 번제를 드려야 됩니까? 주일마다 한 마리 양을 음매하고 몰고 와야 합니까? 아니죠! 왜 하나님은 번제를 드리라는 이 요구에서 우리를 풀어주셨습니까? 내가 내 몸을 산 번제로 드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삶을 살기 때문에 번제를 요구하지 않죠! 왜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안식을 지키지 않으면 죽인다’ 라고 하지 않습니까? 안식일은 생명을 구하는 날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날의 활동을 모든 날들에 하면은 안식일 안 지킨다고 죽일 일이 없죠. 여러분과 저는 율법의 요구를 단순히, 단순히, 그대로 축자적으로 준행하는 단계가 아니라 여호와의 성령의 부단한 감동으로 율법의 요구를 상회하여 준행함으로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율법의 요구는 축자적, 그 문자적 요구가 폐기 되었을 뿐이고 결코 그 요구가 폐지 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은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라, 오징어 어패류를 먹지 말아라, 그 계명의 축자적 문자적 준수는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음식을 먹지 않으므로 음식을 먹을 때도 거룩함을 유지하라는 그 본질적 요구는 절대로, 절대로 폐지 된 게 아닙니다. 특정한 음식을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요구의 본질은 없어진 게 아니래도요! 절대로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특정한 구절의 문자적 준수를 하나님은 폐지하신 것이지 그 문자적 준수 너머에 있는,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요구 그 자체는 폐지 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실언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음식 법에도 거룩과 정결을 추구할 것이 있다, 오늘날 음식 먹는 행위가 모든 종교랑 상관이 있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보다 훨씬 음식 먹을 때 하나님 뜻을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훨씬 옳죠. 오히려 유대인과 이슬람 사람들이 서구인들보다 아무 음식도 다 먹는 중국 사람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되게 행동하죠. 오히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음식 먹는 것도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도구라고 생각하는 유대인을 조롱할 뿐이고 우리는 중국 사람처럼 마음대로 막 먹죠! 그래서 우리가 코로나19 같은 이상한 병들도 우리가 창궐하게 됐을지 모릅니다.

 

마무리 하겠습니다. 로마서 7장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끝나는, 육신으로 끝나는, 갈라디아서에 있는 그리스도인과 논쟁 문맥을 염두에 두면서 이어서 쓰는 편지입니다. 따라서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율법관은 바울의 모든 율법관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 아니라 이 논쟁 문맥에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끝나는 갈라디아에 있는 특수 신자들을 겨냥하여 그것들을 염두에 둔 견해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구약 성경의 모든 기대,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하나님과 모세와 예언자들의 모든 기대는 여전히 정당하고 옳은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고요, 다만, 성령에 의지하지 않고 율법을 맨 몸으로 지키려고 애쓰는 것은 율법을 지키기 힘들다는 무력감으로 끝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지는 것은 불가능하고 의로워진 후에, 위로워진 후에 율법은 지킬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지는 못하고 율법을 지켜서 의로움은 힘들지라도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풀어주신 생명의 성령의 법의 부단한 감동으로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 논리입니다. 이 논리가 오늘 7장 전체의 논리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세요? 좀 어렵죠? 아이고 어려워서 어떻게 해요? 자,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로마서의 논리를 속속들이 깨닫게 해주시옵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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