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는가? (요 3:16-18)
어느 대학생이 도서관을 향해 바쁘게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老)교수 한 분이 그 학생을 부르며, "학생, 무엇이 그리 바쁜가, 어디를 가기에 그렇게 바삐 가는가?" 달려가던 학생이 교수님의 물음에 걸음을 멈추고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습니다.
"예, 도서관에 갑니다" "도서관에 가서 무엇하게?" "무엇하기는요, 공부하기 위해서 가지요." "공부는 왜하는데?" "왜 하다니요? 이 다음에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서 공부하죠" "그 다음에는 무엇하게?"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야죠. 그래서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 야죠"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자식들 낳고 돈도 많이 벌어야지요."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노년을 편안하게 여가를 즐기며 살아 야죠."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학생은 주저주저 하면서, "그 다음에는 죽겠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여보게, 그러니까 자네는 지금 죽음을 향해서 그렇게 급히 달려가고 있는 것인가?"
그 학생은 노 교수의 이 말을 듣고, 곰곰히 자신의 인생의 지표를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한 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히9:27)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싫든 좋든, 인생은 결국,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비결이 본문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 가운데서 가장 큰 은혜는 예수를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할/
이 구절은 너무나 유명해서 우리 모두 어려서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온 말씀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구절만은 쉽게 기억할 정도로 이 구절은 유명합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이 구절을 가리켜서 "복음서 중의 복음서" 또는 "작은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신·구약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복음의 진수"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만큼 이 말씀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야만 했을까요? 이 사실을 바로 알고 믿을 때 믿음의 힘이 생깁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이 예수를 이 땅에 왜 보내셨는가?▶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창세기부터 알아봐야 합니다.
1.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감탄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에덴 동산이라고 했습니다. 에덴이라는 말은 파라다이스 즉 '낙원'이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그곳은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또 그곳에서 사는 생물들도 아름다웠습니다. 그 생물들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그곳은 부끄러움이 없고, 수치가 없고, 갈등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하나님이 직접 그곳을 찾아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친교도 하시고, 대화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낙원의 생활은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낙원을 오래 간수하지 못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큰 실수 때문에 낙원은 한 순간에 송두리째 깨져서 실낙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이 불화와 갈등입니다. 우선 하나님과의 불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의 하나님이 아니고 두려움의 하나님으로, 심판의 하나님으로, 공포의 하나님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멀리 떨어져 나갔습니다.
■자기 자신과의 불화도 시작되었습니다. 온통 갈등으로, 고민으로, 스트레스로, 그리고 죽음의 위협 등, 인간의 근본문제가 그때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연과도 조화가 깨졌습니다. 자연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가 아니고 독을 품고 피해를 주고 홍수와 가뭄과 재해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우리는 매미 태풍 때문에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또 동물과도 조화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함께 생활하던 동물들도 인간의 적이 되어서 포악해지고, 물고 물리는 원수로 변한 것입니다.
낙원은 이제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은 이제 하나님을 향해서 도전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고, 세상에는 온갖 죄가 들어왔고, 파괴가 발생했고, 갈등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은 이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주 악하고 흉한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2.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은 더 이상 눈뜨고는 볼 수 없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물로 세상을 깨끗하게 쓸어 버리셨습니다. 그것이 창7장에 노아의 홍수입니다. 그때 이 세상은 완전히 심판을 받아서 망해 버렸습니다. 사람도, 식물도, 짐승도,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함께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서 심판을 받으니까 세상의 모든 식물도, 짐승도 함께 멸명을 당했습니다. 인간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 모두가 함께 복을 받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모두 망하고 노아 가족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시대에 노아 가족만은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들로 세상을 새로 시작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뜻대로 믿음으로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기대를 가지고 온갖 복을 다 주셨습니다. 창대한 복을 주셨고, 그 자손은 크게 번성하여 많은 무리들이 한곳에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넓은 땅에서 큰 민족을 이루어 살았습니다.
■그런데 자손들이 많아지게 되니까 선한 일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 또다시 불의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피 속에도 아담의 타락된 피가 그대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타락된 본성은 피를 통해서 유전되어 자손에게 그대로 상속이 됩니다. 사람의 피 속에는 이 죄의 유전 인자가 들어 있습니다.
집집마다 보면 좋지 않은 집안 내력들은 모두 피를 통해서 유전됩니다. 이 노아의 자손들도 무리가 커지고 나라가 커지게 되니까 그 타락된 본성이 작용을 해서 하나님을 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창11장의 바벨탑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바벨탑을 쌓은 이유는 하나님처럼 되어보겠다는 교만에서 온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들의 힘을 과시해서 하늘까지 쌓아 보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그런 교만한 행동을 보시고 그 성을 허물어트리십니다. 그리고 바벨탑만이 아니고 사람들까지도 흩어 버리셨습니다. 여러 지역으로, 여러 언어로, 여러 모습으로 그들을 완전히 흩어 버리셨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제2의 심판입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완전히 이질 문화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언어도, 관습도, 문화도, 이해도 모두가 이질적입니다. 거기서 싸움이, 다툼이, 갈등이, 불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저주고 심판입니다.
3. 그 후에 하나님은 세계를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그 시작점이 창12장의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위해 아브라함의 자손들만으로 히브리 공동체를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온갖 축복을 약속하셨고, 그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히브리 백성을 큰 민족으로 키우셨고, 세상의 모든 민족보다 우수하고 뛰어난 백성으로 키우셨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브라함은 순수한 신앙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런 전통은 그의 아들 이삭을 거쳐 야곱과 요셉으로 이어져 갑니다. 그러는 사이에 그 민족도 또다시 거대한 민족으로 발전해갑니다. 그러면서 그 민족도 다시 타락하기 시작하고, 죄를 짓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곁을 떠나고 그 뜻을 거역하기 시작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내내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갈등 관계가 유지됩니다. 백성들은 우상에 관심을 갖고 하나님의 곁을 떠나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고난 당할 때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부르짖기도 하고, 참회도 하지만, 평안이 시작되면 하나님의 곁을 떠나 버립니다. 그리고 우상에게 가서 아첨하고 섬기고 그러합니다. '삿' 성경에 보면 자세하게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서 충고하고, 달래고, 때로는 책망하고 경고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면 잠시 돌아왔다가 다시 우상에게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들의 피와 근본이 타락되어서 그렇습니다.
백성들은 마침내 완악해져서 책망하는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끝까지 인내하면서 참으시고 선지자들을 또 보내셨습니다. 죽이면 또 보내고 죽이면 또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은 그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하나님의 곁을 떠나지 못해 안달이었습니다.
4,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십니다.
그 아들을 보내실 때의 하나님의 마음을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이 그 유명한 요3:16절 오늘 본문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 전체를 압축해 놓은 그런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이 말씀을 '복음서 중의 복음서'라고 하고 또 '작은 복음서'라고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관심은 온통 세상을 구원하는 데 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고, 멸망시키고,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17).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멸망 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어떤 흉악한 죄인이든 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세상의 법은 그를 용서치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시고 받아들일 용의와 아량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좀처럼 헤아리기 어려운 하나님의 깊으신 마음입니다.
■오래 전에 세상을 놀라게 했던 '지존파 일당'들이 있었습니다. 잔인 무도했던 그 흉악한 살인범들이 감옥소에서 아주 차분하게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인육을 먹었다고 큰소리 치건 그 사람이 제일 열심히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사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찬양하면서 죽어갔다고 합니다.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세상이 그들을 버렸고, 이웃이 그들을 버렸고, 심지어는 부모 형제들이 다 그들을 버렸어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 차디찬 감옥까지 찾아가셔서 그들을 용납하시고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렇게 열심히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람들이 세상에서 얼마나 잔인하게 살았습니까? 얼마나 잔인하게 살았으면 세상의 법이 그를 용서치 않고 사형수로 낙인을 찍어 놓았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감옥 속에까지 찾아가셔서 죽기 전에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것이지 결코 하나님이 인간을 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되 그냥 편안히 왔다 가도록 하신 것이 아니고 기구한 희생의 제물로 보내셨습니다.
우선 태어나시기를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수 백년 동안 기다리고 고대하던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데 그 많은 장소 다 놔두고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생애 동안 온갖 무시 속에서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무시를 당하였습니까?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무시의 극치입니다. 당시 나사렛은 저주받아서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면서 무시를 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제자로부터 배반을 당합니다. 세상에서 자장 가슴 아픈 일이 배반당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배신 중에서도 가장 큰 배신은 스승이 제자로부터 배반당하는 것이고, 상관이 부하로부터 배신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런 가슴 아픈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제물로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희생의 극치입니다. 우리들이 십자가를 너무 쉽게 말해서 그렇지 사실 십자가는 우리들이 입에 담기조차 거북하고 흉물스러운 것입니다.
■옛부터 사람을 죽이는 사형 방법은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사약을 내려서 죽게 했고, 또 목을 매달아 죽이는 교수형이라는 것이 있고, 단두형, 총살형 등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목에 돌을 매달아 깊은 물에 던져 버리는 사형법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나와 있는 사형 법입니다. 예수님이 어린 아이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가서 빠져 죽는 게 낫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죄인 중에서도 흉악한 죄인을 그런 사형 법으로 죽였습니다. 죄질이 너무 나빠서 죽은 후에 장례식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아예 맷돌을 매달아 깊은 물에 던져서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보다도 더 지독하게 흉한 사형 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형틀입니다. 이 십자가는 너무나 흉칙해서 당시 사람들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십자가라는 말을 입에 담기를 꺼려했다고 합니다.
옛날 가나안에서는 땅은 생명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신성하게 생각해서 땅을 섬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신앙이 고대 사회에서는 일반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흉악한 죄인은 십자가에서 죽였는데,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때는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높게 매달아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땅에 묻히는 권리도 박탈되어서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공중의 새들이 와서 모두 먹어 치우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신성한 땅에 죄인을 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형 법입니다.
이런 무섭고 저주스러운 십자가의 형벌을 우리 주님이 갈보리 산에서 받으셨습니다. 그 분의 죄 때문이 아니고, 인류의 죄 값을 감당하기 위해 그 저주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칼발트'는 '나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의 생명의 값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무엘 루터 포드'는 '소의 몸집은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일을 하고, 새의 날개도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날고, 십자가도 말할 수 없이 무거우나 바로 그것 때문에 천국에 간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지당한 말입니까? 십자가는 이렇게 값진 것입니다.
■신학자 '본 회퍼'는 '오늘 이 시대 교회에게 가장 치명적인 원수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너무나 값싼 은혜만을 구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고 너무 값싼 은혜만을 사모하고 있다고 개탄했습니다.
또 '키에르케고르'는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체면이 없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들은 잘 살려고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복을 달라고 철야를 하고, 금식을 하면서 왜 좀더 값비싼 은혜를 구하지 못하고 잠시 후에는 없어져 버릴 값싼 은혜만을 구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진정한 사랑과 뜻을 모르면 무지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요3:16절은 사도 바울의 위대한 신학사상인 '이신득의'의 신학이 정립되었습니다. 3:16절은 믿음과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 믿음과 구원을 얻기 위하여 성경이 주는 영적 원리를 바로 알고 믿어야 힘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관계성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여기서 "저"는 물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관계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구원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여러 종류의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욕망과 소원성취를 목적으로 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을 흔히 기복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 신앙은 욕망이나 목적을 성취하려고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믿음은 아닙니다. 그래서 '본 회퍼'라는 신학자는 이 같은 믿음을 "싸구려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또 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믿음도 있습니다. 마음의 평안이나 얻고 심리적인 위안이나 얻어 보자 해서 믿는 신앙입니다. 이것도 성경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신앙이고 극히 수양적인 믿음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과 관련성이 없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예수님과 관계될 때에만 그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태 중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탯줄과 연결되어 있을 때만 생명을 유지하고 영양을 공급받게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태아가 탯줄에서 떨어지면 끝장입니다.
피아노를 보십시오. 피아노의 생명은 줄입니다. 피아노가 겉에서 보면 화려하고 윤기가 나고 빛이 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속에 들어 있는 줄입니다. 그 피아노가 아무리 값이 비싸고 화려해도 모든 줄이 붙어 있어야 할 곳에 붙어 있어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고 값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관계성입니다.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모두 예수의 생명 속에 연합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우리가 있고, 우리가 있는 곳에 예수님이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누리는 축복을 우리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그가 부활했으니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영광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영광을 받을 것이고, 그가 승리했으니 우리도 승리할 것이고, 그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우리도 세상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주님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골3:3절에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모두 관계성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인식'하는 일입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게 해서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그 같은 예수를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우선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면 믿음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값이 비싼 물건을 소유하고 있어도 그것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고 살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아주 비싼 보석 반지가 있는데 그것을 어디에 놓아두었는지 알 수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값이 비싼 최신 기계를 수입해 들여왔어도 그 기계를 만질 줄 모르면 그것은 쇠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여기 "안다"는 말은 머리로 기억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은 체험한다는 말입니다. 가령 성경을 뜻도 모르면서 머리로만 많이 기억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성경을 가장 많이 외운 사람이 불행하게도 교도소에 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약성경을 모두 외우고 시편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웠다고 합니다. 성경을 그렇게 많이 외웠어도 그 말씀이 그에게 별로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체험이 수반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요6:68절에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하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곧 체험입니다. 이 같은 체험이 있으니까 그를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동시에 이 같은 체험이 없는 사람은 미련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천국의 길에서 떠나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반드시 이 같은 체험이 중요합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의 근거는 믿음"이라고 했답니다. 사람들이 우주선에 사람을 태워서 달나라로 쏘아 올립니다. 그때 우주선에 태워져 달나라로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별로 긴장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선이 다시 지구로 무사히 돌아올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학조차도 믿음에 기초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같은 이치는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 높이 올라가서도 편안히 잠을 잡니다. 왜냐하면 이 비행기가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들이 기차를 타고 그 좁은 레일 위를 마구 달리면서도 단잠을 잡니다. 그것도 믿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좋은 믿음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요1:12절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고 했습니다. 어떻게 믿습니까? 알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고로 믿음은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무지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무지가 죄라고 했습니다. 모르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무지하면 세상을 살아가기가 더 힘이 듭니다.
그래서 성경은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는 일이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영접하는 일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것이 요한복음의 주제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뜻은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이며, 그분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죄를 용서하시고 그분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께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시간에 영접기도를 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합니까? "내가 오늘 이 시간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길 원합니다"라는 간절한 마음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영접기도를 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여러분들은 인생의 성공을 선택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수지 맞습니다. 그분은 능치 못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믿/
우리가 주님을 진심으로 영접을 하게 되면 맨 먼저 변화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목적의 변화입니다. 나 중심에서 예수 중심으로 목적이 변화됩니다. 또 소속이 바뀌는 변화가 오게 됩니다. 하늘의 시민권자가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진시황은 38세에 중국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을 지었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불로 장수입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그였지만 흐르는 세월은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영원토록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서 불로초까지 먹었습니다. 그랬던 그도 결국 50을 넘기지 못하고 49살에 죽습니다.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만 것입니다.
절세의 미인 양귀비도 그렇습니다. 임금의 총애를 받고 부귀영화가 한 몸에 있었습니다. 그랬던 그녀도 난리가 나서 도망가다가 37살 한창 나이에 목매어 자살하고 맙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 사는 게 아무 것도 아닙니다. 7-80년 살다가 결국 한 두 평 무덤으로 끝나는 게 인생 아닙니까? 그래서 세상에서도 인생을 生老病死라 합니다. 인생이 무엇인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게 인생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하고, 전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이며,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최대의 고통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죄 때문에 우리가 고통할 필요가 없음을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주셨습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이 땅에 왜 보내셨는가?
①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글에서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돈이나 명예나 권세가 아니고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셨기에 외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롬5:8절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②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고후6:9-10절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③영생을 주시려고,
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원히 사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
③구원을 주시려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하는 천국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할/ (2003년 9월 28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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