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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7:1-6 /제목: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말의 의미

by 【고동엽】 2022. 1. 15.
본문: 로마서 7:1-6
제목: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말의 의미


7장 전체에서 큰 질문을 한가지 가질 수 있습니다. 첫째, 이 7장에서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예수 믿기 전에 바리새인적인 자아를 가리키는가? 아니면은 종교 바깥에 있는, 하나님을 모르는 보통 사람들을 가리키는가? 아니면은 예수를 믿고 성화를 이루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서, 창조적인 갈등을 겪고 있는 신자의 내면을 가리키는가? 자 이렇게 의견이 나뉘어집니다. 저는 세 번째 생각을 취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 ‘나’, 로마서 7장에서 말하는 이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려고 애쓰는 신자의 갈등이다’라고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지 않는 서양학자들이 굉장히 많고요, 많은 경우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 이야기 이거나, 아니면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기 이전의 바리새인적인 바울의 갈등이었을 것이라 이렇게 봅니다. 물론 바울이 쓰고 있는 이 모든 내용은 이전의 바울, 바울이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이 편지 안에, 이 내적 논리 안에 들어가기 때문에 맞지요. 그런데 그렇다면 이것을 로마서에 쓸 필요는 없지요! 로마서에서 6장, 7장과 같은 이 내용을 썼다는 말은 이것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 바울처럼 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있어서 죄의 법을 섬기는 이런 이중적인 자아 분열적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은, 겪고 있는 신자들을 위하여 쓴 편지가 아니라면은 이런 내용을 바울이 쓸 필요가 없죠. 그러고 보면 참 서양학자들이 허무맹랑한 사람들이 많은 거거든요. 예수님을 옳게 깨달은 학자들이 많지 않다는 거죠. 극소수가 이것을 깨달았다는 거죠. 우리가 아는 많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로마서 6장과 7장의 내적 논리를 정확하게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봅니다. 이런 증거는 결정적으로 로마서 6장, 7장이 예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후에 겪는 갈등이지 예수 믿기 이전의 갈등이 아닙니다. 예수 믿기 이전에 누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까? 여러분 예수 믿기 전에 하나님 법을 즐거워 한 적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생기니까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지 못하는 것이지 옛날에 우리가 죄 아래 살 때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일방적으로 우리를 편하게 지배했죠.


그런데 오늘 6장 7장을 보면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법을 즐거워하는 내적 자아가 생겼거든요. 그런데 이 내적 자아, 새로운 자아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이 새롭게 된 이 자아가 충분히 자유를 못 누리는 그것이 문제가 되는 거죠. 강보선 교우님, 갈라디아서 5장 17절 한 번 읽어주십시오. 갈라디아서 5장 17절이요. 이거 읽어보면은 결정적으로 지금 바울이 말하는 이 갈등문제는 예수님 믿기 이전 상태가 아니라 예수 믿고 있는 신자들의 이야기인 걸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읽어주십시오. 갈라디아서 5장 17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 제가 로마서는 갈라디아서의 속편이라고 그랬죠? 그러니까 갈라디아서를 먼저 읽고 로마서를 읽어야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로마서를 이해하려면은 갈라디아서에서 무슨 논쟁이 있었는가를 봐야 되는데 갈라디아서에서의 논쟁은 이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예수를 믿자마자, 의롭다 하심을 받자마자,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려고 애써야 한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바울의 대적자들입니다. 그들도 신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율법의 낡은 조문들을 지키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몸을 맡기고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우리 몸을 맡기는 것이 중요하지 율법의 조문 613가지 율법 조문들을 축자적으로 지키려고 애쓰는 것, 그런 노력을 하다 보면은 율법의 논리에 사로잡힌다. 왜? 613가지 조문 중에 612가지를 지키고, 612가지를 지켰지만 1가지를 어기면은 온 율법을 어긴 자가 되어버리거든요. 야고보서에 나오는 논리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나라에서 전과자가 되려면은, 법에 위반되어서 재판을 받으려면 몇 개의 법을 어기면 됩니까? 수천 가지의 법조문 중에서 몇 가지를 어기면 돼요? 한 조항만 어기면 죄인이 됩니다. 그죠? 우리 김선영 자매님 그렀죠? 한 조항만 어기면 죄인이 되니까 그러니까 죄인 될 가능성은 너무 많은 겁니다. 613가지의 모세의 율법 조항 중에 한 조항만 어기면은 우리는 율법을 어긴 자가 돼버립니다. 612가지 지킨 것이 의미가 없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은 이 수학적으로 굉장히 불리한 겁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 있는 바울의 대적자들은 ‘그래도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아서 하나님 자녀가 되었지만 율법 지키는 일에 All-in 해야 한다. 그래서 할례부터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을 한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7장 6절에 우리는 이제 얽매였던 것에서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나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라 라고 합니다. 자, 이 구절이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드디어 구원파라고 하는 기쁨소식 선교회 박옥수 같은 이런 이단들을 많이 불러내는 그런 구절들입니다.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그러면 십계명과 같은 이런 율법도 안 지켜도 된다는 말인가요?’ 그래서 옛날에 구원파 중의 한 명을 검찰이 취조를 했는데 빚을 7천만 원 지고 안 갚았는데 왜 안 갚았냐고 했더니, ‘지금 나는 율법에서 벗어난 자요, 나는 완전히 하나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대한민국 율법이 나를 얽매일 수 없다’ 그렇게 주장했다는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무슨 말이야 하면은 율법을 통하여 의로워지려는 그 내적 강압에서 벗어난 것이지 율법의 요구가 틀렸다는 거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켜라, 부모를 공경해라,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마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런 모든 요구가 이제 나한테는 별로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율법의 조문을 하나하나 축자적으로 지켜서 의로움을 얻어야 되는 그 내적 논리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율법 요구에서 벗어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 하나는 성전과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모든 제사행위, 그 속죄 제사 이런 절기를 지키는 행위,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을 훈련시킬 때는 필요한 법이지만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이방인 신자들이 이스라엘 법을 다 지킬 필요가 없다는 거죠. 예를 들어서 할례법이라든지, 유월절법이라든지, 그 다음에 손을 씻고 밥 먹는 법 등 이런 것들은 유대인들 공동체를 하나님 백성 공동체로 일련의 기간 동안 훈련시킬 때는 필요하겠지만 이방신자들에게 그 모든 율법의 요구를 하라고 하면 안 된다는 거죠. 왜? 성령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인친 바가 되어서 율법의 요구를 실제로 성령으로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은 율법의 요구 이상을 준행할 능력을 주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에서 벗어났다는 말이지 율법을 안 지켜도 된다는 말로 벗어났다는 말이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율법을 축자적으로 지켜서 의로워지려는 그 내적 강압, 그 내적 억압적 논리에서 내가 벗어났다 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거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돼요? 좀 어렵죠?


다시 한번 그럼 여기서 남편과 아내는 뭘 가리킵니까? 그러니까 남편과 아내를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대개 이렇게 하면 됩니다. 남편은 지금 오늘 본문에 7장 1절부터 3절에 나오는, 이 유대인 아내와 우리 거듭난 신자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옛사람과 거듭난 이 새사람이 한 집에 살고 있는 부부입니다. 부부예요. 그런데 율법이 죽은 거 아닙니다. 옛 자아가 죽었습니다. 내 남편이, 내 남편이 죽었어요. 옛날에는 내 남편이 나를 부인으로 속박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어서 다른 사람에게 결혼해도 되는 아내와 같은 신분이 바로 신자라는 거죠. 이때 죽었다고 할 때가 중요합니다. 율법이 죽었다는 말이 아니라 내 남편, 옛 자아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옛 자아가, 이거 아주 논리가 좀 약간 미묘하죠? 내가 옛 자아가 죽어서, 남편이 죽어서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서 다른 사람에게 가서 이렇게 연합해도 내가 간음죄를 범한 게 아니라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많은 신자들이 혼돈하는 것은 이 ‘죽었다’는 동사의 ‘주어’가 ‘율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율법이 죽었다. 아닙니다! 율법이 죽은 게 아니라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려고 하는 나의 옛 자아가 죽은 겁니다. 아~ 여러분 이걸 이해해야 되는데……. 이해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오늘 묵상 요약을 올려놓겠습니다. 그래서 나의 옛 자아가 즉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려고 했던 이 내 자아가 죽었으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었으므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요구는 더이상 나를 강압하고 나를 억압하지 못합니다. 제가 율법의 요구를 행하는 것은 율법이 지키라고 한 것 아닙니다. 성령이, 영의 새로운 것이 저를 감화 감동시키기 때문에 원래 율법이 지키려고 요구했던 그것을 그대로 내가 준행하기 때문에 율법에서 벗어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가 저한테 “김회권 너는 새벽 5시부터 일어나서 아침 8시까지 세 시간동안 공부해야 돼!” 이게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저한테 준 율법입니다. 강남에 있는 엄마들이 주는 율법입니다. 그런데 이 강남 엄마들이 준 이 율법을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난 아들은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9시까지 공부하면은 엄마가 요구하는 것 보다 더 많이 공부하는 아들은 엄마 아빠의 율법의 강압적 통치에 지배를 받지 않고 율법의 요구로부터 벗어나서 자유케 된 것입니다. 이런 논리입니다. 이런, 그러니까 영의 새로운 것이 율법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그 이상을 준행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에. 여러분 그래서 이런 겁니다. 여러분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다른 사람 목숨을 해치지 말라는 말인데 율법의 요구는 살인하지 말라지만 영의 새로운 것은 살인하지 말라 정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보양하고 그 다른 사람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이웃 사랑을 하라! 이것이 영의 새로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지 말라가 율법의 요구입니다. 그죠? 그럼 제가 다른 사람의 머리를, 다른 사람의 좋은 외모를 탐내서도 안 되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탐내서도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탐내면 안 됩니다. 그런데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신자들은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는 정도가 아니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오히려 탐심을 금지하는 율법의 강압적 요구에 내가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탐심 지향적 존재가 아니라 완전히 자기를 내어주는, 자기 소진적이고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화신이 됩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요구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것의 정확한 의미입니다. 이렇게 해석하지 않고 율법의 요구를 율법 자체를 아예 무시하고 살아도 된다 라는 말로 만일에 해석을 하면은 이것은 완전히 구원파 이단이고 영지주의 이단이고 이것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됩니다. 지금 제가 볼 때 우리 나라에서 광화문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제가 볼 때 아마도, 율법의 요구에서 벗어났다고 믿는 구원파적 확신이 아닌가? 왜냐하면 그들은 윤리 도덕적으로 엄청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거든요. 그 마이크를 잡고 있는 전모 이런 사람들은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구원을 확신하고 하나님과 가깝다고 느끼는 그 과도한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 떨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고 느끼는 그 아득한 이격감과 아득한 이런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저렇게 도덕적으로 파탄 난 도덕적 개차반들은 저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님과 가까움성을 저렇게 강조하는 것은 저 확신은 어디서 났을까? 제가 볼 때는 거짓된 구원 복음, 우리는 천상에 올라가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야!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성만찬 식탁을 하는 사람이야! 너희들하고는 달라! 우리는 이런 시시껄렁한 이런 율법의 요구, 이미 다 벗어난 사람이야!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마 그렇게 대담한 확신이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무리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은 613가지의 율법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613가지 중에서 성전과 관련된, 성전 제사와 관련된 모든 율법들은 문자적으로 안 지켜도 되기 때문에 실제로 그 문자적 준수 요구로부터 우리는 벗어났습니다. 왜? 성전이 무너졌기 때문에 성전을 통하여 거룩함을 가르치려고 하는 그런 율법은 더이상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십계명과 같은 법, 희년법과 같은 이런 법들은 한 번도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불순종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십계명은 영구불변의 도덕법으로써 이것은 이스라엘 나라가 망해도 여전히 필요한 법이고 세계만민에게 모두 다 필요한 법들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안 지켜도 된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율법의 요구에서 벗어났다는 그런 것은 히브리서 6장이 말하듯이 성전과 관련된 제사법만 완전히 축자적으로 안 지켜도 되니까 제사 관련된 법만이 우리가 축자적 준수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진짜 율법 안 지켜도 됩니다. 우리는 양과 염소를 드리러 예배당에 안 와도 됩니다. 예수님이 영 단번에 황소와 염소의 피도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 보혈이 우리한테 남아 있는 한 우리는 항상 제사 드린 상태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요구를 상회하면서 순종했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를 상회화 하면서 준수했기 때문에 그 율법 안 지켜도 되는 겁니다. 따라서 엄격하게 말해서 어떤 율법도 안 지켜도 되는 율법이 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율법은 상회화하여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때에 우리는 그 율법을 준수한 셈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의 요구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무리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지만 우리가 십계명을 ‘내가 개인적으로 지켜야 되는 내 의무, 십계명, 도덕적인 이런 모든 걸 예수님이 다 했기 때문에 나는 십계명의 어떤 요구를 내 개인적으로는 부담을 안 느껴도 돼!’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우리는 모든 하나님의 계명을 개인적 단위로 지켜야 할 내적인 그런 거룩한 부담이 있는데 율법이 명령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이 감동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거지요. 그러니까 율법의 강압적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감화 감동시켜서 그 율법보다 더 나은 수준으로 그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죠. 이 내적 논리 이해가 됩니까? 아하 정말 어렵죠?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좀 어렵게 설명한 것 같습니다. 제가 요약 써놓겠습니다. 나중에 녹취록 한 번 보세요. 여러분 알겠죠? 이렇게 깨달아야 만이 진짜 여러분 이렇게 깨달아야 만이 여러분께서 성령 충만해집니다. 제가 확실하게 이걸 깨닫습니다. 이렇게 깨달아야 만이 대한민국에 좋은 기독교인이 나오고 좋은 교회가 나옵니다.


아버지 하나님
로마서 7장 1절부터 6절의 논리가 다소 어렵고 힘듭니다. 아버지 저의 둔탁한 입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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