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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6:8-11 /제목: “의롭게 되었다”고 여김으로써 의로워지는 우리

by 【고동엽】 2022. 1. 15.

본문: 로마서 6:8-11

제목: “의롭게 되었다”고 여김으로써 의로워지는 우리

 

로마서 6장 8절부터 11절에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될 표현이 ‘죄에 대해서 죽은 자다’, ‘하나님에 대해서 산 자다’ 이런 표현이거든요. 이것은 철저하게 ‘산다, 죽었다’는 개념이 생물학적 죽음이 아닌 걸 알 수 있죠. 생화학적 죽음. 생화학적 죽음은 뭡니까? 목숨이 끊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신체 기관이 심장이 박동을 그치고 폐가 호흡을 그치면 죽는 거잖습니까? 그죠? 그런데 이 생물학적 죽음, 생화학적 죽음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 아니라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적 요구를 의식하면서 그 언약 요구대로 살아가며 그 언약 요구를 지켰더니 열매를 맺고 살아갈 때 그것을 ‘산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지켜본 사람은 압니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살면 반드시 선한 열매가 우리를 에워쌉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을 어떻게 순종 하냐 하면은 순종의 결과가 우리를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기도합니까? 이렇게 우리가 줄기차게 기도하는 이유는 뭡니까? 기도의 결과가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깝게 끌어가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실천하고 순종하면은 그 순종의 결과가 하나님과의 언약적 감미로움을 강화시키고 결속시키기 때문에 그런 거거든요. 그래서 신앙생활은 스토리를 계속 이어가는 거예요. 절대로 신앙생활은 고립된 단자, 고립된 개인들이 혼자 몸부림치는 게 절대 아니에요. 누군가랑 의미 있는 끊임없는 대화를 하고 있대도요. 기도를 하고 있거나 기도 제목을 수서 하거나 아니면 염려 제목을 나누거나, 아니면 같이 재정적인 헌신, 시간적인 헌신, 투신을 하거나 그 스토리가 우리를 끌어가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 스토리는 누가 참여하냐면은 순종해 본 사람. 하나님의 언약 관계 안에서 정밀하게, 세밀하게 순종 한번 해 본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끌어가는 거거든요. 우리 교회를 가만히 보세요. 보통 교회보다 훨씬 요란하지 않지만은 숲을 이루는, 곰팡이 균이 숲을 이루거든요. 숲의 모든 나무 밑에는 World Wide Web 이라고 하는 곰팡이 균이 숲을 지키고 있어요. 그러니까 숲을 지키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곰팡이 균이에요. 그런데 곰팡이 균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한 시그널을 주고받으면서 연락하면서 네트워킹을 유지해요. 그러니까 곰팡이 균의 네트워킹 하는 힘이 없으면 숲은 무너져버립니다. 실재로. 그래서 숲은 살아납니다. 곰팡이 균과 같이 보이지 않는 작은 미세한 영적 지지와 기도 그러니까 어떤 분이 어떤 분을 위해서 기도를 계속 하세요. A라는 교우를 위해서, B라는 교우, C라는 교우가 기도를 계속 중보 기도를 하면은요, 그 기도 많이 하는 사람 중심으로 네트워킹이 형성돼요. 그래서 우리 교우들을 보면은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이 항상 교제가 풍성해요. 항상 스토리가 있어요. 기도하는 분들은. 그분들은 대면이건, 비대면이건 상관이 없대도요. 그런데 기도하면은 사랑의 실천을 하게 되고, 사랑의 실천을 하게 되면 그 사랑의 실천의 열매가 또 기도하는 사람을 격려를 해줘요. 그래서 목사님들은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 덕으로 목사 하거든요. 목회는 얼마나 쉬우냐 하면은 목회는 기도 많이 하는 교우들이 곰팡이 균처럼 숲을 유지하는 영적 저력, 영적인 생명의 네트워킹을 유지하니까 목사님이 목사 노릇하는 거예요. 실제로.

 

그러니까 좋은 목사님은 좋은 교우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요. 그래서 목사님들이 목회를 잘 하는 경우는 한 가지예요. 숲의 밑바닥에서 그 축축한 땅을 지키면서 World Wide Web으로 일컬어지는 그 광범위한 곰팡이 균의 네트워킹으로 숲이 살 듯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성도들의 끊임없는 기도가, 지지가, 영적 부축이 계속 모이면은 불특정 다수가 도움을 받아요. 그러니까 여러분 새벽 기도는 언제 시작 되었습니까? 새벽 기도는 피아노 합기도회에서 시작 되었어요. 피아노 합기도회. 그 피아노 합기도회는 누가 시작했습니까? 여러분이 스스로 기도했지 않습니까? 제가 가만히 봤거든요. 이 새벽 기도가 매우 늦게 시작 되었지만 우리 교회에 기도가 모이는 것은 언제 포착 됐어요? 제가 독일 가기 전에 모였어요. 2018년 이때 성도들은 이제 기도하려고 모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기도 앞에서 모여서, 10명씩 모여서 간절히 기도했어요. 저는 그걸 보면서 ‘하나님이 가향교회들을 기도하게 하신다’라고 저는 믿었거든요. 그런데 이 새벽 기도가 매우 늦게 시작 되었지만 기도하려고 하는 성도들의 이 정밀한, 은밀한 곰팡이 균과 같은 영적 생명력은 이미 역사했거든요. 그러니까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가향교회 주인이래도요. 여러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요. 그런데 ‘산다, 죽었다’라는 말뜻이 뭐냐 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변하지 않는 이 항상적인 성품, 절대로 배반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킬 사람들이 그 가향교회 주인이란 말이에요. 사실은. 교역자들은 파송되기도 하고 파송하기도 하고 더 나은 임지를 위해서 떠나가기도 하고 또한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 떠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우리 교회의 역사에 이름 남는 분들은 이렇게 스쳐가는 교역자가 아니라 피아노 앞에서 기도하고, 새벽에 기도하고, 수요 예배에 모여서 기도하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지만 하나님이 알아주는 방식으로 은밀하게 계속 중보기도를 일삼으면은 그 중보기도를 일삼는 사람들에게 스토리가 부족할까요? 아닙니다. 기도 많이 하는 분들 이야기는 비대면이나 대면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항상 사랑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자, 그래서 오늘 본문에 ‘살았다’라는 말뜻을 이해하려면은 누가복음 15장 24절을 읽어야 됩니다. 여러분 잠깐 기억하세요. 아버지가 한 말입니다. “이 내 아들은,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랬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보고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런데 이 돌아온 탕자가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까? 이제 살아난 아들처럼 살아야 합니까? 살아난 아들처럼 살려면 금가락지와 신발을 신기고 옷을 입히고 환영을 받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뭐하고 똑같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은 것은 정확하게 탕자가 돌아와서 살아있는 자가 된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께 산 자가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자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안고 영 단번에 십자가의 징벌적 죽음을 감수했습니다. 그 징벌적 죽음을 내 죄 때문에 죽었다고 믿는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처절하게 내 죄 때문에 죽은 죽음이라는 걸 믿는 순간이 예수 믿는 순간입니다. 그 예수 믿는 순간에 예수님과 함께 내가 십자가에 못이 박혔다는 걸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 언약적 책임을 진 언약 백성처럼 살아난 자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있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았다는 말은 율법을 안 지켜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훨씬 정밀하게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율법 조항 그 문자 이면도 지키는 더 격화되고 더 급진적이고 더 격상된 순종을 하는 자가 의롭게 된 자고, 그게 거듭난 자고, 이것이 하나님께 살아난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의 특징은 훨씬 하나님께 정밀하게 순종하기 위하여 하나님 말씀을 자세히 연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돈을 쓸 때 어떻게 쓰면 옳을까? 내가 이 많은 권력을 가지고 어떻게 내 권력을 올바로 사용할까?’ 그런 걸 자세히 따지기 때문에 그래서 은밀하게 숲을 이루는 곰팡이 수준의 정밀한 순종을 위해서 말씀을 읽는 거거든요. 그래서 성령 충만은 뭐라고요? 말씀 충만이에요. 왜? 성령은 김회권에게 하나님께 정밀하게 순종하고, 정밀하고 세밀하게 순종하고 항상적인 순종함을 일으키는 마음을 제게 주세요. 그러니까 제가 ‘그러면 순종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순종함의 백과사전적 예가 나와 있는, 불순종의 백과사전적 예가 나와 있는, 정밀하고 감미로운 언약적 결속의 백과사전적 예가 제시 되는 성경을 펼쳐 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아 나와 같은 상황에서는 어떻게 순종하면 좋을까?’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에 대해 산 자가 되었기 때문에 구원 받은 사람은 정신줄을 놓고 이제 ‘아이고, 아~ 구원 받았다. 이제. 아이 이제 율법 안 지켜도 된다’ 이런 게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은 거룩하신 아버지를 아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실정법이 보장하는 부동산 투기도, 대한민국 실정법이 허용하는 이 모든 재테크도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그 마음 때문에 억제 당하여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이 지상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무한한 부의 축적을 위해서 재테크에 몰두를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재테크는 실정법이 허용하는 일일 수도 있는데 하나님의 언약적, 율법적 감미로움 속에 살다 보니까 그렇게 살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렇게 살지 못하다가 보면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 영적 고결한 등고선을 따라 순례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고, 그 사람들과 친구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순례하기 때문에 이 지상에 장망성과 같은 소돔성과 고모라성과 같은 사람의 행실을 따라가지 않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고립되는 것이고, 의도적으로 고립되는 것이고, 의도적으로 고립된 우리가 만나니까 기쁜 것이고, 환희가 넘치고 끊임없이 믿음으로 살았던 간증들이 쏟아지기 때문에 교회가 튼튼해지는 거거든요. 직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스토리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언약적인 동반, 하나님과 언약적 동행을 했더니, 언약적인 충실한 삶을 살았더니 내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말하는 스토리가 직분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 스토리가 빈곤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만나도 데면데면 해서 성도들에게 친절하고 싶어도 친절을 못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과 동행한 이야기가 1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신앙 이야기를 합니까? 그런데 우리 유급성직자, 우리 교역자들은 돈을 받고 살기 때문에 없는 이야기도 지어내는 경향이 있을 수 있고, 할 수 없이 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죠.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과 교역자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교역자가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일하는 것은 일로 보세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은 일로 보시지 않고 언약적 신실함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적 신실함이 왜 중요합니까? 한 번 보세요. 오늘 본문에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 하나님은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경험하라는 게 아닙니다. 너는 이제 죄에 대해서 죽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 단번에 죽었고 우리는 일생동안 미분적, 분할적 죽음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 단번에 우리 죄를 갖고 죽었지만 우리는 영 단번에 우리 죄를 안고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을 미분적으로, 분할적으로 매일 죽기 때문에 매일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겨야 됩니다. 그러니까 매일 십자가를 져야 됩니다. 그래서 매일 십자가를 진다는 말이 나오고, 매일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다는 말도 맞고,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내가 매일 죽노라’라는 말도 맞는 겁니다.

 

마무리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영 단번에 죽으심이고 김회권과 배연정과 정선희 등의 죽음은 분할적 죽음이에요. 예수님은 한 번에 죽어서 죽음을 완료했는데 우리는 매일 죽어서 죽음을 현재 진행형적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완료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매일 죽어야 돼요. 그래서 이걸 저는 미분적 죽음, 분할적 죽음이라고, 이 미분이라는 것을 저는 수학을 배우면서 깨달은 거였는데 미분적 죽음을 해야 되는 거예요. 저는 이것을 깨닫고 제가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드릴지 불의의 병기로 드릴지는 매일 결단해야 돼요. 그래서 ‘그러면 목사님 저 이스라엘 백성과 신자가 하나도 다를 게 없네요? 기독교인이요! 이스라엘 백성도 언약백성으로서 내가 너 앞에 생명과 죽음을, 복과 저주를 두느니 생명을 선택하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신명기 11장 26절, 27절, 신명기 30장 통해서요!’ 맞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언약 백성이니까 매일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삶을 선택하고 복을 선택하듯이 우리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천국 가더라도, 천국 가더라도, 이 선을 선택해야 되는 고투는 계속 됩니다. 그러면 천국이라 함은 선과 악을 의도적으로 선택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선해지는 결단을 기계적으로, 본능적으로 계속 선해지는 행동만 계속하는 것이 천국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천국을 설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천국 가서도 선을 결단하는 일의 중요성을 가르칠만한 환경을 제시할 겁니다. 아마도.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는 똑같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윤진 자매님, 신명기 11장 26절부터 28절을 읽어주세요.

 

26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27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28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예, 11장 26절 이 원리가 정확하게 우리랑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뭡니까? 죄에 대하여 우상숭배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길지어다. 여길지어다가 바로 뭡니까? 매일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해서 여길지어다. 복과 생명과 저주와 죽음 중에서 복과 생명을 선택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우리 연진 자매님? 신명기 30장 15절 읽어주세요.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계속요.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와~좋습니다. 그 다음에 원예진 자매님 18장 5절이요.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게 바로 정확하게 로마서에서 ‘산다’는 뜻입니다. 자, 요약합니다. ‘산다’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을 감미로운 마음으로 지키는 상태다. 하나님의 율법을 기분 좋고 행복한 마음으로, 감미로운 마음으로 준행하는 걸 ‘산다’고 말한다. ‘죽었다’는 말은 뭔가? 죄 짓는 일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죄 짓는 일에 더 이상 관심이 없는 걸 ‘죽었다’고 한다. 자, 그러면 결론적으로 이렇게 하나님과 감미로운 언약적 결속을 즐기다 보면은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열매가 나타납니다. 하루 이틀 멀지 않아 열매가 나타날 때 그 열매가 우리를 지탱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너무 재미있습니다. 진짜! 진짜, 진짜, 매일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그런 뜻이 무슨 말인가 알게 됩니다. 여러분 주변에 엄청난 스토리가 벌어질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이렇게 감미롭게 사랑하시면은 너무너무 교회 다니는 것도 재미있고, 신앙생활 너무 재미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렇게 엄청나게 재미있는 감미로운 신앙생활 돌입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너무너무 놀라운 복음으로 저희들을 살려주시고 예수님이 영 단번에 죽으신 죽으심을 일생동안 조금씩 죽게 하셔서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기는 감미로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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