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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6:12-14제목: 몸의 사욕을 다스리는 길-지체를 의의 병기로 봉헌

by 【고동엽】 2022. 1. 15.

본문: 로마서 6:12-14

제목: 몸의 사욕을 다스리는 길-지체를 의의 병기로 봉헌

 

오늘 이 짧은 본문은 굉장히 중요한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하심을 받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고, 또 하나님과 honeymoon-period, 엄청 감미로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는데 왜 우리는 다시 죄를 짓게 될까? 그러니까 다시 한번 죄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내가 받은 구원은 헛것이 아닌가? 내가 구원을 받았다면 불가역적 변화 속에 들어와야 될 텐데, 불가역적 변화라 함은 다시는 옛날 행동을 하지 않는 변화, 불가역적 다시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는 돌이킴을 나는 했다고 생각했는데 왜 옛날 행동이 지금 내 몸에 나타날까?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래서 불가역적 회개, 불가역적 돌이킴, 다시는 옛날로 돌아가지 않는 No turning back, no turning back! 그런 정도로 회개한 줄 알았는데, 아~ 살아보니까 그게 아니라 내가 이전에 범했던 죄를 동일하게 범하는 내 자신이 나온다는 거죠. 이것이 가장 큰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느꼈겠죠. ‘어 이제는 내가 완전히 새롭게 회복 되어서 다시는 그런 야동을 안 볼 것 같고, 다시는 내가 알코올에 입을 댈 것 같지 않고, 다시는 내가 마약에 손을 안 댈 것 같은데 분명히 내가 그런 7~8개월 동안은 죄를 완전히 이겼다고 느끼는, 죄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내가 확신에 거한 적이 있는데 어찌하여 시간이 갈수록 점점 내 마음이 구원받지 못한 자처럼 되어 가는가! 왜 내가 받은 구원의 감격은 감각상각이 이렇게 심한가! 닳아지고 마멸되고 소모되는가!’ 이것이 오늘 본문이 다루는 주제거든요. 왜 우리는 구원의 감격에 유지, 구원의 감격에 붙들린 채 살아가지 못하고 다시 죄를 지을 가역적 되돌이킴, 되돌이표, 옛날로 다시 되돌아가고자 하는 이런 가역적인 죄성이 왜 나에게 아직 남아있는가! 오늘 본문은 체계적으로 답변을 해주지는 않습니다. 장로님. 로마서 8장 20절부터 27절까지 좀 읽어주시고요, 그다음에 김은자 교우님, 로마서 12장 1절, 2절 좀 읽어주세요. 제가 지금 무슨 말 하려고 하냐 하면은 왜 우리가 영 단번에 죄에 대해서 죽은 예수님을 따라 함께 십자가에 못이 박혔는데, 예수님은 영 단번에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우리는 왜 다시 죄를 짓는 가능성에 노출되는가! 이걸 연구해 보자는 겁니다. 자, 장로님 먼저요 로마서 8장 그다음에 김은자 교우님 로마서 12장 1절과 2절 읽어주십시오. 자, 장로님부터 먼저 읽어주십시오.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야~ 여기서 몸의 속량이라는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8장 23절, 그러니까 몸의 속량 몸까지 구원 받은 것은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가 아직까지. 잘 아셔야 돼요! 내가 하나님께 구원받았다는 말은 구원받기 시작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구원이 종료된 게 아니라 몸까지 구원받아야 만이 구원이 종료되는데 이 몸은 내 죄가 오랫동안 지나갔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Semi-automatic 반자율적인,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좋은 생각을 품어도 내 몸은 또 지가 품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내 몸은 자기 자신의 자율적인 또 판단이 있어요. 몸은. 참 희한합니다. 그러니까 잘 보세요. 기독교인의 구원은 구원받기 시작한 구원이고,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하고, 인지하고, 내 감정이 전향한 구원이고, 내 이해가 동반된 구원이고, 나의 의지가 하나님께 한 번 꺾였습니다. 내 의지가 하나님께 꺾였어요. 의지가 하나님을 향하여 한 번 거룩하게 꺾였기 때문에 의지적 구원이에요. 그다음에 내가 하나님에 대한 감미로운 감정이 많이 생겼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경사된, 감정적으로 하나님께 기울어진 구원입니다. 그리고 내가 옛날에는 깨닫지 못했던 성경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 논리를 명석하게 이해하니까 지적으로 전향했습니다. 지적 전향, 감정적 전향, 의지적 전향, 지적으로 세례를 받고 꺾였습니다. 의지적으로 무릎이 꺾였습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꺾이지 않은 게 있으니 뭐냐 하면 몸의 욕심입니다. 사욕입니다. 그러니까 몸 자체는 범피조물의 연약함에 아직도 쌓여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8장은 몸은 탄식하는 피조물에 일부이기 때문에 몸 자체도 탄식을 거둘 수 없을 만큼 범피조물, 완전한 해방을 받을 때까지는 Groaning 신음하면서 해방을 기다리고 있는 아직까지는 구원받지 못하는 미수복지역이다, 미수복지역, 몸은 아직까지 미수복지역입니다. 제 입은 지금 구원받았습니다. 제 지성도 구원받았습니다. 옛날에 비해서요. 저가 지금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 이거 의지적으로 꺾인 사람만 하는 거잖아요. 이거 구원받았죠? 제가 제 감정적으로 찬송할 때 기쁜 것 보면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 맞습니다. 제 감정적으로도 하나님께 애착이 생겼고,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거룩하게 꺾였고, 나의 지성은 하나님의 내적 논리를 이해하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내 몸은, 내 지적, 정서적, 감정적, 의지적 이 전향에 비해서는 내 몸의 전향은 너무나 아직도 더디고, 완강하고, 집요하게 아직도 협조를 안 합니다. 몸은 Semi-automatical 반자율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 그래서 12장 1절, 2절입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와~ 몸을, 이 몸은 어디에 영향을 받습니까? 몸은 어디에 영향을 받아요? 몸은 어떤 영향을 받냐 하면은 세대의 영향, 이 세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몸은. 그래서 몸은 아직까지 완전한 해방에 도달하지 못한 신음하는 피조물의 일부입니다. 그다음 몸은 하나님을 본받도록 추동하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본받지 말도록 추동하는 세상에, 이 세대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몸을 가지고 산다’는 말은 구원의 감격을 냉각시키는 세상 속으로 뛰어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스스로 너무 여러분을 정죄하지 마세요. 몸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 의지적으로,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꺾여서 하나님을 향해서 내가 분명히 이렇게 다시는 하나님을 배반할 것 같지 않는데, 내 몸은 이전의 행동을 재생하려고 하고, 그걸 고집하려고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는 사욕이라고 했는데, 이 몸의 사욕이란 말에, 몸이란 말에 안 붙어 있습니다. 몸이란 말은 안 붙어 있고 그것의 사욕인데 맞습니다. 이 몸은, 오늘 본문에 말하는 이 몸은 반자율적 존재로서, 이 세상의 영향을 많이 받는 존재로서,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나의 자아가 아무리 하나님을 찬양해도, 내가 매일 기쁘게 191장 찬송을 10번 불러도, 내가 기독교강요를 아무리 철저히 읽고, 감동하고 줄을 쳐도, 내가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찬 예배당에서 찬 공기를 마시면서 거기에 무릎을 꿇고 있어도 내 몸은 여전히 나의 지적, 감정적, 의지적 이 대전향을 무효화시킬 수 있을 만큼 내 몸은 완강한 욕망이 아직도 조선총독부처럼 자리를 잡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해방이 되었는데 조선총독부가 떠나지 않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대한민국 국기가 지금 광화문에 실렸는데 광화문 뒤에 조선총독부가 오랫동안 남아 있었잖아요. 그것처럼 일제 조선총독부가 김영삼 정부가 해체할 때까지 남아 있듯이 우리의 몸은 옛날 내 몸을 지배하던 옛 종주, 옛 종주권을 행사하던 옛 종주의 기득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옛날에 나쁜 일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기독교인으로 살기가 힘들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옛날에 나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몸의 사욕이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급하게 전향이 안 됩니다. 그래서 깡패 출신들이 목사가 되면 안 되고, 아주 나쁜 일을 많이 한 사람들은 그 나쁜 일, 세월을, 풍화침식의 망각 속에 넣기 전까지 긴 시간이 걸려야 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거룩하게 단련 받은 사람, 사무엘 같은 사람, 예레미야 같은 사람, 이사야 같은 사람, 어렸을 때부터 영적으로 잘 단련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민감하게 받고, 좋은 말씀의 종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은 목사님이 되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은 계시의 민감성에 한계가 있대도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한 사람으로 교육시키는 게 중요하고 그런 어렸을 때부터 주님과 동행한 영적 신동 시절을 보냈던 사무엘, 예수님, 예레미야, 이사야, 아모스 이런 영적인 명문 가문에서 훈련받은 사람이 하나님 계시를 쫙 받아가지고 사도적, 예언자적 그런 계시의 소통자가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 몸은 Semi-automatic 그 반자율적인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너무 영향을 너무 많이 때문에, 몸을 가지고 산다는 것 자체가 무슨 말이냐 하면은 구원의 감격을 조금씩 감가상각 한다는 뜻이에요. 참 너무 슬프죠? 그러니까 카페인을 좋아하는 나, 단팥빵을 좋아하는 나, 알코올을 좋아하는 나, 그리고 음란한 행동을 하기 좋아하는 나, 음란한 그림을 보길 좋아하는 나, 음란한 영화를 보길 좋아하는 나 이런 모든 것이 몸이 하는 거잖아요? 비싼 옷을 입고 싶은 마음, 화장을 하고 머리를 하는데 한 30만원 쓰고 싶고 나를 꾸미고 싶은 마음, 이거 전부다 이 세대에 영향을 받는 거잖아요. 좋은 차를 타고 싶고, 좋은 옷을 입고, 비싼 치장을 걸치는 것 이거 전부 다 몸이 원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지배력을 많이 행사한다고요! 뭐 보다요? 구원의 감격, 191장 찬송 부르는 기쁨이 몰래 알코올 마시는 기쁨을 이겨야 되는데 그러지 못한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몸의 사욕을, 그래서 매 순간 결단해야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구원 받았지만은 내가 몽롱한 상태에서 거룩해지는 것 아닙니다. 매 순간 내 몸을 의의 병기로 드릴 것인지, 불의의 병기로 드릴 것인지 매 순간 결단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12절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와~ 어떻게 이런 말이 가능합니까? 아니 구원을 받아가지고 의롭게 된 자에게 어떻게 죄가 다시 우리를 지배한단 말입니까? 이거 구원받기 전 상태 아닌가요? 이거 구원받기 이전 사람 아닌가요? 아닙니다! 로마서 5장 17절 한 번 읽어주십시오. 원예진 자매님 로마서 5장 17절이요.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와~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한다고 그랬고요, 그 다음에 21절입니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은혜가 왕 노릇한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어떻게 6장 12절이 가능하냐고요? 은혜가 왕 노릇한다고 분명히 말한 바울이 어떻게 6장 12절에서 죄가 너희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와~ 이 말은 뭐냐 하면 은혜가 왕 노릇하는 이 상태를 정복시켜서 다시 죄를 왕으로 모시는 이런 가역적 역선택, 다시 옛날 죄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선택하지 마라. 그러면 죄가 다시 지배권을 가지고 너를 구원받지 못한 자인 것처럼 너를 지배한다는 겁니다.

 

자, 여기서 간단하게 정리합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 받았다는 말은 일생동안 영적인 분투를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뜻이지 매일 싸움에서는 죄가 우리를 사로잡아 가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해서 영 단번에 죽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생에 걸쳐서 죄에 대해서 죽기 때문에 매일매일의 영적 분투에서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매일 죄를 우리를 지배했던 왕의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은혜를 다시 우리의 보좌 위에 앉혀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동적으로 은혜가 우리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매순간 은혜가 우리를 지배하여 왕 노릇 하도록 죄를 멀리해야 됩니다. ‘그러면 구원받아도 유대인이 분투하는 거랑 똑같네요? 바로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분투하지 않았습니까? 매일!’ 맞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분투하듯이 우리는 똑같이 분투합니다. 천국 가서도, 회복된 하나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서도 선택의 이 순간은 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천국 가더라도 자동적으로 모든 선을 택하는 것 아닙니다. 매 순간 선을 선택해서 선언합니다. 그런데 천국 가면은 선택이 엄청 쉬워집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죄가 우리 몸을 지배할 가능성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았다고 좋아했던 것이 다 헛것이 됩니까?’ 아닙니다. 바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지배할 때 비상경보음이 울리고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저항하는 레지스탕스가 생기니까, 구원받지 않았을 때에는 죄가 우리를 지배하도록 방치했는데 구원 받았기 때문에 이제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죄의 지배권을 저항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에 우리는 죄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이거 보세요. 우리는,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한 번에 딱 살아난 자가 아닙니다. 한 번에 살아난 자가 아니라 매일 죄에 대해서 우리 몸을 내어 주지 말고 의의 병기로 우리 몸을 드림으로써 매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자처럼 행동을 해야 한다. 네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자처럼 너를 간주하고, 여기고 그렇게 행동해야 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유대인이나 똑같네요? 뭐 도덕주의자나 이렇게 매일 분투하면서…….’ 똑같지 않죠! 우리는 옛날에 우리를 지배하는 죄가 얼마나 뿌리 깊었는가를 몰랐는데, 그때는 죄로부터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결단만 하면은 죄를 이길 수 있을 정도까지는 우리가 자유로워진 거죠. 다시 말해 죄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거하고 죄를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가 생긴 거는 차원이 다르죠. ‘그러면 김회권 목사! 당신의 말은 이런 뜻입니까? 구원받았다는 말은 죄에게 몸을 던지는 것 하고 의에게 몸을 던지는 것 이 두 개의 선택의 이 고투, 이 두 개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이 고민은 아무리 구원받아도 해결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예, 맞습니다. 구원 받아도 그 선에게 복종할 것인지, 악에게 복종할 것인가는 아무 고민이 해결 안 됐습니다. 매 순간 선을 선택하는 경험을 하루 이틀 축적시켜 가면서 구원 받았음을 감격적으로 되새겨야 합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자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의로워진 것이 아니라 의로운 자가 되었다고 여김으로서 의로움을 채워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은 의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뜻입니다. 이해가 됐습니까? 너무 어렵나요? 제가 이렇게 어젯밤에도 연습을 몇 번 하고 잤는데 저는 지금 간신히 이해가 됐는데 여러분들 이해가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이해가 안 돼도 다음에 합시다. 오늘 본문은 요정도 하겠습니다. 죄가 우리를 지배할 가능성은 남아있다, 그렇지만 구원받았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지배하려고 할 때 No! 아니오! 라고 저항 할 수 있는 담력이 생겼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하루도 죄에게 몸을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착한 일에 몰두하다 보면 나쁜 일 할 여유가 없어진다, 이런 뜻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로마서의 논리가 무척이나 정교하고 치밀하여 때로 낯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너무나, 너무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을 잘 설명했습니다. 은혜가 왕 노릇하는 세상에 들어왔지만 죄가 다시 우리를 지배할 수있는 가능성, 이 가역적인 후퇴가 가능하다는 것 때문에 우리가 전율하고 두려워 떱니다. 하나님 오늘도 제 몸을 의의 병기로 드리기를 원합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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