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나의 목자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1-6)
본문은 유명한 다윗의 대표적인 시로써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주기도문 다음으로 잘 알고 외우는 말씀입니다. 이 시편은 우리 글자로 213자입니다. 본문을 가만히 음미해 보면 반짝이는 눈물처럼 청조하고 진주를 먹음은 이슬처럼 영롱한 영감적인 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 우는 자에게는 위로를, 연약한 자에게는 능력을, 아픔을 당한 자에게는 치료를, 불안에 떨고 있는 사림들에게는 평안을, 절망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소망을 던지는 생명의 찬가입니다.
'헨리 비취'라는 설교가는 23편을 가리켜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시 가운데서 이 시보다 더 아름답고 위대한 시는 없다'고 했으며,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스펄죤'은 '신음하고 고통 당하는 자들에게 부드럽고 감미로운 사랑의 음성으로 소망과 기쁨을 실고 오는 종달새의 합창과 같은 시'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또 이 시23편은 유대인들이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암송되어진 시요, 카톨릭에서는 수도원에서 암송되어졌고, 오늘 날 한국의 일천만 성도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가 바로 오늘 본문 시23편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다윗의 위대한 신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시편을 쓰게 된 배경을 한번 보겠습니다.
다윗에게는 많은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셋째 아들 압살롬은 모든 자식들 중에 인물이 뛰어났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어디를 보아도 흠 하나 없이 잘 생긴 인물이었습니다. 얼굴이 잘 났고 몸의 균형이 잘 잡혔을 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뛰어난 천재랍니다. 무슨 일이든 앞뒤를 따져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시작하는 철저한 사람입니다.
그런 압살롬이 늘 생각하기를 '내가 임금 자격자인데 아버지는 엉뚱하게 솔로몬에게 마음을 주고 있으니 왕의 자리가 내게로 올 것 같지 않다. 그러니 미안하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구테타를 일으켜서 나라를 뒤엎고 내가 임금이 되는 거야!' 압살롬은 이런 무서운 음모와 계획을 세우고는 전국적으로 청년운동을 핑계삼아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합니다.
또 아버지의 비밀이라면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는 다윗 왕의 모사 '아히도벨'을 돈으로 매수하여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비밀리에 특공대를 훈련시킵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압살롬이 하루는 아버지 다윗에게 머리를 조아립니다. "아버지! 지난날에 지은 죄도 많고 해서 헤브론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특별 기도를 하고 새 사람 되어 오겠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기특해서 모든 준비를 해 줍니다. ▶이때 거사의 D-day로 삼은 압살롬은 처음에는 하나님께 제사들 드리는 척 하다가 돌연 혁명공약을 선포하고 자신이 왕이 되어 압살롬 왕 만세를 부르며 예루살렘을 향하여 질풍같이 쳐들어옵니다.
다윗이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구나, 당장에는 그놈을 당할 수가 없지, 그러니 머뭇거리거나 싸우다가는 예루살렘은 쑥밭이 되고 피바다가 될 것이니 아예 왕궁을 내어주고 속히 도망가는 것이 피해를 적게 입는 것이라'생각하고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을 내어주고 궁궐과 왕의 보좌를 내어 주고, 다윗은 신하 몇 사람을 거느리고 억울하고 분하기 그지없지만 망명길을 나서게 됩니다. 앞길이 깜깜하고 땅이 꺼질 것 같아 주저앉아 자살 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처지에까지 다윗의 운명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다윗은 울지 않습니다. 낙심하고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또 불평과 원망도 않습니다. 더 더욱 목숨을 끊은 일은 생각조차 하지 해 보지 않습니다. 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가 있지 않은가? 다윗은 조용히 묵상하면서 이 시편을 기록했을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지금 다윗은 아들놈이 반역을 일으켜 모든 것을 버려 두고 간신히 몸을 피해 달아나는 다급한 가운데서도 이런 여유 있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신앙을 가진 자에게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하십니다.
우리는 23편 첫 절에서부터 소망의 찬란한 새 아침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여기 목자는 우리들의 주님이요, 양은 모든 그리스도인, 곧 성도들입니다. 양이 목자의 소유이듯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은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목자되신 주님 안에 바다와 같은 사랑이 있고, 모든 허물을 덮어 주는 자비가 있으며, 그 안에는 우리를 풍성한 삶으로 양육해 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바치는 희생이 그 안에 계십니다.
원래 다윗은 베들레헴 언덕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그가 양을 칠 때 무척 양을 사랑했습니다. 양 떼를 끌고 푸른 풀밭을 찾아 살진 꼴로 배불리 먹여 주었습니다.
또 폭포같이 물이 거세게 흐르는 지역에 가면 양이 놀랄까봐 잔잔한 시냇가로 양을 끌고 가서 물을 먹였습니다. 또 곰이 나타나 어린양을 움켜잡으면 어린 다윗은 용감하게 달려가 어린양을 빼앗고 곰을 때려눕힙니다.
다윗은 지난날의 자기가 양을 돌보며 목자로써의 한 일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시니 내가 무엇을 염려하고 근심한단 말인가? 목자 되신 여호와께서 다 알아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거야!' 다윗은 이런 위대한 신앙이 있었기에 도망하면서도 찬송을 부릅니다. /할/ 여러분! 주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심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양은 모든 성도들입니다. 양은 몇 가지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①양은 약합니다(약자). 양은 멀리를 못 본답니다. 그러니까 악한 짐승이 와도 도망갈 여유가 없습니다. 사실 인간이 강한 것 같습니다. 지식, 지혜, 기술도 많아서 첨단 산업을 이루고, 산을 뚫어 고속도로도 냅니다. 그런데 인간처럼 약한 것이 없습니다. 죄를 못 이깁니다. 자신을 못 이깁니다. 심지어 감기 몸살만 걸려도 끙끙 앓고 누워만 있습니다.
②양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개나 고양이는 멀리 갔더라도 자신이 혼자서 집을 찾아오는 것을 보면 얼마나 용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양이란 짐승은 태어날 때부터 도무지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뜻을 고집하는 짐승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머리로 달나라까지 여행을 하는 가장 지혜로운 것 같은데 진정 복 받을 길을 가지 못하고 망할 길만 골라 갑니다. 우리 인간들의 본향은 하늘나라입니다. 그런데 양들처럼 스스로 본향 가는 길을 찾지 못합니다. 여러분! 많은 영혼들이 갈 길 못 찾아 헤매다가 쓰러져 죽는 심령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면 양의 진정한 행복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선한 목자를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선한 목자를 만난 양은 배고프지도 않고 원수의 공격도 피하며 길을 잃어버릴 염려도 없으니 평안하고 살이 찝니다. 주님은 요10:11절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자에게는 지팡이가 들려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능력과 인도를 의미합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를 들고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에서 인도해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들을 의의 길로,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오늘날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변함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권능을 주시며 거룩하게 해 주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삶에 위로를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며, 또 우리들의 최후의 목적지인 하늘나라까지 안전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③양은 의존하는 짐승입니다. 언제나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 양입니다. 인간들도 그렇습니다. 권력에 의지하고, 재물과, 배경과, 기술을 얻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진정 우리의 의지할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의지하면 어떤 복을 받을 수 있는가?
①부족함이 없는 삶을 삽니다(1절).
그 목자는 우리들의 목자가 아니라 나의 목자 1:1의 목자입니다. 목자는 양을 사랑하십니다. 요3:16절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목자는 양을 인도해 주십니다. 벧전5: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권고라 함은 '모든 것의 해결사'를 의미합니다.
▶인도에 가면 도를 닦기 위해 고생을 하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온 종일 나무에 거꾸로 매 달려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두 손을 높이 들고 몇 해를 보내는가 하면, 겨울에 냉수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6년이나 말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선다싱'의 기록에 보면 그가 한번은 동굴 입구에 흙과 돌로 담을 쌓고 거기 작은 구멍만 남겨 두어 누군가가 음식을 넣어주면 먹고 그렇지 않으면 굶는 사람을 만났다고 합니다. 선다싱이 묻기를 "이런 고생을 통해 무엇을 얻었느냐?" 굴속에 사람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왜 나오지 않으냐고 물으니 이미 보낸 고행의 세월이 아까워 나올 수 없다고 말하더랍니다.
진정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여러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요10:10절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2절: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으면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푸른 초장은 영적으로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의 꼴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 육신적인 풍성한 부자의 풍요로움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쉴만한 물가'란 평안함을 의미하며 모든 짐을 맡아 주심을 의미합니다. 마11: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팔레스타인의 정오는 몹시 뜨거운 시각입니다. 일찍 목자가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먹이고는 그늘진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줍니다. 한마디로 완전무결한 보호입니다. ▶우리 주님의 인도는 더더욱 완벽합니다.
요10:28절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시121:5절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오늘 본문의 안식은 충분한 양식이 있는 안식입니다. 부족함이 없고 넉넉한 안식을 우리 주님이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절대 순종이 필요합니다. 양이 목자의 지시에 순종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되어버립니다.
팔레스타인은 원래 물이 귀한 곳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목장에는 언제나 맑고 시원하고 풍부한 수원이 있어 언제나 양떼들을 시원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이삭과 야곱은 가는 곳마다 우물이 샘솟았습니다. 사55:1절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 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시1:3절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할/
▶3절: 여호와를 목자로 삼는 자는 영혼이 소생되는 은혜 속에 삽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범죄한 영혼을 회개시켜 진정한 생명을 얻게 한다는 말로, '소생하다'는 '되돌아오게 한다'는 뜻으로 죄악과 곤경에 시달리던 영혼이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하다'라는 의미도 됩니다. 영혼이 지쳐있을 때 다시금 용기를 주시고 원기를 회복시켜 주신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생활 경쟁 속에서 심신이 지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염려, 근심, 걱정에 억눌려 생활을 파괴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억압을 극복하기 위해 술을 마시기도 하며 쾌락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마약을 복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억압을 극복하지 못하고 더 큰 절망에 빠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지친 영혼을 주님께 맡기고 눈물로 찬양하고 기도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영혼을 다시 소생시켜 주십니다. 주석가 '마펫'은 본문을 '그가 내 안에 다시 새로운 삶을 부어주시고'로 해석했습니다.
시55:22절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여러분! 행여나 상처 입고 상한 마음이 있으십니까? 주께 맡기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믿/ ▶자신의 이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뜻은 '자신의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구원은 건져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에서, 사망에서, 실패에서, 포로에서, 가난에서, 질병에서 건져내는 것이 구원입니다. 시50:15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4절: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으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건져'주십니다.
본문은 2절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신다'는 말과는 절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이 구절처럼 인간의 삶의 정황과 실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부분은 없습니다. 우리 인간 삶의 양면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목자이신 주님의 인도로 부족함을 모르고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으며 그 영혼의 소생함을 얻고 주님의 손에 이끌리어 의의 길로, 구원의 길로 인도함을 받았으면 계속 잘 나가야 되는데, 예수 믿는 우리에게도 또 다시 어둡고 캄캄한, 고독하고 쓸쓸한 그야말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야 되는 숙명에 부딪히게 됨을 발견합니다.
한마디로 희비쌍곡선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여정입니다. 인생은 항상 기쁘고 즐거울 수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매일 슬프고 고민에 차 있는 곳도 아닙니다. 본문의 '음침한 골짜기'는 원문에는 '비록 죽음의 그늘진 한 복판을 통과하여 지나가게 될지라도'로 되어 있고, '모펫'의 새 번역 성경에는 '어둠침침한 곳으로 미끄러져 들어갈지라도'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란 사망의 어두운 그림자를 의미하는 것이지, 사망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골짜기'란 위험의 극단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교훈은 내가 비록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지라도 하나님이 나의 목자, 즉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모시고 영접하고 따르는 사람에게는 비록 모든 인간이 제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죽음일지라도 그것이 한낱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지 나를 직접 헤치지 못한다는 신앙의 노래입니다.
또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온갖 질병, 환난, 전쟁, 기근, 자연재해 등 죽음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한낱 그림자 같은 실상, 우리를 헤치지 못하는 무기력한 것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눈앞에 닥쳐도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보호해지시고, 인도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바울은 고전15:55-56절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기 전에 또 후에 틀림없이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가게 하신답니다. 여러분! 시련과 연단은 축복은 앞당기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시킬 때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아니면 숨이 막힐 것 같은 환경으로, 또는 육신의 질고의 아픔으로 연단시키십니다.
그 안에 금이 연단해서 순금을 이루듯이 믿음의 큰그릇을 만들기 위하여 시련의 용광로 속에 우리들을 집어넣습니다. 단12:10절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여러분! 시험이 오고 연단이 오면 즉시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이 고난 뒤에는 찬란한 새 아침이 밝아 온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을 때 주님이 함께 하셨고, 그의 친구들이 7배나 뜨거운 풀무 불 속에 들어갔을 때에도 하나님의 신의 아들이 그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망의 골짜기를 해매일 때에도 주님은 그 안에 오셔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할/
우리 주님은 가정에서도 사업장에서도 직장에서도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벧전5:8-9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길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깨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여러분! 이 세계는 어디로 가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으로 두려움은 한 길로 왔으나 일곱 길로 쫓김을 받습니다. /믿/
성경 속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365번이나 나옵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1년 동안 매일 두려움 없이 살라는 말씀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오늘 집을 나서기 전에 기도했느냐가 중요합니다.
바울은 빌4:6-7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주님은 마6:34절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모세가 자신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당부한 말도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다고 수1:7절에서 당부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끊임없이 두려움에 빠지는 것을 봅니다. 왜 그럴까요?
①요1서4:18절 믿음(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사랑은 믿음으로 해석됩니다. 사랑(믿음)은 두려움을 내어쫓습니다. /믿/
②두려움을 쫓은 길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두려움은 무지에서 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뭐니뭐니해도 죽음입니다. 한마디로 죽음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과 공포에 떱니다. ▶먼저 인생을 알아야합니다. 인생이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인생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자들이 되고, 또 하늘나라로 옮기 움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안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한다"고 호4:6절에서 말했습니다.
③기도가 없을 때 두려움이 옵니다. 기도하는 성도는 두려움을 모릅니다. 왜? 기도는 만사가 변화되고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가지 않느니라" /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니라: 여기서 지팡이는 주의 능력이고, 막대기는 째칙입니다. 옛날 고대의 왕들은 손에 홀 때를 쥐고 있었답니다. 쉽게 표현하면 지휘봉과 같습니다. 또 지팡이는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무기도 됩니다. 경찰들의 곤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기도 되지만 한마디로 경찰관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본문의 주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힘을 상징합니다. 목자는 이 지팡이를 사용하여 사자와 이리떼를 물리치고, 또 양떼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갈 때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채찍 역할도 하며, 구덩이에 빠질 때 건져내는 역할도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로 가지 못하고 세상 길로 빠질 때 징계의 막대기를 통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니까 주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 지팡이로 우리를 건지십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빠져갈 때 팔을 내밀어 건져주신 주님은 바로 그 능력의 손길로 우리를 실패에서 질병에서 건져주십니다.
▶안위하시나이다: 안위는 하나님의 위로요, 하나님이 주시는 용기입니다. 새 번역 성경에는 '당신의 막대기로 보호하시고, 당신의 지팡이로 인도하시고, 나를 위로해 주신다'고 번역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헤매일지라도 우리를 그곳에서 건져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위로 받게 하시고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 말의 의미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⑴여호와는 나를 먹이시는 자시니 ⑵나를 돌보시는 자시니 ⑶나를 다스리는 자시니 ⑷나를 양육하시는 자시니 ⑸나를 기뻐하시는 자시니 ⑹나를 사랑하시는 자시니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짧게 표현하면 '먹이시고, 돌보시고, 기르시는 분이십니다' 누가? 나의 목자 되신 하나님이! 그래서 우리의 삶이 부족함이 없습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은 '내가 궁핍함이 없으리로다, 가난함이 없으리로다, 모자람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결핍과 빈곤을 느낍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으면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믿/ 그런데 여러분! 또 봅시다. 본문 5절에 보면 부족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5절: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으면 '내 잔이 넘쳐 나게' 됩니다.
여기 '주께서' 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아니고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한번 열면 닫을 자가 없고, 한번 닫으면 다시 열 자가 없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자를 있게 하시는 주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영원히 살아 계신 그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원수의 목전에서: 여러분 모든 인생은 구름같이 허다한 원수들에 의해 둘려 싸여서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이 원수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불구의 몸이 원수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유 없이 미워하는 원수가 있습니다. 또 사업의 라이벌이 있고, 이 모양 저 모양의 원수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세상 어떤 한 사람도 원수가 없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원수의 대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들은 그 원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왜? 하나님이 그 원수를 내 목전에서 무기력하게 만들거나 무릎을 꿇도록 정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감당하십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분명히 저 사람은 망할 수밖에 없는데 세월이 지나도 끄덕 없습니다. 아니 끄덕도 없는 것이 아니라 차츰 차츰 그 환경이 열립니다. 사업이 일어납니다. 깨어져 버릴 것 같은 가정이 다시 사랑으로 회복되어집니다. 또 매장 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도리어 높임을 받도록 만드십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고대 근동에는 나그네의 도피권이라는 특별한 관습이 있었습니다. 즉 자기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나그네는 그 주인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고 그가 비록 원수에게 쫓기는 몸이라 할지라도 주인의 울타리 안에서는 잔치까지라도 배설하고 즐길 수 있는 완벽한 보호를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롯이 소돔 성에 살고 있을 때 그를 찾아 온 천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딸까지도 내어 주려 했던 기사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서 원수들 앞에서 자기에게 잔칫상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로 인한 원수의 절망을 실감 있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할/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원수들의 목전에서도 우리를 지켜 주시고 좋은 것으로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사43:2절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여기 기름이란 매우 다양하고 중요한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①기름을 머리에 바르는 것은 그날의 연희나 잔치에서의 주인공 또는 귀빈을 상징합니다. 천국 잔치의 주인공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며 아끼는 사람에게 머리에 기름을 붓는답니다. 눅7:37절에 보면 한 여자는 주께 사랑과 존경의 표시로 지극히 비싼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주께 부었습니다.
②특별히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그 나라의 왕, 제사장, 선지자 특별히 선택받은 자들에게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삼상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또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③당시 기름은 다친 상처에 붓고 치료하는 약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눅10:30절은 유명한 사마리아의 비유입니다. 강도 만난 자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④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성령 충만은 백번 천번 말해도 새로운 능력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 충만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겨우 이것이냐'는 불만 속에 인생을 어둡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가하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감격 속에 인생을 밝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쌀독을 열어보고 '겨우 이거야', '아직도 많이 남았네' 똑같은 살 독을 보고 다른 반응을 표현합니다. 다윗은 아직도 많이 남았네 하는 감격 속에 산 사람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에서 몇 가지 진리를 발견합니다.
①내 그릇에 비해 부어주신 은혜가 과분하다는 뜻입니다.
정직하게 표현해 보면 내 그릇은 작은 종지에 불과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동이로 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천한 그릇에 불과한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귀하게 쓰십니다. 사실 나의 사람됨은 선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선한 사람도 받지 못할 축복을 쏟아 주셨다면 이것이 내 잔이 넘치는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은 원래 미천한 목동이었습니다. 또 그는 왕의 자리에서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은 추악한 죄를 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잔이 넘치는 은혜 속에 살았습니다.
②내 잔이 넘친다는 말은 '내 노력에 비해 성과가 크다'는 감격의 표현입니다.
크게 봉사하지도 못했는데, 크게 부르짖는 기도도 못했는데, 하나님이 은총을 쏟아 부어 주셨음을 고백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크게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감격하는 찬양시를 많이 지었습니다.
③내 잔이 넘친다는 이 말씀 속에는 지금 계속 이어지는 진행형입니다.
어제까지 넘치게 부어주신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지금, 현재 이 시간에도 넘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의 잔을 채워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그 분이 채워 주셔야 ①우리의 일생이 풍부합니다. ②삶이 풍성해 집니다. ③신용의 잔도 넘쳐 납니다. ④기쁨의 잔이 넘칩니다. ⑤행복의 잔이 넘칩니다. ⑥승리의 잔이 넘칩니다. ⑦평화의 잔이 넘칩니다. ⑧안식, 쉼의 잔이 넘칩니다. ⑨사랑의 잔이 넘칩니다. ⑩찬양의 잔이 넘칩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추상적이고 환상적인 종교가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종교입니다. 성경 속에는 여러 가지 삶의 원리들을 가르쳐 줍니다. 즉 10계명은 하나님과 인간관계, 또 인간과 인간관계인 윤리적인 문제를 가르쳐 줍니다. ▶요3:16절에는 구원의 원리가 있고, 마5장의 산상수훈은 주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살 것을 밝혀줍니다. 대표적인 당부가 빛과 소금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내 잔이 넘치는 삶의 비결은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을 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텍사스의 유명한 '헷셀 포드' 목사는 "성경 말씀에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보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발전적인 복을 받을 수 있을까?' 그 비결을 더 많이 제시해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창1: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은 축복 속에 살았고, 이삭도 가는 곳마다 농사를 지으면 백배나 잘 되어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를 받았으며, 야곱도 객지 20년 동안 살면서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신28:13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순종하면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신다"고 했으며, ▶갈6:7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으며, ▶눅6: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할/
넘치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 오병이어 기적을 보십시오. 수만 명이 먹고 12광주리를 남겼습니다. 기독교는 축복의 종교입니다. 우리 성림교회 모든 성도는 '내 잔이 넘치나이다'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
▶6절: 현재의 축복과 내세의 축복을 찬양하는 구절입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물론 일이 잘 되며 형통하고 성공하고 승리할 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내 건강이 좋고 수입이 좋고 가족들이 다 평안하고 내 친구들이 다 나를 좋아하면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고 고백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내 자신이 심각한 병에 걸리고, 가정의 어려운 문제들이 닥쳐옵니다. 사업의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나의 평생에--' 이런 고백이 나옵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런 상황 속에 불평과 근심 속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다윗은 지금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저질러 나라꼴이 엉망이요, 간신히 몸만 빠져나간 그런 처지에 지금 이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충고합니다. 하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시켜서 주의 사랑과 섭리를 깨닫게 하시고 다시 한번 잔이 넘치는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리쳤고,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을 롬11:33절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문자적으로 저 천국을 가리킵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말하기를 젊은이는 미래를 바라보며 살고, 장년은 현재에 살고, 노인은 과거를 회상하며 산다고 합니다. 노인은 죽는 것 밖에 기대할 것이 없으니 자연 찬란한 과거 속에 파묻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들은 이런 세속적인 뒤돌아봄이 아니라 저 찬란한 아버지의 집을 바라보며 사는 존재입니다. /믿어집니까?/
▶계21-22장을 보면 우리가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해 줍니다.
①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흐른답니다. 이 땅의 모든 물은 오염된 물입니다. 저 천국의 생명수는 오염되지 않은 물입니다.
②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답니다. 그런데 그 생명나무에서는 달마다 열두 가지의 실과를 맺히게 한답니다.
③저주가 없는 곳입니다. 계21: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 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땅은 어떤 곳입니까? 울고 탄식할 만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집은 저주도 사망도 애통도 이별할 것도 아픔도 없는 곳이랍니다. /믿/
④주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계22:4절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하나님은 너무나 높고 거룩하시기 때문에 감히 그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 구약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천국은 주님의 얼굴을 직접 대하는 곳이랍니다.
⑤그곳에서 저와 여러분은 세세 무궁토록 왕 노릇하게 된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늘나라의 왕자요 공주입니다. /믿/
결론 여호와를 목자로 삼으면 지금 현재에서는 잔이 넘치는 복을 주셨다가 저 천국 영원한 여호와의 집에 왕자, 공주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할/ (2004년 9월 12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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