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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6:1-7 /제목: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

by 【고동엽】 2022. 1. 15.

본문: 로마서 6:1-7

제목: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

 

먼저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복잡한 로마서의 구원론과 같은, 이런 구원론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면은 그것은 너무나 어렵지 않을까? 로마서의 이런 내적논리를 속속들이 이해하면서 의롭게 된다는 원리를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로마서는 지금 할례를 받으므로 의롭게 되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도 여전히 할례를 받아야하며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정조준하여 지금 논쟁을 하는 맥락입니다. 그러니까 로마서는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구원할 가능성으로 초청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다 의롭게 하실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전부다 의롭게 되었다고 믿어 버리는 것을 ‘만민구원설’ 또는 ‘보편구원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바친 순종의 이름으로 모든 아담인류는 둘째 아담인류가 되었으므로 신앙고백 따로 없이도 구원받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런 ‘보편구원론’이 교회사에 한 편에 있었습니다. 반대로 ‘아니다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똑똑한 자의식을 가지고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고백이 없으면은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다.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이런 내적논리를 분명히 이해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라고 말하면은 이것은 또 다른 교회사인데 ‘제한구원론’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제한구원론’이란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계 만민을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사람들을 위한 죽음이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효력은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있고 선택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십자가의 죽으심의 효력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이중예정론’이라고 합니다. 캘빈의 이중예정론, 마틴 부처의 이중예정론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 ‘이중예정론’이 장로교회 지금 교리입니다. 지금, 교리입니다. 그런데 ‘이중예정론’보다 더 심각하게 믿는 사람의 신앙고백을 확실하게 요구하는 종교가 재세례파입니다. 재세례파. 그러니까 재세례파. 제가 볼 때는 ‘주관적 느낌이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에게 구원이 왔으므로 신앙고백 같은 이런 복잡한 내적논리 없어도 그냥 구원 받을 수 있다’라고 믿는 이런 마음씨가 아주 좋은 구원론이 있고 저 재세례파처럼 ‘유아세례도 소용이 없다. 유아세례도 소용이 없는 이유는 유아가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주장을 했는데 유아세례를 아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해서 유아세례를 폐지한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은 재세례파인데 이 재세례파의 후손들이 지금 펜실베니아나 시카고에 가서 만든 이런 메노나이트 교도라든지 아미쉬 교도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캘빈은 자기도 이중예정을 말해놓고 재세례파를 보니까 너무 심하니까 재세례파를 반박하고 마틴 루터와 캘빈은 힘을 합하여서 재세례파와 같은 극단적인 이런 신앙고백 우선주의자들을 반박합니다. 맞습니다. 이게 다 조금씩은 맞는 말인데 신앙고백을 이렇게 ‘분명한 자기의식을 가지고 이걸 이해하면서 로마서처럼 구원을 받는 것이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다’ 그렇게 저는 주장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왜냐 하면은 그렇게 되면은 정신박약아나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이나 어린 아이들은 로마서의 내적논리를 자의식하면서 인지하면서 고백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저는 재세례파를 반대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렇게 ‘야무진 신앙고백의 내적논리를 이해하고 똑똑하게 로마서 내적논리를 알고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이것도 저는 일부분만 맞다고 봅니다. 로마서는 ‘율법을 행함으로 의로워질 수 있으며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도 덩달아 유대인과 같이 덩달아 할례 받아야 된다’ 그런 일부 그리스도인들과 논쟁을 벌이는 문맥에서 로마서를 이해하는 게 가장 좋다는 생각이고요, 저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내가 인지하지 못해도, 나를 구원한다면 내가 2차 세계 대전에 태어나서 예수님을 믿기도 전에 전쟁터에 끌려가서 내가 어렸을 때 엄마, 아버지가 불러주던 찬송가를 부르면서 내가 죽었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그 병사가 참호 속에서 포탄을 맞으며 죽어갈 때 하나님이 그 병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는 로마서의 내적논리를 모르고 아브라함을 모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도 이 구원 받는 하나님이 사용하는 기준은 그리스도의 신실한 순종이라는 절대 기준이기 때문에 로마서의 내적논리에 따라 구원받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구원 받는 사람이 자의식적으로, 의식적으로, 인지적으로 로마서의 내적논리를 다 이해해야 만이 구원 받을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좁히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그런 논리는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저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 때문에 인류가 구원 받는다는 로마서의 그 큰 원리를 믿는 바입니다. 그렇지만 믿는 사람이 로마서의 이런 치밀한 내적논리를 이해하고, 아브라함도 이해하고 다윗도 이해하면서 이렇게 복잡한 논리를 거쳐서 마침내 의로워져서 구원받는다? 이것은 지극히 일부 사람들에게 유용한, 일부 사람들을 위한, 이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한 논리지 많은 사람들은 이것 없이도 하나님의 압도적 신실함으로 그리스도의 피 흘리는 그 순종의 눈부신 공로로 구원을 받으면은 그것은 로마서의 복음으로 구원 받는 거다. 저는 그렇게 본다는 거죠. 이해할 수 있죠? 그래서 우리가 로마서의 이 내적논리를 모른다고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거나, 이런 걸 한 번도 공부해 보지 않은 저 노량진 교회 권사님이, 단 한 번도 로마서를 배워보지 못한 노량진 교회 권사님이 16살 때부터 60년 동안 지금 신앙 생활해 왔는데 이 신실한 이 노량진 교회 권사님이, 한글도 최근에 깨친 이런 권사님들이 로마서를 몰랐다, 이해하기도 힘들고, 그 분은 자의식적으로, 인지적으로 로마서의 내적논리를 조리 있게 말을 못한다 할지라도 그 16세에 구원받고 60년 간 신앙 생활했던 노량진 교회 그 권사님, 한글을 최근에 깨쳐서 감격하는 그 권사님의 마음에도 로마서의 복음이 이미 역사했다고 저는 보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인지하는 정도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둘째 아담의 의로운 순종으로 첫째 아담의 죄와 죽음의 본성에 속박되었던 사람을 구원해내시기 때문에 로마서의 논리가 맞기는 맞지만 로마서의 논리를 얼마나 이해를 많이 하는가는 좀 다른 문제라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묻습니다. “목사님.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거라사 광인이 신앙 고백했습니까? 저 삭개오가 신앙 고백했습니까?” 예, 그런데 삭개오가 신앙 고백하는 점이 안 나와도 삭개오가 구원 받은 논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압도적 신실함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순종의 대가로 구원 받은 것 맞고, 거라사 광인도 맞습니다. 예수님이 거라사 광인을 구원했죠. 예수님의 말의 권세, 예수님이 거라사 광인을 귀신으로부터 해방시킨 그 말의 권세는 예수님이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신 그 권세로 구원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 모든 자들에게 뛰어난 이름이 되어서 그들을 통치하는 권세자가 된 이유가 뭐죠? 빌립보서 2장 6절부터 11절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근본 본체시나 동등됨을 강탈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어주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들의 종이 되셔서, 그를 극단하게 낮추었을 때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그를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혀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게 하셨고, 예수의 이름 권세가 세상에,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으므로 즉 로마서가 말하는 그 신실하신 십자가의 복음, 그 복음의 이름으로 거라사 광인도 구원을 받은 것이고, 갈릴리 가버나움 그 회당에 와서 더러운 귀신 들린 자도 예수 이름 권세로 구원받은 것이니까, 예수의 순종권세로, 예수님의 눈부신 의로움의 권세로 구원 받았으니까 전부 다 로마서로 구원 받은 거죠. 전부 다. 모든 사람들이 로마서로 받은 거죠.

 

그런데 이 로마서의 원리를 거라사 광인이 지금 우리가 이해하듯이 까지 이해를 못해도 상관이 없다는 거죠. 저는 하나님이 엄청난 사람을 구원하셨으리라 저는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은 천국에서 직분을 받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을지 몰라도 ‘셀 수 없는 사람이 천국에 있다’그랬거든요. 셀 수 없는 사람이. 요한계시록 7장 7절, 8절, 9절과 마태복음 8장 11절 등을 보면은 셀 수 없는 사람이 천국에 와 앉아 있다, 아브라함의 식탁에 앉아 있다고 그랬으니까, ‘내적 구원의 논리를 우리가 얼마나 명료하게, 명석하게 인지를 못하더라도 된다’ 이겁니다. ‘그런데 왜 목사님은 갑자기 지금 이런 말을 합니까?’ 하면은 제 답 때문에 그럽니다. 여러분이 로마서의 내적논리가 잘 이해가 안 되더라도 여러분이 인지하는 수준이 로마서가 말하는 것에 충분히 동의가 안 되더라도 그것이 여러분의 구원, ‘여러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압도적 신실함을 감소시키지도 않고 또는 여러분이 받은 구원의 그 절대 값어치를 감소시키지 못한다’하는 말을 합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로마서의 내적논리는 창세기부터, 모세오경부터, 예언자들의 그런 숱한 구조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한테 가장 명석하게 이해되는 논리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는 5장 20절을 이어받습니다. 5장 20절을 보십시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5장 15절, 5장 20절, 5장 17절 보십시오. 이런데 보면은 ‘넘쳤다. 넘쳤다. 넘쳤다’ 세 번 나옵니다. 이 말은 첫째 아담이 가져온 불순종보다 마지막 아담, 둘째 아담이 가져온 순종이 훨씬 더 인류 전체에게 가져온 유익이 크다. 그러니까 아담의 범죄는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흑자를 남겼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는 정도에 있어서 인류에게 아담 이전의 상태로 복원시킨 수준이 아니라 격상된 복원이다. 훨씬 은혜 넘치는 낙원이다. 아담이 누리지 못했던 하나님의 영이 그 사람들의 마음에 내주할 정도로 하나님과 사람은 더 가까이 왔다. 그래서 그리스도 이래로 인류는 죄도 넘쳤지만 은혜가 더욱 넘쳤다. 하나님과 멀어진 인류의 멀어지는 정도가 1년에 10광년만큼 멀어진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이 역사하여 10광년만큼 멀어지는 인류를 100광년만큼 하나님과 더 가깝게 끌어당기기 때문에 5장 15절, 5장 20절, 5장 17절 등에는 넘쳤다는 말이 나온다. 그 넘쳤다는 말은 뭐냐? 성령의 내주하심이 사람들 마음에 역사하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6장 1절입니다. 이런 내적논리를 가지고 5장 20절 논리를 가지고 바울의 반대자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 당신이 결국은 3장 7절, 8절에서 하던 논리를 똑같이 반복하는 거 아닌가? ‘은혜를 더 받기 위해서 죄를 더 짓자’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 아닌가?” 3장 7절, 8절에서 바울이 그렇게 말했다고 바울의 대적자들이 말하죠? 그런데 5장 20절입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 라는 말을 하니까 6장 1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즉 ‘바울 당신의 논리는 이런 거네? 아담의 죄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넘치게 했으니까 당신의 내적논리를 연장하면 내가 죄 좀 짓고, 내가 첫째 아담의 행동에 내가 가담한다 하더라도 둘째 아담 같은 그런 은혜가 더욱 넘친다면 내 인생은 죄로 얼룩져서 어두운 것보다 이 얼룩진 내 인생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더욱 찬란해진다면은 그 좋은 거 아니냐’라고 말하지 말자, 이런 겁니다. 이 논리가 그렇게 비꼬면 그런 논리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그 이유는 그럴 수 없느니라 6장 2절입니다. 죄에 대해 죽은 우리 처음으로 나옵니다. 이게.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뭘까? 이게 참 설명이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 의도적으로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에서는 죽은 우리, 이때 ‘죽었다’는 말은 약화된 우리입니다. 아예 죽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기 신학에서 로마서에서 ‘죽었다’는 말은 완전히 숨이 끊어져 죽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은 보통 죽음이랑 다릅니다. 강시처럼 무덤을 뛰쳐나올 수는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문제는 ‘죽은 우리’라는 말은 뭐냐면은 죄를 짓고 싶은 원시적 충동에서는 결정적으로 약해진 우리, 연약해진 우리, 죄를 의도적으로 짓고 싶은 그런 하나님께 의도적으로 반역하고 우상숭배할 이런 근원적인 충동에서는 죽은 우리 이런 뜻입니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죄 짓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는데 어떻게 이런 논리가 가능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무릇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고, 세례를 받고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요거 아주 중요한 표현인데 마가복음 10장 35절에서 38절에 나옵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주의 우편과 좌편에 자기 아들들을 앉혀달라고 하니까 주님께서 내가 받을 세례를 받을 수 있겠느냐, 내가 마실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라고 말합니다. 장자 세례 이 비슷한 메타포(metaphor)인데요, 예수 그리스도가 요단강에서 침수한 그 세례도 맞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내가 죽는 죽음도 동참한, 나의 죽음에 함께 동참한 사람이다. 나를 믿는 사람들은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다. 따라서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이것은 과거 시제입니다. 과거. 이 완료가 일어났습니다. 완료.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사람이 어떻게 아담의 원시적 죄 충동으로 돌아가겠느냐? 불가능하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3절, 4절 반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가 결정적입니다. 기독교 구원론이 주관적 확신의 구원론으로 빠지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결정적으로 3절, 4절, 5절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이 박혔다는 것까지는 잘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저 조용기 목사님 집회에 가서 오산리 금식기도원에서 1999년 8.15 금식 성회에서 성령 받고 저 더 이상 사기 안칩니다’라는 이런 주관적 신앙고백이 단지 주관적 신앙고백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뭡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 안에서 행하는 것을 이때 행한다는 것은 공공연히 살아가다,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을 공공연히 보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이 주관적 신앙고백,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는 나의 주관적 신앙고백은 주관적 언어진술, 주관적 고백으로 끝나지 않는다. 공공연히 이때의 행한다는 말이 ‘페리파테오’라는 말입니다. 이 ‘페리파테오’라는 말은 뭡니까? ‘페리파테오’라는 말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회생활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공공연히 구원 받은 자처럼 생활하는 나의 삶의 모든 요소가 구원 받은 자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내가 구원 받았다는 말을 주관적 신념의 고백정도로만 하겠느냐? 내가 구원받았다는 이 고백은 절대로 주관적 신념의 고백이 아니라 공공연히 내가 구원받은 것은 알려졌다’ 이런 뜻입니다. 이게 바로 새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그러면 우리 가향교우들은 어떻게 알아요? 옛날에 우리 가향교회 교우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모르는데’ 맞습니다. 가향교회 교우들이 옛날에 어떻게 생활했는지 모르죠. 그런데 압니다. 왜 아냐 하면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장사되고 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고 새생명 가운데 행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자기 기쁨을 감추려 하더라도, 아무리 자기가 누리는 이 평화를 감추려 하더라도 드러나 버립니다. 평화가 드러나 버립니다. 감사가 드러나 버리고 희락이 드러나 버립니다. 그런데 아무리 짜내어도 나에게 감사가 없고, 희락이 없고, 기쁨이 없고, 사랑이 없다? 그러면 제가 볼 때 신앙고백의 진실성을 좀 의심해 봐야 합니다. 내가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교회까지는 내가 왔는데 한 번도 예수님을 옳게 이해하고 믿고 성령의 인친 사역을 내가 맛보지 못했을 수가 있다는 것을 의심을 해봐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그 사람은 마틴 루터적인 신앙고백, 종교개혁적인 신앙고백에 도달하여 성령충만할 수 있습니다.

 

마무리 하겠습니다. 자 보겠습니다. 기독교 구원론은 주관적 확신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기독교 구원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함께 장사되고, 함께 살리심을 받은 이런 삼중적인 프로세스 과정이 완전히 뚜렷이 내 안에 일어난 것이 의식됩니다. 그래서 새생명 가운데 ‘페리파테오’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공공연히 살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 주변 사람들이 다 알 수밖에 없습니다. “아 김회권! 저가 속한 소속, 김회권이 속한 사회가 바뀌었어! 김회권이가 이제 어둠의 자식들과 같이 안 다녀!” 맞습니다. 그런데 저 같이 유급 성직자가 된 사람들은 구원을 안 받아도 받은 것처럼 연기를 할 수는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저처럼 유급 성직자로 안수 받은 사람들은 구원 감격이 없어도 구원 감격이 있는 것처럼 계속, 계속 연기한다면 사람들이 속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들의 ‘페리파테오’보다 평신도들의 ‘페리파테오’가 훨씬 더 진짜, 진짜, 구원 받은 자의 행로라 할 수 있습니다. 성직자들은 모릅니다. 사실은 잘 모릅니다. 이게 연기인지, 이게 이 사람의 자기 생계를 위해서 저렇게 기쁨도 없는데 있는 것처럼 꾸미는지 아니면은 진짜 기쁜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일반 교우들은 알 수 있죠. 여러분들은 알 수 있죠. 여러분들은 교회 와서 유급 성직자로 사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항존직 투표를 하려면은 교우가 교우들을 잘 살펴야 됩니다. 항존직 투표를 하려면은 ‘저분들의 결정들은 앞으로 우리 교회를 대표하는 결정이야. 저분들의 결정은 우리가 어떤 일이 있어도 믿어줘야 돼’ 하는 그 사람이 바로 장로입니다. 장로. 그런 장로님과 목사님이 똘똘 뭉쳐서 우리 교우들이 갈 길을, 우리를 위해서 어떤 결정을 내려도 저분들의 결정은 옳은 결정이라고 믿음직스러움을 주는 항존직 후보가 나타나야만이 조직 교회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려면은 찬찬히 교우들끼리 살피면서, 자세히 주목하면서 공중기도도 들어보고, 언동도 보고, 그 말씀을 일련 간증의 그런 컨텐츠도 검증을 해서 투표를 해야 됩니다. 그래야 옳은 장로님이 나와서 그 옳은 장로님, 교우의 3/2 지지를 받는 장로님이 나와서 교회를 이끌어갈 때 그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됩니다. 그래서 위임 목사님과 항존직이 생기면 가장 이상적인 의미로는 안정되고 성장가도를 달릴 수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 교우들이 서로를 잘 살펴야 됩니다. ‘저분이 혹시 합당하지 않을까?’ 그래서 딱 투표를 해줘야 됩니다. 이것은 이 일을 안 거치면 안 됩니다. 누군가는 항존직이든 아니든, 어떤 이야기이든 먼저 예수님께 밀착 동행하는 제자단이 생겨야 교회가 생깁니다. 그것을 항존직이라 부르던, 장로라 부르던. ‘우리 모두 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맙시다. 우리 모두 다 등거리 불순종을 하면서 아무도 항존직도 되지 말고 장로도 되지 맙시다’ 이, 이렇게 나가는 것은 약간 회중교회 같은 전통인데 그렇게 나가서 모든 회중이 장로님들처럼, 권사님처럼 높아지면 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장로님 뽑지 말자’는 말이 ‘등거리 불순종자로 가득 찬 교회로 만들자’란 말로 속히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폐해가 있어도 먼저 밀착 동행하는 제자들이 나타나면은 교회 전체로 유익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다시 살리심을 받아서 새생명 가운데 행하는 진짜 진성 신자, 참 신자 되어 오늘도 사회생활에서 ‘페리파테오’ 공공연히 새 사람된 것을 입증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신앙고백은 주관적일지라도 우리의 삶은 공공연히 사람들 앞에 다 알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가향교회 성도들이 공공연히, 공공연히 새생명 가운데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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