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로마서 3:1-8
제목: 이신칭의 교리 오해 논박
오늘 본문에서 인용부호가 좀 길게 있다고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인용부호 중에서 가장 처음 인용부호는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여기가 인용부호라고 봐야 됩니다. 그 인용부호의 첫 대답이 “범사에 많으니”가 이제 사도 바울의 대답입니다. 자 그런데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이것도 인용부호입니다. 그 다음에 또 5절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이거 인용부호입니다. 그 다음에 7절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이거 인용부호입니다. 그 다음에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이거 인용부호입니다. 요건 전부 다 사도 바울의 말이 아니라 사도 바울과 사도 바울의 적대자들이 주고받은 말들인데 갈라디아서 교우들이 주로 바울에게 쏟아낸 말들이라고 봐야 됩니다. 이게 갈라디아서 교인들입니다. 그러니까 로마서는 갈라디아서를 훨씬 더 심층적으로 풀고 있다 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로마서는요. 그래서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신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통속적으로 오해되는 하나의 이분법을 극복해야 되는데 구약과 신약이라는 겁니다. 그니까 창세기 1장부터 말라기까지는 구약이고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을 신약이라고 그렇게 하는데 이 기준은 아주 후대에 생긴 기준입니다. 왜냐하면은 성경과 서신들 이렇게 불렀습니다. AD 390년에 아타나시우스가 신약성경을 27권 성경이라고 부르기 전까지는 교부들은 이렇게 불렀어요. ‘성경과 바울서신’ ‘성경과 마태복음’ 이렇게 불렀고 신약성경이라는 말이 구약성경과 대등하게 불리는 것은 4세기 후반에 나오는 겁니다. 자, 그런데 구약은 모세언약이고 신약은 예수님 언약이다 요런 통속적인 구분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신구약은 하나의 언약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아브라함 언약. 아브라함 언약이 신구약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신구약을 한마디로 말하면 뭐냐 하면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하여 세계 만민에게 아담인류의 저주를 거둬내 주시겠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하여 세계 만민에게 덧씌워진 아담인류의 죄성과 저주와 죽음을 거둬내 주시고 제거해 주시겠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김주온 자매님, 갈라디아서 3장 8절부터 14절까지를 읽어 주십시오.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 나옵니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여기에 율법대로 행하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다는 말에서 이 저주라는 말은 창세기에 나오는 말이잖아요? 그렇죠?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최초에 복음을 들었던 사람인데 아브라함에게 최초의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무슨 내용이냐 하면은 아브라함에게 천하 만민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다는 복음,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아브라함에게 전해진 복음 내용이 뭡니까? 갈라디아서 3장 8절 보세요.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이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러면 무슨 복을 줍니까? 아담 인류가 인류에게 초래한 저주로부터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율법의 정죄를 받고 그 율법의 저주 아래 살 수밖에 없는 그 감금 상태로부터 아브라함이 받은 그 복음으로 풀어준다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바울이 예수님의 복음을 아브라함의 복음으로부터 시작했다는 말이 너무 중요한 거거든요. 그래서 창세기부터 읽어야 되는 거예요. 구약성경을 창세기부터 읽지 않으면 예수님부터 복음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은 감동을 못 받는 거예요. 로마서와 요한복음부터 읽는 게 아니고 요한복음과 로마서는 이야기 스토리에 제일 마지막에 읽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읽어야 되냐 하면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아담 인류의 저주를 끝내 이겨내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창세기에서 이미 읽어야 마태복음과 갈라디아서와 로마서가 이해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신약 구약 이 구분법을 전문학자들은 쓰지 않습니다. ‘성경과 신약’ 이렇게 말합니다. 왜냐하면은 신약 사도들은 자기가 쓴 편지가 구약성경과 권위가 같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바울은 자기 서신을 성경을 대신 할 수 있는 문서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왜요? 모든 중요한, 모든 약속이 전부 다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복음을 전했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 아브라함이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는 저주라는 말이 참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 주은 자매님 한 번 만 더 읽어주세요. 너무 중요합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 하수진 자매님 창세기 3장 17절부터 19절 좀 읽어주십시오. 너무 중요합니다. 창세기 3장 17절부터 19절.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로마서는 철저하게 창세기 문법에 지배를 당하고 있다고 그랬고요. 로마서는 갈라디아서를 한 번 더 심층 해설하고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전에 갈라디아서를 먼저 읽어야 됩니다. 갈라디아서를 자세히 푸는 것이 로마서인데 로마서는 철저하게 그 논리가 창세기 문법에 지배되고 있다. 창세기 3장 17절부터 19절 읽어 주십시오.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하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것이 바로 저주입니다. 그러니까 저주는 뭐냐하면은 노동이 영생을 가져오는 노동이 아니라 허무를 완성시키는 노동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너무 슬프죠. 허무를 완성시키는 노동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우리가 아침 일찍 출퇴근하면서, 전철 타면서, 고생하는 이 모든 것은 허무를 완성시키는 노동입니다. 이것을 직시해야 해요. 그래서 기독교는 우리의 인생이 허무를 완성시키는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이걸 직시해야 만이 복음을 이해하는 거예요. 허무를 완성시켜 가는 중노동이, 가시와 엉겅퀴를 경험한 사람이 이 율법의 저주 아래서 풀려나기를 원하는 거거든요. 여러분 이것은 이해가 되죠? 여러분들은 신자가 됐기 때문에 이 말을 이해할 겁니다. 그렇죠? 이걸 제가 이해를 한 거거든요. 제가 이걸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제가 구약을 안 것이 아니었어요.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구약을 안 게 아니라 저는 율법의 저주 아래서 저의 이 모든 성실한 노동과 공부가 제가 열심히 공부하면은 친구들 등수가 내려가는 거예요. 그러면 너무 슬픈 거예요. 제가 다니던 학교가 기가 막힌 학교인데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이런 소설에 나오는 학교입니다. 1등부터 600등까지 점수를 쭉 칠판에 적어 게시판에 한 달에 한번씩 적어 놓습니다. 그리고 1등을 첫 자리에 앉히고 2등을 두 번째 자리에 앉히고 등수별로 앉히는 거예요. 제가 다닌 학교가 그랬어요. 그래서 월말에 게시판에 점수가 이렇게 적은 걸 보고 아무리 친한 친구끼리 손을 잡고 가도 그 등수가 바뀌어 있으면 마음이 많이 슬픈 거예요. 그래서 저는 뭘 깨달았냐 하면은 내가 밤새 열심히 공부하면 내 친구가 등수가 내려간다는 것을 알고 너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실제로... 너무 허무한 거예요. 그러니까 저의 성실이 남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성실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내가 잔치를 벌여도 내가 많이 번 돈 때문에 누군가가 가난해져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열심히 성공하고 내가 행복한데 딴 사람도 덩달아 행복하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고 나의 열심과 성실과 나의 출세와 부귀영화가 다른 사람의 박탈과 다른 사람의 고난과 다른 사람의 노예적 삶을 강요하는 그런 저주받은 운명을 맞교환하는 거라면 이 노동은 저주 아래 있는 노동이고 이 노동은 그래서 제가 구약성경을 다 깨달은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에서 예수를 영접한 거예요. 그때 예수님이 제게 다가온 거거든요. 예수님이 죄와 저주에서 저를 해방한다는 말뜻을 그때 저는 20대 때 알게 된 거예요. 그걸! 그때 저는 구약성경을 낱낱이 몰랐어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처음 뵈었을 때 저주에서 우리를 풀어준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이것이 복음이에요. 이것이 복음인데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을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이 복음을 지금 전하고 다녔는데 유대인들은 뭐라고 말했어요? “그러면 이면적 유대인이 오히려 우리 유대인보다 낫다 하면은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자랑하고 다녔던 것, 그리고 4살 때부터 미드라쉬를 배우고, 6살 때부터 토라를 암송하고, 12살 때부터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했던 이 모든 유대인다움이 좋은 것은 하나도 없네?”라고 하니까 바울이 말합니다. “아니! 유대인다움의 가장 좋은 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맡은 민족이었기 때문에 좋았다. 하나님의 뜻을 더 자세히 아니까 좋았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유대인 대부분이 하나님을 못 믿고 하나님의 신실함에 실패한 자 아닙니까? 우리 전부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전부를 선택하여 세계 만민에게 복의 근원 삼아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한 것 아닙니까? 이렇게 우리 유대인들이 대다수가 못 믿었기 때문에요?” 하니까 “아니다! 일부 유대인들이 더러 완악하게 돼서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온 아브라함의 복의 완성적인 이 복음을 영접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신실함이 폐하여진 것은 아니다. 유대인 일부가 완악하여 믿음에서 떨어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여 세계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이 복음의 사명은 이스라엘 민족이 성취를 잘 한 거다. 이스라엘 민족은 실패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민족의 사명은 예수님 때문에 완전히 성공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 일부가 이 믿음의 반열에서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아브라함 후손을 통해서 천하 만민을 끝내 죄와 죽음의 법에서 풀어준다는 이 약속은 하나님이 지킨 것이다.” “자 그러면은 하나님의 신실함이 우리 유대인의 불신실함 때문에 더 도드라지게 드러났고, 우리 유대인들의 거짓됨 때문에 하나님의 참됨이 더 도드라지게 드러났고, 오히려 우리 유대인들이 악행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찬란하게 빛나게 만들었다면은 우리의 악행, 우리의 거짓된 삶, 우리의 이 모든 불의한 것도 하나님께는 뭔가 공헌한 것이 있지 않느냐? 그런데 우리가 악역을 맡았다고 우리를 심판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렇게 하니까 “이런 논리는 너희들이 나에게 덧씌우 악의적인 주장이다. 너희들이 내가 전하는 복음을 축소화시켜서 해석하고 희화화 하고 캐리커쳐링 하고 조롱하는데 너희들 모두는 악의적으로 내 복음을 개작하고 풍자하여서 패러디해서 내가 이따위 도덕폐기론적인 입장 즉 하나님 율법대로 사는 것은 더이상 의미가 없네, 오히려 불의한 자가 하나님께 더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네? 라고 패러디하는 것은 그건 정말 악한 것이다.” 하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비방하고 패러디 하는 이런 논리를 단죄하는 거죠. 여러분 그래서 “신약은 예수님에 관한 복음이고, 구약은 모세에 관한 복음이다”라는 이분법은 옳지 않습니다. 자, 구약이라는 말은 성경에 히브리서 3장하고 히브리서 6장 이 두 군데만 구약이란 말이 쓰였는데 그때의 구약이라는 말은 아브라함 언약을 가르키는 말이 아니라 모세의 성전에 관한 율법, 제사법을 가르킬 때만 구약이란 말을 썼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음을 받겠다는 그 갈라디아서 3장 8절의 복음은 신구약을 아치모양으로 딱 붙들고 있는, 신구약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복음입니다. 마태복음 8장 11절을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예, 우리가 천국 가면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최초로 자리를 잡은 그 식탁에 앉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철두철미하게 천국은 인종적으로는 유대인들이 천국의 핵심 공무원들이라고 보면은 됩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유대인들의 핵심보직 섬김이 지배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 다음에 유대인 아니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면은 섬김과 봉사 사역자로 쓰임 받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아브라함의 식탁에 가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 이것을 늘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천국은 불평등은 없지만 위계질서는 있습니다. 천국은 불평등은 없지만 위계질서는 있다는 말은 뭡니까? 높낮이가 있습니다. 열 고을 다스리는 사람이 있고, 다섯 고을 다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그냥 모든 평등한 사람들의 평등한 축제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최초로 선택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중심으로 펼쳐진 아주 자발적인 식탁 공동체다, 폭력적인 공권력기관이 거기에는 없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로마서가 철두철미하게 창세기의 문법을 가지고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되는 아브라함의 복의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 예수님의 이야기다 라는 이 큰 논리를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독창적인 분이 아니라 완주자 의식을 가진 분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적 천재가 아니라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구속사에 완성자라는 자의식이 강한 분이었지, 그분은 내가 독창적으로 하나님을 말한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여러분을 풀어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게 하시기 때문에 더이상 여러분들은 허무를 완성하는 노동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직장 출근은 허무를 완성하는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는 봉사의 일환입니다. 즉 예배의 일환입니다. 여러분들의 직장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봉사 현장이 됩니다. 허무의 완성이 아니라 면류관을 얻는 너무나 복된 일이 됩니다. 여러분 직장이 오늘도 면류관을 얻는 현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 죄와 사망의 법 안에서 속박 되었을 때에는 끝내 허무할 수밖에 없는 노동을 하다가 몸이 쓰러져가고, 생명이 닳아지는 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성령 받고 나서 허무를 극복하는 노동을 하게 하시옵시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직장 생활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일터로 나아가는 당신의 아들 딸, 가정에서 가정을 섬기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만복으로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제목: 이신칭의 교리 오해 논박
오늘 본문에서 인용부호가 좀 길게 있다고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인용부호 중에서 가장 처음 인용부호는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여기가 인용부호라고 봐야 됩니다. 그 인용부호의 첫 대답이 “범사에 많으니”가 이제 사도 바울의 대답입니다. 자 그런데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이것도 인용부호입니다. 그 다음에 또 5절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이거 인용부호입니다. 그 다음에 7절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이거 인용부호입니다. 그 다음에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이거 인용부호입니다. 요건 전부 다 사도 바울의 말이 아니라 사도 바울과 사도 바울의 적대자들이 주고받은 말들인데 갈라디아서 교우들이 주로 바울에게 쏟아낸 말들이라고 봐야 됩니다. 이게 갈라디아서 교인들입니다. 그러니까 로마서는 갈라디아서를 훨씬 더 심층적으로 풀고 있다 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로마서는요. 그래서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신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통속적으로 오해되는 하나의 이분법을 극복해야 되는데 구약과 신약이라는 겁니다. 그니까 창세기 1장부터 말라기까지는 구약이고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을 신약이라고 그렇게 하는데 이 기준은 아주 후대에 생긴 기준입니다. 왜냐하면은 성경과 서신들 이렇게 불렀습니다. AD 390년에 아타나시우스가 신약성경을 27권 성경이라고 부르기 전까지는 교부들은 이렇게 불렀어요. ‘성경과 바울서신’ ‘성경과 마태복음’ 이렇게 불렀고 신약성경이라는 말이 구약성경과 대등하게 불리는 것은 4세기 후반에 나오는 겁니다. 자, 그런데 구약은 모세언약이고 신약은 예수님 언약이다 요런 통속적인 구분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신구약은 하나의 언약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아브라함 언약. 아브라함 언약이 신구약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신구약을 한마디로 말하면 뭐냐 하면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하여 세계 만민에게 아담인류의 저주를 거둬내 주시겠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하여 세계 만민에게 덧씌워진 아담인류의 죄성과 저주와 죽음을 거둬내 주시고 제거해 주시겠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김주온 자매님, 갈라디아서 3장 8절부터 14절까지를 읽어 주십시오.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 나옵니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여기에 율법대로 행하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다는 말에서 이 저주라는 말은 창세기에 나오는 말이잖아요? 그렇죠?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최초에 복음을 들었던 사람인데 아브라함에게 최초의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무슨 내용이냐 하면은 아브라함에게 천하 만민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다는 복음,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아브라함에게 전해진 복음 내용이 뭡니까? 갈라디아서 3장 8절 보세요.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이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러면 무슨 복을 줍니까? 아담 인류가 인류에게 초래한 저주로부터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율법의 정죄를 받고 그 율법의 저주 아래 살 수밖에 없는 그 감금 상태로부터 아브라함이 받은 그 복음으로 풀어준다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바울이 예수님의 복음을 아브라함의 복음으로부터 시작했다는 말이 너무 중요한 거거든요. 그래서 창세기부터 읽어야 되는 거예요. 구약성경을 창세기부터 읽지 않으면 예수님부터 복음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은 감동을 못 받는 거예요. 로마서와 요한복음부터 읽는 게 아니고 요한복음과 로마서는 이야기 스토리에 제일 마지막에 읽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읽어야 되냐 하면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아담 인류의 저주를 끝내 이겨내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창세기에서 이미 읽어야 마태복음과 갈라디아서와 로마서가 이해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신약 구약 이 구분법을 전문학자들은 쓰지 않습니다. ‘성경과 신약’ 이렇게 말합니다. 왜냐하면은 신약 사도들은 자기가 쓴 편지가 구약성경과 권위가 같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바울은 자기 서신을 성경을 대신 할 수 있는 문서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왜요? 모든 중요한, 모든 약속이 전부 다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복음을 전했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 아브라함이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는 저주라는 말이 참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 주은 자매님 한 번 만 더 읽어주세요. 너무 중요합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 하수진 자매님 창세기 3장 17절부터 19절 좀 읽어주십시오. 너무 중요합니다. 창세기 3장 17절부터 19절.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로마서는 철저하게 창세기 문법에 지배를 당하고 있다고 그랬고요. 로마서는 갈라디아서를 한 번 더 심층 해설하고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전에 갈라디아서를 먼저 읽어야 됩니다. 갈라디아서를 자세히 푸는 것이 로마서인데 로마서는 철저하게 그 논리가 창세기 문법에 지배되고 있다. 창세기 3장 17절부터 19절 읽어 주십시오.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하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것이 바로 저주입니다. 그러니까 저주는 뭐냐하면은 노동이 영생을 가져오는 노동이 아니라 허무를 완성시키는 노동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너무 슬프죠. 허무를 완성시키는 노동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우리가 아침 일찍 출퇴근하면서, 전철 타면서, 고생하는 이 모든 것은 허무를 완성시키는 노동입니다. 이것을 직시해야 해요. 그래서 기독교는 우리의 인생이 허무를 완성시키는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이걸 직시해야 만이 복음을 이해하는 거예요. 허무를 완성시켜 가는 중노동이, 가시와 엉겅퀴를 경험한 사람이 이 율법의 저주 아래서 풀려나기를 원하는 거거든요. 여러분 이것은 이해가 되죠? 여러분들은 신자가 됐기 때문에 이 말을 이해할 겁니다. 그렇죠? 이걸 제가 이해를 한 거거든요. 제가 이걸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제가 구약을 안 것이 아니었어요.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구약을 안 게 아니라 저는 율법의 저주 아래서 저의 이 모든 성실한 노동과 공부가 제가 열심히 공부하면은 친구들 등수가 내려가는 거예요. 그러면 너무 슬픈 거예요. 제가 다니던 학교가 기가 막힌 학교인데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이런 소설에 나오는 학교입니다. 1등부터 600등까지 점수를 쭉 칠판에 적어 게시판에 한 달에 한번씩 적어 놓습니다. 그리고 1등을 첫 자리에 앉히고 2등을 두 번째 자리에 앉히고 등수별로 앉히는 거예요. 제가 다닌 학교가 그랬어요. 그래서 월말에 게시판에 점수가 이렇게 적은 걸 보고 아무리 친한 친구끼리 손을 잡고 가도 그 등수가 바뀌어 있으면 마음이 많이 슬픈 거예요. 그래서 저는 뭘 깨달았냐 하면은 내가 밤새 열심히 공부하면 내 친구가 등수가 내려간다는 것을 알고 너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실제로... 너무 허무한 거예요. 그러니까 저의 성실이 남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성실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내가 잔치를 벌여도 내가 많이 번 돈 때문에 누군가가 가난해져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열심히 성공하고 내가 행복한데 딴 사람도 덩달아 행복하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고 나의 열심과 성실과 나의 출세와 부귀영화가 다른 사람의 박탈과 다른 사람의 고난과 다른 사람의 노예적 삶을 강요하는 그런 저주받은 운명을 맞교환하는 거라면 이 노동은 저주 아래 있는 노동이고 이 노동은 그래서 제가 구약성경을 다 깨달은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에서 예수를 영접한 거예요. 그때 예수님이 제게 다가온 거거든요. 예수님이 죄와 저주에서 저를 해방한다는 말뜻을 그때 저는 20대 때 알게 된 거예요. 그걸! 그때 저는 구약성경을 낱낱이 몰랐어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처음 뵈었을 때 저주에서 우리를 풀어준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이것이 복음이에요. 이것이 복음인데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을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이 복음을 지금 전하고 다녔는데 유대인들은 뭐라고 말했어요? “그러면 이면적 유대인이 오히려 우리 유대인보다 낫다 하면은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자랑하고 다녔던 것, 그리고 4살 때부터 미드라쉬를 배우고, 6살 때부터 토라를 암송하고, 12살 때부터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했던 이 모든 유대인다움이 좋은 것은 하나도 없네?”라고 하니까 바울이 말합니다. “아니! 유대인다움의 가장 좋은 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맡은 민족이었기 때문에 좋았다. 하나님의 뜻을 더 자세히 아니까 좋았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유대인 대부분이 하나님을 못 믿고 하나님의 신실함에 실패한 자 아닙니까? 우리 전부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전부를 선택하여 세계 만민에게 복의 근원 삼아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한 것 아닙니까? 이렇게 우리 유대인들이 대다수가 못 믿었기 때문에요?” 하니까 “아니다! 일부 유대인들이 더러 완악하게 돼서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온 아브라함의 복의 완성적인 이 복음을 영접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신실함이 폐하여진 것은 아니다. 유대인 일부가 완악하여 믿음에서 떨어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여 세계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이 복음의 사명은 이스라엘 민족이 성취를 잘 한 거다. 이스라엘 민족은 실패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민족의 사명은 예수님 때문에 완전히 성공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 일부가 이 믿음의 반열에서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아브라함 후손을 통해서 천하 만민을 끝내 죄와 죽음의 법에서 풀어준다는 이 약속은 하나님이 지킨 것이다.” “자 그러면은 하나님의 신실함이 우리 유대인의 불신실함 때문에 더 도드라지게 드러났고, 우리 유대인들의 거짓됨 때문에 하나님의 참됨이 더 도드라지게 드러났고, 오히려 우리 유대인들이 악행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찬란하게 빛나게 만들었다면은 우리의 악행, 우리의 거짓된 삶, 우리의 이 모든 불의한 것도 하나님께는 뭔가 공헌한 것이 있지 않느냐? 그런데 우리가 악역을 맡았다고 우리를 심판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렇게 하니까 “이런 논리는 너희들이 나에게 덧씌우 악의적인 주장이다. 너희들이 내가 전하는 복음을 축소화시켜서 해석하고 희화화 하고 캐리커쳐링 하고 조롱하는데 너희들 모두는 악의적으로 내 복음을 개작하고 풍자하여서 패러디해서 내가 이따위 도덕폐기론적인 입장 즉 하나님 율법대로 사는 것은 더이상 의미가 없네, 오히려 불의한 자가 하나님께 더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네? 라고 패러디하는 것은 그건 정말 악한 것이다.” 하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비방하고 패러디 하는 이런 논리를 단죄하는 거죠. 여러분 그래서 “신약은 예수님에 관한 복음이고, 구약은 모세에 관한 복음이다”라는 이분법은 옳지 않습니다. 자, 구약이라는 말은 성경에 히브리서 3장하고 히브리서 6장 이 두 군데만 구약이란 말이 쓰였는데 그때의 구약이라는 말은 아브라함 언약을 가르키는 말이 아니라 모세의 성전에 관한 율법, 제사법을 가르킬 때만 구약이란 말을 썼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음을 받겠다는 그 갈라디아서 3장 8절의 복음은 신구약을 아치모양으로 딱 붙들고 있는, 신구약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복음입니다. 마태복음 8장 11절을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예, 우리가 천국 가면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최초로 자리를 잡은 그 식탁에 앉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철두철미하게 천국은 인종적으로는 유대인들이 천국의 핵심 공무원들이라고 보면은 됩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유대인들의 핵심보직 섬김이 지배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 다음에 유대인 아니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면은 섬김과 봉사 사역자로 쓰임 받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아브라함의 식탁에 가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 이것을 늘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천국은 불평등은 없지만 위계질서는 있습니다. 천국은 불평등은 없지만 위계질서는 있다는 말은 뭡니까? 높낮이가 있습니다. 열 고을 다스리는 사람이 있고, 다섯 고을 다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그냥 모든 평등한 사람들의 평등한 축제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최초로 선택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중심으로 펼쳐진 아주 자발적인 식탁 공동체다, 폭력적인 공권력기관이 거기에는 없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로마서가 철두철미하게 창세기의 문법을 가지고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되는 아브라함의 복의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 예수님의 이야기다 라는 이 큰 논리를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독창적인 분이 아니라 완주자 의식을 가진 분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적 천재가 아니라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구속사에 완성자라는 자의식이 강한 분이었지, 그분은 내가 독창적으로 하나님을 말한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여러분을 풀어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게 하시기 때문에 더이상 여러분들은 허무를 완성하는 노동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직장 출근은 허무를 완성하는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는 봉사의 일환입니다. 즉 예배의 일환입니다. 여러분들의 직장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봉사 현장이 됩니다. 허무의 완성이 아니라 면류관을 얻는 너무나 복된 일이 됩니다. 여러분 직장이 오늘도 면류관을 얻는 현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 죄와 사망의 법 안에서 속박 되었을 때에는 끝내 허무할 수밖에 없는 노동을 하다가 몸이 쓰러져가고, 생명이 닳아지는 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성령 받고 나서 허무를 극복하는 노동을 하게 하시옵시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직장 생활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일터로 나아가는 당신의 아들 딸, 가정에서 가정을 섬기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만복으로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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