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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4:16-24 /제목: 아브라함의 믿음직스러움 = 아브라함의 의

by 【고동엽】 2022. 1. 15.

본문: 로마서 4:16-24

제목: 아브라함의 믿음직스러움 = 아브라함의 의

 

로마서 4장 16절부터 24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서 의롭게 됐다는 뜻을 정확하게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야고보서 2장을 보세요.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또는 갈라디아서 3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할례를 받지 않고도 이방인 신자들이 의롭게 될 수 있다는 논리를 뽑아냅니다. 갈라디아서 3장과 로마서 4장에서요. 그런데 야고보서가 이 로마서의 논리를 이미 알고 있다는 걸 전제하면서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모리아 산장에서 이삭을 바쳤기 때문에 끝내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하면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말을 율법 지키지 않고도 의롭게 되었다는 논리로 말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쐐기를 박습니다. 자, 그러니까 세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 야고보, 그 다음에 바울과 야고보 사이에 있는 경직된 할례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자 경직된 할례주의자들은 제가 어저께 9월 7일 날 새벽묵상 요약에서 자세히 써놨습니다. 한 번 보세요. 경직된 할례주의자들이란 이런 겁니다. “이방 신자들은 도덕적 슬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율법을 다 지키도록 교육하는 것이 더 낫다. 이방 신자들에게 ‘성령 받았으니까 자유롭게 살아라’고 하는 것 보다는 할례를 받게 하고 유대인처럼 먼저 할례 받고 613개의 율법조항 아래 훈련받게 하는 거 이것이 옳다” 라고 가르쳤습니다. 그게 할례주의적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들은 악인이 아닙니다. 바울과 논리적으로 대적한 사람들이지 악인이 아니에요. 절대로. 잘못된 사람이 아니라 바울과 논리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바울의 논리적 대적자들은 에스겔서 20장 11절, 13절, 이사야 54장 17절, 신명기 6장 25절, 레위기 18장 5절 등을 들면서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됐다는 이 원리를 왜 바울은 깨뜨리려 하는가, 바울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계명을 파기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뭐라고 말하냐면 “할례를 받은 것은 의롭다하심을 받은 후에, 즉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난 후에 할례를 받았다. 그 다음, 아브라함이 율법조항을 다 지켜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의롭다하심을 먼저 받은 후에 율법의 지켜서 의로운 자가 되었다” 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과 할례주의자들의 이 논쟁은 정말 각각 논리적 정당성이 있고 상황적 맥락적인 타당성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바울을 오해하는 자들을 교정하기 위해서 야고보서 2장에서 믿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이런 일탈적 가능성 이런 사람들을 교정하기 위하여 바울이 믿어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 맞는데, 그런데 그 바울이 ‘믿었다’는 그 말뜻은 ‘신실했다’는 뜻이지 ‘뭔가를 확 믿어버렸다’는 뜻이 아니다, 뭔가를 확 믿어버리기만 하면은 뭔가 공로를 덧입는 것처럼 느끼는 이런, 일부 이방 신자들의 이런 ‘믿음주의’, ‘믿음지상주의’를 경계하는 것이 야고보서입니다. 저는 야고보서에 가깝다고 보면 됩니다. 제 입장은 그러니까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진짜 본심은 야고보서랑 가까운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율법적으로 엉망진창으로 살아도 된다”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이방 신자들이 하나님 자녀가 되는 입문과정, 그 입문과정, 그 하나님 자녀가 되는 그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지금 하는 것이지 하나님 자녀들이 하나님을 믿고 나서 어떻게 성장할까에 대한 이야기는 바리새인 할례주의자보다 훨씬 더 관심을 많이 쏟았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절대로 야고보랑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과 야고보가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독일 튀빙겐 신학자이었던 F.C.프리드리히 바우어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바울은 믿음지상주의고 마태복음과 야고보와 예수님은 율법을 여전히 행하도록 강조했다”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잘 보면 바울과 야고보는 충돌하지 않습니다. 자, 오늘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16절입니다.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때 이 믿음이란 뭐죠? 신실하심으로 되다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신실함(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그래서 여러분 바울이 쓰는 이 믿음이라는 말을 신실함, 즉 믿음직스러움이란 말로 바꿔 쓰면 똑같이 돼요. 야고보랑.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 할 때 그 동사를 보지 마세요. 한 번 믿는 동사로 보지 마세요. 믿음직스러운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한 분사 형태의 믿음으로 보세요. 아브라함은 믿고, 믿고, 믿는 일을 지속적으로 했는데 믿는 일을 지속적으로 할 때 그런 것을 표현하는 문법이 분사형입니다. 분사. 한 번 딱 믿어버리는 일회적인 믿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단 말은 믿기를 다짐하고 계속 믿었고 믿고 믿었다는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믿고 믿는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을 우리는 믿음직스런 사람이라고 그렇게 말하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직스럽게 대했다. 하나님을 믿음직스럽게 대했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믿음직스럽게 행동했다. 그러니까 여러분 “그러면 어 잠깐만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는데 왜 하갈을 낳았죠? 그건 믿지 않는 것 아닙니까?”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만일에 네 몸에서 날 자손이란 이 약속을 안 믿었다면, 이 약속을 사라에게 설득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가 자기의 100세 된 몸에서도 자녀가 난다는 그 말을 안 믿었다면 하갈과 동침하여 자녀를 낳지 않았겠죠? 아브라함이 믿은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중대한 생략을 하십니다. ‘네 몸에서 날 자’까지는 말하셨지만, 네 몸과 네 아내 정실부인 사라의 몸에서 라는 말은 하나님 안 해 주십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날 자라는 말뜻은 네 몸과 네 아내의 몸이란 말로 아마도 창조적으로 해석하기를 하나님은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기대하지 않고 특히 사라 자신이 아마 거부했던 것 같습니다. 사라가 아마 잠자리를 거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라 자신이 웃는 걸 볼 때 사라가 18장에 보면은 막 끽끽 웃거든요. 네 몸에서 자녀가 난다고 하니까 이 할머니를 놀려도 보통이 아니라면서 막 하나님과 천사와 실랑이를 벌이는데, 왜 사라가 아브라함과의 잠자리를 거부했다고 짐작할 수 있냐면 사라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자녀를 준다는 약속을 철썩 같이 믿고 오니까 사라가 말합니다. “그러면 당신의 파트너는 내가 아니라면서 나의 젊은 여종 하갈이 당신의 아이를 낳겠다”라고 합니다. 당시의 관습상 여종이 낳은 아들도 정실부인의 아들로 등록되었습니다. 창세기 16장을 잘 읽어보면은 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 사람이 사라입니다. 사라가 주도합니다. 아브라함은 절대로 사라에게 여종을 씨받이로 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몸에서 자녀를 준다는 약속을 아브라함이 믿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안 믿었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볼 때 지금 약간 어색한 상황이 발생했을 뿐이지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신실함으로 자기 몸에서 아이를 낳기 위하여 하갈에게서 아이를 결국 낳습니다. 이 말은 창세기 15장 6절에 나오는 그 믿음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7절 봅시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절 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심이라

 

그런데 아브라함은 지금 자녀가 없는데, 지금 한 명의 자녀도 없는데 많은 조상의, 많은 사람의 조상이 되려면 한 명은 최소한 낳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기 몸이 늙어가는 것을 방치하시고, 자기 아내의 몸이 늙어가는 것을 방치하신 그 하나님이 약속은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네 몸에서 날 자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고 네 몸에서 날 자손들은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진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한 명의 대물림도 못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약속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창조적으로 격동시키는 것이고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고취하는 거죠.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19절입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이것은 창세기 18장입니다.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신실함으로(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자, 그것을 의로 여겼다. 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지속적인 신실함, 지속적인 믿음직스러운 믿음 이것을 의라고 여겼습니다. 한 번, 단박에 믿어버리는 걸 의라고 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방인 신자들이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믿어야 되고, 반복적으로 믿어야 되고, 신실하게 믿어야 되고 하나님을 믿는 그런 일련의 지속적인 신실함을 보시고 “이 사람 믿는 사람이다!”라고 판단하면은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의 요체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믿고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것이 내 믿음의 종료입니다. 내 믿음의 종료는 지속적으로 내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일련의 행동을 했을 때 그 지속적인 믿음직스러운 나의 발자취를 보고 하나님이 “이 사람은 나를 믿는 사람이다!” 라고 최종 판정을 내리면 하나님 편에서 문을 열어주는데 그것이 바로 뭐냐면 성령을 보내주시는 겁니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제가 좀 미안하고 심각한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제가 여러분이 어떻게 해서 믿는 사람인지 제가 잘 모릅니다. 대부분이 그것을 들어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려면은 어떻게 이 사람이 신자가 됐는가를 자세히, 자서전적으로 한 번은 들어야 됩니다. 목회자는... 그래야 도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짐작하건데 저는 스토리를 다 안 들었지만 어떤 사람이 인간적으로 짜증을 내면서 교회에 나오는지, 아니면 돈 때문에 나오는지, 직업 때문에 나오는지, 이게 자기 일이기 때문에 유급 성직자이기 때문에 하는지, 아니면은 복받쳐 오르는 다함없는 성령의 내적 감동으로 하는지 그것은 분별할 수 있거든요. 제가요. 그래서 제가 볼 때 그런 스토리를 쭉 듣지 않아도 저 사람은 요단강을 건너는 그런 결단을 한 번은 한 사람 맞다, 그래야만 저 사람이 저렇게 사는 것이 이해가 된다 라고 하는 그 믿음의 지속적인 임계점에 도달한 그 신실함, 그 임계점에 도달한 신실함에 하나님은 인을 칩니다. ‘하나님이 인을 친다’라는 말은 뭡니까? 성령의 인을 칩니다. 그러면은 성령의 인을 받지 못하면 신자가 안 됐습니까? 맞습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믿는 과정을, 입문을 하나님 편에서 Divine Approval ‘신적 승인’을 받지 못하고 성령의 내적 인침을 받지 못하면은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뭡니까? 신자가 되고 싶은데 건성으로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랑 어울리기는 좋아하는데 신자는 아니고, 성령의 내적 인침의 사역도 모르고, 성령의 인도하심도 모르고, 성령이 우리를 성화시키는 거룩한 사역도 모른 채 교회만 오래 다니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사실상 신자가 아닙니다. 왜 신자가 아니냐면 이분들은 아브라함적인 믿음직스러움의 지속성을 건너뛰고 아브라함적 지속성의 시험을 통과하여 하나님 편에서 “너는 내 신자다. 나의 인친 백성, 나의 소유된 백성이다!”라는 하나님의 ‘신적 승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믿으려고 할 뿐, 진짜 믿은 자의 표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진짜 믿는 사람과 믿으려고 모여든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그러나 우리가 감히 ‘이 사람은 성령이 인 친 사람이다, 아니다’ 이것을 함부로 판단 못하지만 성령의 인침 사역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사람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신령한 사람은 신령한 사람을 알아봅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신령하지 못하고 교회 나오는 사람이 많단 말입니까?” 많다고 보면 됩니다. “어느 정도 됩니까?” 반 이상은, 신앙의 내적 비밀이 없다고, 모든 교회는 거의 반 이상은 신앙의 내적 비밀이 없습니다. 없는데도 교회 나오는 이유는 아버지가 신앙을 상속했기 때문에,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친구 따라 교회가 갔기 때문에 그 다음에 교회 다니는 이런 문화적인 것에 저항감이 없기 때문에 다닙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은 아브라함적 신실함을 지속적으로 축적시켰다가 임계점을 넘고 ‘너는 의로운 자다!’ 딱 인을 쳐준 이런 성령의 내적 인침 사역을 끝내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런 사람들이 이미 장로가 되고 직분을 맡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장로 직분을 다 내려놓고 정직하게 내가 아브라함적인 믿음의 입문과정을 거치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세례를 받아야 되고, 정식으로 새로 시작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걸 부끄러워하고 내가 성령의 내적 비밀도 없는데, 성령의 내적 인침도 없는데 믿는 자인 것처럼 행동을 막 따라 하면서 그런 흉내를 내는 것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캘빈은 이런 현실 교회의 인적구성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긴 모인 사람들이 다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누가 교회에 속한 사람인가를 압니다. 그렇지만 지상의 인간의 눈에는 안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로 교회를 나눌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너무 슬프게도 우리 한국교회가 한 명의 신자를 만드는데 아브라함적 믿음직스러움을 누적시키고 축적시킨 사람을 지속적으로 관찰한 후에 이 사람이 성령 받았는가까지 확인하고 세례를 준다면 이런 일은 없겠죠.

 

제가 목회한다는 말은 그런 뜻입니다. 제가 목회한다는 말은 그 사람을 하나님 나라까지 데려가서 인도하는 책임까지 한다는 게 목회이기 때문에 대형 목회가 될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수많은 군중을 데리고 목회를 못한다는 말이 그런 말입니다. 사람을 하나님 앞에 대면시키고, 하나님 앞에 그 양심을 소환하여서 성령의 인침 사역까지 받아야만이 이것이 전도가 끝나기 때문에 하~ 목회라는 말이 너무 힘듭니다. 그것까지 해야 목회가 되는 겁니다. 설교하고, 수요예배 설교하고, 새벽기도 설교하고, 세례 주고, 수양회 가고 이건 목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세속적인 신자도 다 할 수 있고 세속적인 목사가 합니다. 진짜 하나님의 종이 해야 할 일은 뭐냐? 아브라함적 믿음직스러움을 축적 시키는 성도를 관찰하고 그 성도를 바로 인도하여 마침내 성령의 인치는 사역까지 경험하게 만들어 하나님 나라에 입문시켜서 하나님 나라 안에까지 인도하는 것까지가 바울이 말한 목회입니다. 그러니까 빌리 그레이함은 자기는 목회자가 아니다, 자기는 열매를 거두지 못했고 자기가 전도한 그 사람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내가 설교하고 나서, 내 설교를 듣고 사람이 어떻게 바꼈는지 나는 모른다. 그것은 목회가 아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25년 동안 500명도 안 되는 사람을 데리고 사역했을까요? 사도 바울의 목회지는 8군데 흩어져 있었고, 아무리 수를 많이 잡아도 500명도 안 되는 사람을 데리고 25년간 사도 바울이 분투를 거듭했습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분투를 거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한 명은 놓쳤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이 목회를 뭐라 생각할지, 교회를 뭐라 생각할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도 먼저 신자 된 사람, 성령의 내적 인침을 먼저 경험한 사람이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신앙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을 자존심 상하지 않게 은근히 도와주어야 됩니다. 이게 저의 동역자입니다. 절대로, 절대로 지금 갑자기 어떤 사람보고, 장로가 된 사람보고 “당신은 믿음의 인침을 받지 못한 사람이야!”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지금 크게 싸움 납니다. 한국교회 모두가 이미 믿는 과정을 이렇게 가볍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제가 아무리 용을 써도 “김회권이 뭐 저렇게 까다로워!”라고 비난만 받지 절대로 제가 칭찬 못 받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이 양심상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시고 인을 쳐 주시고 성령으로 내 안에 거주해 주시며 나를 시시각각으로 조명하는지요. 로마서 8장 11절로 16절 읽고 마치겠습니다. 우리 윤진 자매님 로마서 8장 11절로부터 16절까지 좀 읽어주십시오.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예,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인침 받은 자녀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의로운 자입니다. 이게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여러분이 이전에 무슨 교회를 다녔던 간에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여러분은 참 신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비극이고, 우리의 슬픔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하나 따져야 됩니다. 담임목사는 이걸 따져줘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 분을 돕는 것입니다. 직분을 나눠가지고 교회 일을 하는 것은 완전히 지극히 세속적인 일도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직한 사람들 사이에만 신앙의 비밀을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지극히 정직하고, 내면적이고 솔직한 성도들만이 신앙을 논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구역예배나 이런 것들이 아주 신령하지 않으면 구역예배가 유지가 안 됩니다. 그런데 교회는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지속적인 성령충만이 없으면 목회가 사실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지속적 성령충만은 어디서 옵니까? 피와 땀을 쏟아 붓고 제단에 피를 쏟는 아론과 제사장적 소수의 중보자가 몇 년씩 기도해야만이 성령이 임합니다. 이것은 필수적입니다. 주일예배 한 번 나오는 것,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로마서 8장 11절로 17절이 여러분에게 일어나야만 여러분이 신자입니다. 좀 더 길게는 로마서 8장 1절부터 17절이 여러분에게 일어나야만 여러분은 아브라함적 의로운 자, 아브라함적 의를 덧입은 자가 됩니다.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심각한 말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한국교회는 한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 나라에 입문시켜서 데려가는 참된 목양의 열정이 사라지고 교회가 사업이 되고, 일이 되고, 세속의 과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성도 개개인의 영혼을 하나님 나라까지 인도하려는 목회자가 대형교회가 되어서 폼 재고자 하는 목회자보다 많아지게 하시옵시고 제단에 피를 쏟는 목사님들이 면류관을 쓰고 자랑하려는 목사님보다 훨씬 많아지게 도와주옵소서. 우리 가향교회는 제단에 피를 바르고 그 성의에 피를 바르고 제단에 피를 쏟는 감람유를 가득 채운 목사님이 꼭 와야 되겠습니다. 성도들의 영혼을 하나님 나라까지 데려가는 목사님을 보내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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