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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4:9-15 /제목: 율법과 믿음의 관계

by 【고동엽】 2022. 1. 15.

본문: 로마서 4:9-15

제목: 율법과 믿음의 관계

 

로마서, 오늘 두 군데 찾아봅니다. 로마서 3장 22절하고요, 갈라디아서 2장 16절, 한국교회가 완전히 오역을 하고 있는 번역입니다. 자, 제가 오늘 말씀드립니다. 로마서 4장 9절부터 15절에 나오는 이 모든 ‘믿음’은 번역할 때 ‘믿음직스러움’으로 번역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4장 9절부터 15절을 읽을 때 ‘믿음직스러운 삶’ 또는 ‘믿음직스러움’을 지금 ‘믿음’이라고 번역했는데 지금 우리나라 한국 동사에 ‘믿는다’는 동사는 ‘로또를 믿는다. 내일 비가 올 것을 믿는다. 네가 대리출석해 줄 것을 믿는다’ 이게 전부 다 믿는다는 동사거든요. 그런데 지금 성경 로마서 4장 9절부터 15절에 나오는 이 ‘믿음’은 ‘믿음직스러움’ 입니다. 여러분 로마서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갈라디아서 1장부터 5장인데 그 중에서 2장, 3장이 제일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3장에는 바울이 이방신자들에게도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출신 기독교인들과 논쟁을 벌이는 맥락입니다. 바리새인-출신 기독교인들은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되며 유대인들이 지키는 613가지의 율법 조항들을 전부 다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613가지 언약을 패키지로 다 지키겠습니다’라는 뜻이 ‘할례’를 받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에게 속한 모든 성전과 관련된 제사, 또는 제사와 관련된 모든 의식법들 이런 걸 다 지켜야 된다고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니까 우상숭배를 하지 말 것, 피채 음식을 먹지 말 것, 음행과 간음 등 영적 문란에서 벗어날 것 이런 몇 가지 기본 조항, 즉 우상숭배를 할 때 벌어질 수 있는 이런 기본적인 핵심조항만 지키고 나머지는 마음에 할례를 받은 이방인들의 양심에 맡겨야 한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우상의 제단에 받쳤던 음식이 시장의 일반음식점에서 팔릴 때 그런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은 율법조항이 아니라 양심의 조항이다, 그러니까 신자가 누리는 자유의 일부라고 본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바리새인-출신 신자들은 ‘이방인 신자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에 대해서 논쟁이 붙었는데 바리새인 출신 신자들은 이방인 신자들은 먼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이후에 영생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건 받지 않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야만이 영생에 들어갈 수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은 영원히 할례를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창세기 17장을 근거해서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논리는 이겁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된다는 그 원리는 맞다. 그 원리를 아무도 부정해서는 안 된다. 다만 순서가 다르다. 아브라함이 ‘의롭다’라는 선언을 받은 것은 율법적인 행위를 완전무결하게 지켜서 받은 것이 아니다. ‘의롭다’는 선언은 창세기 15장에서 일어난 일이고, 아브라함이 ‘의롭다’는 선언을 받은 후에 16장에서 실수를 한다. ‘의롭다’는 선언을 받은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는, 즉 하나님의 약속을 좀 믿는 데서 동요를 경험하고 실수한 것처럼 보이는 사건이 있다. 이 말은 엎치락뒤치락이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으라는 요구는 17장에서 이뤄진 일이다. 그러니까 ‘의롭다’는 선언이 먼저 일어났느냐? 할례가 먼저 일어났느냐? ‘의롭다’는 선언을 받고나서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된다. 그래서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율법대로 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극단적인 그런 순종을 보여준다. 그게 바로 ‘네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그런 계명도 아브라함은 지키는 그런 수준까지 갔다. 이거 봐라. ‘의롭다’는 선언 받고 나서 점차적으로 시간이 걸려서 의로운 자가 되어간다. 따라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부터 받으라고 요구하면서 그들의 양심에 재갈을 물리는 식으로 이방인 신자들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먼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고 나서, 바울은 ‘성령 받는 것’을 ‘마음의 할례’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은 후에, ‘의롭다’는 선언을 먼저 들은 후에 칭의, ‘의롭다’는 선언을 들은 후에 그리고 내용을 채워가야 한다. 어떻게? 의로운 삶으로 채워가야 한다.”

 

그러니까 바울은 순서를 말합니다. 율법폐기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 신자들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할례라는 그 초기의 입문과정을 너무 어렵게 하면 안 된다, 예수를 주라 고백하고 성령을 받은 신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덧입은, 파생적인 의로우심을 덧입은 자, 의로운 자 즉 신실한 자가 되었다, 김회권 같이 유다 지파도 아니고 베냐민 지파도 아닌 저 단군 자손의 아들이 예수 믿고, 예수님의 신실한 순종의 덕분에 성령을 받고 그 성령을 받고 나서 김회권은 조금씩, 조금씩 의로운 자가 되어가고 신실한 자가 되어가서 제일 마지막에 의로운, 즉 율법의 요구를 행한 자로 인정받는 자가 되어간다, 이것이 바울의 논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가 아니라 할례를 먼저 받을 것을 요구함으로서 예수님 믿는 자의 입문 과정을 어렵게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수원 형제님 갈라디아서 2장 16절 읽어주시고요, 김조은 자매님 로마서 3장 22절 좀 읽어주십시오. 자, 이 두 구절은 한국 사람이 중대하게 오해하고 있는 번역입니다. 자, 먼저 갈라디아서 2장 16절 읽어주십시오.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앎으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네, 이 구절을 잘못 읽으면 로마서 2장 13절과 중대한 충돌이 옵니다. 자, 로마서 2장 13절, 제가 읽습니다.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이거 보십시오.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그 원리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사야 54장 1절입니다. 이사야 45장 25절입니다. 신명기 6장 25절입니다. 에스겔서 20장 11절, 13절, 이사야 54장 17절 전부 다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게 가능하며, 율법을 지켜서 의로움을 받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로마서 2장 13절은 율법을 지켜 의로움을 성취하라는 예언자들의 요구를 집약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나는 완성하러 왔다!” 예수님이 한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관점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지금 이 율법을 지켜서 행할 수 있는 능력, 없다. 이거는! 우선적으로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켜 행할 능력이 없고 또 유대인들도 이론적으로는 율법을 지켜 행하여 의롭다함을 받을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율법을 지켜 ‘의롭다’라는 말을 들을 사람이 별로 없다” 이게 바울의 논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써 라고 할 때 이 율법의 행위는 권연경 교수가 잘 밝히고 김세윤 박사 등 주요한 신약학자들이 밝혔는데 이 ‘율법의 행위’라는 말은 뭐냐면은 ‘할례’를 가리킵니다. ‘할례’ 그러니까 의롭게 되는 것은 할례받음으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대한 해석은 율법, 의롭게 되는 것은 할례를 받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아~이거 번역이 잘못 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이 동사가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없는 말입니다. 이거 정확하게 김조은 자매님 한 번 읽어주십시오. 3장 22절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여기서 믿는 믿음을 신자의 믿는, 신자가 믿는 동사를 하는 주체인 걸로 말합니다. 3장 22절과 2장 16절, 둘 다 틀렸습니다! 여기서 둘 다 그런 말 아닙니다. ‘신자가 믿는다’는 동사 개념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입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서 2장 16절과 로마서 3장 22절 둘 다 우리가 믿는다는, 신자가 암묵적인 주어로 해석될 수 있는, 이런 예수를 믿는 이런 동사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 원전 찾아보세요. 영어 성경 찾아보세요. 없습니다. 우리나라 성경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할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음 인줄 아나니, 즉 우리가 신실함을 덧입는 이유는 뭐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를 100% 수행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적으로 의로운 자가 됐죠? 맞죠?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를 다 행했다고 믿고 우리가 율법을 준행할 무능력자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이 내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고, 우리를 율법의 요구에서, 마치 우리가 율법의 요구를 지킨 자처럼 우리를 덧입혀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순간 신실하지 못한 사람에게 신실한 사람이 덧입혀집니다. 덧입혀집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된 줄을 믿노니,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 즉 할례를 받음으로써가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써, 이때도 예수 믿음으로 동사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으매. 아하, 좋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예를 들었죠. 어떤 사람이 신실한 행동을 저 앞에서 누적적으로 많이 해서 제가 그 사람을 믿게 됐습니다. 그러면 제 믿음은 공로입니까? 그 신실한 사람이 제게 준 선물입니까? 선물이잖아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에게 밤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면서 그 많은 별들을 하나하나 세어보라고 했죠? 아브라함이 별들을 세기 시작했습니다. 하나, 둘, 셋, 넷…….아브라함이 별들을 세다가 그 무량수만큼의 별을 세다가 그 무량수만큼의 크기의 하나님의 우주적 신실함에 직면하면서 이렇게 큰 별을 하나하나 불러내시는 하나님, 이렇게 큰 별을 통치하시고 천체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그 압도적이고 형용할 수 없는 크기, 그 형용할 수 없는 신실성, 형용할 수 없는 그 위대한 능력을 믿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아브라함이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상상력을 동원해서 믿음직스럽지 못한 하나님을 믿어준 겁니까? 하나님의 그 신실하신 능력과 그 아브라함에게 대했던 그 오랫동안 선대했던 그런 낱낱의 세월들을 다 한꺼번에 계상해 보고 믿은 겁니까? 계상입니다. 계상, 계산 아닙니다. 계상해 보고 하나님은 믿을만한 분이다 믿자 라고 결단했다면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브라함이 진공상태에서 일으킨 자기 공로입니까? 하나님의 압도적인 신실한 인격과 정면으로 조우하고 하나님의 거대한 신실함과 부딪혀서 생긴 파생적인 믿음입니까? 아브라함은 파생적 믿음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부딪혀서 자기도 덩달아 신실한 사람이 되어갔죠? 그래서 아브라함이 신실한 자가 되어가니 그를 의롭다고 하나님이 여겼습니다.

 

마무리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압도적 신실하심과 다각적으로 접촉한 끝에, 하나님의 압도적 신실함을 이리저리 다 경험해 본 후에 하늘의 별들을 세어보라고 요구하는 하나님 앞에 별들을 세어보다가 지나간 아브라함의 세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던 그 세월들을 낱낱이 계상해 보다가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마침내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대상이 되는데 이때 하나님의 압도적 신실하신 인격과 성품이 아브라함을 감화감동 시켜서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하나님을 믿음직스럽게 여길 만큼 상상력과 담력을 줬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믿은 사람인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아브라함이 율법의 요구를 다 행했습니까? 하나님의 인격적인 신실함, 그 큰 실체를 먼저 맛보았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격적 성품을 단번에 맛보았잖아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를 주라 고백할 때 우리가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을 받는 순간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압도적 신실함, 이 세계를 사랑하셔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그 엄청난 압도적인 크기에, 우주적인 크기를 가진 그 신실함을 딱 만나면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믿는 일을 44년 동안 저처럼 계속 하나님 믿는 일을 계속합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계속 믿습니다. 그 파생적 신실함이 저를 붙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의 믿음은 공로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압도적인 파생 그 신실함이 저를 쥐고 흔들고 지배하고 장악합니다. 그래서 저는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 삶이 처음에는 엎치락뒤치락하고 엉망진창으로 됐을지라도 하나님의 신실함이 저를 점점 감화감동 시켜서 도박도 끊고, 노름도 끊고, 모든 악행을 서서히 끊어가면서 마침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갑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율법을 행하지 않아도 된다’가 아니라 ‘율법을 행하라는 요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덧입고 신자 되려고 하는 이방인들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일으킨 그 사역을 믿고 의존하려고 하는 그 이방인 신자의 그 영적 갈망을 깨뜨리지 말아라’고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논리가 이해가 됩니까? 여러분. 제가 오늘 설교 요약본 올려놨습니다. 다시 한번, 만일에 어렵다면 그것을 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로마서는 갈라디아서를 읽은 사람에게 쓰여진 편지입니다. 갈라디아서를 아는 사람, 갈라디아서 2장, 3장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한글 성경은 마치 ‘남은 안 믿는데 내가 믿었기 때문에 내가 의롭게 됐다’고 믿게 만드는 아주 잘못된 번역을 했습니다. 자, 한국 사람들이 가지는 이 믿음의 이해는 정확하게 유대인 신자들이 가졌던 ‘할례’와 똑같습니다. ‘할례 받으면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됐어! 예수를 주라고 믿으면 나는 영생의 상속자가 됐어!’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신실함으로, 그 예수님의 신실함을 닮아가야 한다는 내적 압박을 전혀 안 받는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모든 사람이 다 마음만 먹으면 믿을 수 있는 게 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원천적으로 받아드릴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상숭배자는 기독교 신앙을 갖고 싶어도 못 갖습니다. 그런데 맘몬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으러 가는 것은 그것은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과 같습니다. 이 마술사 시몬은 악행을 마음에 품으면서도 성령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습니다. 돈에 대한 탐욕을 이기지 못하고, 돈에 대한 탐욕을 가득 숨긴 채 예수의 성령을 또한 받으려고 했으니까요. 여러분 모두가 로마서의 내적 원리를 깨닫고 성령으로 날마다 감동되어 끝내 율법의 요구를 행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게 바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사람의 선언입니다. 자,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의롭다하시는 선언을 받고 나면 그 선언은 이례적으로 완료된 선언입니까? 지속적으로 계속 되어야 되는 선언입니까? ‘의롭다’는 선언은 매일 지속적으로, 예수님이 저를 의롭다고 한 그 선언이 유지 되도록 저는 응답을 해야 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너무너무 박진감이 넘치고 스릴이 넘칩니다. 저는 신앙생활이 너무 재미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너무 역동적이고 저를 설레게 만듭니다. 오늘 하루도 설렙니다. 내일도 설렙니다. 하나님과 같이 걸어가는 이 삶은 설레고 벅차고 하나님과 걸어가는 이 스토리는 너무 놀랍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해서 신앙은 성장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로마서의 복음, 갈라디아서의 복음을 정통으로 깨닫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가향교회 새벽 성도들부터 로마서의 깊은 진리를 깨달아서 성령으로 감화감동 되어 끝내 율법의 요구를 행하는 영생 상속자가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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