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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6:22-23 /제목: 지상의 영적 분투의 마지막, 영생

by 【고동엽】 2022. 1. 15.
본문: 로마서 6:22-23
제목: 지상의 영적 분투의 마지막, 영생


이렇게 매일 의의 종으로 드릴 것인지, 죄의 종으로 드릴 것인지 이런 분투가 있다는 것을 전혀 안 가르쳐주는 겁니다. 왜? 의롭다 하심이라는 이 말이 구원 그 자체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생각하니까요. 아닙니다! 의롭다 하심은 구원의 알파이고, 구원의 오메가는 영생입니다. 그런데 의롭다 하심에서부터 영생으로 가는 이 긴 기간은 중간 과정이 필요한데 매일 의의 종으로 내 몸을 드릴 것인지, 죄의 종으로 내 몸을 드릴 것인지 매일 고투하면서, 분투하면서 마침내 거룩함의 열매를 맺어서 영생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3장부터 로마서 6장 지금까지 읽은 본문을 여러분이 내적 논리를 정확하게 이해해야만이 7장부터 더 쉬워집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부터 8장을 이해하면은 기독교 전체를 이해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 들은 내용을 좀 더 확인하려면은 묵상 요약을 보시기 바라고요, 그다음에 좀 더 깊이 확인하려면은 지금 하나님나라 연구소 카페에 가면은 완전 100% 녹취를 해 놨습니다. 전부 다. 지금 하나님나라 연구소에서, 제가 지금 있는 연구소에서 완전히 100% 녹취를 했기 때문에 로마서 주석을 쓰기 위해서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그런데 그 완전 녹취록을 보면 훨씬 이해가 쉽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께서 그럴 시간이 없다면은 새벽마다 제가 올리는 묵상록을 보면서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자, 어제 우리는 말했습니다. 구원받기 이전의 삶은 일방적으로 죄의 종입니다. 그때는 죄를 지으면서도 자각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진노를 쌓으면서도, 하나님 진노가 자아내는 심판도 의식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죄를 짓고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구원받기 이전의 삶입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도 죄가 죄인 줄 알지 못한 채 멸망으로 서서히 빠져드는 것이 우상숭배의 삶이었고, 그리스도 바깥의 삶이었고, 하나님의 통치 바깥에 살았던 하나님의 율법과 언약에 자유롭게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죄를 위해서 저주받은 죽음을 죽었다는 느낌이 들고 자기의 잘못된 삶을 뉘우치고 이전 과거의 삶을 부정하고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을 지속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믿는 자가 되었다는 Sign을 주시는데 하나님이 믿어주는 사람, 성령의 인친 사람이 됩니다. 여기가 중요합니다.


내가 믿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믿는 게 더 중요합니다. 내가 믿는 것은 교회 다니는 행위이고, 하나님이 나를 믿는 것은 성령의 내적 거주, 성령의 감화, 성령이 끝임없이 나를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만드는 내 용솟음치는 하나님의 언약적 감미로움,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믿어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믿어 줄 때 신자가 되는 것이고, 내가 하나님을 믿겠다고 교회에 주섬주섬 나오는 것은 신자가 될 의향을 일부 표현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신자가 될 의향을 지속적으로, 목적 지향적으로 심사숙고 끝에 이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살고 싶은 열망이 정말 확실하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인을 쳐주시는데 이게 하나님이 의롭게 여겨주시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거 아브라함은 몇 년 걸렸냐 하면은 아브라함은 75세 때 부르심을 받아가지고 85세 때 의로움 하심을 받았으니까 10년 걸렸습니다. 하나님은 10년 동안 아브라함의 행동거지를 심사숙고 끝에 판단하신 후에 아브라함을 마침내 의로 여기시기로 결단하고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믿으니 이를 의로 여기셨습니다. 여러분이 믿었을 때 하나님이 의롭게 여겨주는 그 내적인 하나님 편에서의 시그널이 오지 않으면 아직까지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하나님에 의해서는 믿는 자라는 인정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거 목사가 해결할 수가 없는 겁니다. 목사가 해결 못합니다. 그건 진짜 그 사람이 전존재를 가지고 믿는 행위를 지정의를 다 동반한 채 믿겠다고 해야 만이 하나님은 성령의 감화 감동을 주시고 놀라운 은혜 속에 살게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 가장 놀라운 것이 거룩하신 능력에 사로잡힙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잖아요. 디나미스입니다. 그러니까 그래서 디나미스가 있기 때문에 남을 도울 힘이 나옵니다. 내 죄 짐이 하나님께 맡겨진 사람만이, 나의 죄가 해소된 사람만이 남을 도울 수 있는 여유가 생기니까 이 하나님과의 감미로운 속박감 때문에 사랑이 샘솟습니다. 사랑이 샘솟다 보니까 이웃 사랑에 자기를 바칠 수 있습니다. 시간이 납니다. 돈이 납니다. 이웃 사랑을 위해서 내 모든 재능과 시간과 돈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그런 의의 종이 되기 시작합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이렇게 의로운 사람, 의로운 일에 자기 몸을 바칠 사람들이 꽤 다수가 지금 존재합니다. 제가 볼 때 우리 교우들은 의로운 대의명분이 생겼을 때 사정없이 몸을 바치고 돌진할 수 있는 그런 내적 감미로움이 있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볼 때 교인 수 전체에 비해서는 많은 편입니다. 지금 우리가. ‘뭐 새벽 기도 서른 명도 잘 안 나오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130명, 140명 중에 서른 명이 새벽 기도 나오면은 다른 교회보다는 훨씬 진짜 많은 교인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물론 ‘새벽 기도 나온다면 진짜 다 교인입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진짜 교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새벽 기도는 그냥 인간이 하루 이틀 애써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강력하게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은 지속적 신실함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요구에 따라 지속적으로 언약, 지속적으로 살려는 이, 내적인 이런 속박은 내가 가장할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들은요?’ 네 목사님은 가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계 때문에 즐겁지 않으나 즐거우나 새벽 기도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은 다릅니다. 저는 가짜로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여기 유급성직자이니까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다릅니다. 여러분들은 여기 나온다고 돈을 주는 게 아니잖아요. 여러분 새벽 기도한다고 여러분 사례 받습니까? 안 받잖아요. 물론 저도 여러분이 주시는 목회활동비를 쓰지만은 우리 같은 사람은 진짜 안 믿어도 믿는 척을 해야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성령의 감동을 부단하게 주니까 여러분이 오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제가 볼 때, 제가 목회했던 교우들을 보면은 엄청 용감무쌍하게 헌신하더라고요. 저는 ‘우리 교우들이 나보다 낫다. 유급성직자인 나보다 저렇게 온전하게 하나님을 믿고 나오는 사람들이 훨씬 거룩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나날의 분투를 거쳐서 날마다 심사숙고 끝에 의의 종이 되기로 결단하는 이 삶이 마지막에 받는 상급이 뭡니까? 영생입니다. 영생은 뭘까요? 영생은 새로운 육신을 입고 하나님과 내가 너무 사모하고, 내가 너무 함께 있고 싶은 거룩한 성도들과 한 공동체에서, 한 마을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영생의 선물이 설레지 않습니까? 바울을 만나보고, 베드로를 만나보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만나본다는 생각이 이 지상에서의 어떤 관심보다 더 크지 않습니까? 저는 이게 큽니다. 대장동에서 돈을 버는 것이 하나도 부럽지가 않습니다. 그 수백억, 수천억의 돈이 저한테는 추상적 숫자일 뿐이고 하나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영생의 식탁에서 식사하는 이것이 저한테는 더 중요합니다. 우리 윤진 자매님, 마태복음 8장 11절 좀 읽어주십시오. 너무 중요한 본문입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예, 저는 대부분 많은 사람이 천국 갈 거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천국에 대해서 거부감, 천국에서 No, 천국 안 돼! 하는 사람들, 그런 거부 선언을 들은 사람들은 잘 보면은 하나님 이름을 갖고 지상에서 온갖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천국에서 No!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국 입장을 안 시키십니다. 그런데 저는 사람이 셀 수 없을 만큼 천국에 왔다는 말은 천국이 어마어마할 거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식탁은 뭡니까? 시간의 격차가 해소된 식탁. 인종적 격차가 해소된 식탁, 그러니까 BC 1900년에 태어난 사람과 AD 2000년에 태어난 사람이 아브라함의 식탁, 시간의 격차가 해소되어버린 천국 식탁에 같이 앉는다는 겁니다. 저는 이 상상을 하면 너무 흥분이 됩니다. 실제로. 그러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대부분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 식탁에 동참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사람이 정신적으로 우리를 지배하니까 그 사람 죽은 것 아닙니다. 죽었다고 기억이 소멸되는 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은 그 자녀에게 살아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그가 지상에 남긴 아름다운 삶으로 살아있고요, 그가 남긴 삶의 발자취가 지상에 이어지기 때문에 죽은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아무도 죽지를 못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죽을 수 없는 창조주라면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 죽을 수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벌 받을 수는 있지만은 죽지는 못합니다. 태어나고 창조된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께 죽고 싶어도 못 죽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식탁에 앉는 날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바로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영생’이라고 쓸 때는 누가복음 10장 27절 이하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나오는 그 이야기입니다. 어떻게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상속하리이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냐면은 너도 likewise do this, 너도 이와 같이 사마리아 사람처럼 강도 만난 자를 돕기 위해서 바쁜 여행 일정을 조정하면서 네 돈을 낭비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삶을 살을 지어다! 그러면 영생을 상속한다. 영생 상속은 엄청나게 고도로 자발적으로 선한 일이 몸에 배인 사람들이 가는 공동체입니다. 선한 일이 몸에 배어서 아무런 감시 기능이 없어도 남의 돈을 조금도 취하지 않는 재정적 정직한 사람, 탐욕이 배제된 사람, 주려고 하는 사람, 흘러넘치는 사랑이 가득 찬 사람들이 모인 곳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너무너무 사랑이 가득 찬 곳입니다. 너무너무 고도로 자발성이 가득 차 있습니다. 왜 자발성이 이렇게 가득 찼을까요? 매일 자기의 죄성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매일 이 고단한 분투를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마무리 하겠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구원의 알파 포인트에 들어간 것이고, 영생은 구원의 오메가 포인트라는 사실, 그리고 진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매일 의의 종으로 살 것인지, 죄의 종으로 살 것인지 이 초경렬한 자아분열을 겪는다는 것, 이 초경렬한 자아분열은 구원받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 구원받기 이전에는 이런 자아 갈등도 없었다는 것, 이게 중요합니다. 그러면 이런 갈등이 언제 해소됩니까? 성령 충만함으로 갈등이 해소됩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이 임하면은 의의 종으로 살 것인가, 죄의 종으로 살 것인가? 이 선택의 고뇌도 없어진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성령 충만해도 여전히 의의 종으로 살 것인가, 죄의 종으로 살 것인가 라는 이 선택의 고뇌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훨씬 선한 일을 하기가 쉽습니다. 훨씬 더 의의 종으로 내 몸을 바치는 것이 쉬워지고, 감미로워지고 즐거워집니다. 여러분 이 고립되고 격리된 코로나 환난 중에 믿음을 지켜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아마 대면 예배가 활성화되고 좋은 목사님이 여러분의 담임목사로 취임하고 그러면 아마 엄청 신앙생활 하기가 더 쉬워질 겁니다. 지금은 진짜 어려운 때입니다. 이 어려운 때도 믿음을 지켜주신 여러분 정말, 정말 저는 감사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영생의 선물이, 시간의 격차가 해소된 아브라함의 식탁이 여러분에게 선사될 줄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새벽 기도에 참여한 모든 교우들에게 아브라함의 식탁으로 초청해 주셔서 육신의 장막 벗고 나서도 새 몸을 입을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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