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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5:12-21
제목: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 : 한 사람 원리
여러분 레위기 16장과 17장과 18장 이 세 장을 가만히 읽어보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속죄된 죄,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 받은 죄의 목록과 레위기 16장이 말하는 대속죄일 제사가 대속한 용서한 죄 목록이 다르다라는 걸 알게 됩니다. 여러분 레위기 16장에는 1년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죄 중에서 부지중에 지은 죄, 불결한 것과 접촉 당함으로써 일상 생활하면서 고의성이 없이 덧입게 된 불결, 부정 또는 허물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종교적 경범죄들을 위한 죄사함입니다. 종교적 경범죄를 위한 제사가 대속죄일 제사입니다. 또 이스라엘 대부분의 평민들은 대속죄일 날 황소의 피로 속죄제의 피로 용서받을 수 있는 죄를 짓고 그 범주 안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대속죄일의 제사가 해결할 수 없는 죄가 17장, 18장과 20장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17장, 18장, 20장에 나오는 죄들은 대속죄일의 제사도 해결할 수 없고 바로 즉시 처분한, 죄를 짓자마자 즉시 죽여 버리는 그런 형법으로 다스리는 죄들입니다. 그러니까 종교적 제사로도 해결 안 되는 죄가 17장, 18장, 20장에 나옵니다. 그런 이 죄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오늘날 형법으로 다스리는, 오늘날 사형으로 다스리는 이런 무서운 죄들입니다. 그 죄를 한 마디로 말해서 피 흘리기게 하는 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기는 무시무시한 윤리적인 죄, 근친상간, 동성애, 짐승과 교합함, 우상숭배 이런 것들은 제사로 절대로 해결이 안 됐습니다. 이것들은 제사로 왜 해결이 안 됐냐 하면 이것들은 즉시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제사로 해결된 죄는 경범죄라 할 수 있고, 돌로 쳐 죽여서 그 죄가 간음한 사람의 죄가 생명력을 갖고 우주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다시 말해서 우상숭배한 자들의 죄가 은닉되어서 감추어진 채 계속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그런 행위를 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 죄를 범한 사람을 죽여 버림으로써 그 죄가 생물처럼 자라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17장, 18장, 20장의 죄를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즉시 사형당한 죄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혹시 기억납니까? 로마서 1장 28절부터 31절에 이런 모든 죄의 목록을 말하면서요, 이런 죄들은 1장 28절부터 31절입니다.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주사, 더러운 정욕에 내어버려두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그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매 그들을 불의에, 수군거림에, 비방함에, 하나님을 증오함에 이런 모든 죄들은 사형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고도 그런 죄를 지어도 옳다하고 그런 죄를 짓는 자들을 옳다고 할 뿐만 아니라 그 죄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들은 그런 죄들을 범한다. 그게 1장 28절부터 31절이거든요. 그 사형에 해당되는 죄가 바로 뭐냐? 레위기 17장, 18장, 20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는 레위기 16장에서 말하는 대속죄일의 제물이 해소할 수 있는 죄보다 더 참혹한 죄를 예수님의 피는 해소했다. 예수님의 피는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궁극적인 죄 즉 타인의 생명권을 손상하고 파괴하는, 타인의 생명을 파괴하는, 피 흘리는 그 죄를 그 각각의 사람이 담당해야 될 그 죄를 예수님이 피 흘림으로 각각의 사람이 담당해야 될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치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죽음은 대속죄일의 재현이 아닙니다. 그것의 연장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큰 죄, 16장, 17장, 18장, 20장에 나오는 참혹한 인류의 모든 죄들을 예수님이 대신 징벌 받았다. 그게 바로 아담 인류의 죄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여러분 잘 구분해야 됩니다. 레위기 5대 제사나 속죄제 제사는 종교적 경범죄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건 안 됩니다. 보세요. 어떤 사람이 살인을 하고 나서 고해 성사, 고해 신부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내가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총으로 네 사람을 쏴 죽였습니다. 신부님, 저에게 그리스도의 용서를 선포해주십시오.” 이렇게 대부에 나오는 말론 브란도나 총잡이들이 사람을 네 사람 죽이고 고해 성사실에 가서 용서를 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때는 영성체를 먹어도 용서가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형법으로 다스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죄들은 형법으로 즉시 처분한 죄, 아니면 경범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말하면 경범죄는 뭡니까? 벌금 죄입니다. 벌금 죄. 그러니까 속죄 제사를 드렸다는 말은 뭐죠? 그러니까 종교적 벌금을 냈다는 뜻입니다. 속죄 제사는. 제물은 드린다는 말은 뭐죠? 속죄 제물? 벌금 죄입니다. 그런데 벌금으로 해결 안 되는 무시무시한 죄들은 그 죄를 담당한 자가 직접 피 흘려 죽음으로 그 죄를 담당해서 자기가 범한 죄가 더이상 우주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하고 죄도 죽고, 자기도 죽었습니다. 이게 원리입니다. 이게 1절 죄의 생물학적 구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는 레위기 17장, 18장, 20장에 나오는 그 참혹한 죄, 즉시 처분되는 죄, 즉시 피 흘려 죽음으로 그 자기가 범한 죄를 더이상 우주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죄와 함께 죄 짓는 사람도 같이 죽는 그 죄를 예수님이 피 흘려 죽음으로 죄를 용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만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만 하면 죄와 그 죄 지은 사람은 영구적으로 죽어서 소멸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는 죽이되 그 죄를 범한 사람을 다시 살려서 Second chance 두 번째 기회를 주기 위해서 예수님을 부활시켜서 우리 죄가 용서 받았고 우리가 새 언약 백성 됐다고 선언함으로써 다시 한번 아담의 범죄 이전 상태로 다시 한번 Reformat을 새로 해줍니다. 다시 시작합니다. Reset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는 창세기 3장 상태에서 2장 상태로 Reset 하면서 죄 짓기 이전 상태로 다시 하나님과 언약 백성의 관계로 우리를 복원시켜 줍니다. 그것이 오늘 5장 12절입니다.
5장 12절은 한 사람의 원리인데 우리한테 어처구니없이 불합리할 정도로 유리합니다.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는 원리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불합리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는 Chance를 얻었다는 것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유리하고 은혜롭습니다. 5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이것은 지금 바울이 창세기 3장을 펴놓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바울은 창세기를 펴놓고 창세기를 왔다갔다 하면서 4장에서 창세기 15장부터 17장을 펴 놓았습니다. 그다음에 22장을 펴 놓았습니다. 지금은 다시 창세기 3장을 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우리가 아담 안에서 생물학적으로 내포된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요. 참, 여러분 이게 이해가 됩니까? 저는 이 원리를 일본 사람이 쓴 책을 읽으면서 좀 깨달았습니다. ‘뇌내 혁명’ 그러니까 뇌 안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는 뜻인데 이 뇌 과학자가 쓴 책인데요, 후손의 모든 유전정보 안에는 조상이 범했던, 조상이 행했던 일들을 기억하는 기억 유전인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억했다는 말은 학습했다는 말이거든요. 내 피 안에는 경주 김씨 우리 조상들이 행했던, 조상이 품었던 생각의, 그것들 일부가 남아있다는 거죠. 그래서 ‘뇌내 혁명’이란 책은 왜 천재가 나오는가를 설명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 책을 보니까요. 그리고 아담의 원죄론을 설명하기가 참 좋습니다. 인간은 23쌍 염기서열로 된 DNA 염기서열을 그 유전 정보의 염기서열 안에 존재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기가 이 유전의 사슬을 벗어나려고 해도 우리 안에는 우리 조상이 범했던 기억을 학습하고 있는 유전자가 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류는 아담의 범죄에 유전자적으로 가담한 셈이 됩니다. 유전자적으로. 그래서 아담이 범했던 그 행위가 유전자 안에서 만일에 돌연변이를 일으켜서 하나님에 대해서 불순종하는 내적 성향을 가진 유전자를 만들었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왔다는 바울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뇌 과학자들의 책들은 이런 것들을 많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떤 행위가 ‘죄가 있다, 죄가 없다’라는 그 말을 하는 단계는 인류가 오래 전에 죄가 있다는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는 인간이 한 행동은 죄가 아닌데 ‘이건 죄가 있다’라고 인간이 규정을 받기 시작할 때부터는 죄가 됩니다. 그것은 인간 본성 안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종교적 감정이 싹 틀 때부터는 죄에 대한 이해도 싹 텄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율법이 오기 전까지는 우상숭배를 단죄하는 율법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오기 전에도 샘족의 일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24장 보십시오. 우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는 우상을 섬겼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유프라테스 강 너머에서는 우상을 섬겼다고 했지만 하나님은 지나간 날 모든 것을 다 묵과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오고 나서부터는 율법의 정죄가 규칙적으로 적용된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에게도 아담의 죄가 그 사람에게 역사하여 사망이 왕 노릇했습니다. 5장 14절입니다. 그래서 사망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중요합니다. 아담이 가져온 죄는 아담의 죽음을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아닌 둘째 아담 예수의 순종이 가져온 그 이득은 첫째 아담이 가져온 손해보다 더 커서 결국은 남는 장사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눈부신 순종은 아담의 불순종을 삼켰고 예수님의 그 극단한 하나님에 대한 지고지순한 순종은 아담의 불순종을 무효화해서 은혜가 죄보다 커졌습니다. 15절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온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여기서 중요합니다. 더욱 입니다. 더욱.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더욱 넘쳤다’ 이 말이 중요합니다.
자, 더욱 넘쳤다는 것은 아담이 가져온 범죄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 가져온 은혜가 더 넘쳐서 하나님을 더 기쁘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담 인류 때문에 하나님이 damage를 크게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류 트라우마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침팬지 트라우마는 안 생겼는데 아담 트라우마 때문에 하나님도 안식을 빼앗겼는데 아담 인류를 대표해서 둘째 아담인 예수가 아담 인류가 지었던 모든 죄 때문에 실망한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만족시키고도 남는 순종을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 이전 상태로 원상복구를 시키지 않고 훨씬 더 초월적인, 만회하는, 상회하는 복구, 다시 말해서 격상된 복구를 시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성을 더 격상된 복구를 시켰기 때문에 은혜가 넘쳤습니다. 이것은 아주, 아주, 아주, 좋은 일입니다. 우리한테는.... 그래서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거듭난 사람, 예수님의 성령 안에 거듭난 사람들은, 아담은 맛도 볼 수 없는, 아담 인류는 기대할 수 없었던 성령 충만함을 맛보면서 세밀하고 정밀하게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담 인류는 예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복입니다. 그래서 넘쳤다는 말이 참 중요합니다. 16절입니다.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것처럼 예수 안에서, 둘째 아담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될 Chance를 얻었습니다. 이때 의롭게 되었다는 말은 우리 모두 예수를 고백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의롭게 될 기회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그런데 왜 아담 안에 있을 때는 ‘내가 죄 짓겠습니다.’ 동의하지 않았는데 죄인이 되는데, 왜 예수 안에서는 ‘예수 믿겠습니다’라는 말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겁니다. 우리가 죄인이 되는 과정은, 죄인이 되는 과정은 내리막길로 미끄러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고, 의인이 되는 과정은 내리막길에서 오르막길로 올라오기 때문에 의인이 되는 이 과정은 진실로 원해야 합니다. 왜?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의롭게 되는 이 과정은 지금 당신이 아담 인류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삶에 비하면은 굉장히 손해 볼 수도 있고, 굉장히 추가 고난을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유 재산이 축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죄악된 탐닉되어 즐기던 그런 모든 나쁜 일들을 더이상 재미있게 못 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 의롭게 된다는 말은 지금 당신이 아담의 본성 안에서 누렸던 이런 기존의 삶을 상당히 구조 조정하는 그런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래도 예수 안에서 둘째 아담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됐다는 선언을 원합니까? 물어봅니다. 그 물어보는 이유는 하나님이 설계한 하나님 나라는 지극히 자발적인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요. 지극히 자원적이고 자발적인 사람들이 아무런 외적 강제나 공권력의 위협 없이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저절로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천국은 반드시 우리가 이 예수를 믿는 그 의지를 확고부동한 자발성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범죄가 됐을 때는 동의 없이 범죄가 되었지만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된 자가 될 때는 반드시 자발적인 충분한 숙고 끝에 “예 제가 예수를 믿겠습니다!” 라고 심사숙고 끝에 결단해야 됩니다. 이런 심사숙고의 결단이 하나님께 온전히 영접될 때 성령으로 Endorse 인을 쳐줍니다. ‘당신이 예수를 주로 고백한 이 믿음의 신실성은 하나님께 인정받았습니다’하면서 싸인을 받습니다. 그게 바로 뭐냐면은 인을 쳐줍니다. 인을 친다는 말은 뭐냐면은 ‘너는 내 것이다. 너는 하나님 자녀가 됐다.’ 그게 바로 성령의 내적 인침 사역입니다. 이 성령의 내적 인침 사역은 감미로운 속박입니다. 제가 하나님께 지금 감미롭게 속박되어 있습니다. 제가 새벽기도에 감미롭게 속박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침마다 일어나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전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하나님나라 일을 하는 것은 저한테 속박입니다. 그런데 지극히 자발적이고 감미로운 속박입니다. 성령의 인을 친 바 된 사람들은 예배드리는 것이 감미로운 속박이고, 교회 다니는 것이, 성도를 섬기고 사랑하고, 교회 일을 하는 봉사 일을 하는 것이 감미로운 속박입니다. 그래서 인을 친 바 된 사람의 성실하고 인친 바의 내적 비밀은 없지만은 인간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의 성실은 어디서 차이가 나냐 하면은 성령의 내적 인침 없는 사역은 예를 들어서 “내가 고용돼서 일을 하거나, 내가 성령의 내적 추동력은 공급받지 못하지만 저 공동체에 끼는 것이 내 존재감을 상승시켜”라는 그런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 그런 사람들은 처음에는 똑같은 모습으로 출현합니다.
그런데 점점점점 성령의 내적 감화 강동이 없는 사람의 성실한 봉사는 화를 내게 만들고 남을 비판하게 만들고 계속 누군가를 헐뜯게 됩니다. 왜? 피곤하기 때문에. 그런데 성령의 내적 인친 자들, 즉 우리의 범죄보다 우리의 은사가 더 넘치는 사람들은 아담의 본성이 가져온 피해보다 예수 그리스도 둘째 아담이 가져온 두 번째 이 새로운 피조물들, 새로운 본성이 나를 압도하면은 나는 희락과 감사와 사랑이 충만하여 아무리 교회에 봉사를 많이 해도 남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그걸 구분합니다. 교회 일을 하는 사람이 점점 불행해지고 남에 대한 Judgmental 심판적 태도가 많은 사람들은 뭔가 기쁨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이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교회의 집사직을 맡겨도 성가대장직을 맡겨도 너무나 즐겁고 이게 나에게 영광스러운 존귀한 직분이란 생각이 들면은 그 사람의 즐거움은 성령의 내적 인침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30~40년간 같은 교회를 다니면서 똑같은 사람들을 계속 사랑하는 사람들은 대개 성령의 인치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똑같은 항상성을 유지하면서 사랑이 충만하고, 감사가 충만하고, 그렇게 헌신이 충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여러분 스스로를, 그리고 여러분 교우들을 지금은 잘 살펴야 합니다. 누가 우리교회 장로감일까? 누가 우리 교회에 좀 더 모범적인 신자일까? 그걸 왜 여러분이 분별하고 평가해야 되냐면 그래야 조직 교회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찌보면은 상호 평가에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조직 교회가 됩니다. 이 무서운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조직 교회가 되거나 안 되거나 아마 여러분들은 서로를 다 알고 있을 거예요. ‘저 분은 어떤 분이다.’ 대개 알 수 있죠. 그래서 여러분도 분별하고 있고 우리 서로 분별합니다. ‘아 저 분이 목사님인데 그냥 그냥 억지로 하는 건지, 그냥 월급 때문에 하는 건지, 그냥 재미있는 건지’ 그런 것도 금방 알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 다 알죠. 여러분과 제가 아담의 본성이 가져온 Damage보다 둘째 아담 예수가 우리에게 끼친 은혜가 넘쳤기 때문에 이 넘치는 부분이 바로 뭡니까? 고도의 자발성, 감미로운 속박, 그리고 끊임없이 샘솟는 기쁨과 사랑, 성령 충만한 열심 이런 것들은 전부 다 아담의 본성, 옛 사람의 본성을 집어 삼켜서 아담의 죄를 없는 것처럼 원상 복구시킬 뿐만 아니라 넘쳐나는 은사 때문에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17절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절은 삽입어구 해설입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1절입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예, 오늘 5장 12절부터 21절의 핵심은 17절과 19절입니다. 예수님의 보혈, 예수님의 피는 아담 본성을 원상태로 복구시키지 않고 격상된 방식으로 복구시켜서 이걸 up-cycling 그렇게 말합니다. ‘re-cycling 하지 않고, 아담 본성을 up-cycling 상승적으로 재활 복구시켰다’ 이렇게 말합니다. 신학에서는. 여러분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 안에 넘치길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치면은 절대 감소하지 않는 기쁨, 절대 감소하지 않는 자발성, 절대 감소하지 않는 사랑 이것이 여러분 인생을 죽 지탱합니다. 여러분 안에 괴로운 일도 있고, 근심 염려도 가득 찬 일도 있겠죠.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의 이런 권세가 여러분을 에워싼 근심들을 무효화 시킬 수 있기를 바라고 아무것도 아닌 걸로 여기는 대범함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근심 많고 걱정 많은 세상에 나가 삽니다.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쳐서 극한 자발성과 감사함으로 남은 생애 내내 신실함과 믿음직스러움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복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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