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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6:15-21 /제목: 죄의 종 혹은 순종의 길을 매일 선택하는 고투

by 【고동엽】 2022. 1. 15.
본문: 로마서 6:15-21
제목: 죄의 종 혹은 순종의 길을 매일 선택하는 고투


바울이 구사하는 두 가지 논리는 ‘의롭다하심은 완성된 일이고, 의롭다하심은 이제 일어난 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생에 이르는 이 길은 아직까지 달려가야 할 미완의 과업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의롭다하심을 입었다는 말뜻은 구원을 받았다는 말의 시작일 뿐이고, 구원의 완성은 아닙니다.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적 요구를 느끼는, 하나님께 언약적으로 묶여 있다는 것을 느끼는 자각에 이르렀다는 뜻이지 그 언약 율법을 다 완성했다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의롭다하심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의롭다하심이 일어난 이유는 로마서 4장 25절의 논리입니다. “그는 우리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 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느니라.” 확실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어서 더 이상 진노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의롭다하심을 얻었다는 말은 더 이상 선과 악을 선택할 고투, 선과 악을 매 순간 선택해야 되는 이 짐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했는가? 그건 아니라는 거죠. 우리는 구원을 그렇게 생각하기 쉽죠. 내가 구원을 받았다면은 죄를 지을 마음을 완전히 없애주거나, 아니면 웬만한 죄를 짓더라도 다시 벌주지 않아야 구원받은 거라 생각하기 쉽죠?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통속적인 구원의 두 가지 오류는 첫째, 우리가 구원받았다면은 죄 지을 마음이 완전히 없어지는 완전체 의인이 되도록 하는 것 이게 구원받은 것이다. 아니면은 우리가 구원받았다면은 우리가 웬만큼 저지른 죄는 더 이상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곳이 바로 구원파입니다. 박옥수 같은 사람 구원파 신학입니다. 그런데 앞에 말한 거 있죠? 우리가 구원받았다면은 완전한 성화에 이르러야 한다, 이게 감리교입니다. 감리교의 완전 성화, 그러니까 진짜 구원받았다면 완전한 성화에 이르러야 되고, 그래서 성령의 세례를 또 받아야 되고, 뭐 이렇게 주장하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감리교적 성결주의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 구원파보다는 이것이 약간 낫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구원을 받아도, 의롭다하심을 선언 받았지만, 죄에 대해서 영 단번에 죽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에 대해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징벌받아 죽음으로 죄에 대해서 영 단번에 죽었습니다. 한 번에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대신해서 한 번 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간주해야 될 뿐이고 죄에 대해서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못이 박혔는데, 우리는 십자가에 못이 박힌 그 사건, 예수님에겐 단 한 번 일어난 그 순간의 사건을 분할하여 일생 동안 계속, 매일 죽음으로 매일 죽은 자로 간주하고, 매일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간주함으로써 그 매일 죽은, 매일 죽은 죽음을 총 적분하여 마침내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영생의 도상 위에 있는 존재고, 영생을 완전히 누리지는 못합니다. 왜? 왜 그렀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었다는 그 말은 일생 동안 일어날 그 일을 표현한 일종의 말의 어법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다는 말은 신자된 내가 개인 일생을 통하여 살아낸 삶의 역정을 한 마디로 말합니다.


김회권은 1979년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신자의 삶을 완성하고 나서, 제가 관에 들어가서, 죽음으로 저의 지상 순례를 완성할 때 그때 사실 해 줄 수 있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그런데 그 전까지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믿고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간주하면서 매일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간주하는 그 간주함으로 말미암아 죄의 요구를 거절하고, 배척하고, 계속 거부하는 그런 분투를 계속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의 가장 큰 과업입니다. 그런데 이 분투는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일어났던 거랑 다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우리 몸을 아예 죄와 불의의 종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나니까 우리가 우리 몸을 죄와 불의에게 종으로 두던 그런 일방적인 불순종의 종이 되는 삶에 저항감을 느끼고 이제 하나님께 순종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니까 분투가 일어납니다. 자, 이 분투가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구원받은 사람의 결정적 증거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자아 분열적 갈등이 안 일어난다면 우리는 구원 받은 게 아닙니다. 전에는 불법의 종으로 살았을 때는 갈등이 없습니다. 계속 일관된 불법의 종의 논리를 따라 살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의로운 자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이전에 없던 분투, 옛날에 하던 그 악행을 성찰하면서 괴로워하면서 악행을 한다 하더라도 옛날과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불법의 종으로 드려졌던 우리 지난날의 삶에 균열이 일어났고, 마찰이 일어났고, 저항감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의 내적 증거입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될 것은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는데 이렇게 남모르는 고민으로 갈등한다면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무시하고 배척할까?’하는 민망한 정도의 내적 갈등이 있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성도의 실존적인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이건 절대로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낙심하지 말 것은 내가 죄의 법 아래 팔려가는 경험을 한다 하더라도 죄를 직접 짓고, 죄가 죄인지도 모르고 살던 때랑은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은혜 아래 살지만 은혜의 왕 노릇하는, 은혜의 왕국에 살지만 또한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 있는 세상에 사는데 그 이유는 우리 몸의 사욕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이 탄식하는, 신음하는 피조물의 일부입니다. 우리 몸은 구원받지 못하고 아직도 탄식하며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날 때까지 해방을 기다리는 신음하고 고통을 앓고 있는 그런 피조물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에는 반자율적인 Semi-autonomous한, 반자율적인 그런 행동지침이 있습니다. 우리 몸은 단 음식을 보면 먹고 싶고, 우리 눈은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만지고 싶고 이런 우리 몸 자체는 내가 아무리 고삐를 잡아도 내 통제 아래 잘 들어오지 않는 나름대로 자율성을 가진 또 하나의 나 자신입니다. 그리고 이 내 몸은 구원받지 못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내 몸은 아직까지 옛날에 행동했던 그 행동을 기억하면서 그대로 행동하려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몸을 구원받기 이전에는 한 번도 몸과 내 자신을 구분하지 않고 살았는데 이제는 내가 내 몸을 통제해야 될 그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하면서 내 몸의 욕망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능력이 생겼고, 아 내 몸의 욕망을 그대로 추종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자각이 생기고 그런 경보음이 생긴 거죠. 이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의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런 고투를 한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또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 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이런 6장 12절 같은 거, 요런 말들이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이전에 불법에 살 때 불의한 삶을 살 때는 한 번도 없었던 이런 자아 분열적 갈등이 일어난다, 이건 바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즉,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에게 있는 자각 증세입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말 것은 한 번 보십시오. 20절입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해서 자유로웠다.” 이때는 뭡니까? 6장 20절 보십시오. 옛날 불법의, 불법의 사람으로 살 때는 한 번도 자아 분열적 갈등이 없었습니다. 왜 의에 대해 자유로웠습니다. 그런데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나니까 이제 의롭게 살고 싶은 내적 욕망이 생겼는데, 이 거룩한 내적 욕망을 방해하는 몸의 사욕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살고 싶은 나의 거룩한 고귀한 열망과 나의 몸에 붙어 있는 사욕이 갈등을 합니다. 그래서 이 내적 갈등, 자아 분열적 갈등은 매우 건강한 것이며 이것은 성령 충만을 갈망하게 만드는 탄식입니다.


자, 이런 자아 분열적 갈등은 성령 충만을 학수고대하게 만드는 갈등으로, 창조적 갈등으로 내가 환골탈태하려고 할 때 일어나는 갈등이고, 좋은 갈등입니다. 절대로, 절대로 비관하면 안 되는 갈등입니다. 따라서 이런 갈등은 내가 오늘 하루 살 때 내 몸을 거룩한 일에 던지면은 죄를 지을 여가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오늘 거룩한 일에 내 몸을 드릴 일이 없는 사람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오늘 하루 24시간 또는 12시간이 거룩한 일에 내 몸을 드릴 일이 없는 사람이 매우 조심스럽게 자기 남은 시간을 잘 못 쓰면 안 됩니다. 거룩한 일은 뭘까요? 기도와 말씀 공부와 이웃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대의명분을 위한 헌신과 희생과 봉사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의명분을 위한 헌신과 희생과 봉사를 하거나, 하나님께 고요히 잠잠히 기도하거나 예배드리거나, 내 이웃의 곤경을 조금이라도 도와드리기 위해서 내가 이웃 사랑을 은밀하게 실천하는 것들이 바로 의의 무기로 내 몸을 드리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갈라디아서 5장 16절입니다. 너희가 은혜 아래 있지 아니하면은, 너희가 성령을 따라 살면은 은혜 아래 있나니, 죄가 너희 몸을 지배하지 못한다. 그래서 은혜로운 공동체에 속해야 됩니다. 은혜로운 사람들과 접촉해야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지배해 주도록 그런 영적 환경에 나를 노출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교회가 필요합니다. 좋은 교회를 다녀야 되는 이유는 은혜가 왕 노릇하는 나라에 다녀, 은혜가 왕 노릇하는 그런 교회를 다녀야만이, 내가 죄를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불법과 불의에 내 몸을 바치는 일을 Stop!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끝내 하나님의 영생에 이를 수 있도록 거룩함을 추구하도록 도와주는 회중, 도와주는 구역, 도와주는 친구들과 영적 멘토들과 그런 동역자들과 똘똘 뭉쳐있어야 만이 거룩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진짜 좋은 교회가 필요합니다. 좋은 교회라 함은 내 몸을 의에 병기로 드리는 것을 촉진해 주고 도와주는 교회입니다. 좋은 설교는 뭡니까? 그런 삶을 도와주는 게 좋은 설교입니다. 재미난 설교가 좋은 설교가 아니라 좋은 설교라 함은 하나님께 내 몸을 성별하여, 죄의 죽을 몸이 이 세상에 메어 일방적으로 죄의 논리, 불법의 논리, 이 세상의 탐욕의 논리에 내 몸이 좌우되지 않도록 내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을 격려하고 칭찬해 주는 그런 회중과 그런 공동체에 우리가 노출되고 속해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좋은 목사님이 필요한 것이고, 좋은 교회가 필요하고, 좋은 구역이 필요하고,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좋은 교우가 되셔야 됩니다. 그래야 이런 영적 싸움을 도와 줄 수 있습니다. 아마 우리 교우들이, 기도를 하는 교우들은 이 내적 분투를 압니다. 기도하는 교우들은 자신이 죽을 몸과 몸의 사욕에 메어 있으며 이 죽을 몸과 몸의 사욕이 나를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겸손하게 사는 사람들이 기도하고 예배하고 찬양합니다. 몸의 사욕이 나를 지배하려는 완강한 힘을 느껴 본 사람들은 함부로 남을 심판하지 못하지요. 자기가 연약함에 빠졌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본문 보겠습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함으로, 너희 육신이 연약함으로, 이 육신은 뭡니까? 죽을 몸, 이 몸은 뭡니까?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세상, 탄식과 앓은 소리가 가득 찬 세상에서 완전한 해방을 기다리는 이 피조물의 일부가 되는 내 몸, 이 연약한 몸, 이 연약한 몸의 실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성령 충만한 것이 왜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압니다. 그래서 성령을 간구하게 됩니다. 결국은 6장, 7장은 로마서 8장을 기다리는 장입니다. 성령 충만이 왜 필요한가를 우리의 실존적인 영적 분투를 통해서 깨닫게 해주는 겁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이런 내적 갈등이 있는 것, 이것은 굉장히 건강한 사람의 지표이면서 동시에 이 내적 갈등은 여러분에게 끝내 승리로, 여러분에게 끝내 승리로 끝날 여러분의 승리, 거듭난 여러분의 자아가 끝내 면류관 얻을 그 싸움의 시작이지 여러분이 패배되어서 구원받지 못한 자처럼 끝날 재난이 아니라는 것을 늘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오늘도 191장 찬송처럼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하면서 달려가는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옛날에는 자아 분열을 겪지 않고 불법에 따라 살았고 불의한 삶을 살았고 하나님에 대해서 굉장히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요구를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재테크에 몰두했고 우리의 하등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온 시간을 다 보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율법적 요구, 언약적 요구에 아무런 상관없는 자유로움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서, 의롭다하심을 받고 나서부터는 우리에게 갈등이 생겼고, 우리에게 건강한 자아 분열적 갈등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은혜가 왕 노릇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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