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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3:21-23 /제목: 율법의 의와 다른 하나님의 의

by 【고동엽】 2022. 1. 15.
본문: 로마서 3:21-23
제목: 율법의 의와 다른 하나님의 의


자, 먼저 ‘의’라는 말뜻을 잠깐만 설명합니다. 의는 쌍방속박적인 언약, 쌍방구속적인 언약의당사자가 그 언약관계를 지키기 위하여서 의무를 다하는 것을 ‘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로마서가 설명을 지금 안 했지만 구약성경, 신약성경 모두 다 통 털어서 언약이라고 하는 고대 샘족들의 독특한 이해, 인간관과 이해, 사회관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세계는 쌍방속박적 언약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상호책임감으로 유지되고 있다, 세계는 쌍방속박적인 언약 당사자들이 서로 쉴 새 없이 수행하는 신실한 의무 수행으로 이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 이렇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그 창조를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언약관계 안에 초청한 걸로 본 거예요.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뭐냐하면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단순한 피조물로 본 것이 아니라 쌍방속박적인 언약의 당사자로 창조했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전제군주처럼 행동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답게 행동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맞게 행동을 해야 돼요. 하나님의 성품에 맞게 행동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마음대로 변덕스럽게 행동하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행동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아담 하와 사이에서 맺어진 언약을 우리는 ‘에덴언약’ 또는 ‘창조언약’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창조언약과 에덴언약의 핵심은 아담이 에덴동산을 잘 지키고 다스리며 땅을 정복하고 동식물들을 잘 다스리는 것이 아담의 언약적 의무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이 언약백성으로 삼았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약백성으로 삼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쌍방속박적인 언약으로 불러서 앞으로 세계운명은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 사이에 신인협력적인 이 동역에 달려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총을 세계 만민에게 매개할 그런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의 2인 3각과 같은 일종의 쌍방속박적인 언약으로 서로를 동여매어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이 서로에 대한 의무를 다하므로 세계 만민에게 하나님의 복을 유통시키고 전파하는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독선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이 되셨을까요?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라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맞게 행동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만든 언약에 스스로 속박당하시는 입헌 군주적이고 자기 제한적인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변덕스럽게 행동을 못하세요. 언약에 맞게 행동을 하셔야 돼요.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민족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려고 애쓰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 이유가 뭐냐하면은, 세계만민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의 언약적 신실성의 혜택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개 자녀들은 어떤 부모님 밑에서 커야 자녀가 잘 큽니까? 엄마 아빠의 언약적 신실감이 튼실하게 작동할 때 그 가정에 태어난 자녀들이 아주 우주적 안정감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엄마 아빠가 도란도란 대화를 한다거나, 친교를 한다거나, 손을 잡고 산책을 한다거나 이렇게 부부 사이가 좋아야 그 부부 사이에 태어난 자녀가 우리 엄마 아빠가 자아내고 있는 이 언약적 신실성의 관계가 자기를 우주적으로 평안하게 만들거든요. 그러니까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장님과 종업원이 서로 쌍방속박적인 언약에 최선을 다하여 의리를 지켜야 됩니다. 이렇게 언약 관계의 당사자가 서로에 대한 의리를 지킬 때 그것을 ‘의’라고 말합니다. 자, 신명기 6장 25절을 우리 위혜숙 집사님이 읽어주시고, 레위기 18장 5절을 원혜진 자매님이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25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네 바로 이겁니다. 그 다음 원혜진 자매님 레위기 18장 좀 읽어주십시오.


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예, ‘살리라’ 이게 뭐냐하면은 이 구약성경에서 ‘살리라’라는 말은 ‘언약관계 안에서 존재하리라’ ‘언약적 신실성 안에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이수원 형제님 창세기 17장 1절 좀 읽어주십시오.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예, 그래서 제가 설명하자면은 쌍방속박적 언약은 이런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서로가 손을 잡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입니까? 이 쌍방속박적 언약이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실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잡는 손이 약해집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잡는 손이 이렇게 약해집니다. 그러면 이런 경우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쌍방속박적인 언약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손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의 손을 이렇게 잡습니다. 이렇게.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잡지 못해요. 이렇게. 이게 보입니까? 오른쪽이 이스라엘이고 왼쪽이 하나님이라면은 원래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쌍방속박적 언약은요. 서로 이렇게 꽉 잡았습니다. 이 서로 상호 속박적인 언약에 신실하게 붙어있는 것을 우리는 ‘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잡는 의가 약해져서 이렇게 됩니다. 점점 언약관계에서 빠져나갑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붙드는 이 언약적인 그런 파지력 이 붙드는 힘이 약해지더라도 하나님이 딱 이렇게 잡으면은 이스라엘 민족이 신실함이 모자라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신실함을 만회하고도 남는 만큼 압도적으로 비대칭적으로 더 강한 신실함으로 이렇게 딱 붙들면은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는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이때 쌍방속박적 언약에 대등하게 언약적 신실함으로 서로를 지탱해야 될 그 역할 중에서 하나님 역할이 이스라엘 역할을 대신해서 일방적으로 이 언약관계를 지켜 줄 때 그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이스라엘의 신실함이 모자라서 언약관계가 와해 될 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꽉 붙들어서 언약 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지탱시켜 주는 걸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비대칭적이고 감히 우리가 마땅히 요구할 자격도 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신실함이 우리의 불신실함을 완전히 뛰어넘는 양보다 더 많이 신실함이 있어서 이 하나님의 신실함이 우리를 딱 붙들 때 이것을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식탁에 모여든 세리와 창녀들은 쌍방속박적 언약대로 사는 데 실패했습니다. 세리와 창녀는 하나님과 언약백성으로 사는 데 실패했습니다. 탕자도 하나님 아버지와 맺은 언약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탕자를 맞아들여서 다시 반지를 끼워주고, 다시 신발을 신겨주고, 아들로 영접해 주는 것은 아버지의 의가 아들의 의보다 압도적으로 풍성하고 큰 겁니다. 예수님의 식탁에 모여든 세리와 창녀의 의는 바닥이 났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6장 1절부터 6절 보세요. 에브라임의 인애는 아침 안개같이 사라진다, 믿을 수가 없다, 신실함이 모자란다 이런 뜻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압도적인 신실함이 언약관계를 지탱하도록 이끌어간 역사가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율법과 예언자들이 처음부터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쌍방속박적 언약관계는 부서질 때가 많았지만, 와해될 때가 많았지만, 끊어질 때가 많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의가 이스라엘의 불의를 덮어쓰기 하면서 지탱시켰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바로 뭡니까?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거를 받았다는 말이 뭡니까? 이스라엘이, 쌍방속박적 언약관계에서 이스라엘이 그 불의, 모자람, 그 언약관계의 신실성의 실패 그것을 하나님의 압도적인 실실함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백성 신분에 머물도록 지탱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가장 잘못된 번역이 이 번역입니다. 여러분, 22절을 좀 읽어주십시오.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여러분 집에 가서 영어성경 찾아보세요. 이 영어 성경을 번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믿음이 아닙니다. . 정확하게 번역하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께 보였던 신실함, 그것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대신한 이스라엘, 예수님이 대신한 인류가 마치 하나님께 신실한 삶을 산 것처럼 이상한 방식의 그런 덮어쓰기가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 아닙니다. 가장 잘못된 번역이 3장 22절 번역입니다. 자 여러분이 원전을 모르니까 근데 구글에서 치면요, 원전을 다 알 수 있어요. 영어로 Rom chapter 3. verses 22 in Greek 이라고 치면 바로 영어랑 헬라어가 다 나와요. 헬라어를 영어로 다 직역해 놓은 게 나오거든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입니다. ‘믿음’이라는 번역도 잘 못 되었습니다. 믿음직스러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직스러움으로 말미암아, 즉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지탱했던 하나님 아버지의 신신함을 대신하기도 하고, 그동안 신실함을 보이지 못해서 실패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실패를 만회하는 이스라엘의 신실함을 대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신실함은 하나님이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보여주셨던 그 압도적인 하나님의 그 신신하심을 구현하는, 대표하는 신실함이기도 하고 끊임없이 신실하지 못하여 하나님께 징계를 초래했던 그 이스라엘 민족이 마침내 각성하여 이제 100% 순종을 드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선수로서 하나님께 바친 신실함을 대표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함입니다. 그래서 이걸 깨달으면 여러분은 신약성경을 정통으로 깨달았다 할 수 있습니다.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제가 이걸 여러분들에게 지금 충분히 설명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여러분이 이걸 깨달으셔야 됩니다. 자 마무리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압도적인 의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원리는 예수님이 또는 사도 바울이 갑자기 발견한 신학적 원리가 아니라 모세오경부터 예언자 모두가 구약역사를 이렇게 정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불신실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압도적이고 훨씬 더 불합리할 정도로 풍요로운 의로우심과 그 신실함이 언약관계가 유지되어 왔습니다. 그 말은 뭐죠? 어떻게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유지되어 온거죠? 하나님의 압도적인 신실함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136편부터는 하나님의 무궁하신 인애를 찬양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왜? 바벨론에서 150년 만에 돌아온 이스라엘을 다시 하나님 백성으로 삼아주시는 그 은혜가 너무 커서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무궁하심이로다” 이런 후렴구가 계속 나오는 거죠. 여러분 오늘 10분 동안 질의응답 시간에 필요하면 질문해 주시고 또 다음 시간에 더 하겠습니다. 이것을 길게 길게 오랫동안 해야 하는데 여러분 혹시 질문 있으면은 또 이메일로 해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쌍방속박적 언약을 맺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그 위상을 높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과 대등한 쌍방속박적 언약의 파트너로 우리를 삼아주셨지만, 우리가 실패할 때 이 쌍방속박적 언약에서 이탈하려고 하는 우리의 이 자포자기된 절망을 치료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의로 우리를 붙들어 주셔서 우리를 끝내 하나님께 책임지고 하나님에 대해서 응답하는 존재, 지금 우리처럼 이렇게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를 만들어주시고 하나님 자녀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는 말은 뭐죠? 쌍방속박적 언약관계에 우리가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깊이깊이 깨달아도 더 신비로운 하나님의 구원의 이 묘법을 우리 사랑하는 새벽 성도들이 깨닫고 세상이 빼앗아갈 수 없는 감격 속에 살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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