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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4:25 /제목: 이스라엘을 의롭게 한 그리스도의 부활

by 【고동엽】 2022. 1. 15.

본문: 로마서 4:25

제목: 이스라엘을 의롭게 한 그리스도의 부활

 

‘의롭다’는 말뜻의 핵심은 쌍방속박적인 언약관계 안에서 요구되는 의무사항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걸 ‘의롭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의롭다’라는 말은요, ‘일방적인 약속의 수혜자였던 아브라함이 그 일방적인 약속의 내용을 아브라함 편에서도 이루기 위하여 의무를 다해야 된다’ 이런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란 땅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을 때 받았던 약속은 이런 것 아닙니까? “내가 네게 큰 민족을 이루고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만들어 주겠다. 그리고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상속적 기업의 땅으로 주겠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유인했을 때 구사했던 약속이거든요. 이것은 일방적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일방적 약속을 아브라함 편에서는 지킬 그 뭐가 없습니다. 약속만 했습니다. 그런데 11년 동안 이 약속으로 아브라함을 단련했습니다. 11년간, 86세까지입니다. 그런데 11년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행로를 자세히 주목하시다가 아브라함을 쌍방속박적인 언약 당사자, 언약의 파트너, Covenant- Partner로 격상을 시켜서 아브라함에게도 이 약속을, 일방적 약속을 지킬 의무를 주어서 아브라함 편에서도 해야 할 과업들을 주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준다는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아브라함도 아이를 낳으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가나안 땅을 하나님이 기업으로 준다는 그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그 땅을 사야 합니다. 그러니까 고대 사회에서 땅을 차지하는 방법은 그 땅에 오래 사는 것, 이것을 취득시효라고 합니다. 취득시효. 자연적인 땅이 오래 산 사람의 소유로 되어가는 것을 같다가 민법에서 취득시효라고 합니다. 주인이 없는 빈 땅을 20년 동안 살면은 자기 소유가 되는 그런 법이 취득시효법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을 차지하려면 그 땅에 오래 살아야 됩니다. 오래 살아야 그 땅이 자기의 것이 되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떠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기근이 왔다고 이집트로 가면 안 됩니다. 기근이 왔다고 이집트로 가면 안 되기 때문에 이집트로 간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환란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 다음에 이삭이 그랄 땅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때 그 블레셋 땅에 있는 이삭을 불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블레셋 세력과 논쟁이 일어나게 하셔서, 갈등이 일어나게 하셔서 다시 브엘세바로 불러들입니다. 이렇게 자꾸 약속의 땅을 떠나려고 하는 그 믿음의 조상들을 가나안 땅에 살게 하는 이유는 그 땅을 오래 차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그 땅이 자기 땅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일련의 의무조항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도 행할 때 서로 의로워집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시려고 애를 쓰고 가나안 땅을 줄 의무를 지킬 때 그럴 때 의로운 하나님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하나님 노릇을 하시려면 반드시 땅을 주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시려면은 땅을 주셔야 됩니다. 우리 교우들의 하나님이 되시려면 하나님은 내게 땅을 주셔야 됩니다. 내 생계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땅을 주셔야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내게 하나님이란 소리를 들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그냥 공연히 하나님 권세로 우리한테 예배를 받으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도 쌍방속박적 언약의 의무를 다하셔야 됩니다. 하나님도. 그러고 나서 우리의 경배를 기대하시고 우리의 찬양을 기대하셔야지 ‘그냥 내가 창조했으니까 너희들은 다 알아서 나를 찬양해야 돼!’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언약에 근거하여 예배를 받으시고, 언약의 의무를 다하시고 싶어서 최선을 다하시려고 하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야 되고, 하나님도 아브라함에게 최선을 다하여 땅을 주셔야 되고 후손을 반드시 주셔야 됩니다. 이름을 창대하게 해야 되고요, 그리고 임재와 보호를 통하여 아브라함과 함께 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대하여 11년 동안 지켜보면서, 처음으로 아브라함을 별이 총총 빛나는 밤에 데려가서 그 하늘의 많은 별들을 보여주면서 “네 자손이 이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나님은 선언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믿었습니다. 이때 믿었을 때 처음으로 아브라함이 언약, 일방적인 약속의 소유자에서 쌍방속박적인 언약의 당사자로 신분이 바뀝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아브라함이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만들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한 명의 자녀를 낳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사라의 장막에 들어가서 아이를 낳으려고 시도했을 때 사라가 거부하고, 사라가 자기가 몸이 경수가 끊어진 자신의 몸을 알고 사라는 하갈을 붙여주면서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는 걸 돕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갈이 아니라 사라의 몸에서 아이가 태어나길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7장에 금방 나타나십니다. 이제. 하나님이 금방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처음으로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언약당사자로서 신실함을 지키라 그렇게 하면서 드디어 아브라함의 몸에서 뿐만 아니라 “네 아내 사라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란 말을 합니다. 자, 여기서 이 말을 처음으로 사라에게 했을 때 사라가 충격과 당혹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18장에서 직접 천사를 보내어 사라와 담판을 짓게 하십니다. 그런데 사라는 너무 인간적인 분이었습니다. “내년 이맘에 네게 아들이 잉태되리라” 이렇게 하니까 사라가 장막 뒤에서 웃습니다. 계속 웃으니까 웃음을 그치지 않으니까 그 아들 이름을 ‘이사크-웃는다’ 이런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웃음동이라는 뜻입니다. 이삭은. 그러니까 그 웃는다는 말은 기가 막혀서 웃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가 아이를 낳는다는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좋아서 우습기도 하고 냉소와 실소와 어떤 긴장이 풀리는 온갖 종류의 감정이 다 착종된 그런 웃음이었겠죠? 어쨌든 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이를 낳으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이 사라가 설복 당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100세 90세 이렇게 이미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이를 넘은 그 나이에 순종을 했습니다. 이렇게 했습니다.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않고 – 이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약하여 지지 않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세 번째 믿음, 19절 믿음, 20절 믿음, 20절 두 번째 믿음 이거 전부 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신실함에 의하여 만들어진 파생적 믿음입니다. 이 파생적 믿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신실함에 붙들려서 파생된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100세의 아브라함, 90세의 사라가 드디어 아이를 낳습니다. 이렇게 순종을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의롭다’라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일방적 약속의 수혜자가 쌍방속박적 언약의 성취를 위하여 자기에게 부과된 의무를 다할 때 그걸 ‘의롭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의롭다’라는 말은 100%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만들어 복권시켜준다, ‘언약백성을 복권시켜준다’라는 말이 정확하게 ‘의롭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자손만 되기만 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영생을 상속한다고 봤거든요. 그래서 아브라함 자손이 되는 복권과정, 그 신분복원 과정을 ‘의롭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기만 하면은 우리 모두는 영생을 상속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브라함 자손 되는 이 일을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받는다’ 또는 ‘영생을 상속한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도 예수님 당시에 ‘구원받는다’ 라는 말을 절대로 안 썼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받는다’라는 말을 쓰지 않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3장에 보십시오. “너희가 속으로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여기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말은 뭐죠? 의로운 자, 그래서 삭개오에게 예수님이 한 말이 뭐죠?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하면서 “아브라함 자손이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이게 바로 유대인들에게 통하는 일종의 관용어법입니다.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이 임했다’라는 말은 쓰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0장에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그 율법사가 와서 묻습니다. “내가 영생을 상속하기 위하여, 우리 번역에는 ‘영생을 얻는다’로 되어 있는데 아닙니다. 영생을 상속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하니까 이웃을 돌보라고 하십니다.

 

돈이 많은 부자에게는 어떤 언약적 율법조항이 있냐면은 ‘이스라엘의 모든 부자의 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는 것’이라는 언약 의무조항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을 방치한 채 저 홀로 부자로 사는 것은 이스라엘 언약 백성의 의무에 배치되는 겁니다. 그래서 ‘네 모든 소유를 팔아 또는 너도 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상처 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다 도와줘라’ 이것이 아브라함 언약백성의 의무다, 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면은 영생을 상속한다, 이렇게 말한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스라엘 맥락 안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동안 모든 아브라함적 삶을 살지 못하고 실패했던 모든 것을 일괄하여 완전히 새롭게 집단적으로 전체다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한 번 언약백성으로 신분을 회복해 주는 사건이 예수님이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예수님이 내어줌이 되고 우리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복원시키기 위하여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저주받은 죽음이 하나님께 통했으며 우리의 죄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일사부재리의 원칙 때문에, 한 번 심판 받은 죄는 두 번 심판하지 않는 원리 때문에 예수님이 내 대신 죄를 받았다면 내 죄는 용서 받았다고 믿고 예수를 믿는 순간 이방인에게는 마음의 할례 즉 성령이 임합니다. 그래서 마음의 할례인 성령이 임하는데 이걸 에스겔 36장과 예레미야 31장에서는 마음의 할례를 일으키는 ‘새 언약’ 그랬습니다. “내 영을 네 마음에 두고, 내 율법을 네 마음에 두고, 너희 돌 같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겠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을 체결하기 위해서 뿌려진 피가 바로 예수의 피 입니다. 누가복음 22장 20절입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새 언약의 피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이스라엘 백성을 집단적으로 아브라함 언약 만드는, 아브라함의 백성으로 복원시키는 사건임과 동시에 모든 이방인들을 예수가 아브라함의 언약을 성취하였고 이스라엘이 대표한 인류의 죄, 아담 인류의 죄를 대신 징벌 받고 저주를 받아서 아담 인류의 죄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셨다고 믿는 순간 마음의 할례가 일어나는 일이 벌어져서 새 언약 백성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존재하던 아브라함의 식탁에, 이미 있는 아브라함의 식탁에 접붙여지는 돌감람나무입니다. 원감람나무인 이스라엘, 아브라함 공동체, 영생공동체에 우리는 접목되어서 아브라함적 삶을 살았던 공동체에 접목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로마서의 큰 원리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예수님의 사건을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사건임과 동시에 아담 인류의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사건으로 풉니다.

 

여러분 창세기 38장 26절입니다. 이것만 읽고 예배 마칩니다. 야곱의 아들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과 성적 관계를 맺습니다. 유다는 자기 아내를 잃고 자기 며느리가 과부가 돼서 친정에 가 있을 때 그 친정 근처에 가서 과부가 된 자기 며느리를 그냥 창녀인 줄 알고 만나서 잉태를 시킵니다. 그런데 그 다말이 배가 불러오자 사람들이 “당신 며느리가 행음하여 아이를 뱄습니다”라고 하니까 “불사르라! 데려와서 불사르라” 하면서 그 다말을 꽁꽁 묶어서 옵니다. 그리고 배가 부른 그 다말에게 “누구의 아이를 잉태하였느냐?” 이렇게 물으니까 그 다말이 하는 말이 “이 인장과 지팡이의 임자입니다” 하면서 바로 유다 자신을 가리키니까 유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모든 사람 앞에서 “내가 잘못했다. 너는 나보다 의롭다” 그랬습니다. 의롭다. 여기서 다말에게 ‘의롭다’라는 말을 썼다는 말은 뭐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가문에서 형수가 먼저 죽으면 동생은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여 형의 아이를 낳아줄 언약적 의무가 있습니다. 형사취수제도입니다. 그런데 다말은 자기 시동생과 결혼해서라도 아들을 낳아서 자기 남편의 이름으로 땅을 상속하고 싶은데 집안이 안 도와줍니다. 그러니까 이런 방식으로 아이를 잉태하여 끝내 자기 남편의 이름으로 땅을 상속하도록 의무를 다합니다. 그러니까 이 의무를 다한 다말에게 “네가 의롭다”라고 말합니다. ‘의롭다’라는 말은 쌍방속박적 언약관계에서 의무를 다하는 걸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의롭다’는 선언을 아브라함은 11년 만에 들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를 믿었다고 바로 순간적으로 성령을 받는 이런 사람이 있는 반면에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를 나왔지만 오랫동안 성령의 인침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의 내적 인침이 있는 사람들은 로마서로 자가진단을 할 수 있고, 로마서 8장 1절로 39절을 읽으면은 내가 성령의 인침을 받았는가를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절부터 39절이 내 인생을 설명하는 내적 논리가 되면 성령 인침이 왔다고 봐야 됩니다. 내 감정과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 1절부터 39절로 자기 일상생활이 해명이 안 되면은 그는 성령의 인침을 받지 못했다고 봐야 됩니다. 신자가 아닌 겁니다. 교회 다니는 교인이지 신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로마서가 우리를 이렇게 갈라냅니다. 로마서는 우리를 갈라버립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아마 다 수평적인 동등한 교인이라고 생각할지 몰라요. 투표권을 행사할 때는 물론 수평적인 교인입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구원 받은 성령의 사람이 있고, 구원 받지 못한 교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제가 다 말을 못합니다. 이것을 말하면 오늘날 자존심이 상합니다. 기분 엄청 나빠합니다. 그러나 정직한 사람은 이걸 가지고 하나님께 토로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 공동체가 아니라 사교집단이 되었기 때문에 일종의 교제 집단, 사회적인 모임이기 때문에 여기서 사람의 신분을 함부로 가르면은 굉장히 큰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는 3년 동안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3년 후에만 예배당에 들어왔습니다. 성만찬은 믿기로 결단한 사람이 3년 동안 대기하다가 3년이 지나야 세례를 확정하는 배심원의 판결을 받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례는 허접한 세례교육과 허접한 목사들이 허접하게 눈을 감고 세례증을 남발하기 때문에 교회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냥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지금 제 고민이 뭔 줄 아십니까? 제 고민은 지금 한국교회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는. 이렇게 엄청난 사람 숫자를 모아놓고 사업 하듯이 헌금하고 이렇게 하면 안 되고, 헌금은 딴 데 다 하고 제가 하고 싶은 교회는 이런 겁니다. 헌금은 딴 데 다 하고, 오로지 진리의 말씀에 굶주려서 말씀만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런 모임이 충분히 많이 서야 합니다. 지금처럼 하면은 진짜 안 됩니다. 이게 안 되는 이유는 우리 가향교회가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전부 다 이렇게 해도 교인이 되고 장로가 되기 때문에 목사 되는 과정도 이렇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어디를 고쳐야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진짜 예수님, 기독교를 유지하고 신앙을 가진 사람은 돈 중심으로 모이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헌금하는 교회를 저는 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헌금 들어가면 목사님은 헌금이 자기 생계가 되기 때문에 안 됩니다. 오로지 말씀만 공부하고 성령의 교제를 일삼고 헌금은 딴 데 하는 그런 진리를 구도하는 공동체가 만일에 있다면은 거기는 기독교 신앙이 유지될 가능이 있습니다. 왜? 거기에 나가는 사람들은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저도 목사기 때문에 제가 유급 성직자로 살면 좋습니다. 저한테도. 그런데 그렇게 되면 돈을 많이 헌금하는 사람은 이뻐하게 되고, 재정 기여를 못하는 사람은 푸대접을 하게 됩니다. 지금처럼 헌금 중심으로 가면요. 여기저기 한국교회가 이 헌금을 거두다가 객과 고아와 과부를 돕는 데 쓰지 않고 온통 나쁜 데 쓰고 있습니다. 헌금은 교역자의 생계비 빼고 나머지 모두는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다 써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걸 차곡차곡 모읍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교회는 말씀 증거, 믿음, 아멘 화답, 교제, 일상생활, 건물 하나도 물론 없었습니다. 이것만 계속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엄청난 복음의 사역을 이루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 알고는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초대교회로부터, 사도 바울로부터 얼마나 많이 떨어져 있는지 알고 있어야 됩니다. 갑자기 우리가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저도 그 점에서 절망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말씀은 점점점점 낯설어집니다. 이제 로마서를 진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 겁니다. 왜냐하면은 우리는 너무나 깊게 세속화됐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진짜 성령의 인침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셔서 성령의 내주와 성령충만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시면 여러분은 바보가 됩니다. 여러분은 중상층의 삶을 못 살지도 모릅니다. 성령이 충만이 임하면은. 그런데 이렇게 서울 시민들이 부러워하는 중상층의 삶을 살려면 성령님이 임하길 기대하면 안 됩니다. 성령충만하면 우리는 역동적인 성령의 회오리바람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끌고 가는대로 가게 됩니다. 성령은 거룩한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세상 사람과 확연히 구별합니다. 아무리 똑같은 옷을 입어도 성령충만한 신자들의 공동체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많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로마서부터 천천히 깨달아서 우리 일상생활에 로마서 8장 1절부터 39절처럼 이루어지기를 기대해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너무나 많이 멀어졌습니다. 성경이 낯설어질 만큼 멀어졌습니다. 성경의 내적 논리를 알아 들을 수 없을 만큼 멀어졌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43년간 분투했지만 하나님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불쌍히 여겨주시옵시고 로마서의 말씀을 깨닫고 초대교회로 순식간에 타임머신을 타고 올라가서 바울의 동역자가 될 만큼, 지중해의 거친 물살을 헤치고 바울의 동역자가 될 만큼 감격적인 충만 교우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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