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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8:18-25제목: 현재의 고난과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

by 【고동엽】 2022. 1. 15.

본문: 로마서 8:18-25

제목: 현재의 고난과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

 

오늘 본문은 더 분명하게 우리가 받은 구원은 경험하는 구원일 뿐만 아니라 소망하는 구원이다 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받은 구원은 이미 이루어진 구원 맞습니다. 이미 시작된 구원 맞고요, 그다음에 이미 우리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을. 그런데 이 구원은 또한 한편으로 미래에 있는 구원입니다. 아직 완전히 우리가 다 소유하지 못한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말이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구원될 것을 소망한다는 뜻입니다. 이게 무슨 논리란 말입니까? ‘우리가 이미 구원 받았고 구원을 경험하고 있는데 우리의 구원은 저 먼 미래에 있는 것처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 받았다. 즉 우리가 구원 받을 것을 소망하고 있다’ 이렇게 지금 말하는 거거든요. 이것이 갈라디아서의 논리랑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서랑 갈라디아서는 정말 싱크로율이 한 99% 되는 논리입니다. 자, 갈라디아서 5장 5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4절부터 할게요.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러니까 의롭게 될 소망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까 ‘김회권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제가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란 이 평가를 받으려면 제 지상 생애가 끝나야 됩니다. 사실은. 저는 제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지금 주장할 뿐이죠? 그런데 제 3자가 ‘김회권! 그는 80 생애동안 하나님 믿었다’ 제가 하나님 믿었다고 선언해 주고 평가해 주게 되면은 제가 믿는 행위를 끝내야 됩니다. 지상에서. 그러니까 지금은 뭡니까? 믿는 자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고 누군가 완료해 주려면은 우리 다음 세대가 우리를 평가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아주, 아주,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매일 분투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성도를 사랑하고, 봉사하고, 교회에 와서 도타운 사랑을 나누고, 또 사회적 활동을 하고 이 모든 것들은 의롭게 될 소망을 향해서 정조준 되고 있는 활동이라는 거죠. 여러분 뭔가 손해 본다는 느낌이 드나요? 아니죠! 아니죠. 우리가 결혼한 사람이 결혼을 완성할 때 결혼했다고 결혼이 완성되고 사랑이 완성됩니까? 아니죠. 결혼 관계에 들어가 보면 알지만 결혼 관계에 들어간 것은 사랑할 의무의 시작이지 더 이상 사랑하려고 애쓰는 노력이 필요 없는 상태가 아니잖아요. 그죠? 그거랑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은 ‘구원 받아버렸다’가 아니에요. 하나님께 의로운 사람처럼 살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른다면은 내 구원만 중심으로 생각하면은 ‘어, 좋은 거 하나도 없네! 다시 선을 선택하고 불의를 배척하고 이런 매일매일 선과 악의 두 갈래에서 결단해야 되고 선택해야 된다는 말이네? 좋은 거 아나도 없네! 나는 구원 받았으면 율법에서 벗어난 줄 알았는데 이젠 웬만한 행동을 해도 하나님은 나한테 더 이상 진노를 퍼 붓지 않는 줄 알았는데, 왜 모든 진노는 예수님께 다 쏟아놓았기 때문에 나한테 쏟을 진노가 없다고 들었는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너무 잘못됐다는 거죠. 그래서 신약성경에 오면 하나님이 진노를 다 소진해서 이제 웬만한 죄에 대해서는 진노할 필요도 없을 만큼 마음이 차분해진 하나님, 그래서 스스로 마음이 차분해져서 인간의 죄를 보고는 이제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그런 하나님이 되어버린 것으로 생각합니다. 신약성경에 오면은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께 인류의 모든 죄에 대한 징벌과 진노를 다 쏟아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는 소진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웬만한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내 죄를 가지고 화를 내는 법은 없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받은 구원은 소망으로 받은 구원이라는 사실이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 손해 본다는 느낌이 하나도 안 들죠?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 구원의 성격을 결정하는데 우리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결정하는데 우리가 이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그렇게 고역 됩니까? 그렇게 짐스러워요? 아니잖아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너무 존귀하고 영화로운 분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내가 내 삶을 조율하는 것은, 그걸 믿음으로 사는 그것을 짐스럽게 느낄 필요가 없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모른다면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붙드는 손이 율법 조항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모른다면은 아마 신앙 생활한다는 것은 고역스러운 의무들을 끊임없이 수행하는 그런 번거로운 일이 될 거예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로잡는 인격입니다. 우리에게 요구하는 율법 조항이 아니에요. 우리 하나님은 무생물적인 율법 조항의 그런 묶음이 아니라, 그런 율법 조항의 총체성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매료시키고, 매혹시키고, 사로잡고 우리에게 이렇게 감정을 표현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하나님을 향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의롭다 함을 채워가는 의로운 삶을 매 순간 결단하는 것은 은혜롭고,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거죠. 그래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과 완전히 다르죠.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은 그 율법 배후에 있는 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모른 채 두려워하는 영을 받았거든요. ‘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은 우리가 벌 받는다. 우리가 심판 받는다’ 이런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영에 사로잡혔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게 아니거든요. 제게 율법 조항을 주신 하나님은 십자가에 당신의 독생자를 주셔서 나를 끝내 독생자의 자리에 올려놓고 하나님 자녀로 대접하기로 결단하신 하나님, 내 마음과 영과 육체를 사로잡는 하나님, 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서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아 율법의 요구를 행하는 삶을 사는 것, 이게 바로 의의 병기로 드림, 우리 몸을 날마다 산 제물로 드림, 의의 병기로 드림이거든요. 그래서 이 삶은 그 율법 배후에 감정을 가지시고 나의 매일의 분투를 부축해 주시고, 지지해 주시고, 견인해 주시는 인격적 하나님이, 예수님이 나의 이 분투 배후에 나를 끌고 가시고, 나를 견인하시기 때문에 그냥 율법을 지키는 거랑 완전히 차원이 다르죠. 그래서 신앙생활은 191장처럼 되는 거거든요.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손이 나를 안보함이요. 이것 때문에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런 가운데 지금 현재 내가 예수님과 이렇게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은은히 장미꽃이 피고 새가 은은히 노래 부르는 동산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이 삶을 이 지상에서 살아내는 사람들은 구원이 미래에 속했다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안 되죠. 낙심이 안 되죠. 뭔가 손해 본다는 느낌이 안 들죠.

 

그래서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곤경은 미래에 당할 우리의, 미래에 우리가 받게 될 영광을 냉각시키거나 영광에 대해서 기대를 좌절시키지 않습니다. 현재에 받는 고난은 뭡니까? 육체를 따라 난 육체의 자녀들, 즉 이스마엘 같은 자녀들의 박해입니다. 이 갈라디아서 4장 9절부터 22절, 29절에 나오지 않습니까? 이삭, 약속을 따라 난 성령의 자녀 이삭은 육체를 따라 난 자식 이스마엘에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즉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기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뭡니까? 우리 하나님 나라가 장차 완성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좌절시키는 모든 이스마엘 같은 악이죠. 그 우리의 신앙을 좌절시키고 냉각시키는 이런 모든 세속의 힘들! 이것이 우리를 박해합니다. 그런데 장차 받게 될 영광은 뭘까요?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의 가장 큰 변화는 하나님과 함께 화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하는 모습입니다. 우리 각자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하는 존재의 변화가 가장 큰 놀라운 영광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을 일부 상속하여 통치에 참여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통치에 참여합니다. 우리의 통치의 대상이 누가 될지는 모릅니다. 아마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 이거나 하나님께 죄 짓고 심판 받는 사람들 이거나 아니면 타락한 천사들 이거나 아니면 동물들 이거나 아니면 숱한 다른 피조물들이 아마도 성도의 통치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성도의 교제에 참여합니다. 우리 존재를 격양시키고, 변화시키고, 추동시키고 끊임없이 감화, 감동시키는 너무나 멋진 사람들의 교제권에 초청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게 될 영광입니다. 이 영광! 여러분들은 가향교회에 있으면서 이상적인 마음의 가향교회, 실재 가향교회 말고, 여러분 존재를, 여러분이 고민을 털어 놓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이상화된 가향교회를 마음에 두고 현재 레알 가향교회 나오는 거거든요. 그런데 장차 받게 될 영광은 우리가 지금 당하는 곤경과 비교해 볼 때 부등식으로 말할 때 엄청 크죠. 그래서 장차 받게 될 영광을 바라면서 현재의 고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이삭의 머리를 쥐어박는 이스마엘의 고난, 이스마엘이 주는 이런 박해 이런 것을 우리가 견뎌낼 수 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러면 왜 지금 당장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까요? 23절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그런데 8장 16절에 이미 양자가 됐거든요. 한 번 볼까요? 8장 15절 16절입니다.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양자가 됐습니다. 그런데 양자가 되었는데 또한 양자 될 것을 기다려야 됩니다. 8장 23절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아~ 양자가 되었고, 양자의 경험을 하고 있는데 또한 양자가 될 것을 완성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결혼하고 나서 내가 어떤 사람의 배우자가 됐습니다. 내가 지금 배우자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종례에, 끝내, 내 생애가 끝날 때 ‘나는 누구누구의 남편, 나는 누구누구의 아내’라는 그런 아내 됨과 남편 됨을 완성해 가는 거죠. 그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자가 되었지만, 양자의 영을 받은 우리도 범피조물이 당하는 고난은 면제되지 않습니다.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내가 양자가 되었다고 갑자기 피조물 전체를 덮치는 기근과 환란과 태풍과 이런 걸 갔다가 다 피해갈 수 있나요? 아니죠! 범피조물을 에워싸고 도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 말은 뭡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 되기 위해서 오늘날 이 모든 피조물이 겪고 있는 슬픈 고통입니다. 이 말은 해산의 고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을 받고 양자의 영을 받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밤낮으로 부르짖는 그 하나님 자녀도 피조물 전체를 뒤덮고 있는 기근은 피해가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이 기근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가난을 피하지 못했고, 예수님이 태풍을 피하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폭풍을 피하지 못합니다. 바울이 지중해 일대를 사로잡는 유라굴라 광풍을 피하지 못하여 14일 동안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지중해를 표류했습니다. 하나님 자녀인 우리는 범피조물의 고통에 일부가 됨으로 피조물 전체를 구원할 사명을 갖습니다. 그래서 피조물이 지금 허무한 데 굴복합니다. 이 피조물은 이방인을 가리키고 모든 동식물을 가리킵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구원을 아직 받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먼저 받은 우리가, 하나님 자녀의 영광에 들어간 우리가, 하나님 영광의 자녀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무제한적 책임감을 가지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동터온다! 하나님 나라가 여명이 밝아온다!’라는 말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느끼는 무진장한 사명감이 있지요. 이것

이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양자의 영으로 추동되는 하루를 사시기를 바라고 또 양자 될 것을 소망하면서 오늘도 영적 분투를 일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양자가 되었고 날마다, 아침마다 밤낮으로 아빠 아버지를 부르짖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저희들은 이 피조물 전체를 덮치는 고통에서 비껴갈 수 없고 면제될 수 없으며 몸의 속량을 기다리고 있고 양자 될 것을 아우성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루어진 구원과 이루어질 구원 사이에 이 묘한 역설적 긴장을 즐기며 오늘도 주의 손의 안보함, 부축함을 경험하고 순례의 길을 행할 수 있도록 힘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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