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에 있는 '여리고'를 무너뜨리자! (수 6:15-21)
어느 목사님이 서울에 있는 한 교회에 새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부임한 교회의 교회학교가 얼마나 아이들을 잘 가르쳤나 보려고,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얘들아, 여리고는 누가 무너뜨렸지?" 그러자 아이들이 한결같이 대답하는 말, "목사님, 우린 아니에요. 우린 여리고를 무너뜨리지 않았어요" 합니다.
목사님이, "아니, 그럼 너희들은 여리고를 누가 무너뜨렸는지 모른단 말이냐?"고 했더니, 곁에 있던 교사들이 말을 합니다. "목사님, 누가 여리고를 무너뜨렸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 아이들은 아닙니다. 그건 우리가 보증합니다"
기가 막힌 목사님이 할 말을 잃고 낙심해 있자, 이를 보던 수석 장로님이 그랬답니다. "목사님, 그렇게 낙심할 것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무너뜨리지 않았다지만, 그까짓 것, 교회 재정으로 보수해 줍시다" 성경을 몰라도 한 참 모르는 소리입니다. ◀제목소개!▶
오늘 본문의 배경은 절대 절망! 절대 위기 가운데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건져내신 사건입니다.
배경: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불쌍히 보시고, 위대한 지도자 모세를 통하여 430년의 종살이를 마감하게 하고 애굽에서 건져내 홍해를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향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만 건너면 완전히 애굽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줄로 생각했고 모든 것이 끝난 줄로 생각했습니다. 이젠 완전 자유! 완전한 독립! 완전한 해방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첫 작업에 불과했습니다.
이제부터 정신을 차려야 하고, 용기를 내어야 하고, 담대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광야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 배고픔을 당해야 했고, 추위에 떨기도 했으며, 때때로 죽음의 위기를 수도 없이 넘기는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너무 힘들고 고달플 때는 애굽을 생각하기도 했고, 자기들을 인도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나안을 향해 계속 나아갔습니다.
결국 많은 고생과 방황 끝에 가나안 땅 입구까지 왔습니다. 백성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은 실망하고 낙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방향과 목표를 잃어버렸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이렇게 귀합니다. 나라뿐이 아니지요! 교회의 지도자도, 가정의 지도자도 정말 귀한 분들입니다.
자! 위대한 영도자 모세가 죽었습니다. 절망과 좌절가운데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지도자를 예비하셨다가 세우셨습니다. 그가 바로 본문의 주인공 여호수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단강을 건너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길목에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가는 입구에 장엄한 철갑성인 여리고 성이 딱 가로막고 서 있습니다. 절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여리고 성이 장애물입니다.
우리도 지금 천성 문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데 많은 여리고 성과 같은 장애물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장애물, 우리들의 축복을 가로막고, 사업을 가로막고,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먼저 여리고 성을 어떻게 무너뜨렸는가를 알아보고, 그 다음 우리 안에 여리고 성이 무엇인가를 같이 알아보려고 합니다.
1. 먼저 여리고 성은 어떤 성인가?
그 당시 작은 소읍으로 요단강 대평원 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로써, 그 전략적 위치 상 매우 중요한 가나안의 방어 거점으로써 군사시설의 요충 지대이며, 따라서 가나안 중부로 통하는 교통의 중심지입니다.
여리고는 ‘향기 나는 곳’이란 뜻으로 종려나무와 삼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사람들은 <종려나무의 성읍/향기 나는 성읍>이라고도 부른 답니다.
그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공격이 어려운 그런 요새랍니다. 즉 여리고 성은 가파른 경사지 정상에 쌓았으며, 적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밖으로 3-4미터의 높이의 장애물들을 설치했을 뿐만 아니라, 그 밑은 깊은 낭떠러지가 있으므로 군사작전상 절대 공격 불가능한 그런 천연요새입니다.
1절을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여리고 사람들이 성문을 굳게 닫은 것은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굳게 닫힌 성문을 부수고 공격한다든지 성곽을 넘어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세상도 문이 굳게 닫혀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아파트 벨을 눌러도, 주택을 돌아다녀도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문만 아니라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삽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갈 틈을 주지 않습니다.
본문의 굳게 닫힌 견고한 성은 무너질 수도 없고, 무너져서는 안 되는 성입니다. 그런데 무너졌습니다. 여하튼 여리고는 여호수아의 군대에게 포위 된지 일주일 만에 그 기초마저 깡그리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성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점령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경험한 또 하나의 기적이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2. 여리고 성이 무너지기까지는 몇 가지 신앙의 위대한 법칙이 있습니다.
①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무너뜨렸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언약서입니다. 사람의 약속도 믿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약속은 깨어지기가 쉽습니다. 왜? 인간의 마음이 조석변개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약속은 믿을 수 없지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믿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오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었습니다.
2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또 16절 "일곱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여리고 성이 아무리 견고하고 굳게 닫쳤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붙이셨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셨다는 것은 곧 승리를 보장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도 보장된 승리가 있고 축복이 있는 줄 믿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이미 여리고 성에 들어가기도 전에 하나님이 그 성을 여호수아에게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5:13-15절에 보면 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에 가까이 왔을 때였습니다. 눈을 들어보니 어떤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앞에 서 있습니다. 깜짝 놀란 여호수아가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말은 쉽게 표현하면, <너는 아군인지 적군인지 밝히라>는 말입니다.
이 때 14절에서 그 분이 대답을 합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그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었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자기가 이스라엘의 영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군대 장관 앞에서 엎드려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이 때 그 분이 엉뚱한 이야기를 합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합니다.
지금 여호수아는 여리고 전투를 앞에 두고 초긴장이 되어 있었고, 이런 가운데 여호와께서 하늘의 군대 장관을 보내셨으므로 여호수아의 기대가 굉장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여리고 전투에 작전을 들려주시기를 기다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군대 장관은 짤막한 한마디를 던집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무슨 뜻입니까?
⑴너를 나의 종으로 세우겠다는 뜻입니다.
당시에 종의 신분이 아니고서는 신을 벗고 다니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여호수아의 신을 벗기신 것은 그를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 부르신 사실입니다.
종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분은 주인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습니다. 그 종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권한이 주인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의 신을 벗기신 것은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신 것과 그의 생명과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지시겠다는 의미입니다.
⑵죄를 버리라는 뜻입니다.
수3:5절에서 여호수아가 요단강 앞에서 백성들에게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요단강 물을 가르는 역사를 베푸실 터이니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성결하라>고 요구하신 하나님이 여리고 전투를 앞에 두고는 <네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즉 죄를 버리고 성결한 백성이 되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누가 능력잡니까? 기도 많이 한 사람입니까?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입니까? 물론 기도 많이 하고 말씀 많이 보면 하나님이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결한 자에게 주십니다. 더러운 심령 위에 주시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심령 위에 하나님의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능력자는 성결한 사람, 깨끗한 사람입니다.
공직 사회에서도 그렇습니다. 깨끗한 사람이 큰 소리를 칠 수 있습니다. 뒤가 캥기면 큰 소리를 칠 수가 없습니다.
⑶거룩하신 하나님 앞이기 때문에 신을 벗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찾아주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신전의식>이 중요합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백성이 싸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나팔을 불었을 뿐이요, 그 성을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돌았을 뿐입니다. 그 때 싸운 것은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었고, 여호와의 군대가 싸웠습니다.
수5:13절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군대 장관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있었다는 것은 싸울 태세를 이미 갖춘 모습입니다. 바로 여리고의 전투태세가 완료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세밀하게 준비해 놓고 기다리십니다. 이렇게 준비해 놓고 계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로 믿고 믿음으로 행하면 지금도 여리고는 무너지는 줄 믿습니다.
히11:30절 "믿음으로 7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향기가 나는 여리고 성에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은 믿음의 힘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자들, 여리고 성에 들어간 자들은 다 믿음의 사람들 이였습니다. 믿음이 없었던 자들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믿음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고, 이 믿음의 보상은 우리가 믿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후 약 1,500년이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 그 여리고 성을 지나가시게 되셨습니다. 그때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향하여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자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시니 그의 믿음대로 눈이 밝아졌습니다.
소경이 눈을 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호수아가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지 약 1,500년 후에, 다시 믿음의 사람에게 역사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히11:6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첫째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 하나님은 엘로힘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믿/
그 다음, 하나님이 지금도 역사하심을 믿어야 하고, 그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좋은 것으로 상 주시는 분이심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어디에서 생길까요?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롬10: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②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할 때 여리고는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여리고 성의 주위를 돌라고 명하십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생각할 때 어처구니없는 일이요 웃기는 일입니다.
3절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 7명이 7양각 나팔을 손에 들고 제일 앞서 가고, 그 뒤에 언약궤가 따르고, 그 뒤에 백성들이 따르면서, 여리고 성을 매일 한 바퀴 씩 6일 동안을 돌았습니다. 그리고 제 7일에는 7바퀴를 돌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돌 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리고 성을 돌 때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수6:10)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말 없이 성을 돌았습니다. 이것은 이유를 대지 않고, 불평도 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순종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입만 열면 불평이요 원망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곳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완전 침묵시위를 시켰습니다. 왜? 인간적인 전략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략으로 하는 것이기에 인간의 언어, 인간적인 이야기, 인간의 경험과 인간의 지혜에 근거한 견해는 말도 꺼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말들은 도리어 방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6일 동안은 하루에 1바퀴씩 돌고, 제7 일에는 7바퀴 돈 것에도 순종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6일 동안은 하루에 1 바퀴씩 돌고, 제 7일에는 7바퀴를 돌아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지지 않고 절대적으로 순종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왜 오늘은 한 바퀴를 돌아요? 왜 오늘은 7 바퀴를 돌아요?"하고 묻지도 않았고,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순종하자 여리고 성은 저절로 무너졌습니다.
사실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을 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침묵하며 순종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6일 동안이나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비합리적인 일을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행한다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믿음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기적은 순종하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③언약궤를 메고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절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여호수아는 지도자이지만 결코 하나님의 법궤를 앞서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항상 예수를 앞세우고 자신은 그 뒤를 따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법궤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앞서 가는 법궤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앞서 가신다고 생각했고, 또 내 뒤에 있는 법궤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내 뒤에 계신다"고 믿어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가지고 행할 때 이 법궤는 항상 맨 앞쪽 아니면 한가운데에 위치했습니다. 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할 때는 법궤는 앞서갔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그들이 머물 때는 이 법궤는 가운데에 위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가 앞서갈 때에는 '앞서 가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했고, 법궤가 한가운데 위치할 때는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언약 궤! 하나님의 말씀(십계명)이 담겨 있는 궤! 말씀을 붙들고 가라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나아간다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공 비결은 확실한 약속의 말씀과 그에 대한 믿음과 순종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십시오. 어려운 때일수록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붙드십시오. 그 말씀이 '승리의 깃발'을 줄 것입니다.
④나팔을 불 때 무너졌습니다.
4절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절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나팔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처음 만나는 시내산 장면에 보면 큰 나팔 소리와 함께 하나님께서 강림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강림하시고, 임재 하신다는 표징으로 나팔소리가 울려나곤 하였습니다.
첫째 날도 제사장 일곱이 나팔을 불었습니다. 둘째 날도, 셋째 날도, 넷째 날도, 다섯째 날도, 여섯째 날도 그리고 일곱째 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 일곱 바퀴를 돌며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 나팔을 불 때 여호수아의 구령에 맞춰 모든 백성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절대 복종하는 모습이고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또한 질서 있는 행동이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성도들의 신앙을 크게 축복하십니다.
나팔 소리와 백성의 고함 소리가 한데 어우러지면서 뇌성벽력처럼 들렸습니다. 그 순간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사장 일곱만이 나팔을 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모든 제사장들의 대표이며 백성의 대표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악기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타악기입니다. 두드리고 흔들어서 소리를 내는 악기로써, 큰북, 작은북, 탬버린 등이 있고, 둘째는 현악기입니다. 이것은 줄을 뜯어서 소리를 내는 악기로서 비파, 거문고 등이 있고, 셋째는 관악기입니다. 이것은 입으로 부는 악기로써 수염소 뿔로 만든 나팔을 들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그 나팔을 분 것입니다.
●구약 시대 나팔을 부는 경우는, 시간을 알릴 때, 소식을 전하기 위해 불었고, 또한 전쟁의 시작과 끝을 알릴 때 불었습니다. 본문의 경우는 승리의 나팔이었고 선포의 나팔이었습니다. 살전4:16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지상 종말과 주님의 재림 때에도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팔>이라는 점입니다. 군악대나 경찰 악대가 부는 나팔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팔입니다. 여리고 성 정복 당시의 경우도 모든 백성이 다 나팔을 분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별된 일곱 제사장만 불었습니다. 그 나팔 소리를 들으며 백성들은 행군했고, 마지막 날 일곱 바퀴를 돌 때에는 나팔소리와 함께 우렁찬 함성으로 소리를 쳤던 것입니다.
이 나팔 소리는 승리의 함성이었고, 믿음의 함성이었습니다. 우리도 이제 복음의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을 움직이는 곳에는 복음의 나팔이 울려 퍼져야 합니다.
마24:31절에 보면 마지막 주님 재림 때 예수님은 천군 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오신다고 했습니다. 계11:15절에 보면 일곱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이 세상은 여리고 성과 같이 무너지고 주님이 다스리는 새날이 온다고 했습니다.
⑤새벽 기도시간에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6일 동안 일찍 일어나서 성을 돌았습니다(12). 그러나 제 7일에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성을 7 바퀴 돌았습니다(15). 성을 7바퀴를 돈 후에는 제사장들을 나팔을 길게 울려 불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크게 소리 질러 외쳤습니다. 그때에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성을 7바퀴 돌고, 7제사장들은 크게 나팔을 울려 불고, 백성들이 크게 소리 질러 외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통성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새벽제단을 쌓을 때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고, 향기 나는 곳에 들어가려는 우리를 가로막는 높고 견고한 여리고 성은 우리가 새벽에 일어나 부르짖어 기도할 때 무너져 내릴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향할 때, 그들 앞에 놓인 제일 처음 장애물은 홍해였습니다. 그런데 그 홍해가 갈라진 것이 새벽이였습니다. 그 새벽에 애굽의 군대들이 다 홍해에 수장되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다윗의 나라를 괴롭히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가 블레셋이였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이 이 블레셋을 완전히 물리친 것도 새벽이였습니다(삼상30:17).
시46:5절 "하나님은 새벽에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러나 새벽에는 더욱더 우리를 도우십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도 새벽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 간 것은 새벽입니다. 이렇게 새벽에 하나님의 역사가 많이 일어납니다. 새벽은 이렇게 가로막는 담을 허는 능력이 있습니다./믿/
▶기도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야곱의 얍복강가의 기도는 20년 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에서의 복수의 마음을 사라지게 했고, ?모세가 기도하자 여호수아의 군대가 아멜렉을 물리쳤으며, ?한나가 기도하자 아들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다윗이 기도하자, 반란을 일으켰던 아히도벨이 스스로 목매어 자살했고, ?다니엘이 기도하자 사자의 입이 막혔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하자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고, 또 기도하자, 다시 비가 내렸습니다. ?엘리사가 기도하자 죽은 소년이 영혼이 돌아 왔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영원까지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그 견고한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축복의 문을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 성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건강입니까? 사업입니까? 믿음 붙잡고 씨름해 보세요!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 같이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먼저 내 안에 신앙의 여리고 성이 딱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내 안에 들어 있는 여리고가 무섭습니다. 우리 이 시간에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여리고 성이 몇 가지인가 같이 생각해 보면서 하나하나씩 무너뜨리며 하나님의 기적의 주인공들로 바꿔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우리 안에 있는 여리고는 무엇인가?
①우리 안에 가장 큰 여리고는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실존과 능력을 의심하거나 과소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울 왕이 왜 망 한지 아십니까? 불신앙 때문에 망했습니다. 아담이 왜 무너졌습니까? 불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지금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불신앙을 찍어 버리고, 믿음으로 굳게 서시기를 바랍니다.
히11:6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막9:23절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②우리 마음속에 여리고는 <게으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게으름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회학자인 <펙크>는 <게으름은 악의 주요 원인이요, 심리적인 병의 원인이요, 인간관계에 있어 실패하는 주요 원인>이라고 설파했습니다. 사실 게으름 때문에 인관 관계가 많이 실패합니다. 게으름 사람은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게으름의 태도는 자꾸 내일로 미루는 태도입니다.
여러분! 마귀가 성도를 파괴시키는데 사용하는 무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내일로 미루는 게으름입니다. 현대 신종 마귀는 바로 내일 마귀랍니다. 예수 믿는 것도 내일! 교회 가는 것도 내일! 기도하는 것도 내일! 열심 내는 것도 내일!
모든 것을 안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지 말고 해도 내일 하자고 속삭입니다. 오늘날 성도 가운데 내일 마귀에게 사로잡힌 교인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잠24:33정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우리 오늘 <좀더 자자! 쉬자! 놀자>하는 게으름의 여리고 성을 쳐 부시고, 내일로 미루는 사탄의 전략도 찍어 버리고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시기를 축원합니다.
③우리 안에 여리고는 우리 속에 있는 <정욕>입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모든 인간은 정욕의 지배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의 생활 속에 주님의 능력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는 정욕에 의해 지배당하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갈5:17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약4:1절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이 정욕 때문에 이웃과의 싸움이 일어나고, 형제간에 다툼이 일어나고, 또 자기와의 싸움이 일어납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연약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하신 성령의 역사 없이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육체의 정욕에 의해 인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사 삼손도 한때 이 정욕으로 넘어져 머리를 깍기우고 힘을 잃어 적군의 포로가 되어 눈이 뽑히고 맷돌을 가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가롯 유다도 이 정욕에 포로가 되어 예수를 배신했습니다.
여러분! 정욕은 환상이요 착각의 세계입니다. 또한 순간적이요 찰라적인 것입니다. 영원한 기쁨은 그 정욕을 이길 때 있습니다.
④분노, 혈기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가로막는 여리고 성입니다.
분노는 죄입니다. 때로는 싸움의 원인이 되고, 살인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첫 번째 살인자 가인이 이 분노 때문에 자기의 동생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엡4:26절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잠12:16절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약1:20절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⑤하나님이 가장 슬퍼하시는 것이 인간의 <교만>입니다.
교만은 일종의 자기 숭배입니다. 또 거만은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잘난 체 하는 것입니다. 또 오만은 도를 넘어 사람들을 업신여기며, 하나님까지 무시하는 자입니다.
♥하나님 보좌 가까운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루시퍼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대적자인 마귀가 되었는지 아십니까?
한마디로 하나님과 똑같이 영광과 찬송을 받고자 하는 교만과 자기 숭배 때문에 하늘 보좌에서 쫓겨나 사탄의 괴수가 된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만 믿습니다. 자기가 최고요 자기가 다라고 착각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철저한 겸손의 종교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저 높고 귀한 하늘 보좌 버리시고 이 낮고 천한 곳에 오시면서 겸손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면서 <너희들도 이렇게 하라>고 겸손의 덕을 보여주셨습니다.
삼하22:28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잠16:18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약4:6절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 잠29:23절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교만을 벗어야 합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칼까지도, 체질까지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내 모습 이대로! 죄진 그대로! 허물된 몸 그대로, 병든 몸, 실패한 삶! 그대로 주님 앞에 왔나이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런 기도가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이 밖에도 우리 안에 불 신앙적인 여리고는 많이 있습니다. 시기심도, 탐욕도, 남을 헐뜯는 험담도, 의심과 불평도 다 우리 안에 신앙의 여리고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무너져 내릴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런 것들을 다 내려놓을 때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롬8:28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결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여리고를 무너뜨린 것은 군대의 힘도, 핵무기의 힘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믿음으로 무너뜨렸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앞을 가로막는 여리고 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여리고라 할지라도 먼저 내 안에 있는 여리고를 무너뜨린 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그런 믿음 안에서 새롭게 도전하면 지금도 우리들의 축복을 가로막고, 응답을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는 무너지고 홍해는 갈라지는 줄 믿습니다.
지금도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되는 역사가 분명히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처음 보다 나중이 더 좋아지는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축복을 받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2004년 9원 19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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