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설교자료 18,185편 ◑/설교및자료 16,731편

본문: 로마서 2:12-16 /제목: 마음에 새겨진 자연법, 양심의 등불

by 【고동엽】 2022. 1. 15.

본문: 로마서 2:12-16

제목: 마음에 새겨진 자연법, 양심의 등불

 

오늘 본문에 심판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오는 이유는 사도 바울의 머릿속에는 지금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심판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고 본거죠. 그러니까 이것은 그 당시 시사적인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그 당시가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에 하나님의 진노의 먹구름이 끼어있다고 사도 바울은 본 거죠.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독특한 역사인식은 그 당대가 예수님 당대가, 사도 바울 당대가 심판이 임한다고 믿었다는 거예요. 근데 그 심판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전무후무한 심판이 될 거라 본거죠. 그 전무후무한 심판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서 70년 동안 유배 생활하는 정도와는 비교가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4장, 마가복음 13장에 너무너무 무시무시한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아벨에서부터 바라갸의 아들 스라갸까지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을, 죄 없는 하나님의 종들을 살해한 불순종한 그 죗값을 이 당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당대에 일괄정산하겠다는 거예요. 너무 무서운 말이죠.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면은 유대민족이 민족으로써의 정체성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재난이 몰려오고 있다고 본 것이죠. 이것은 참 독특한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인식인데 예수님은 선한 목자를 따르지 않는 양들은 삯꾼 목자와 도적과 이리 떼의 밥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에 보면은 참 목가적으로 보이는 선한 목자 담화가 나오지요.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앞서 인도하고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다.”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그 선한 목자 담론이 무서운 심판의 먹구름, 도적 떼와 삯꾼 목자와 이리 떼와 강도가 와서 양의 우리를 침범하는 그날을 바라본 거죠. 그리고 사도 바울이 이 로마서를 쓸 때가 57년에서 58년이거든요. 정확하게 12년 후에 예루살렘이 초토화가 됩니다. 예루살렘이 완전히 초토화됩니다. 그리고 65년 후에, AD 135년에 예루살렘은 두 번째 초토화됩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예루살렘을 완전히 초토화시켜 버립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전무후무한 규모와 전무후무한 강도로 심판이 임할 것을 안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언약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하여, 로마 제국과 군사적 항쟁을 벌여서 전멸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로마제국과의 군사적 항쟁으로 이스라엘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보다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먼저 지적하고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언약 공동체로서 재창조되고 재활 복구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본 거죠. 만일에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감지하는 영적감촉력이 사도 바울과 예수님처럼 이렇게 출중했다면 우리도, 아마 모든 일을 제쳐 놓고 복음을 전했겠죠. 제일 중요한 일이 그거니까요.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업하고 재산을 늘리고 이런 모든 사회적 오락 생활과 어떤 세상일에 몰두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진노의 사인을 읽어내지 못하는 이런 영적 무지몽매, 이 영적 무지몽매 상태는 다 쓰러져 가버리거든요. 전부 다 심판 앞에 속수무책이에요. 그니까 사도 바울과 예수님은 역사의 망루의 끝에 서서 이스라엘 역사의 하늘에 낀 먹구름을 본 것이고 재난의 먹구름, 심판의 먹구름을 보았기 때문에 심판하는 날이 온다고 믿었다는 거죠. 그래서 사도 바울의 서신과 예수님의 말씀에는 심판이라고 하는 하나의 뚜렷한 사건 임박한 사건을 염두해두고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을 윤리적으로 착하게 만들려고 설득하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때가 재산을 모으고 이 썩어 없어질 돈을 모으고 이런 쾌락과 욕망에 집착해서 흥청망청 살 때가 아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거룩한 심판이 육박하고 있다, 지금은 하나님을 두려하는 마음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대면할 날을 기다려야 되는 시간이다 라는 영적감청력을 갖는 것입니다. 영적인 감지력이 있다면 우리가 지금 이 세속의 길에 깊이 빠져서 하는 모든 오락들, 모든 일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돼 버리죠. 사도 바울은 그 심판관을, 예수님은 바로 그 심판을 생각하면서 복음을 전한 거죠.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사람을 교육시켜서 착하게 만들려고 했다기보다는 임박한 심판의 날을 세팅해 놓고 이 임박한 심판의 날에 맞게 행동하라고 즉각적인 회개를 요청한 거죠.

 

도덕적 슬럼지대에 사는 사람들의 심판은 이미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와 이런 세상에 사법체계가 그들을 심판을 합니다. 1장 28절부터 32절에 나오는 이런 모든 죄들은 국가의 사법행정기관들이 다 심판하죠. 인간의 문명사회가 심판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 문명사회로 볼 때 최고의 수준을 이룬 도덕적인 양심소유자들은 심판을 받지 않는가? 아닙니다. 도덕적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그 도덕과 양심이 시퍼렇게 살아있기 때문에 저 도덕적 개차반, 도덕적 슬럼지대에 빠진 사람보다 더 정죄를 많이 받습니다. 왜? 오늘 본문 보세요. 모세율법처럼 율법의 체계를 갖지 않은 사람이 본성적으로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본성적으로 율법을 행한 사람의 이 행한 판례, 행동, 관습, 이것이 율법이 됩니다. 이 말은 뭐냐면은 모세의 율법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심판을 받는데 그들이 본성에서 우러나서 하는 행동들을 차곡차곡 모으면은 각 나라와 각 민족의 미풍양속이 되고, 각 나라와 각 민족의 불문법과 같은 관습이 되는데 이 관습이 바로 율법이 된다. 이렇게 본성으로 선한 행동을 한 이런 사람들, 본성으로 의로운 행동을 한 사람들 그 사람의 행동을 파편적으로 편린적으로 하나하나 모으면은, 그 율법 없이 행한 사람들의 행동을 하나하나 모아 보면은 그것이 이렇게 본성으로 선한 행동을 한 사람들의 삶들, 그 자체가 하나의 기준이 된다, 율법이 된다 이런 뜻입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디언 사회에서도 불문 율법이 있거든요. 인디언들은 정착하며 살지 않았기 때문에 인디언들이 볼 때 제일 어리석은 사람들은 정착해서 살면서 땅을 많이 가지려는 사람들입니다. 인디언들이 보기에 제일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어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이동할 때 살림살이를 가볍게 하는, 아주 적게 소유한 사람들, 그러면서 장딴지나 다리의 근육이 튼튼하여 맹수랑 싸울 때 그 다음 적들로부터 도망을 칠 때 빨리 달려서 생존기술을 높이는 사람들 그 사람이 제일 지혜로운 거예요. 그 사람 중에서 추장이 나오거든요. 인디언 사회에서는 맹수하고 적들에게 쫓길 때 여러 사람을 많이 구해낸 119 소방대원처럼 무섭게 사람들을 구해내고 착한 일을 많이 하면은 그 사람이 추장이 되는 거예요. 인디언들은 살림살이를 가볍게 하고 빨리 달리고, 용감무쌍하고 남들을 위해서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인디언들 부족 안에 있는 관습법이 되고 그게 율법이 되는 거예요. 농경사회에서도, 유목사회에서도 전부 다 이런 본성으로 율법을 행한 사람들이 관습법을 딱 만듭니다. 이렇게 본성으로 의로운 일을 한 이 사람들이야말로 관습이 되고 율법이 됐다. 그 다음 두 번째로 그런 사람들 이거 복수입니다. 이방인들 복수입니다. 이 번역이 복수가 되어야 합니다. 2장 14절에 보면은요. 율법 없는 이방인들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들을 행할 때에는……. 전부 다 복수입니다. 이때 이 사람들은 열방족속들은, 열방족속들은 율법입니다. 그 다음에 문제는 그러면 열방족속들까지는 됐다 치고 그러면 열방족속들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본성의 일을 한단 말인가? 어떻게 본성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행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본성 안에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란 말입니다.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 2장 15절 한 번만 더 읽어주십시오.

 

15절 이런 일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야~ 마음에 새긴 율법이 중요합니다. 그니까 바울과 예수님과 모든 유대인 랍비들은 하나님이 모세의 율법 전에, 모세의 율법 전에 창조질서 안에 율법을 계시하셨다고 믿고요, 역사 속에 상당한 보응과 심판을 축척시켜서 역사 속에 율법을 계시했다고 믿고요, 그다음에 인간의 마음의 본성에, 인간의 마음에 율법을 새겼다고 봅니다. 앞에서 이방인들이 본성으로 의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이방인들이 마음에 새겨진 모세의 율법보다 더 오래된 이 자연법으로 선한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근데 문제는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을 만큼 그렇게 완전한 선을 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할 정도의 선을 행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도 모세오경보다 더 중요한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도들도, 이슬람교도도 어떤 법을 가지고 있습니까? 모세오경보다 더 오래된 법 마음의 새긴 율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새긴 율법을 가진 사람들, 그 사람들이 마음에 새긴 율법대로 선을 행하면 의롭다 함을 인정받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교회가 잘 못 가르치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절대로 절대로 스스로 선을 행하여 구원을 받을 수 없어, 그 말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분명히 2장 13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함을 얻으리라.”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 가능하며 율법을 행하여 의로워지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확률적으로는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행하여 의로워진 사람이 있죠? 욥이 있습니다. 욥이 있다는 말은 뭐죠? 욥이 있다는 말은 율법대로 행하여 의로움을 받은 욥이 있다는 말은 이 세상 누군가도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율법을 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너무 강조하고 “율법을 행하는 것은 옳지 않아. 예수를 믿어야 돼!” 이렇게 예수를 믿는 믿음과 율법을 행하는 걸 반대로 구분하는 것이 너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고 내일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자,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는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받는 게 아니다 라는 이분법이 잘못되었다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믿어야 된다고 말할 때 ‘믿는다’란 말은 어떤 주가가 오를 걸 믿는다, 내일 비가 올 것을 믿는다 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직스런 예수님께 믿음직스러움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율법을 행하여 구원받는다는 말은 뭐죠? 율법을 신실하게 지키는 믿음직스러움으로 구원을 받는다니까 둘 다 믿음직스러움이라고 풀면 똑같은 말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신실하게 믿음직스런 관계를 유지하면은 구원을 받는다 라는 말입니다. 그 말과 모세오경의 율법을 믿음직스럽게 지키면 구원 받는다라는 말과 양심에 새겨진 율법을 믿음직스럽게 지키면 의로워진다는 말이 똑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교회에 나온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더 좋은 조건을 받았기 때문에, 더 좋은 조건을 받은 상태에서 판단을 받기 때문에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보다 좀 더 엄격한 판단 기준을 받는다 라는 이런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약간 긴장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제가 보건데 우리 일반 교우들에게 하는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라는 설교를 목사님들한테 10배 더 많이 해야 됩니다. 일반 교우들을 가만히 보면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요. 진짜로……. 교우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요. 목사님도 두려워하고……. 근데 목사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진짜 아주 비참합니다. 목사님들은……. 목사님이 만일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 내적 경건이 스스로에게 없다면 목사님은 도덕적 슬럼지대에 너무 빠지기 쉬운 무시무시한 존재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목사님을 삼가하고 두려워하죠? 근데 목사님들, 성직자들, 사제들은 성령의 내적인 증거를 받지 못하면은 그는 아무도 두려운 자가 없이 내버려둔 자가 되고 망나니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는 모세오경보다 더 오래된, 모세오경보다 더 오래된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율법대로 살면은 의로운 자가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욥이라는 한 샘플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모세율법을 알기도 전에 엄청나게 많은, 모세율법을 알기도 전에 엄청나게 많은 선한 일을 해서 차곡차곡 쌓아 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각자 부족과 자기 나라의 문명과 역사 안에 차곡차곡 쌓아놨던 모든 관습법을 보면은 모세오경과 90%가 같습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우리 하나님은 인간을 율법을 새긴 채 창조했습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됐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교제함직스러운 존재로 우리를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모세오경을 알기도 전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계명을 받은 겁니다. 그다음에 가인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너가 어찌 선을 행하면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너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낯을 들지 못한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 보세요. 마음에 새긴 율법이 없다면 어떻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 말을 하거나 카인에게 선을 행하지 않았다고 하나님이 추궁할 수 있단 말입니까? 로마서는 여러분이 아는 것보다 훨씬 깊고 깊은 복음입니다. 여러분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만 완전히 이해하면은 여러분들은 성경 66권을 다 이해한 것입니다. 로마서 9장부터 16장을 이해하면은 여러분은 사명자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1장부터 8장까지 공부해서 로마서를 완전히 체득하면은 성령충만한 신자가 될 수밖에 없고 9장부터 16장을 이해하면은 바울처럼 땅 끝까지 달려가려는 복음의 사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로마서의 복음을 깨달아서 성령충만하며 땅 끝까지 달려가는 복음의 사도로 능력 있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가향교우들에게 로마서 말씀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시고 성경의 내적 논리를 터득할 수 있도록 영적 지각을 허락하여 열어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