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로마서 5:1-5
제목: 하나님과 누리는 화평
1년에 한 번씩 이스라엘 전 민족의 죄를 대속죄일날 하나님은 용서하시는데 그 용서의 이유가 7번 뿌려지는 속죄제 피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지난 날 잘못된 삶을 전부 다 잘못 살았다고 인정하고 ‘저렇게 죄 지은 나는 죽었습니다. 저런 죄를 짓고 이런 죄를 지은 저는, 저 시므온은 죽었습니다. 저 벤자민은 죽었습니다, 저 레위인은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집단적 죽음을 상징하여 7번 하나님이 휘장에 뿌려주는 거를 갔다가 우리는 대속제일 제사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대속제일 제사에 대제사장이 속죄 제사, 시은좌, 은혜의 보좌에 들어가는 그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은혜의 보좌에 들어가자마자 두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서 빛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던 성소, 지성소 휘장 밖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지성소 휘장이 찢어져서 예수님의 피 때문에 찢어진 휘장 너머로 들어가서 은혜의 보좌 앞에 도달하여 그 은혜의 보좌에 가득 차 있는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겁니다. 대속죄일 제사의 그림 언어를 바울은 지금 여기서 ‘은혜에 들어가다’란 동사와 ‘영광을 보고 즐거워한다’는 이 두 가지 동사를 통해서 대속죄일 제사를 소환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대속죄일 제사의 그림 언어를 써서 예수님의 신실하신 모습,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그 죽음이 율법의 요구를 100% 성취하는 죽음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죽음임과 동시에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율법의 요구를 다 성취하는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불순종한 이스라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선민주의의 오만함에 빠져 이스라엘은 죽었다, 이방인을 멸시하던 이스라엘은 죽었다, 이제 불순종하던 이스라엘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또한 예수님의 죽음은 그 불순종한 이스라엘의 죄를 뒤집어쓰고 대신 죽어준, 엄청 마음씨 좋은 이상적인 이스라엘 사람의 순종을 대신하니까 예수의 죽음에는 죄를 대신 짊어져서 벌 받는 죽음도 있고, 죄 없는 자가 이스라엘 동포를 위해서 사랑을 극대 값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죽는 순종을, 즉 극대값적 친구를 위해서 죽는 죽음,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죽는 죽음, 이웃 사랑의 극치, 그다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죽음, 하나님 사랑과 이스라엘 동포들의 죄를 대신하는 이 사랑을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죽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 안에는 오만한 선민주의에 빠졌던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뒤집어쓰고 벌 받아 죽는 죽음의 의미도 있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는 이 구약성경의 사랑의 이중 계명을 100% 성취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죽는, 사랑을 극대 값으로 표현하기 위한 죽음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죽음이 예수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 이 신실한 순종을 보고 하나님은 성소 휘장을 쫙 열어젖혔습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까지. 그래서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는 말은 뭐냐하면 성소, 지성소 휘장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심판하는 무서운 눈초리가 누그러뜨려졌고,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의 시발점이 돼 버린겁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살아나셔서 예수 믿는 자에게 예수님의 신실함이 파생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신실함이 유입되게 했고, 전가되게 했고,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신실해집니다. 여러분, 그래서 ‘내가 예수 믿는다’란 그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님이 나를 믿는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믿는 자로 인정하는 순간이 인을 치는 순간입니다. 성령의 인을 치는 순간,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는 그것이 신앙의 시발이 아니라 예수 믿는다는 나의 신앙고백을 하나님이 진지하게 영접하여 진짜 믿는 자로 인을 쳐주는 이 사건이 내가 의롭게 된 사건입니다.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 진짜 그래서, 여러분이 이전 교회에서 뭘 어떻게 배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전 교회에서 만일에 이렇게 안 가르쳤으면 그것은 바울의 로마서를, 바울의 신약의 복음을 정통으로 안 가르쳐준 겁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 떼 지어 나타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기 위해서, 교회의 기초를 놓기 위해서 떼 지어 믿는 사람을 집단으로 밀어 넣어서 어지럽히지 않고 먼저 성령의 인침을 경험한 사람들을 차곡차곡 쌓았다가 그들로 하여금 성령의 민감한 음성에 순종할 정도로의 순종공동체, 그 Inner-Circle을 만드신 후에 교회를 천천히, 천천히 성장시켜 갑니다. 이 성장의 원리가 바울 교회의 성장의 원리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지성소 휘장 너머 있는 진노하시는 하나님, 모든 인생을 심판하실 기세로 가득 차 있는 하나님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보시고 마음을 푸시고 우리에게 용서를 선포하시는데 그 용서의 증거가 마음의 할례입니다. 그 마음의 할례가 바로 뭡니까? 예수를 주라 고백하자마자 우리에게 임하는 성령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1절부터 3절, 로마서 8장 1절부터 39절이 예수를 믿는 자를 끝내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의 진정성을 보시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칭의’ 의롭게 된 자의 특징입니다. 예수를 진지하게 믿은 지 3년 정도 안에는 이런 성령의 인침 사역이 나타납니다. 그 3년 동안 하나님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관찰하시고, 우리를 응시하시고, 우리 내적 동기를 보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보신 후에 우리 하나님은 문을 열어주십니다. 그게 바로 뭐냐면은 성령의 인침입니다. 이 성령의 인침도 없이 장로가 된 사람도 많습니다. 제가 볼 때는 아주 요지경입니다. 한국교회는 과히 엉망진창이라 봐야 합니다. 워낙 교회도 이렇게 믿는 과정을 초대교회나 이 정통교회가 했던 것처럼 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례 받는 것이 너무너무 성의가 없습니다. 그래서 너무 모든 게 지금 정직하지가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정직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의 신자 되는 비율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 일본 사람은 진짜 완전히 주권을 양도할 때까지는 예수를 못 믿겠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권양도’ 믿는 그 규정, 그 깨알 같은 작은 글씨 읽어보지 않고 사인부터 먼저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한국 사람들은 정직성에서 참 많이 모지랍니다. 정직성이 모지라기 때문에 성경을 읽어보고 로마서 8장 1절부터 39절까지 읽어보고 이런 일이 내게 안 일어나도 자기가 참 신자가 되었는가를 반성하기보다는 ‘아이고 사람들이 나랑 비슷하지 않어? 뭐 나랑 저 사람 차이가 뭔데?’라고 하면서 그냥 지나갑니다. 저는 이것이 너무 충격이라고 보거든요. 이게 충격이라고 보는 이유가 로마서 8장 1절로부터 39절로 자가 진단을 했는데 로마서 8장 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부터 시작해서 제일 마지막에 “사망이나 능력이나 천사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 요 일련의 드라마가 우리 신자의 삶을 지배하는 키워드거든요. 실제로. 그런데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일을 상시로 합니다.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부르짖음은 내가 억지로 상상력을 동원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로마서 5장 보십시오. 로마서 5장 5절은 3절부터 희한한 일을 당한 사람의 의심을 척결해 줍니다. 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면서 이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기 시작했는데 현실에서는 환란이 옵니다. 5장 3절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이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기 시작했고 이제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접근했는데 오? 현실에서는 환난이 나타나고 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소망을, 환난, 인내, 연단 이런 일련의 부정적인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은 거 맞아? 이거? 내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지?’라고 우리 신앙의 확신, 우리가 인침 받은 성령의 확신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련의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게 바로 뭐냐 하면은 5장 3절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데 다만 이뿐 아니라 환난 중에도 우리가 구원 받아서 느끼는 즐거움은 감소되지 않습니다. 환난 중에도. 우리가 환난을 경험하는데도 우리가 받은 구원의 즐거움은 감소되지 않습니다. 위축시킬 수 있지만요. 그런데 환난은, 구원받은 자의 환난은 인내를 만들어내고, 구원받은 자의 인내는 연단을 만들어 내고, 구원받은 자가 느끼는 환난은 우리에게 소망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우리와 누리는 화평을 실제적인 삶에서 왕창 맛보는 그 사태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구원받은 자가 누리는 환난은 인내를 만들고, 인내는 신앙 성품을 만들어내고, 신앙 성품은 우리가 하나님과 그동안 하나님을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했는데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다는 이 사실을 이렇게 환난 경험 속에서 잠시 흐리게 만들었다가 끝내는 5장 5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됨을 기대하면서 영광을 즐거워했는데 마침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쏟아 부어졌다. 이런 극적인 반전이 일어납니다.
마무리 하겠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기 시작했는데 화평을 누리는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이제 나에게 멋진 영광의 날이 올 줄 알았는데 갑자기 중간에 삽입 온 것처럼 환난이 끼어듭니다. 환난이 끼어들고 환난이 오래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오래 참음을 요구합니다. 요래 참음도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완전히 새로운 인간이 될 때까지, 내 성품을 단련할 때까지 이 환난은 계속됩니다. 이 환난이 계속되다가 내가 새로운 신앙 성품이 생기자마자 연단을, 새로운 신앙성품을 가리킵니다. Character 입니다. 이 연단은 나에게 ‘아 이제 곧 이 환난이 끝나는 순간 하나님이 나를 인친 자로 대접하는 놀라운 그런 반전을 일으켜 주실 거야!’라는 희망을 갖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희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5장 5절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이것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이 행적 이 Cycle을 경험해 본 사람에게는 이게 너무너무 쉬운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사랑과 여러분의 구원과 여러분이 누리는 신앙의 그 상태를 의심하는 환난과 오래 참음과 신앙 성품을 연단하는 장기간의 환난과 그리고 현재로서는 맛보지 못하지만 오직 희망으로만 맛보는 구원, 구원이 현재의 경험이 아니라 미래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불확실한 시간을 보냈습니까? 이런 불확실한 시간은 환난, 인내, 연단, 소망으로만 구원 바라보기, 이런 불확신의 Cycle에 들어갔다가 감히 마침내 갑자기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쏟아 부어지는 이런 대 반전을 경험해 본적이 있습니까? 이걸 경험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는, 의롭다고 인침을 받은 사람에게는 이렇게 대 반전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이 누구 이야기일까요? 여러분 이거 잘 보세요. 환난 Cycle에 들어갔다가, 오래 참음을 요구받았다가, 연단이 되었다가 완전히 이제 하나님께 완전히 사로잡힌 자가 되었다가 마침내 하나님 약속이 성취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아~ 서스펜스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이 딱 성취는 되는 것을 맛보아서 하루 종일 웃었던 사람이 누구예요? 하루 종일 웃어서 그래서 아들 이름을 웃음둥이 라고 지은 사람이 누구죠? 이거 누구 이야기 같아요? 환난, 인내, 연단. 소망 마침내 큰 사랑 이거 누구 이야기 같습니까? 누구 인생을 해설한 것 같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 이야기이에요. 이게 아브라함과 사라 이야기를 추상명사로 풀은 거예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런 일을 겪었다 이거죠! 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 놀라운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난답니다. 우리가 믿으면.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8절부터 22절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일이 이방 신자, 갈라디아 신자, 우리에게도 나타납니다!’ 이게 바울이 설명하는 거잖아요. 여러분 너무 기쁨이 충만합니다. 이 기쁨은 세상 다른 기쁨과 완전히 다른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 여러분 진짜 여러분이 믿는 자가 되세요. 하나님의 파생적 신실함에 사로잡혀서 성령의 인침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일을 부단히 하게 하세요. 그래야 새벽기도가 재미있습니다. 찬양이 재미있고, 예배가 재미있고, 성도랑 만나는 게 너무 재미있습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성도랑 만나면 우리 스토리가 끝나질 않습니다. 계속 아름다운 이야기가 엮어져 갑니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엮어져 갑니다. 여러분, 그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만남 안에는 어떤 스토리가 만들어질지 몰라요. 너무너무 장엄한 이야기가 지금 준비되어 있고, 잘 보세요. 그래서 신자끼리 서로 지속적으로 관찰하다가 내가 마침내 저 사람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제가 3년 동안 가향교회 목회 현장에서는 많이 떠나있었잖아요. 개인적으로 교우들을 만나지도 않았고. 그런데 이번에 제가 ‘아 우리 교인들 중에서 부쩍 성장한 교우들이 있는 것 같다!’ 파생적 신실함이 몸에 막 나타난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들이 막 있어 너무 요즘 제가 위로 받습니다. ‘확실히 그분들은 신실한 사람, 파생적 신실함을 덧입은 사람인가 보다’라는 느낌이 듭니다. 인간의 열심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가향교회에서 이 작은 직분 맡는 것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명함에 박을 수 있는 것 아니죠? 가향교회 관리팀장, 가향교회 예배부장, 가향교회 재정부장 뭐 이런 것 누가 알아줍니까? 하나님만 아시죠. 지금 가향교회에 새벽기도를 나와서 중보기도 일삼는 것 세상 사람들 누가 알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지속적으로 관찰하신 후에 마침내 아브라함에게 하루 종일 웃게 만드셨거든요!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웃음이 찾아온다. 시편 기자처럼 하루 종일 웃는 사람, 이삭을 안고 웃음을 그치지 못했던 사라처럼 둥실둥실 춤을 추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납니다.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파생된 신실함을 덧입은 사람에게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이 환난 중에 오래 참음을 요구받고 있고, 오래 참음을 경험하다가 신앙 성품이 완전히 새로워지길 요구받고 있고 그렇게 되어도 아직까지 약속의 실체는 나타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해야 되는 이 서스펜스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마침내 하루 종일 웃음을 그칠 수 없는 기쁜 날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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