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로마서 8:5-11
제목: 여전히 생명과 사망의 두 갈래 길에서 선택하는 영적 분투 바울이 로마서에서 쓰고 있는 단어 중에 몸이란 말이 있고요, 그다음에 육신이란 말이 있고, 그다음에 지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체, 몸, 육신 이것은 거의 같은 말인데 약간 다릅니다. 로마서 12장 1절을 보면은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때 몸이죠. 로마서 8장 23절 몸입니다. 몸의 속량을 받을 때까지. 이때 몸은 중립적입니다. 중립적인 것. 그러니까 몸은 그야말로 반자율적인 그러니까 자기가 옛날에 했던 행동의 관성을 기억하고 있는 반자율적인 그러나 그렇게 죄가 거한다고 느끼지 않을 만큼 그야말로 반자율적인 그야말로 Semi-automatic한 그런 존재가 몸입니다. 그런데 육신은 뭐냐 하면은 육신은 몸을, 그 몸과 내통하고 있는 나의 옛 자아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옛 자아가 뭐냐 하면은 내 몸, 내 몸이 기억하는 죄악의 관습들을 기억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그러니까 공존하려고 하는 나의 옛 자아,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선언된 그 옛 자아, 그 옛 자아, 겉 사람 이것이 바로 육신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은 뭐냐 하면은 그 죄악의 관성을 가지고 있는 그 몸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 믿기 이전 상태의 행동을 고집하고 계속하려고 하는 그런 관성에 매어 있는 옛 자아입니다. 그것을 육신이라고 합니다. 육신은 ‘싸르크스’라고 말하고요, 몸은 ‘쏘마’라고 말합니다. 그다음에 지체, 한 지체란 말은 몸과 육신 중간의 말인데 이 지체는 여전히 불의의 병기로 잘 동원되는 내 몸입니다. 나의 입, 나의 발, 손, 눈 전부 다. 그러니까 내 눈이, 아름답지 못한 영상을 본 내 눈, 아주 추악하고 음란한 영상을 많이 본 눈, 이 눈은 그것에 대한 이력이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뇌신경을 자극을 받은 기억이 있기 때문에 계속 음란물을 본 사람들은 음란물을 보게 됩니다. 동영상으로 정보를 획득해서 내 감정이 아주 기가 막히게 흥분하였다면 그것은 강력한 기억을 남겨버립니다. 그래서 나쁜 경험을 많이 한 사람, 나쁜 것을 많이 본 사람, 나쁜 말을 많이 들은 사람, 나쁜 행동에 가담했으면 이 모든 것들이 다 지체 속에 있는 죄악의 기억들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성령의 소욕을 이룰 때 매우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몸 자체가 일단, 우리 눈, 코, 귀, 입 이런 모든 몸 지체들이 죄악 또는 죄악된 행동에 가담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10년 동안 조폭 생활하면서 깡패 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조XX, 조목사님에게 설교를 듣고 감화를 받고 성령 세례를 받고 오산리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간증을 했습니다. “저는 이제 새 사람이 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박수를 엄청 쳤습니다. 그리고 그가 엄청 새 사람 됐다고 믿고 한 7개월 동안은 본인 자신도 성자처럼 살게 됩니다. 한 6-7개월 동안은 성령이 싹 장악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10년 동안 온갖 나쁜 짓을 했던 그 몸은, 그 몸은 7개월 만에 바뀌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그 몸을 가지고 했던 그 기억의 총체인 그 옛 자아는 절대로, 절대로 짧은 기간에 바뀌지가 않습니다. 왜냐 하면은 옛 자아, 옛날 죄악된 행동에 가담했던 나의 옛 자아는 하루에 죽는 양이, 하루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양 자체가 제한 돼 있습니다. 우리는 미분적으로, 분할적으로 죽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영 단번에 죽었지만 영 단번에 죽으신, Once and for all, 그 영 단번에 죽은 죽음을 우리는 미분적으로, 분할적으로 매일 죽기 때문에 이 조폭, 10년 동안 조폭 생활했던 사람이 엄청나게 갑자기 성자가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흉악한 범죄에 가담했던 사람이 아무리 극적으로 회심을 했다 하더라도 목사가 되면은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부작용이 납니다. 그래서 죄악된 행동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절대로 성직자 후보군으로 분류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극적인 회심을 해도, 아무리 극적인 간증을 하고 다닌다 하더라도 그는 몸 자체가 갖는 고도의 반자율적인 어떤 그런 고집 때문에……. 몸이라는 것은 굉장히 뭐랄까요? 우리가 쉽게 통제할 수없는 또 다른 자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육신은, 육신은 이겁니다. “네가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여길지어다” 예, 그렇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우리, 우리의 몸, 우리의 죄, 우리의 옛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 맞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로 간주되어야 할 뿐이지 진짜 레알 죽은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진짜 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진짜 죽으신 죽음을 일생동안 미분해서 하루에 하루만큼의 죽음을 경험하고 그 하루만큼의 죽음을 총 적분한 채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아직 저를 모릅니다. 제가 죽어서 관에 들어갈 때까지는 제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 할 수가 없습니다. 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제 인생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제 인생이 죽음으로 완료될 때 그때 사람들은 ‘김회권은 1979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거듭났습니다’라는 그 평가가 유효한 겁니다. 그렇지 않고 제가 이론적으로 옛 자아와 내통하는 이런 육신의 일을 생각하다가 악한 열매를 맺고 만일에 악한 일을 하다가 비명횡사를 하면은 그 사람은 진짜 예수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 끝내 의심의 명제를 남기고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었던 행위의 완료, ‘저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 행위의 완료형 시제는 내 죽음으로 완료 될 때만 일어납니다. 그러면 저는 뭡니까? 나는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저는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 의롭다 하심을 채워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제가 만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 제 삶의 열매가 만일에 영생의 열매라면은 사람들은 말할 겁니다. ‘김회권 형제는 1979년에 예수를 믿었고, 그 믿음 상태를 유지했다가 2040 몇 년에 뭐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문제는 그런데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선택의 부담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해방되었다고 했는데, 해방되었는데도 여전히 5절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이것은 서술형입니다. 서술형. 이런 말이 아닙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해야 하며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여야 한다. 그런, 육신의 일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라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라 명령이 아니라 서술입니다. 이때 ‘생각하다’란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생각하다. 영의 일을 생각하다 이 헬라어 동사 ‘프로네오’라는 동사입니다. ‘프로네오’, ‘프로네오’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고도로 영어로 말하면 Set-mind on, set-mind on 마음을 고도로 집중하다. 그러니까 마음을 두는 곳, 내가 마음을 쏟는 곳, 내 모든 주요한 에너지가 그쪽으로 쏠리는 곳, 내 에너지가 쏠리는 그것이 바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생각은 뭡니까? 의도적으로 내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그 일, 그게 바로 영의 일, 영의 일이라는 말은 뭡니까? 영의 일은 성령에 따라 살기로 결단하여 거룩한 열매를 맺고자 하는 그 일에 에너지를 치중하면은 그게 바로 뭡니까? 갈라디아서 5장 22절부터 23절 성령의 일을 따르는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맺히죠. 그러니까 5장 17절을 보시면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충돌하는데 육체의 소욕과, 이 육체의 소욕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하는 육체의 소욕은 로마서가 말하는 육신입니다. 똑같은 말입니다. 육신의 소욕은 음란과 호색함과 당 짓는 것과 분냄과 성냄, 알라스카 연방 교도소에 들어갈 만한 그런 죄악을 유발하는 그런 악한 감정들이 육신에 왕노릇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성령, 영의 일을 집중하면 어떻게 됩니까? 5장 22절부터 23절 희락과 사랑과 화평과 온유와 절제와 오래 참음과……. 아~ 이런 기가 막힌 열매가 나옵니다. ‘그러면, 그러면 제가 볼 때 저는 참 애매합니다. 저는 일단은 5장 17절부터 21절 같은 이런 흉악한 죄는 거의 저에게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5장 22절부터 23절 성령의 열매도 안 나타납니다. 그럼 저는 뭘까요?’ 이제 이런 질문을 하는데 그러면 전반적으로 육체의 소욕을 따르기 직전 상태에 있는 그러니까 육체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하위계급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적극적으로는 육체의 일을 따르지 않지만 육체의 일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저항하지 않고 육체의 일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부하로써 정신적인 그런 꼬리가 돼서 그런 대세에 추종하는 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 영의 일을 적극적으로 추구하여 육체의 일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을 보고 경악하면서, 놀라면서 그것을 고치려고 애쓸 때 그는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절대로, 절대로 애매모호한 회색지대에 자기가 존재하는 것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자기는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사람도 아니고 육체의 일을 따르는 사람도 아닌데 저는 뭡니까?’ 답은 뭐냐 하면은 그 사람은 육체의 일을 따르는 사람들을 보고 중립적 방관자의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진영논리에 따르면 그는 육신의 일을 따르는 사람들이 만든 대세의 세상에 추종하는 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제가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사람이 될까요?’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갈라디아서 5장 17절부터 21절에 나타나는 육체의 소욕을 이루는 사람들의 이런 행동과 문화와 삶과 정부와 이런 모든 삶의 총체에 대해서 거룩한 불만족과 분노를 가지고 그것을 개혁하고 뒤집어 업으려고 과부처럼 계속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뭐냐 하면은 성령의 소욕에 추동되면 그렇게 됩니다. 성령의 소욕에 추동되어야 만이 육체의 일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만든 세상에 대해서 No! 보이콧할 수 있는 마음이 듭니다. ‘No! 이거 아니다!’ 이 Boycott! 이 세상에 육체의 일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만든 이 세상에 Boycott를 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내적 패기와 담력이 있는 사람들이 육신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끝은 뭡니까?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이 사망이란 말은 뭐냐 하면은 불멸의 가치가 아닌 썩어 없어질 것들, 썩어 없어질 것들에 집착한다는 말이죠. 그다음에 생명과 평안은 뭡니까? 하나님의 성품과 영원히 공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영생으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참,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데 돈을 많이 선제적으로 많이 먼저 번 사람들을 보세요. 여러분 돈을 많이 선제적으로 벌어들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잘 보세요. 돈이 없는 사람들은 절망하고 자살지향적인 우울증에 빠집니다. 그런데 돈이, 불의한 방법이건, 건전한 방법이건 돈이 많아지는 사람들은 진짜 영의 일을 생각하는데 현저하게 백지상태가 돼 버립니다. 실제로. 그러니까 돈이란 말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하등욕망을 극대화시키는데 동원되는 악마적인 부하일 경우가 많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명과 평안 대신에 소비력을 극대적으로 과시할 수는 있죠? 그러나 생명과 평안 딱 그것만 없는 거죠. 그런데 제일 좋은 것은 이거죠. 돈도 많으면서 생명과 평안이 넘칠 수는 없을까요? 이거 가능하죠. 욥 같은 사람이요. 제가 볼 때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비관적입니다. 얼마든지 좋은 부자가 있습니다. 우리한테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진짜 좋은 부자가 이 세상에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좋은 부자들 때문에 미담도 많아지는 것을 보면은 어딘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이런 의로운 부자들을 분명히 쓰실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도 하지 못합니다.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육신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의향도 없지만 기쁘시게 할 능력도 없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9절과 10절, 11절에 답이 나옵니다.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아~ 이건 참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1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죠? 그죠? 그리스도가 우리를 에워싸죠?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명의가, 하나님의 인감도장이 나한테, 내 손에 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그 안에 계실까요? 하나님이 그 안에 있기로 한 사람이 하나님이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믿어주는 그 사람이 하나님이 안에 있기로 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로마서 8장이 자가 진단키트가 된다는 말이 뭐냐 하면은 자가 진단키트라는 말이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있으면서 우리가 하등욕망,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것을 통제해 주고 선한 길로 인도해 주는 경험을 매일, 누적적으로,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이 이런 겁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자마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예,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기도가 시작되면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상속자의 품격을 획득해 나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 자녀의,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이 무지무지 큰 재부를 상속할 것이기 때문에 이 땅에 모든 세종대왕 글자 있는 것, 토마스 제퍼슨, 워싱턴 대통령 얼굴 있는 이런 달러나 세종대왕, 신사임당, 율곡선생님이 있는 한국 돈이 가치가 덜 있어 보입니다. 뭣 때문에요?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요. 그래서 우리가 물질에 집착하는 삶을 이겨낼 수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 속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으려고 의도적으로 생각하고, 치중하고, set mind on, 마음을 그쪽으로 집중하면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있어주기로 하나님 편에서 또한 상호결단을 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로 결단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기로 결단하는 이 상호침투적 결단이 드디어 종말까지 우리를 끌어가면 우리는 영생을 확실하게 상속합니다. 그 영생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나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자가 진단을 잘 해보세요. 옳게 믿었는가? 내가 최초로 기독교인 되는 과정은 온전했는가? 내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했는가? 내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무시로 성령의 내적 음성이 내 모든 염려와 근심을 뚫고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가는가? 내가 두려움을 향해 속박당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뜨거운 사랑을 감촉할 수 있는가? 자가 진단해 보세요. 꼭! 로마서 8장은 자가 진단키트라고 그랬죠? 기도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가향 교우들, 새벽 성도들이 끝내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 하나님 자녀 공동체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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