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막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눅 10:25-37)
유명한 신학자 '밀턴 부버'는 '참된 삶은 만남이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만남의 존재입니다. 인간의 운명이란 우연이든 필연이든 모두 다 만남이라는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 성공한 사람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다 만남에 잘된 사람들입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 또 좋은 스승을 만나 위대한 진리를 배워서 삶을 지혜롭게 사는 사람들! 또 이 세상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 출세의 길로 달려갔던 사람들로 있습니다. 이 모두가 다 만남의 잘된 축복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불행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실패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사람들을 잘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 길을 가는 동안 좋은 사람, 형통한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배우자를 잘못 만나서 날마다 탄식과 한숨으로 밤을 지새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만나서는 안 될 사람들을 만나 치명적인 손해를 본 사람들도 많습니다.
부모를 잘못 만나 술집에 팔려 가는 딸도 봤습니다. 종업원을 잘못 만나 사업에 실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인을 잘못 만나 착취만 당한 고용인도 있고, 위정자를 잘못 만나 도탄에 허덕이는 백성들도 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그러기에 인생은 잘 만나면 행복이요, 못 만나면 불행입니다. 상대를 괴롭히고 해롭게 하는 만남은 불행한 만남이요, 서로를 좋게 하는 것은 행복한 만남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아침 우리 성도들에게 좋은 만남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할/
■오늘 본문이 그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써, 강도 만난 자의 이야깁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런데 본문 25절에 보면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처음부터 잘못된 사람입니다. 불순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께 접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믿/
그 율법사의 반응에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되물으십니다.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때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을 때 버리고 도망갑니다. 이때 그 길을 제사장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를 보고도 못 본 척 피해갑니다. 또 레위인도 지나가는데 그를 보고도 피해 못 본 척 피해 갔습니다.
그 때 마침 사마리아 사람이 여행을 하면서 그 길을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 주고 주막집에 데리고 가서 돌봐줍니다.
이튿날 사마리아 사람은 두 데나리온을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이 사람을 돌봐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 갚아 주겠소" 부탁을 하고 떠나갔습니다.
비유를 마치신 예수께서 율법사에게 "그대 생각에는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그는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 "너도 가서 그렇게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를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율법사는 율법을 지키는 것만이 영생을 얻는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 율법사에게 예수님은 이웃에 대한 비유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조심히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여기 이웃은 착한 일을 하는 이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이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생명을 살려주는 이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웃은 강도 만난 자가 아닙니다. 강도 만난 자를 살려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바로 이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 나그네 길에서 강도를 만나 신음하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혼에 강도를 만나 거반 죽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마음에 상처를 입고 한이 맺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잃고, 사업이 망하고, 가정이 파탄되고, 인생이 비참하게 쓰러지는 슬픈 사연들을 우리가 종종 봅니다.
여러분! 강도 만난 사람을 누가 살렸습니까?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여기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여러분! 인생 길에서 강도를 만나 어떤 형편에 있을지라도 그 형편에서 우리를 살려 내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많은 학자들은 본문의 비유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을 합니다.
여기 강도 만난 한 사람은 아담, 즉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을 가리킵니다. 강도는 사탄과 마귀, 예루살렘은 낙원, 하늘 나라를 가리킵니다. 여리고는 세상, 내려갔다는 것은 타락으로 보았고, 그리고 제사장은 율법의 대표자 모세로, 레위인은 예언자들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시요, 기름과 포도주는 성령의 기름과 십자가의 보혈, 두 데나리온은 성부와 성령, 주막은 교회요, 주막집 주인은 목사요,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은 주님의 재림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할/ ◀제목소개!▶
오늘 본문을 보면 세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①만나서는 안 될 사람이 있는데 이는 강도입니다. 강도는 안 만나야 합니다.
②또 만나나 마나한 사람이 있는데, 누구입니까? 제사장과 레위 인입니다. 유익도 손해도 없는 평범한 만남입니다.
③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이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인생길 가는데 험하여도 이런 분 만날 수만 있다면 참으로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길이 될 수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서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땅에는 많은 사람들이 강도를 만나서 건강을 빼앗기고, 재산을 빼앗기고, 생명을 잃기도 하며 탄식하고 울고 있습니다.
인간은 여러 가지 면에서 강도를 만나고 있습니다. 선한 양심이 도적을 맞기도 하고, 행복한 가정이 강도를 만나서 울기도 합니다. 사업에 강도를 만나고, 건강하고 평안한 심령이 강도를 만나 근심 가운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여러분! 인간 누구에게나 강도를 만날 위험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인생행로 도처에 원수 마귀의 정략이 있고 계략이 있는데 걸리면 바로 강도 만난 자가 됩니다.
■먼저 27절의 말씀을 한번 집고 넘어갑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가장 잘 묘사된 용어는 '예배'입니다.
교회는, 성도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는 내가 예배를 통하여 어떻게 그 분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느냐?는 말입니다. 예배보다 더 귀중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스타가 되고 장관이 되고 세상이 알아주는 인물이 되었다 할지라도 바빠서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실패한 사람이 됩니다. 아무리 열심히 주의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예배보다 우선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늘 말합니다 만은 우리의 사명은 예배와 선교입니다.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자기를 섬기듯이 이웃을 섬기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믿/
세상의 관심은 얼마나 섬김을 받느냐에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우리 주님도 막10:45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읍니다.
■그리스도인이 무엇하는 사람이냐? 결론은 하나님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신학자 '본 훼퍼'는 "예수님은 이웃을 위해 존재했다"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인류를 위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며, 주장할 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할 때 비로서 빛을 발하게 됩니다.
요일22: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20세기에 가장 존경받은 분은 든다면 "알버트 슈바이쳐"박사입니다. 이유는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20세 때 "30세가 될 때까지는 예술과 학문에 정진하고, 30이 넘으면 인류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의 결심대로 30세 때 아프리카로 들어가 흑인들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 봉사했습니다.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던 손이 통나무를 잘라 병원을 짓는 손으로 변했습니다. 병든 몸을 만지던 그 손이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인술의 손이 된 것입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질 때 말이 필요 없습니다. 십자가가 말하기 때문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어서 만민이 기도하는 곳이요, 말씀이 있는 곳이며, 은혜가 있는 곳이요, 축복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거기를 떠났다가 불행을 만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내려갔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사업이 내려가도 안됩니다. 건강이 내려가도 안됩니다. 신앙이 내려가면 정말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올라가야 합니다.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같이! /할/
■성경에는 내려갔다가 불행하게 된 사건이 많이 나옵니다. 창12:10절 이하에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바로에게 그의 마누라(부인)를 빼앗길 뻔 했습니다.
룻1장에 보면,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모압 지방으로 내려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립니다.
내려갔다는 말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성도는 신앙이 절대로 내려가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이 내려가고, 기도 생활이, 감사 생활이, 봉사 생활이 내려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때 조심해야 합니다. 강도 만날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두 길이 있습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이 있고,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 있습니다. 이 두 길 중에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인생은 누구를 만나야 합니까? 사마리아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삽니다. /할/
■어떤 분이 이렇게 비유를 했습니다. 한 사람이 강도 만나 피 흘리며 죽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 빼앗기고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석가가 지나가면서 피 흘려 죽어 가는 사람에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하고 지나갑니다. 조금 있다가 공자가 지나가면서 "군자는 대로 행인데 조심해야지" 하면서 지나갑니다.
다음엔 예수께서 지나가시다가 보시고, 가까이 오셔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하려고 함이라"고 말씀하시고 자신의 피를 쏟아 강도 만난 자를 살리고 자신은 죽었다는 비유로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을 잘 묘사한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본문에 있는 강도 만난 사람이 무엇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습니까? 마땅히 예루살렘을 위하여 써야 할 건데, 여리고라는 세상을 위하여 쓰려고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마땅히 하늘나라 새 예루살렘을 위하여 자신의 건강을, 재물을, 시간을 주님께 써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을 위하여 쓰려고 하다가 강도 만나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하늘나라에 심으면 심은 대로 거두리라고 하시면서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눅6: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여러분! 온 인류는 강도 만난 자들인 것을 기억하십니까? 언제 만났습니까? 에덴동산에서부터 인류는 강도를 만났습니다.
곧 사탄이 우리의 강도로 등장합니다. 마귀는 강도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요10:10절에서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여기 도적이 누굽니까? 도적은 마귀요, 마귀는 살인잡니다. 요8:44절에 보면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고 합니다.
■이 세상사에는 살리는 운동이 있고, 죽이려는 운동이 있습니다.
인류가 한 일은 살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귀에게 속하여 서로 죽이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살리러 오셨고, 마귀는 죽이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마귀는 인류를 타락케 해서 멸망으로 끌어가려고 합니다.
지금 인류는 강도를 만나 옷이 벗겨진 채 매 맞아 거반 죽게 된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이 광경을 제사장도 보고, 레위인도 보고 지나갔습니다. 사실 이들은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저들에게 살린 만한 능력이 없고, 강도 만난 자의 상처를 치료할 약이 없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율법으로는 생명을 살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사마리아 인에게 있는 포도주와 기름으로 상처를 싸매고 돌보아 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의 보혈만이 우리가 살아날 수 있고, 주의 성령으로만이 살아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요10:10절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 제사장과 레위인을 보면서 이렇게 나쁜 사람이 있는가? 어떻게 피하여 자나갈 수 있는가? 지도자들이 그렇수가 있느냐고 몰아 세울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강도를 만난 자를 싸매 줄 것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에게는 없었습니다.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가진 것이 있었는데 곧 포도주와 기름입니다. 포도주는 주님의 보혈이요, 기름은 성령입니다. 여기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자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사마리아 인으로 비유해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씀하셨고, 또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실 것을 예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인류를 살리기 위해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신 일입니다. 아무도 강도 만난 자를 살리기 위해 피를 흘리지 못했습니다.
공자도 못했고, 석가도 못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죄인들을 위해 피를 흘릴 사람이 없습니다. 피 흘려 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성령의 기름부음 만이 사망에 빠진 인류를 살려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을 살리려고 오셨습니다. 병든 자를 건강하게 살리십니다. 불의하고 악한 자를 의롭게 살려 놓습니다. 또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를 통해서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이 닿으면 모든 사람이 다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살림'을 하러 오신 분입니다.
살림은 '살리다'의 준말입니다. 교회는 인간과 세계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시작하신 살리는 일을 계승받은 곳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살림을 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저의 목회는 예수님의 살림을 하는 것인데, 바로 여러분들을 살리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건강, 가정, 사업, 자녀들의 문제를 놓고 기도할 적마다 예수님은 세운 종을 통하여 당신의 살림을 대신 하십니다.
어머니는 가정의 살림을 맡으신 분이요, 기업가는 회사의 살림을 맡은 자요, 교육가는 학교 살림을 맡은 자요, 정치가는 나라 살림을 맡은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분야의 살림을 맡아 섭리하십니다. 그 살림을 교회를 통해서 세우신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하고 계십니다. /믿/
오늘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자에게 포도주를 붓고, 기름을 바르고, 싸매어서 어디로 데리고 갔습니까? 주막으로 데려갔습니다.
■주막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오늘 주제입니다.
①여기서 주막은 오늘날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맡겨 주신 사람들을 돌보는 곳입니다. 교회는 주막집입니다. 예수님은 이 주막집에 그러니까 우리 성림교회에 사람들을 맡기셨습니다. 지금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창세 전에 택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때가 되어 교회에 맡겨진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그 성도들이 다 강도를 만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의 강도를 만나 주막에 왔고, 어떤 사람은 사업에 강도를 만나 다 망해 버리고 주막에 왔고,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환경에서 강도를 만나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주막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찾아온 것이 아니고 사마리아 사람이 주막에 데리고 왔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러 성령님이 인도해서 오늘 이 자리에 왔다는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합시다. /할/
그런데 여러분! 주막에 왔다는 사실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 오늘 본문에 강도 만난 자가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 주막으로 인도되어 깨끗하게 치료받고 살아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의 어떤 형편에서든지 강도 만났다 할지라도 오늘 이 자리가 치료받고, 해결 받고, 능력 받고, 축복 받는 자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으시면 아멘!
②목사는 주막집의 주인입니다.
사마리아 인이 강도 만난 자를 치료하여 주막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강도 만난 자를 치료한 것은 사마리아 인이요, 주막집 주인은 그를 돌보고 있습니다. 제사장도 가고, 레위인도 사라졌습니다. 사마리아 인도 떠났습니다. 떠났다는 말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의미합니다.
사마리아 인은 강도 만난 자를 주막집에 맡기고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피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의 기름을 인류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지금 교회는 주막집에 되어 주님께서 맡기신 사람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막집 주인은 목사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성림 주막에 맡기신 것입니다.
③주막집은 나그네들이 음식을 먹고 가는 곳입니다.
옛날 주막집은 지나가는 길손들이 잠시 쉬어 가는 곳이요, 술을 마시기도 하고, 길을 묻어 가기도 하고, 음식을 사 먹는 곳으로 나그네들에게 꼭 필요한 곳입니다. 주막집이 현대화 된 것이 여관이요 호텔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곳에 주막집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여기서 쉬어갑니다. 사마리아 인은 강도 만난 자를 치료하고 주막집에 맡기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떠나면서 이 사람을 잘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여기 사마리아 인이 떠나면서 말한 "내가 돌아올 때까지"란 어느 때입니까? 분명히 주님께선 재림하여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돌아올 때까지 돌보아 주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떡을 먹이는 일입니다. 교회에 찾아온 성도들을 말씀의 떡을 먹여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생명의 떡을 먹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이 떡은 먹고 죽지 않는 영생의 떡이요, 이 떡을 먹는 자마다 주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떡집)에서 나셨고, 인간의 밥이 되어 주시려고 구유(밥통)에서 나셨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강도 만난 나그네가 와서 말씀을 먹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되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이 소생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④주막집은 나그네들이 쉬어가며 안식을 얻는 곳입니다.
나그네들이 먼 길을 가다가 피곤하면 주막집을 찾아가 쉬고 갑니다. 또 비바람이 불고, 날씨가 추워지면 이곳에서 쉽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쉬어 가는 곳이요, 비바람을 피하는 곳입니다. 인생 나그네들이 천성을 향하여 갈 때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가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친정 집과 같아야 합니다. 옛날 여인들은 시집살이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그때 여인들이 친정 집에 가서 어머니 품에서 안식을 얻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댁으로 올 때 푸짐한 선물도 가지고 돌아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여러분들도 교회 오셔서 하나님께 많은 것을 받아 가지고 가야 합니다. 먼저 하늘의 신령한 복을 많이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땅에 기름진 것을 받아 가지기 바랍니다.
성도들은 교회에 와서 은혜를 받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손에 축복을 들고 돌아가야 합니다. 병든 자는 건강을, 낙심한 자는 용기를,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은 하늘의 소망을 얻어, 가슴에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우고 가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의 축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할/
⑤주막집은 나그네들이 술을 마시는 곳입니다.
교회는 신령한 주막입니다. 주막집은 술 취한 사람들이 많아야 소문이 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 성림 주막에 성령님을 보내시어 성령의 새 술에 취한 사람들이 되라고 하십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새 술에 취한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인색한 사람도 술 마시면 후해집니다.
주막집 주인은 나그네들이 주막에 와서 술 마시고 흥겹게 놀다가기를 원합니다. 목사는 여러분들이 다 성령의 새 술에 취하기를 원합니다.
술은 새 힘을 줍니다. 술을 마시면 강하고 담대한 힘이 솟아납니다. "네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강하고 담 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 기었느니라" 이런 힘이 새 술에서 나옵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시기를 바랍니다.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 되는 세상!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만 됩니다. 성령의 새 술에 취해야 합니다. 술은 인생을 즐겁게 합니다. 노래를 하게 하고, 춤을 추게 합니다. 술은 놀이마당을 제공해줍니다. 한마디로 술 취하면 세상 살맛이 나듯이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모든 것이 똑 소리 납니다.
그래서 "성령 받으라! 성령 받으라!" 외치는 것입니다. 행1: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힘으로도 할 수 없고, 능으로도 할 수 없으나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할 수 있느니라"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교회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예배가 바로 드려져야 하고, 강도 만난 자의 주막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 이웃이 누군인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던 길 멈추고 주막인 교회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세상살이 지친 자들이 여기 성림의 주막에 와서 쉼을 얻고 용기를 얻어 새로운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먼저 믿는 우리가 돌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는 참된 이웃이 되기를 바랍니다. 강도 만난 자를 주막으로 인도한 사마리아 사람이 참된 이웃입니다. 한번 따라 하고 말씀을 마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할렐루야! 아멘! (2003년 10월 19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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