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로마서 7:14-25
제목: 바울의 극단적인 인간성 비관론과 그 의미
오늘 본문은 인간을 이원적 구조로 보고 있는 바울의 인간관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육신과 마음이 또는 지체와 마음이 이원적으로 약간 각각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 두 부분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원하는 것과 육신이 즉 육체, 지체가 원하는 것이 다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제가 마음으로는 탄수화물을 먹지 않기를 많이 원합니다. 그런데 그랑블루제리를 지나갈 때마다 ‘저것은 무슨 맛일까?’하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그 말은 뭐냐하면 제가 아내를 무서워해서, 우리 딸을 무서워해서 또는 의사 선생님이 “탄수화물 과다입니다”라는 말을 무서워할 때는 아, 갑자기 그 ‘지방간’이런 말을 들을 때는 탄수화물 위축증이 일어나서 그랑제리를 지나갈 때 전혀 유혹이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굉장히 어떤 때는 그랑블루제리를 지나갈 때 거기 누워있는 빵을 가만히 보면 내 지체 속에 있는 한 다른 법이 의사 선생님의 말도 잊어버리게 만들고 아내의 충실한 권면도 잠시 망각하게 만들어서 돈을 만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돈을 만지기 시작하다가 아! 이렇게 갈등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입니다. 인간은 이원적 갈등구조로 통전성을 이룬다는 것이 참 역설적입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으로는 이것을 원하는데 내 육체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가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 내 지체, 내 육체, 커피를 들이키는 내 마음, 알코올이 몸에 나쁜 것을 알지만 알코올을 원하는 내 입술 이런 것들은 인간의 신체도, 지체, 또는 신체, 또는 육신, 똑같은 말입니다.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자기 지향성이 있는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 존재라는 거죠. 여기가 오늘 본문을 이해할 때 우리가 파악해야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모든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질료적 기원과 인간의 그 육신을 만드는 질료와 인간의 신적 기원, 인간의 정신과 인간의 이 마음을 이원적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전통에 따라서 바울은 인간을 질료, 진토로 만들어진 인간의 질료, 인간의 질료성과 인간의 신적 기원을 동시에 다 붙들고 있는 거죠. 그래서 제가 지금 여기 바탕화면에 공유를 한 번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거듭난 자아는 의롭다하심을 받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나, 다시 말해서 이미 구원은 완료된 일, 성취된 과거 사실이라고 말하는 모든 구절들은 아직도 100% 몸의 성화를 기다리는 신자의 이 과도기 갈등을 그리는 다른 로마서 본문들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로마서 3장부터 로마서 7장까지는 이미 성취된 구원, 이미 우리에게 시작된 구원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로마서 5장 1절 볼까요?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니다.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과거 사실입니다. 그런데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이 박혔습니다. 6장 보겠습니다.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아~ 드디어 여기에 나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또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것 이것은 미래 시제입니다. 그래서 6장 6절이 결정적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6장 6절이 오늘 본문과 결정적으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6장 6절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음이라
야~ 6장 6절이 결정적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다시는,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렇게 돼 있죠? 완료된 겁니다. 우리 죄의 몸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죄의 몸이 죽었다고 해놓고 그 순간에 잠시 10절입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고린도전도 5장 20절입니다. 죄를 알지도 못한 그를 우리 대신 죄로 삼으셨다고 그랬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19절부터 20절 보십시오. 고린도후서 5장 19절부터 20절은 죄를 알지도 못한 그를 우리 죄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단번에 죽으신 것은 우리 죄가 단번에 죽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대표하는 우리 죄는 단번에 죽었는데 우리 개별적인 죄는 단번에 죽지 않고 미분적으로, 분할적으로 일생을 걸쳐서 천천히 죽는다고 제가 말씀드렸죠? 그래서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인데 우리는 우리 죄를 대신하는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단 한 번에 죽으셨는데 살아있는 우리, 그리스도 때문에 거듭난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죄에 대해서 일생동안 미분적으로, 분할적으로 매일 죽는 죽음을 축적시켜 가야 된다고 그랬죠? 6장 11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서는 죽은 자요. 아하~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기고 간주함으로 죄에 대해서 죽어야 됩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랑블루제리 과다탄수화물, 상도동의 파리바게트에 있는 팥빙수 한 그릇이 590kcal입니다. 제가 그때 상도동 팥빙수, 파리바게트에서 590kcal 그 팥빙수를 사 먹고 제가 얼마나 놀랬냐 하면 그때 제가 파주 헬스클럽에서 아주 땀 내어서 트레드밀에 올라가서 계속 30분 걸으면 120kcal가 소비되었습니다. 그런데 상도동에서 10분 만에 590kcal를 섭취하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 인간은…….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뭐냐하면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간주해야 된다는 말은 ‘우리 지체 안에서 그랑블루제리의 탄수화물 과다 고칼로리의 그 팥빙수를 먹으려고 하는 내 지체의 법을 죽은 것으로 간주함으로 나는 내 몸의 건강을 지켰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해서는 예수님은 단번에 죽었지만 우리는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지 않고 죽은 자로 간주함으로써 매일 조금씩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죄에게 종으로 몸을 드릴 것인지, 의에게 종으로 드릴 것인지를 매일 선택을 해야 됩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난 선택입니다. 생명을 선택할 것인지 복을 선택할 것인지, 죽음과 저주 이것 사이에 선택의 고투를 비켜가지 못합니다. 구원받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생명을 선택할 것인가?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죄를 선택할 것인가? 의를 선택할 것인가? 이런 매 순간의 결단의 그 짐이 벗어났습니까? 짐에서 벗어났어요? 아닙니다. 구원받았다는 말은 의를 선택하기가 조금 더 쉬워졌다는 뜻이지 반드시 가만히 있어도 의로운 선택을 자동적으로 하는 전자 로봇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구원받은 우리는 여전히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간주해야 된다는 거죠.
이 6장 7절 논리부터 6장 23절 그 논리가 똑같은 판박이 논리입니다. 6장 6절부터 6장 23절 똑같은 판박이 논리가 7장 14절에서 25절에 그대로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로마서 전체에서 구원은 이미 완료된 일입니다. 의롭다 하신 일은 이미 완료된 일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 선언을 받은 것은 완료된 일입니다. 그렇지만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은 영생까지 가는 길에는 매일 6장 23절입니다. 매일, 매일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우리를 간주하고 우리 몸을 의의 종으로 드려야만 그 마지막이 영생입니다. 6장 22절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그러니까 결국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 자신을 의롭다고 간주하여 의로움을 채워간 사람이 영생을 받는 겁니다. 즉 의로움을 채워가서 거룩함의 열매를 맺은 사람이 받는 선물이 영생이라는 것을 알겠죠? 그러니까 의롭다 하심은 영생과 다릅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영생의 선물을 받기까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도록 의의 종이 되는 것을 쉽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은 이제 일방적으로 죄에게 지배를 당하지 않고 죄를 배척할 수 있는 내적 담력이 생긴 것이다, 즉 죄와 의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의를 선택하기를, 의를 선택하기가 유리해진 것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겁니다. 그러니까 의롭다 하심은 구원의 완료가 아니라 구원의 입문 단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서 7장의 논리를 이해합니다.
자, 로마서 7장의 논리는 가만히 보니까 나의 존재가 이원적으로 구성됐는데 거듭난 자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나,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나 A는 육신과 지체로 대표되는 B와 A 사이가 이원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나, 거듭난 나, 그 내가 미워하는 것을 B가 행합니다. 이 B안에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B는 육신적 자아를 대표합니다. 그런데 이 B는 선을 행하기보다는 A와 각축하면서 동거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사람 A와 내 지체 속에 있는 다른 법 B는 동거하면서 각축합니다. 여기가 아주 중요합니다. A와 B는 둘 다 내 모습입니다. 그랑블루제리 앞에서 탄수화물이 가득 찬 빵을 사먹기 원하는 나, 그 다음에 의사의 엄중한 경고 앞에서 탄수화물을 억제해야 된다고 결심하는 나는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A와 B가 선한 각축을 하는데 문제는 이때 이 선을 행하기 원하는 A는 성령의 감화 감동 속으로 즉 은혜가 지배하는 은혜의 왕국 속으로 빨리 도피하지 않으면 B에게 백전백패를 합니다. 그래서 7장 22절, 23절입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육신 속에 있는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여러분, 이때 지체, 육신이라는 말은 뭐죠?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아직도 하나님의 통치에 완전히 복종하지 않는 지나간 일, 내가 지나간 일에 행했던 그 일들로 뭉쳐진 자아입니다. 기억덩어리입니다. 내가 옛날에 행했던 죄악된 행동을 기억하면서 아직도 나에게, 거듭난 나에게 기득권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평안남도에서 조만식과 한경직 목사가 1945년 8월 15일 날 일본 헌병들의 무장해제를 도왔습니다. 그런데 일본 헌병 중에 일부 나쁜 헌병이 1945년 8월 16일 날에도, 8월 17일 날에도 여전히 칼을 차고 평안남도, 평안북도 사람들을 막 칼로 위협을 했습니다. 해방이 됐고 일본은 폐망을 했는데……. 평안남북도에 있는 일본 형사와 일본 경찰은 여전히 일본이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을 가지고 평안남북도 사람들에게 일본 헌병의 위력들을 맛보게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몸은 이미 하나님에게 사로잡힌바 된 해방된 해방구입니다. 그런데 우리 몸을 한때 지배했던 죄와 지체의 다른 법이 우리에게 마지막 발악을 하면서 나를 지배하려고 으르렁거립니다. 이때 우리는 신속하게 예수님의 보혈을 찬양하며 내가 내 마음의 법과 똑같이 내 육체, 내 지체도 거룩하게 복종시켜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몸을 가지고 예배당에 오는 게 너무 중요합니다. 내 몸을 가지고 거룩한 성도들에게 내 몸을 노출 시키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거룩한 성도의 눈에 내 몸을 노출시키고 거룩한 성도의 동아리에 내 몸을 가져가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내 몸이 다른 카바레나 중독되는 어떤 술집이나 도박판이나 이런 나쁜 데 동아리에 끼지 않도록 내 몸을 거룩한 성도에게로 끌어가서 내 몸을 거룩한 예배당에 딱 앉혀 놓는 거,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제가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목자님, 목자님, 제가 지금 제 마음은 목자님 설교 들으려고 그 설교단 앞에 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 몸은 지금 신림6동 소주 파티에 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 마음을 받아주십시오.” 제가 이렇게 했습니다. “아니! 아니! 그러지 말고 내게 필요한 것은 네 마음이 아니라 그 신림6동 소주 시장에서 소주 파티 벌여서 고주망태가 되는 그 술자리에서 네 몸을 끌고 내 앞에 오는 게 중요해! 네 몸이 나한테 더 중요해!” 그래서 몸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몸은 거룩한 성도들과 어울릴 때 이 몸은 위축됩니다. 내 지체 속에 있는 다른 법이……. 그런데 이, 내 지체 속에 있는 다른 법이 언제 맹위를 떨치냐 하면 고립되고 격리된 신자에게, 예배적 환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신자에게 신자의 몸은 내 지체 속에 있는 다른 법에게 몹시도, 몹시도 지배당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대면 예배가 필요합니다. 대면 예배는 몸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대면 예배는 몸으로 성도들과 거룩한, 온유한, 거룩한 감시, 온유한 돌봄, 감미로운 그런 살가운 교제를 통해서 내 지체 속에 있는 다른 법을 억제하고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도와줍니다. 대면 예배가……. 그런데 고립된 예배, 남들이, 성도의 눈이 보지 않는 나, 거룩한 성도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이 돌봐주지 않는, 봐주지 않는 내 몸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죄의 법을 섬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죄에게 사로잡힙니다. 자, 다음 주부터는 이제 대 반전이 일어납니다. 오늘 제가 쓴 묵상을 한 번, 다시 한번 읽어보시고 하나님 나라 연구소에 녹취록 한 번 읽어보시면 로마서 1장부터 7장까지 매우 중요한 본문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은 완전히 암송을 하셔야 됩니다. 이 8장은 암송장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부터 39절을 암송하면 영적자가 진단키트를 가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모든 거듭난 신자는, 모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로마서 8장 1절 39절의 길을 따라갑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미 의롭다 하심을 선언 받은 여러분에게 성령이 여러분을 지탱시키고 온전케 하셔서 영생까지 인도하는 거룩한 동행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렇게 엄청난 로마서 복음을 날마다 깨닫게 하시옵시고 날마다 성령 충만으로 하루하루 승리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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