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본문: 로마서 8:1-4 /제목: 완료된 구원과 완료되어야 할 구원 사이에서

by 【고동엽】 2022. 1. 15.

본문: 로마서 8:1-4

제목: 완료된 구원과 완료되어야 할 구원 사이에서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이 말씀은 그동안 로마서 1장부터 7장을 요약했다 할 수 있고요, 오늘 본문은 오늘 우리에게 이미 일어난 사실로서의 구원입니다. 사실로서의 구원. 우리에게 일어난 사실로서의 구원은 뭐냐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에게는 아닙니다. 뜻을 잘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도 아니고요, 한 번 믿는 자에게도 아니고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애쓰는 자들도 아니고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가, 안 믿었다가, 엎치락뒤치락 하는 사람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라는 마음 깊숙한 영토로 들어온 자’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전인적 지배 아래 들어간 사람, 예수님의 전인적 통치 아래 들어간 사람에게는 이런 실패도 없고 이런 정죄감도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정죄감요? 로마서 7장 14절부터 24절에 나오는 그런 절망감이 없다는 말이죠. 어떤 절망감요?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지체 속에 있는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나로하여금 죄의 종이 되게 한다’는 이런 백전백패 같은 영적 혈투 이것이 없다는 거죠? 누구에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입니다. 여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 번 믿은 사람이라는 뜻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성령의 감화 감동 안에’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전인적인 감동 속에 사는 자들은 이런 혈투를 벌이다가 죄악의 포로로 잡혀가는 비참한 패배감이 없다. 즉 ‘아이고 내가 지옥에 떨어졌다’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낭패에 몰리지 않는다. 왜?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고 하는 이 내적 영토, 하나님이 주도하는 영토, 하나님이 나에게 능동태 동사를 써서 나로 하여금 수동태 경험에 사로잡히게 하는 이런 상태에까지 들어가면은 로마서 7장 14절부터 25절의 이 절망적 외침은 없어진다. 왜냐 하면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

 

불가역적 해방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해방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이런 자기 죄와 불타는 투쟁도 없고 혈투를 벌이는 내적 고민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었다가 엎치락뒤치락 하는 사람들, 예수를 믿을 때 옳게 믿지 않은 사람들, 신앙을 배우지 않고 교회를 다니다가 어느새 교인들처럼 행세하는데 몸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은 로마서 7장 14절부터 24절에 나오는 이런 내적 투쟁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고, 진입하고 하나님 나라의 영토에 깊숙이 들어가는 이런 내적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로마서 7장 14절부터 24절에 그런 심층 심리적인 자아 분열적 투쟁을 감히 경험하지 못하지요. 왜 그런지 아세요?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이나 사도 바울이 신앙을 가르쳤던 그런 방식으로 신앙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교인 수를 모으려고 하지 신앙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옳게 신앙인 되는 과정이 생략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종교개혁자들 후예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마틴 루터와 캘빈이 대부분이 일치하지만 완전히 일치하는 부분은 이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성령을 부어주셨다면 단 한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개신교의 성령, 종교개혁의 성령은 성경 말씀을 통해 역사하는 성령이므로 성경 말씀을 자세히 연구하여 내가 어떻게 순종할지를 고민하는 단계에 들어간다. 그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께 참된 순종을 드리기 위해서 자기를 완전히 하나님을 향하여 전향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자세히 숙고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가 받은 구원을 심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을 자세히 연구하는 이런 성경연구 영성이 바로 개신교의 성령 경험이라는 거죠. 그런데 왜 루터와 캘빈이 이런 말을 했냐 하면은 그 당시 1520년대 직통계시파들이 많았습니다. 재세례파들이라고 해서요. “성경이 뭐가 필요하냐? 하나님이 주시는 직통계시가 성경보다 더 중요하다” 하면서 직통계시를 강조하던 사람들이 너무 많아가지고 “아니다! 정통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 말씀의 문법, 성경 말씀의 알파벳을 통하여 문장을 구사하신다. 성령이 구사하시는 문장의 알파벳은 성경 안에 나와 있다. 성경 말씀만이 하나님과 우리가 소통하는 천국의 알파벳이다” 이런 식의 말을 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안에 있는 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통치에 깊숙이 참여한 사람들은 그 직전 상태, 어떤 상태가 있냐 하면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애를 쓰는데 내 지체 속에 있는 한 다른 법, 육신에 있는 한 다른 법이 나를 자꾸 포로로 잡아서 나를 병든 노예 상태로 끌고 가기 때문에 이끌고 가는 이 상태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꾸 자아 분열을 경험하다가 결국은 죄 아래 팔리는 곤고한 몸으로 전락합니다. 그런데 이런 전락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고 하는 피난처로 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은 뭡니까? 매우 신비적인 표현이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본 사람들끼리 통하는 일종의 깊은 의사소통 시그널입니다. 왜냐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고 하는 그것은 ‘오늘 이런 행동을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겁니다’라고 일반 준칙으로 만들어서 ‘이런 일련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들어간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것은 너무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예술적 재능이 꽃피기도 하고요, 엄청난 능력에 사로잡히기도 하고요, 엄청난 기도에 사로잡히고요, 하나님의 헌신에 막 사로잡힙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때와 자기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자아 의식적으로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구원이 완료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완전히 불가역적으로 해방하였습니다. 다시는 거기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연약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몸은 내 지체 속에 역사하는 죄가 거하는 내 육신입니다. 내 육신, 나의 옛 자아입니다. 옛 자아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감미롭게 준행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 하나님의 율법 요구를 감미롭게 준행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그러니까 새벽에 잠이 많은 것은 그것은 절대로 좋은 겁니다. 백지원 자매님? 새벽에 잠자는 것은 새벽기도 하는 것과 거의 같을 만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합니다. 새벽에 잠자기 위해서 새벽기도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매우 좋은 겁니다. 왜? 낮 시간에 아주 충실하기 때문에요. 새벽기도는 새벽에 잠을 일찍 일어나도 될 만큼 일찍 잠이 들 수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이지 육아 때문에 아주 지쳐서 새벽에 일어나고 싶어도 잘 못 일어나는 사람들은 죄책감을 가지면 안 됩니다. 우리 백지원 자매님이 새벽기도 안 와도 ‘잠은 국력이다’라는 모토를 믿고 잘 자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그런 죄책감 갖지 마세요.

 

자,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에 대한 민감한 이해가 생기고, 그 율법의 요구를 자세히, 정밀하게 순종하는 능력이 생기는 상태가 바로 뭐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입니다. 그러니까 1절부터 4절은 3장, 4장, 5장에 나오는 이미 완료된 구원을 말합니다. 완료된 구원, 그러니까 3장부터 5장은 완료된 구원을 말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 지성소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상태까지 된 겁니다. 그런데 6장부터 7장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사람들의 일탈,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사람들 또는 예수 그리스도 안까지 들어가려고 하는 중간 과도기에 속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나서 다시 말해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나서 영생에 이르는 그 길까지 과도기를 견디는 사람에게 이제 뭐가 나옵니까? 8장 5절부터 8장 30절까지의 내적 투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8장 5절부터 30절은 6장, 7장이 다룬 주제를 그대로 반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로마서 8장으로 자가 진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 예수님을 처음 믿으면은 한 몇 달 동안 honeymoon-period 라고 그래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와 같은 몽환적인 행복을 느낍니다. 그걸 예수 처음 믿었을 때 느끼는 honeymoon-period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 honeymoon-period가 끝나면은 어떤 상태가 되냐 하면은 현실로 돌아오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혔던 그 감미로운 속박감이 약간 느슨해지면서 세속에 파묻히면서 내가 하나님 말씀을 들었을 때의 말씀의 논리가 감정적으로 나를 꽉 장악하는 힘이 약해집니다. 그러면 점점점점 다른 논리가 성경 말씀의 논리를 속으로 파고 들어서 이제 성경 말씀은 아무 것도 아닌, 별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평범한 말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것을 세속화라고 그럽니다. 세속화. 자, 세속화는 뭐냐 하면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세속 사회에 살면서 받게 되는 영향입니다. 이것은 죄가 아닙니다. 세속화는 죄가 아닙니다. 먼저 세속화된 사람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사명감에 눈을 뜨기 때문에 세속화는 뭐보다 낫냐 하면은 세상을 버리고 오대산 월정사에 들어가서 혼자 구원받겠다고 도 닦는 사람보다 낫습니다. 왜요? 세속화를 경험한 사람만이 도시를 구원할 마음이 생기고,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서 중보기도에 애타는 열정을 갖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세속화를 경험할 때 너무 죄책감을 갖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세속화를 부정적으로 보게 됩니다. 모든 참된 기독교는 세속화의 위기 속에서 탄생했지 세속을 떠난 사람에게서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속을 버리고 혼자 거룩해지겠다고 노동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굴에 앉아 있는 것, 이것은 우리가 바람직한 그런 현상이라 보지 않죠.

 

마무리하면 로마서 8장은 우리가 예수를 처음 믿고 나서 비현실 정도로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포획됐다는 느낌이 드는 그런 엄청난 환희를 맛보는 그 단계를 인정합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몽환적인 행복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는 구원의 honeymoon-period는 영원히 가지 않습니다. 일정 기간 가다가 반드시 세속화라는 단계로 들어갑니다. 자, 세속화의 단계는 내가 받은 구원을 감가상각시키고, 내가 구원받지 못한 자처럼 내 의식을 뚜렷하게 냉각시키면서 기독교적 가르침, 성경의 가르침, 하나님의 가르침을 상대화시키는 이런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성도는 다시 육신을 따르는 자, 영을 따르는 자, 다시 고투를, 이 두 개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직장에 가면서 육신을 따르는 자 즉 로마서 7장 23절이 말하는 것처럼 내 지체를, 내 지체 속에 있는 한 다른 법을 따를 것인지, 나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이끄는 성령의 법을 따를 것인지를 매일 결단해야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지도 않는데 우리를 강제로 정신 병원 같은데, 좋은 데 입원시켜 가지고 우리를 강제로 뇌수술을 받게 하고, 강제로 우리가 순한 사람이 되게 하고, 강제로 엄청 착한 사람 되게 만들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구원은 내가 온전히 자유의지와 숙고를 거쳐서, 심사숙고를 거쳐서 성령을 따르기로 결단할 때 즉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로 결단할 때,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에 거하기로 결단할 때 그 결단을 도와주시는 것이 우리 하나님과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오늘 여러분 하루를 사실 때 여러분 모두가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는, 구원의 감격,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는 그 사실을 직시하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그 사실을 직시하고, 죄의 요구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No! 죽은 자로 선언하고, 의로운 자로 간주하고,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간주함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로 결단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누리는 성령의 감화 감동을 상시로 경험하는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끝내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로마서 4, 5장부터 8장 30절까지 참으로 우리 성도의 비참한 영적 엎치락뒤치락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너무 자세히 묘사합니다. 그런데 31절은 다시 놀라운 승리로 반전을 줍니다. 그래서 31절부터 39절이 바로 뭡니까? 로마서 8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습니다.

 

이 선언이 어떻게 입증됩니까? 5절부터 엎치락뒤치락, 좌충우돌,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는 이런 지상의 모든 분투를 다 경험하고 나면 31절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쭉 내려와서 33절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정죄할 것입니까?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즉 우리가 이렇게 엎치락뒤치락을 경험하지만 누가 우리를 영적으로 지탱합니까?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는 하나님 우편 보좌에 그리스도! 그 다음 제일 마지막입니다. 39절입니다.

 

내가 확신합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러니까 1절과 2절 39절이 수미쌍관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들은 실제로 뭘 경험하냐 하면은 여러분이 실제로 경험하는 기독교는 5절부터 30절입니다. 육신의 일을 선택할 것인지? 영의 일을 선택할 것인지? 그러다가 8장 23절입니다. 아무리 영의 일을 선택해도 ‘내 몸은 아직까지 구원 받지 못했구나!’를 절감합니다. 8장 23절. 그래서 몸의 구원을 위해서, 내 지체 속에 역사하는 이 다른 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몸의 속량을 위해서 애타게 기도하다가 마침내 31절과 39절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8장 31절부터 로마서 8장은 자가 진단키트입니다. 영적으로 내가 하나님께 감미롭게 속박되어 있는가? 내가 하나님을 떠나 표류하고 있는가를 진단할 수 있는 감미로운 속박 시금석 진단키트 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을 항상 암송하시면은 정말 도움 많이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로 진군하기 위해서 전향하고 돌이켰습니다. 전향하고 돌이킨 우리 사랑하는 하나님 자녀들이 하나님께 가는 길이 험하고 거칠어서 자기가 구원 받았는지 의심할 만큼 영적으로 퇴락하고 좌충우돌할 때 있습니다. 하나님 끝내 그들을 안보하셔서 로마서 8장 39절에 끊을 수 없는 하나님 사랑까지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