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로마서 8:12-17
제목: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는 신적 수동태 은혜
같이 읽겠습니다. 예, 우리 김삼용 교우님 저랑 같이 한 절씩 교독해 주십시오.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아멘! 하나님 말씀입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 번 반복했죠? 로마서의 구원론은 갈라디아서 구원론을 이어서 심화, 발전시키는 구원론이다. 그래서 로마서 읽기 전에 갈라디아서 논쟁을 이해해야 된다 라고 말씀드렸죠? 갈라디아서 핵심은 뭐냐 하면은 갈라디아서 4장, 5장인데 오늘 본문을 읽을 때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종이라는 그 이스마엘, 그러니까 종의 영, 이스마엘의 영입니다. 두려움에 사는 영, 이스마엘의 영이 누구냐 하면은 할례를 받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고 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종의 영을 받은 사람은 갈라디아 안에서 할례를 행하는 사람들, 할례를 지켜서 절기와 날과 해와 달 같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특별한 날,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특별한 절기,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특별한 행사, 의례 이런 걸 다 지켜서 거룩하게 하려고 하는 이런 사람들이 바로 할례를 받아서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할례 받은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갈라디아서 5장 3절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핵심적으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한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4절입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이게 바로 뭐냐 하면은 로마서 7장 14절로 24절에 나오는 사람, 그러니까 육신 안에서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은 대 좌절을 겪는데 갈라디아서 5장 4절에서 바로 말해주는 이 바울의 그 수신인들입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로마서 7장 14절부터 24절에 대 좌절과 곤경을 겪게 된다. 그래서 너희는 아무리 율법을 지키려고 애써도 이삭과 이스마엘의 비유를 통해 말하자면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 사로잡혀 있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은 뭐냐? 내가 하나님께 진노를 촉발할 만한 죄를 범한 것이 없는가? 그것 중심으로 자기를 다그치고 자기를 심각하게 검열하고 감찰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검열과 자기 감찰이 심한 사람입니다. 이 자기 검열과 자기 감찰을 아무리 심하게 해도 율법 모두를 다 지키는 데는 인간이 연약하고 무기력하다는 겁니다. 이게 바울이 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7장 14절에서 25절 말을 누구한테 한 말이냐 하면 갈라디아에서에서 율법을 다 지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너희, 그들에게 한 말입니다. 그들을 겨냥하고 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극단적 비관적 인간성은 갈라디아서에 써있는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 넘치는 사람들을 향하여 한 말입니다.
원래 바울은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 이런 것에 대해서는 이런 더 큰 보편적인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2장 6절입니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2장 10절입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이거 보세요. 선을 행하는 사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을 바울이 인정한데도요. 2장 10절과 11절은. 그러니까 바울이 로마서 7장 14절에서 25절에서 극단적인, 비관적인 인간론을 전개한 이유는 갈라디아서에 있는 이 사람들, 특히 5장 4절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이것이 바로 바울의 문제의식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도 정확하게 갈라디아서에서 나왔던 하나님 나라 상속, 무서워하는 종의 영, 아들의 영 그 다음 이런 성령을 따라 행함, 율법을 따라 행함 이거 전부 다 갈라디아서 5장 4절 말이거든요. 자, 5장 14절에 온 율법은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이 계명 안에서 다 향하여 지켜졌다. 그러니까 구약성경 613가지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는 이 계명 하나에 완전히 압축되었기 때문에 이웃 사랑으로 바쳐진 그 몸은 율법을 준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래서 5장 16절에 갈라디아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바로 요런 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핵심이에요. 자, 로마서 8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이때 육신은 우리 몸 그냥 생화학적인 그런 영양분을 원하는 몸, 그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옛날에 내 죄악의 행동을 기억하고 있는 거의 반자율적이고 나름대로 자기 생각이, 자기 행동 관성을 가진 그런 몸과 그런 그 몸에게 내통하는 나의 아직까지 완전히 죽지 못한 나의 옛 자아가 바로 육신입니다. 육신. 그래서 이 육신의 원래 뜻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겉 사람입니다. 우리의 겉 사람! 그러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선언된 사람, 그러나 아직까지 완전히 죽지는 않고 죽어감을 완성하는 사람, 이것이 육신입니다. 헬라어로 ‘싸르크스’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죽었고, 장사되었다고 간주되고, 믿어지는 그 육신이 영을 따라 행하면은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있는데, 영을 따라 행하지 않고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자신감을 중심으로 다시 옛 자아가 도덕적 분투를 거듭하면은 어떻게 되느냐?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 지배를 받게 된다. 다시. 왜?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 지배를 받는 이유는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았다가 613가지 율법 조항 중에 하나만 어겨도 율법 전체를 다 어기는 셈이 되어버리는 야고보서 2장 10절의 원칙, 야고보서 2장 10절 율법 중 하나만 어겨도 모든 율법을 다 어기는 셈이 된다, 즉 범법자가 된다. 이것은 정말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일이 얼마나 불리하고 불합리한가를 보여주는 구절이죠. 그죠? 야고보서 2장 10절.
자,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갈라디아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 본문이 공감이 안 됩니다. 왜? 갈라디아서 사람들은 그나마도 우리 한국교회보다 훨씬 더 대단했던 이유는 갈라디아 사람들은 애를 쓰고 분투를 해서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국 사람들은 아예 율법 폐기론입니다. ‘율법 지킬 필요가 있어? 주 안에서 우리 다 이미 구원이 완성된 것 아냐? 우리는 이미 천국에 와 사는데 왜 율법을 지켜야 돼?’라고 생각하는 고린도 교인들, 고린도 교인들 2장, 3장에 나오는 고린도 교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과 정반대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성령을 받고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려고 분투하다가 바울에게 이런 책망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특징은 뭐냐 하면은 온갖 음란, 세속화가 고린도 교회를 다 장악했는데 고린도 교인들 중 누구도 율법을 지키려고 분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 도덕적 개차반들로 살면서도 율법 자체를 안 지키면서 하는 말이 뭡니까?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이야! 우리는 영의 사람이야! 영에 속한 사람은 더 이상 율법의 요구에 좌우될 필요 없어!’ 라고 생각하는 고린도 교인들이 한국 교인들과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 교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도덕적 분투에 공감이 안 될 거예요. 아마. 그래서 로마서가 좀 어려운 이유는 한국 교우들이 처한 상황에 정조준되는 말씀이 아니라 굉장히 어려워요. 우리 고린도전후서 교인들이 바로 한국 교인들과 같은 거라서요. 사실은. 그래서 로마서는 약간 비껴가요. 로마서는 뭐냐 하면은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선언된 우리가 우리 지체 속에 있는 한 다른 욕망과 내통하여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써보다가 대 좌절을 경험하는 이런 갈라디아 교인과 같은 분투가 없기 때문에, 좌절을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를 감화, 감동시켜야 된다는 내적 필요성도 잘 못 느끼고 그냥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지키는 것을 신경을 안 쓰고 사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닮아야 됩니다. 한국 교인들은. 그래야만 로마서가 뼈저리게, 뼈저리게 다가옵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7장 14절을 이해하려면은 갈라디아 교인적인 분투를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교회는 불행하게도 고린도 교인들을 닮아가지고 ‘우리는 천국에 와 있어! 부활 필요 없어! 우리는 온갖 은사로 가득 차 있어! 우리는 이미 왕 노릇하고 있어! 주와 함께 다스리고 있다! 우리는. 주와 함께 다스리고 있는 우리에게 무슨!’ 이런 식으로 있죠.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웃 사랑의 계명을, 사랑장이란 이름으로 쭉 말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무례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행치 아니하며...쭉. 그게 바울이 이 사랑장이 율법 다 지키는 것과 똑같은 원리가 있다 라고 말하면서 사랑장을 보여주죠.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 특징? 당 짓기, 나는 그리스도파, 나는 바울파, 그다음 고린도 교인 특징? 음란한 행동을 한 사람들은 ‘뭐가 잘못됐어?’ 이렇게 자기 아버지와 영적으로 통간한 자들, 자기 아버지와 성적으로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을 교회 지도자로 세우면서 ‘이런 사람들이 뭐가 잘못 됐어?’ 이렇게 말한 것이 고린도 교회입니다. 우리나라의 어떤 특정한 교회처럼 그런 교회입니다. 이게 고린도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도덕적 열등, 도덕적 개차반, 슬럼지대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자기들은 천국에 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고린도 교인들과 갈라디아 교인들의 이 양극단에 이제 우리가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누가 더 바람직할까요? 갈라디아 교인들이 더 바람직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그다음 챕터는 로마서 8장이거든요. 로마서 8장은 뭡니까? 갈라디아 교인들아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대로 살면 안 된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며 산다. 아, 여기서 우리가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 죽었다고 이미 선언되었는데 우리의 죽음은 이미 일어난 일인데 또 죽여야 합니다. 여기가 역설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십자가에 못이 박혀서 죽었습니다. 죽었는데 또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척추, 우리의 영적,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살아가는 삶의 바른 큰 세계관적인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가 죽었습니다. 우리는 다시는 옛날처럼 못 돌아갑니다. 그런데 우리 몸의 행실은 아직도 속량 받지 못한 몸의 관성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관성으로 남아있는 이 몸의 행실을 이것을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죄를 죽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 죄를 죽이라고 말하지 않냐 하면은 죄는 십자가에서 이미 못 박혀 죽었습니다. 죄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로 후퇴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몸은 아직까지, 몸은 아직까지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행하는데 대항하고 있고, 성령의 감화, 감동을 안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됩니다. 자, 죄를 죽이라는 말 아닙니다. 죄악된 우리의 자아는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었지만 몸의 행실은 또한 죽여야 하는 지체 속에 다른 법이 아직 있기 때문에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죽이다 보면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는 사람 곧 하나님의 아들 즉 이삭과 같은 사람이 되고 만일에 몸의 행실을 죽이지 않고 율법을 따라 행하려고 하면 이스마엘처럼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고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영을 받고 아빠 아버지라 부르면서 이게 바로 갈라디아서 4장에서 말하는 아빠 아버지입니다. 4장 6절입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4장 6절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을 이어 받아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그 다음에 이제 갈라디아서 4장 주제가 상속자거든요. 자녀이면 또한 이스마엘과 같이 쫓겨난 종의 아들이 아니라 이삭처럼 상속자이니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coheir 공동 상속자이니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
아~ 예수 믿고 나니까 진짜 본격 고난으로 돌입하는구나! 즉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기 위한 고난이 있구나! 그게 바로 뭐냐? 몸의 행실을 죽이는 고난, 거룩한 싸움에 동참하는 고난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종의 영이 아니라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 영을 하나님이 여러분 각자에게 보내 주시사 아침마다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 이렇게 감미로운 기도가 여러분을 아침마다 지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처럼 천하고 부족한 죄인에게 하나님 아들의 영을 보내사 아침마다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제목: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는 신적 수동태 은혜
같이 읽겠습니다. 예, 우리 김삼용 교우님 저랑 같이 한 절씩 교독해 주십시오.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아멘! 하나님 말씀입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 번 반복했죠? 로마서의 구원론은 갈라디아서 구원론을 이어서 심화, 발전시키는 구원론이다. 그래서 로마서 읽기 전에 갈라디아서 논쟁을 이해해야 된다 라고 말씀드렸죠? 갈라디아서 핵심은 뭐냐 하면은 갈라디아서 4장, 5장인데 오늘 본문을 읽을 때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종이라는 그 이스마엘, 그러니까 종의 영, 이스마엘의 영입니다. 두려움에 사는 영, 이스마엘의 영이 누구냐 하면은 할례를 받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고 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종의 영을 받은 사람은 갈라디아 안에서 할례를 행하는 사람들, 할례를 지켜서 절기와 날과 해와 달 같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특별한 날,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특별한 절기,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특별한 행사, 의례 이런 걸 다 지켜서 거룩하게 하려고 하는 이런 사람들이 바로 할례를 받아서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할례 받은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갈라디아서 5장 3절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핵심적으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한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4절입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이게 바로 뭐냐 하면은 로마서 7장 14절로 24절에 나오는 사람, 그러니까 육신 안에서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은 대 좌절을 겪는데 갈라디아서 5장 4절에서 바로 말해주는 이 바울의 그 수신인들입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로마서 7장 14절부터 24절에 대 좌절과 곤경을 겪게 된다. 그래서 너희는 아무리 율법을 지키려고 애써도 이삭과 이스마엘의 비유를 통해 말하자면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 사로잡혀 있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은 뭐냐? 내가 하나님께 진노를 촉발할 만한 죄를 범한 것이 없는가? 그것 중심으로 자기를 다그치고 자기를 심각하게 검열하고 감찰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검열과 자기 감찰이 심한 사람입니다. 이 자기 검열과 자기 감찰을 아무리 심하게 해도 율법 모두를 다 지키는 데는 인간이 연약하고 무기력하다는 겁니다. 이게 바울이 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7장 14절에서 25절 말을 누구한테 한 말이냐 하면 갈라디아에서에서 율법을 다 지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너희, 그들에게 한 말입니다. 그들을 겨냥하고 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극단적 비관적 인간성은 갈라디아서에 써있는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 넘치는 사람들을 향하여 한 말입니다.
원래 바울은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 이런 것에 대해서는 이런 더 큰 보편적인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2장 6절입니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2장 10절입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이거 보세요. 선을 행하는 사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을 바울이 인정한데도요. 2장 10절과 11절은. 그러니까 바울이 로마서 7장 14절에서 25절에서 극단적인, 비관적인 인간론을 전개한 이유는 갈라디아서에 있는 이 사람들, 특히 5장 4절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이것이 바로 바울의 문제의식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도 정확하게 갈라디아서에서 나왔던 하나님 나라 상속, 무서워하는 종의 영, 아들의 영 그 다음 이런 성령을 따라 행함, 율법을 따라 행함 이거 전부 다 갈라디아서 5장 4절 말이거든요. 자, 5장 14절에 온 율법은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이 계명 안에서 다 향하여 지켜졌다. 그러니까 구약성경 613가지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는 이 계명 하나에 완전히 압축되었기 때문에 이웃 사랑으로 바쳐진 그 몸은 율법을 준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래서 5장 16절에 갈라디아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바로 요런 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핵심이에요. 자, 로마서 8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이때 육신은 우리 몸 그냥 생화학적인 그런 영양분을 원하는 몸, 그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옛날에 내 죄악의 행동을 기억하고 있는 거의 반자율적이고 나름대로 자기 생각이, 자기 행동 관성을 가진 그런 몸과 그런 그 몸에게 내통하는 나의 아직까지 완전히 죽지 못한 나의 옛 자아가 바로 육신입니다. 육신. 그래서 이 육신의 원래 뜻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겉 사람입니다. 우리의 겉 사람! 그러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선언된 사람, 그러나 아직까지 완전히 죽지는 않고 죽어감을 완성하는 사람, 이것이 육신입니다. 헬라어로 ‘싸르크스’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죽었고, 장사되었다고 간주되고, 믿어지는 그 육신이 영을 따라 행하면은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있는데, 영을 따라 행하지 않고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자신감을 중심으로 다시 옛 자아가 도덕적 분투를 거듭하면은 어떻게 되느냐?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 지배를 받게 된다. 다시. 왜?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 지배를 받는 이유는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았다가 613가지 율법 조항 중에 하나만 어겨도 율법 전체를 다 어기는 셈이 되어버리는 야고보서 2장 10절의 원칙, 야고보서 2장 10절 율법 중 하나만 어겨도 모든 율법을 다 어기는 셈이 된다, 즉 범법자가 된다. 이것은 정말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일이 얼마나 불리하고 불합리한가를 보여주는 구절이죠. 그죠? 야고보서 2장 10절.
자,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갈라디아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 본문이 공감이 안 됩니다. 왜? 갈라디아서 사람들은 그나마도 우리 한국교회보다 훨씬 더 대단했던 이유는 갈라디아 사람들은 애를 쓰고 분투를 해서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국 사람들은 아예 율법 폐기론입니다. ‘율법 지킬 필요가 있어? 주 안에서 우리 다 이미 구원이 완성된 것 아냐? 우리는 이미 천국에 와 사는데 왜 율법을 지켜야 돼?’라고 생각하는 고린도 교인들, 고린도 교인들 2장, 3장에 나오는 고린도 교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과 정반대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성령을 받고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려고 분투하다가 바울에게 이런 책망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특징은 뭐냐 하면은 온갖 음란, 세속화가 고린도 교회를 다 장악했는데 고린도 교인들 중 누구도 율법을 지키려고 분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 도덕적 개차반들로 살면서도 율법 자체를 안 지키면서 하는 말이 뭡니까?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이야! 우리는 영의 사람이야! 영에 속한 사람은 더 이상 율법의 요구에 좌우될 필요 없어!’ 라고 생각하는 고린도 교인들이 한국 교인들과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 교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도덕적 분투에 공감이 안 될 거예요. 아마. 그래서 로마서가 좀 어려운 이유는 한국 교우들이 처한 상황에 정조준되는 말씀이 아니라 굉장히 어려워요. 우리 고린도전후서 교인들이 바로 한국 교인들과 같은 거라서요. 사실은. 그래서 로마서는 약간 비껴가요. 로마서는 뭐냐 하면은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선언된 우리가 우리 지체 속에 있는 한 다른 욕망과 내통하여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써보다가 대 좌절을 경험하는 이런 갈라디아 교인과 같은 분투가 없기 때문에, 좌절을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를 감화, 감동시켜야 된다는 내적 필요성도 잘 못 느끼고 그냥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지키는 것을 신경을 안 쓰고 사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닮아야 됩니다. 한국 교인들은. 그래야만 로마서가 뼈저리게, 뼈저리게 다가옵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7장 14절을 이해하려면은 갈라디아 교인적인 분투를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교회는 불행하게도 고린도 교인들을 닮아가지고 ‘우리는 천국에 와 있어! 부활 필요 없어! 우리는 온갖 은사로 가득 차 있어! 우리는 이미 왕 노릇하고 있어! 주와 함께 다스리고 있다! 우리는. 주와 함께 다스리고 있는 우리에게 무슨!’ 이런 식으로 있죠.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웃 사랑의 계명을, 사랑장이란 이름으로 쭉 말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무례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행치 아니하며...쭉. 그게 바울이 이 사랑장이 율법 다 지키는 것과 똑같은 원리가 있다 라고 말하면서 사랑장을 보여주죠.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 특징? 당 짓기, 나는 그리스도파, 나는 바울파, 그다음 고린도 교인 특징? 음란한 행동을 한 사람들은 ‘뭐가 잘못됐어?’ 이렇게 자기 아버지와 영적으로 통간한 자들, 자기 아버지와 성적으로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을 교회 지도자로 세우면서 ‘이런 사람들이 뭐가 잘못 됐어?’ 이렇게 말한 것이 고린도 교회입니다. 우리나라의 어떤 특정한 교회처럼 그런 교회입니다. 이게 고린도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도덕적 열등, 도덕적 개차반, 슬럼지대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자기들은 천국에 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고린도 교인들과 갈라디아 교인들의 이 양극단에 이제 우리가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누가 더 바람직할까요? 갈라디아 교인들이 더 바람직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그다음 챕터는 로마서 8장이거든요. 로마서 8장은 뭡니까? 갈라디아 교인들아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대로 살면 안 된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며 산다. 아, 여기서 우리가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 죽었다고 이미 선언되었는데 우리의 죽음은 이미 일어난 일인데 또 죽여야 합니다. 여기가 역설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십자가에 못이 박혀서 죽었습니다. 죽었는데 또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척추, 우리의 영적,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살아가는 삶의 바른 큰 세계관적인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가 죽었습니다. 우리는 다시는 옛날처럼 못 돌아갑니다. 그런데 우리 몸의 행실은 아직도 속량 받지 못한 몸의 관성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관성으로 남아있는 이 몸의 행실을 이것을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죄를 죽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 죄를 죽이라고 말하지 않냐 하면은 죄는 십자가에서 이미 못 박혀 죽었습니다. 죄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로 후퇴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몸은 아직까지, 몸은 아직까지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행하는데 대항하고 있고, 성령의 감화, 감동을 안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됩니다. 자, 죄를 죽이라는 말 아닙니다. 죄악된 우리의 자아는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었지만 몸의 행실은 또한 죽여야 하는 지체 속에 다른 법이 아직 있기 때문에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죽이다 보면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는 사람 곧 하나님의 아들 즉 이삭과 같은 사람이 되고 만일에 몸의 행실을 죽이지 않고 율법을 따라 행하려고 하면 이스마엘처럼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고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영을 받고 아빠 아버지라 부르면서 이게 바로 갈라디아서 4장에서 말하는 아빠 아버지입니다. 4장 6절입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4장 6절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을 이어 받아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그 다음에 이제 갈라디아서 4장 주제가 상속자거든요. 자녀이면 또한 이스마엘과 같이 쫓겨난 종의 아들이 아니라 이삭처럼 상속자이니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coheir 공동 상속자이니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
아~ 예수 믿고 나니까 진짜 본격 고난으로 돌입하는구나! 즉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기 위한 고난이 있구나! 그게 바로 뭐냐? 몸의 행실을 죽이는 고난, 거룩한 싸움에 동참하는 고난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종의 영이 아니라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 영을 하나님이 여러분 각자에게 보내 주시사 아침마다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 이렇게 감미로운 기도가 여러분을 아침마다 지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처럼 천하고 부족한 죄인에게 하나님 아들의 영을 보내사 아침마다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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