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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삶이라는 붓으로 인생이라는 이야기 책을
엮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인생이라는 이야기 책을 바르게 엮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인생이 무엇인지 인생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뒤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인생이 무엇인지’ 우리 함께
깊이 사색해 보았습니다.
인간이 삶이라는 붓으로
엮어가야될 인생 이야기 책의 핵심을
그 이야기 책이 추구해야 할 핵심적인 단어를
두 단어로 표현한다면
첫째는 “사랑”이 될 것이고, 둘째는 “섬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밤에는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함께 사색해 보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출세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지금 그 인생이 사랑의 이야기로 엮어지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거꾸로 지금 세상적으로 볼 때는 실패했고
세상적으로 볼 때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매일 매일의 인생이
주님 안에서 사랑의 이야기로 엮어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지금 성공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 얘기가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단정하는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절대로 흘려버려서는 안 되는 말씀입니다.
쉽게 주석을 하자면
지금 그 인생의 이야기가
사랑의 이야기 책으로 엮어지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의 종교적인 열심 이 가장 뛰어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나님께서 단정하셨습니다.
왜요? 여호와 나, 하나님 내가
사랑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체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사랑하셨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게 하심으로써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당신의 사랑의 통로로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 인생을 사랑의 이야기로 엮어가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소위 최후의 만찬 예식을 마가의 다락방에서 가지셨습니다.
그 만찬을 끝내시고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이제 십자가 죽음을 놓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 앞에 기도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때 제자들도 함께 따라갑니다.
마26:30 ‘그들이 찬미하면서 감람산으로 나아가니’
‘그들이’는 3인칭 복수형입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즉 ‘그들이’
감람산으로 가면서 즐겁게 유월절 축제 노래를 불렀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복음서는 한 번도 예수님과 제자를
한데 묶어서 ‘그들’이라고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제자들과 한데 묶어서 ‘그들’이라 하겠습니까.
사복음서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동시에 칭할 필요가 있을 때는
‘예수와 그 제자들’
항상 예수님과 제자를 따로 떼어서 표현했습니다.
마26:30절에서 ‘그들이’ 찬미했다는 것은,
예수님은 포함되지 않고
지금 제자들이 기뻐서 노래를 부르며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죽음을 앞드고 절체절명의 기도를 하시기 위해서 가는데
제자들은 지금 축제의 노래를 부릅니다.
왜요?
그들은 지금까지도 날이 밝으면 예수님께서 빌라도 총독을 몰아내시고
집권하실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1. 그래서 사랑은 눈을 들여다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고 도망갈 것이다’
그 예기를 듣고 베드로가 펄쩍 뛰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 저 사람들 모두 다 버려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때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너는 오늘 밤에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호언장담했습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 집에 들어갔습니다.
‘아니야, 간단하게 부인했습니다’
두 번째로 또 ‘아니야, 너 맞잖아?’
그랬더니 베드로가 맹세하면서 부인했습니다.
유대인의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멩세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데
나는 저 작자를 몰라
마지막으로 또 ‘아니야, 너 맞잖아
네 말투가 갈릴리 말이잖아!’
그랬더니 베드로가 부인하고 맹세하는 것도 모자라서
예수님을 저주했습니다.
그 후에 닭이 울고 베드로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나가서 통곡한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딴 공간에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대제사장 그 좁은 마당에 베드로와 같이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력하게 잡혀가서 따귀를 맞으시고
모독 당하는 것을 보고 자기에게 화가 미칠까
지금 두려워서 베드로가 자기 보호 본능으로
예수를 지금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하는 그 순간에
닭 우는 소리가 들리겠습니까.
누가복음이 그 상황을 정확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입니다.
눅22:59~60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지금 베드로가 세 번째 부인합니다.
그런데 그때 닭이 웁니다.
여러분, 새벽에 닭이 한 번만 웁니까?
닭이 울면 계속해서 몇 번 웁니다.
지금 베드로 귀에 이 닭소리가 안 들리는 것입니다.
눅22:61~62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지금 베드로가 주님의 면전에서
주님을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한 것입니다.
그 닭 우는 소리가 들릴 즈음
주님께서 얼굴을 돌리셔서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통곡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을 보고
닭울음 소리가 귀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자 그 장면을 여러분 한 번 머릿속으로 그려보십시오.
베드로가 지금 세 번째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합니다.
닭 우는 소리가 납니다.
베드로는 그 소리를 지금 전혀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고개를 돌려서 베드로를 쳐다봅니다.
제가 <네게 있는 것>이란 책에도 이 장면을 썼습니다만
만약 여러분들이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베드로를 쳐다보는 눈이 어떤 눈이겠습니까?
여러분 제가 한 사람을 스카우트해서 3년 동안 먹여주고 입혀주고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전수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그 사람이 공개된 장소에서
저를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때 만약에 제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그 사람을 쳐다보는 제 눈이 흰자만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베드로는 쳐다보는 예수님의 눈이
흰자만 있었으면 베드로 귀에는 절대로 닭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도 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내가 배를 버려두고, 그물을 버려두고 당신을 3년 좇아다녔는데
고작 이렇게 무력하게 잡혀가면서
나를 이렇게 만들려고 나를 그동안 데리고 다녔느냐?’
예수님이 흰눈이었으면 베드로도 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돌아보시는 그 주님의 눈이
호수처럼 여전히 연민과 사랑해 찬 눈초리입니다
그 눈을 보는 순간에
베드로 귀에 닭울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나가서 통곡했습니다. 회개였습니다.
왜요?
그 주님의 눈이 사랑의 눈이었고
그 사랑의 눈을 베드로가 들여다보는 순간에
그 마음속에서 상실했던 주님에 대한 사랑이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사랑은 눈을 서로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욥이 고난 끝에 이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욥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이 고난을 거친 후에
내가 이제 눈으로 주님을 봅니다.
욥이 영적인 눈으로 주님과 눈을 맞추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공부하고
경건훈련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해야될 것은
우리를 보고계시는 그분과 눈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때 그 분의 사랑속에서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면서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끼리 사랑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여러분!
우리 옛 말에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할 때
뭐라고 표현합니까?
‘쟤들 눈이 맞았어!’ 합니다.
정말 좋은 표현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복원해야 될 표현입니다.
눈이 맞았다는 이 표현이
사랑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주기 때문에
눈이 맞는 것부터 사랑이 시작되거든요.
그래서 외국에도 이런 표현이 있는가? (찾아보니)
제가 공부한 프랑스어에는 이런 표현이 없습니다.
혹시 영어에 이런 표현이 있는가? (찾아보니 없었습니다)
제가 미국 변호사에게
영어가 능통하고 한국어도 능통한 분이죠
제가 전화해서 물었습니다. 이런 표현이 있는지?
없어요!
영어에 첫눈에 반했다 love at first sight
이런 표현은 있습니다.
‘그런데 눈이 맞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여러분들 다들 연해할 때, 결혼하기 전에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눈이 맞았잖아요!
카페에서 공원에서 서로 눈이 맞았습니다.
그때 서로 마주볼 때, 상대방 눈으로
내가 빨려 들어가는 것 같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는 눈을 안 쳐다봅니다.
부부가 이야기 하는데요
눈을 보는 것 같은데 이마를 보거나
볼을 보거나, 가장 근접하면 눈썹이나 미간을 봅니다.
눈을 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같이 살면서
사랑과 무관한 관계가 됩니다.
여러분, 상대방의 눈을 들여다본다고 하는 것은
상대의 심중까지 꿰뚫어보면서
말로 발설되지 아니한 상대의 그 속 의중까지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시인이 밤을 새웁니다.
자기가 표현해 내고 싶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단어를 찾아내기 위해서 며칠 밤을 새웁니다.
자기 속에 있는 그 감정들, 살아움직이는 그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단어는 하나밖에 없거든요.
그 단어를 찾기 위해서 애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는 내 아내, 남편, 자식에게
내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절대 불가능합니다.
눈을 쳐다보면 됩니다. 눈이 말을 합니다.
내 아내가 얼굴을 웃는 것 같지만
그 속에 지금 우수가 잠겨 있는지
내 남편이 아무 말 안 하지만
그 눈 속에 지금 무슨 근심이 깃들여져 있는지
눈이 말을 합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눈을 맞추어야 합니다.
눈을 들여다 봐야 합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아내하고 남편이 얘기했는데
여러분 자녀와 부모가 얘기했는데
서로 눈 쳐다보면서 얘기한 적이 언제입니까?
여러분 아내 눈동자 색깔을 아십니까?
여러분 남편의 눈이 어느 정도의 세상을 담고 있는지
여러분 한번 들여다보신 적이 있습니까? 없죠?
여러분, 오늘 댁에 가시면
사랑해야 될 사람의 눈을 쳐다보십시오.
앞으로 매일 눈을 보고 이야기하십시오.
눈 속에는 상대의 과거가 새겨져 있고,
현재가 드러나고 있고
미래가 투영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눈을 들여다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2. 두 번째로 사랑은 너무나 당연하게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나의 존재를 상대방에게 주는 것입니다.
사랑해야할 상대에게 주는 것입니다. /
나의 손발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내 존재를 어떻게 줍니까?
내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내 존재는 나의 시간으로만 표현됩니다.
어제, ‘인생은 모래시계’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시계에서 지금도 모래가 줄줄줄 떨어지고 있는데
이 모래(시간)를 사랑해야 될 사람에게 주지 않고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 존재, 내 시간을 주지 않고
돈을 주는 것으로 내가 그를 사랑한다?
그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구절입니다.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산모나 막 아이를 낳은 여인에게
당신 아이를 잊어버릴 수 있겠느냐 물어보면
대부분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 말은 사실 아닙니다.
매일 아이에게 매여 사는 것 같죠?
그러나 재미있는 드라마를 볼 때
아이는 안 보입니다.
친구하고 전화하면서 한 시간, 두 시간씩 이야기할 때
아이가 안 보입니다.
더더욱 아이를 키우는 여자들이
자기 연민에 얼마나 오래 빠져있습니까.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동안에
아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사49:15~16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 이름을 손바닥에 쓰시면 지워지지까
지워지지 않도록 우리 이름을 손바닥에 새기시고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전 존재를, 당신의 모든 시간을
우리에게 개별적으로 다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로고스이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Incarnation 이 땅에 오셨습니다.
뭘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전 존재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의 시간을 우리에게 송두리째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부활승천하시면서
마28:20절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당신의 영으로, 당신의 전 존재로
당신의 모든 시간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이해를 쉽게 해드리기 위해서
제 경험을 말씀드리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주 예전에 제가 주님의교회를 목회할 때
저희 집에는 아이들 4명에 저희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께서 3년 동안 누워계실 때는
또 어머니를 도와주시는 분, 그래서 여러 명이 함께 살았습니다.
제 처가 동시에 가장 많은 콜을 받은 것이
동시에 아이가 웁니다. 그 순간에 전화 벨이 울립니다.
그 순간에 시어머니가 ‘야야’ 하고 부르십니다.
어디부터 가야 합니까?
그 상황에서 가장 급하다고 생각되는데
한 군데의 부름에 응하면 나머지는 응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 개개인과 전부 다
함께 하시고 당신의 시간을 우리 개개인에게 주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전 존재를
당신의 전 존재인 시간을
우리 개개인에게 송두리째 주시면서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 역시 사랑해야 될 사람에게
우리의 시간을 주는 것으로
사랑은 실천됩니다.
▶제가 주님의교회에서 목회할 때
제 집이 강북 합정동에 있었습니다.
매일 새벽에 강남 YMCA로 와서 새벽기도를 인도하고
끝나는 순간부터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밤11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가는 날이
태반이었습니다.
제가 집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넥타이도 풀기 전에 식탁에 앉아서
제 처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밖에 나와서 목회를 산다고 애쓰는만큼
제 처는 가정주부로서 아이를 키우고 시어머니 모시고 하는
집안 일이 있지 않습니까.
하루에 어떤 일이 있었고, 또 남편에게 하고 싶은 말,
그 모든 말이 끝나야 저는 넥타이를 풀고 잠을 잤습니다.
어떤 때는 밤 12시를 넘길 때도 있죠.
저는 내일 새벽에 나가야 되는데
그래도 끝까지 아내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제 아내를 위해서 시간을 주지만
제 아내는 저를 위해서 자기 시간을 준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강남이라는 공간에서 목회사역을 하고
제 처는 강북 합정동이라는 공간에서 주부로 일하지만
그 밤에 서로 시간을 주고 받음으로써
각각 다른 공간에서 다른 일을 하는 우리 둘이서
한 인생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아이가 네 명이 있다보니까
늘 아이들과 만나서 밥을 먹거나 이야기하거나
항상 집단적으로만 하게 됩니다.
아이들과 개별적인 관계를 맺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제가 시간이 나면
아이들과 한 명씩 돌아가면서 데이트를 했습니다.
명동에 데리고 가서 칼국수도 먹고
명동 뒷골목에서 산낙지도 먹고
코스모스 백화점 계단에 앉아서 행인들을 보면서 이야기도 하고
아이들 어릴 때 다 그렇게 개별적으로 그 아이들을 위해서
시간을 주었습니다.
저는 사내아이만 네 명이니까
그 아이들이 군대에 갈 때
저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남의 집 아들들한테 진 빚을 당당하게 가서 갚고 와라
이제 너는 우리 집안을 대표해서 그동안 남의 집 아들들에게 진 빚을
네가 가서 갚고 와라’
우리 집을 대표해서 빚갚으로 가는데 그냥 보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군에 가는 아이들하고는 꼭 제가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서 이틀 정도 함께 여행을 했습니다.
국내 여행을 하고 빚갚으러 보냈습니다.
제가 작년 2018 에 칠순을 했는데
가족들이 다 모여서
아빠에게 무엇이 가장 감사했는지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한 가지씩만 얘기하기로 했는데
제일 큰 아들이
자기가 어릴 때 자기를 위해서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어서 아빠가 데이트 해 주고
자기가 군에 가기 전에 이틀 동안 시간내서
여행해 준 것, 그게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루는 24시간이고 1440분입니다.
1440분 되는 이 긴 분 중에서
여러분이 사랑해야 될 대상에게 진심으로 몇 분이나 주고 있습니까?
그 시간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3. 세번째로 사랑은 무한 신뢰입니다.
내가 믿을 수 없는 상황속에서도
내가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울이라는 교회를 짓밟던 사람이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아서 다메섹으로 향하지 않습니까.
그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께서 핀셋으로 그 사울을 집어내셨습니다.
바울이죠.
주님을 만나는 순간에 바울이 시력을 상실했습니다.
주님께서 아나니아 라는 선지자에게
‘너는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에 가서
사울 이라는 사람을 찾아서 안수해서 눈을 뜨게 해 주어라’
아나니아가 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행9:13~14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쉽게 풀이하면 ‘주님, 주님께서 그 작자를 모르시는군요.
그 작자는 몹쓸 작자입니다. 교회를 짓밟던 폭도이고
지금 우리를 해치기 위해서 여기 왔습니다.
그 작자는 차라리 시력을 상실한 채로 살아가게 하시는 게
교회를 위해서 더 낫습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행9: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여러분, 이방인, 임금, 이스라엘 자손.. 그러면 세상 사람 모두입니다.
지금 바울은 아직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내가 주님 앞으로 돌아갑니다!’ 하고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먼저 바울을 믿고 계십니다.
아나니아는 ‘저 사람 폭도입니다. 안 됩니다.’ 하는데
예수님은 ‘아니다. 저 사람은 내가 내 이름을 위해서 택한 나의 그릇이다!’
무한신뢰입니다.
그 주님의 무한신뢰 속에서
우리가 아는 바울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복음에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 탕자의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받아주었는데
그 탕자의 아버지가 위대하다면 왜 위대합니까?
그 탕자 아버지의 어떤 부분이 위대합니까?
아버지 재산 절반을 마치 자기 권한처럼 달라고 독촉해서
들고 나가서 허랑방탕해서 다 날렸습니다.
그리고 돼지가 먹는 먹이도 먹을 수가 없이
자기 배가 곯아서 죽을 지경이 되니까 아버지 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받아줬습니다. 그게 위대한 일입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안 하겠습니까?
그 자식이 내 재산 절반을 허비하고 아무리 미워도
잘못했다고 하면서 돌아오면, 내가 품어주는 것!
그게 아버지의 도리 아닙니까? 보통 아버지도 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 탕자의 아버지의 위대함은 딴 데 있습니다.
이 탕자가 나가서, 재산을 다 허비하지 않았습니까.
돼지를 치면서, 돼지 먹이를 또 먹을 수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 재산 절반 받아서 그 집에서 나갈 때는
부잣집 아들의 풍채를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아버지 재산 다 말아먹고, 짐승 사료도 먹지 못해서 돌아올 때는
피골이 상접한 거지입니다. 옷은 넝마와 똑같습니다.
아버지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부잣집 아버지 그대로입니다.
아버지는 외형이 하나도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이 아들이 거지가 되어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버지가 나를 받아줄까?
아니면 나를 내팽개치고 야단치실까?
지금 가슴 두근두근 하면서 옵니다.
그런데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 아들을 먼저 알아보십니다.
아들은 아직 아버지를 못 알아봅니다.
아버지가 그 아들을 알아보고 뛰어가서
아들 목을 잡고 울면서 환영했습니다.
왜요?
그 아버지는 매일 기다렸거든요.
그 아버지는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이 자식이 재산 반을 달라고 해서
가지고 나갈 때부터
‘그래, 네가 내 재산 반을 탕진해도
너는 이 과정을 거쳐서 다시 돌아올 줄로 믿는다!’
그래서 매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알아보고,
그 아들을 찾는 그 사랑에
둘째 아들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믿지 못할 사람 속에서도
사랑해야될 대상이기 때문에
내가 믿는 것입니다.
▲사랑장인 고전13:7절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인데
거기서 키워드는 ‘믿는’ 것입니다.
내가 믿기 때문에, 이 아들이 내 재산의 절반을 들고나갔지만
그 허물을 덮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 아들을 믿기 때문에
이 아들은 지금 내 재산을 들고나가서 허랑방탕하게 살 것이 뻔하지만
그 아들이 돌아올 것을 소망하는 (엘피소) 것입니다.
내가 믿기 때문에, 이 아들이 거지가 되어서 돌아왔지만
내가 인내하는 (히포메노) 것입니다.
그래서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저는 제 처와 누님들, 제 어머님께
참 감사한 점이 있습니다.
제가 모태신앙인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렇게 허랑방탕하게 살아갈 때
제가 믿음 좋은 교회 집사인줄 알고 결혼하고 보니까
알코올 중독자처럼 살아갈 때
제 처나 제 어머니나 제 형제 중에 한 사람이라도
‘너는 싹수가 노랗다’
그랬으면 저는 정말 어그러졌을는지 모릅니다.
제 처를 비롯해서 제 가족 중에 한 명도
제게 제 미래에 대해서 절망하거나
저를 저주하는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끝까지 저를 믿었습니다. 믿어주었습니다.
그 믿음이 오늘 제가 이런 모습으로
서 있을 수 있게 된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특히 젊은 강남 어머니들께 부탁합니다.
성적으로 자식들을 잡지 마십시오.
주위에서 다른 학부모가 하는 이야기를 듣지 마십시오.
여러분, 지금은 옛날처럼 사람들을 일직선에 세워놓고
경쟁시키는 시대가 아닙니다.
일직선에 내 자식을 세우면
내 앞에 누군가는 있습니다.
평생 내 아들로 하여금
내 앞에 있는 누군가에 대해서
박탈감을 느끼고 열등감을 느끼면서 살게 하는 것이
직선 위에 놓는 것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라면
내 자식을 360도의 원 위에 세워두어야 합니다.
일직선이 아니라, 내 자식이 가고 싶어하는 방향으로 가게 해줘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탕자의 아버지처럼!
저 자식이 저 길을 가더라도
아무도 안 간 저 길을 가면
‘하나님께서 저 아이를 통해서
광야에 길이 나고, 사막에 강이 터지게 해 주실 것이다’
그런 믿음을 부모가 가질 때
그런 믿음을 가진 부모가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일직선 상에 세워서 끊임없이 경쟁해서
조금 더 낫고, 조금 더 앞으로 나가고
그렇게 해서 살게 하면, 대부분의 경우에
자기를 위해서 인생을 살다가 끝납니다.
아무리 연봉을 많이 받아도
아무리 스펙이 커도, 기여하지 않는 인생은
세상에 오물만 더 버리다가 끝납니다.
믿어야 합니다.
무한 신뢰가 사랑입니다.
◐4. 마지막으로 사랑은 중단없는 자기 투쟁입니다.
마21장을 보면,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는데
성전을 장삿꾼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장삿꾼들을 몰아내시면서
‘내 아버지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들이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소리치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성전정화 사건이라고 하는데,
그 마21장의 성전정화 사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닷새 전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제일 마지막 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2장에 보면, 똑같은 성전정화 사건이 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2장은 예수님 공생애 시작하자마자의 시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에를 시작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신 일 가운데 하나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성전을 정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3년 후에 공생애를 마무리하시면서
또 가셨을 때, 또 오염되어 있는 것을 보시고
그 성전을 정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성전정화사건으로 시작해서
성전정화사건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그 성전을
예수님께서 혈혈단신으로 들어가셔서
그 성전 뜰을 둘러엎으시고 정화하신다는 것은
목숨을 내어놓는 일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 성전을 장악하고 있는 대제사장 무리들이
예수님께서 사랑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실족시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사랑해야 할 자들을 실족시키는 그 외부의 도전에
주님께서는 맞서서 싸우셨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처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들 기도하시면서 등허리에 땀이 나는 것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거의 없으시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얼마나 처절하게 기도하셨으면
땀에 피가 배여나왔습니다.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 비참한 죽음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그 피눈물 나는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제 가자’ 하시며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십니다.
그 겟세마네의 기도는 예수님 당신 자신과의 투쟁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은 당신 자신과 투쟁하신 것입니다.
그 투쟁에서 예수님께서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재물이 되어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고전13:6절은 이렇게 정의합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진리로 인해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남편이 정상적으로 한 달에 얼마를 벌 수 있는지
다 아시죠?
그 금액 넘어서 가지고 오면 뭔가 이상한 것 아닙니까.
그때 그 금액을 좋아라고 받으면 불의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때 남편으로하여금 ‘우리 이렇게 살지 마십시다.’
그것이 진리로 인해 기뻐하는 것입니다.
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로 인해 기뻐하는가요?
아까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신데
사랑의 속성이 불의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하나님의 정의와
함께 갑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정의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하나님의 정의’이고
하나님의 정의의 또 다른 모습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이 배제된 정의는 폭력이고,
우리가 많이 경험했습니다.
정의가 결여된 사랑은 마약입니다.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하나님의 정의를 수반하는 것,
그것이 공의입니다.
▲제가 1988년도에 ‘주님의교회’를 시작한 이래
작년에 제가 은퇴할 때까지
30년을 목회했습니다.
30년을 목회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저를 믿으시고
제게 맡겨주신 교우님들을 바르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도전과 맞서야 했습니다.
여러분, 목사가
목사가 걸어야 할 바른 길을 걸을 때
함께 동참하기 원하는 목사님들도 계시지만
더 많은 목사들은
그 (바른 길 가려는) 목사를 배제시키려고 합니다.
바른 길을 걷는 목사 때문에
자신의 기득권이 흔들린다고 생각되는 목사들이
제 등을 찔렀습니다.
저는 30년 동안 수많은 칼을 맞았습니다.
수많은 칼을 맞으면서
제가 사랑해야 될 교우님들을 바르게 사랑하고
목사의 길을 바르게 걸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내가 싸워서
바른 목사됨을 지켜가야 한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외부의 도전과 맞서서 싸우는 것,
제 의지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은혜 없이는
어떤 순간도 맞서 싸워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회하는 내내 아침에 일어나면
눈을 뜨자마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저는 매일 하루 일과를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주님, 오늘도 바른 것을 분별하는 지혜와
바른 것을 실천하는 용기와
바른 것을 포기하지 않는 인내와
바르게 더불어 살아가는 은혜를 주십시오’
목사가 야합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바르게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매번 바른 것을 분별하는 지혜,
바른 것을 실천하는 용기,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제 기도는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오늘도 보다 깊고 넓고 멀리 바라보는 눈과
보다 많은 것을 정확하게 듣는 귀와
보다 사려 깊게 말하는 입과
보다 많은 사람을 포용하는 마음과
보다 주님을/ 닮은 손과 발을 지니게 해 주십시오!’
매일 매일 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더 깊이 알아야 하고
주님의 말씀을 더 많이 들어야 하고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께
매일 매일 제 시선을 고정시키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기도가 이렇게 끝납니다.
‘그리하여 어제의 결과가
오늘인 것처럼
오늘이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발판이 되게 해 주십시오!’
매일매일 그 기도를 드릴 때
주님께서 매일매일 당신의 사랑으로
저와 함께 해 주심으로
30년의 목회를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다고 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들여다 보시고, 우리의 속마음까지 헤아려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당신의 전 존재를, 당신의 전 시간을
우리에게 송두리째 주셨습니다.
내가 주님께 등을 돌리고 주님을 배신하고 있을 때도
주님께서 우리를 무한 신뢰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해 주시기 위해서
외부의 도전에 맞서섰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을 자취하시기 위해
겟세마네에서 자기와의 투쟁을 이기심으로써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분이 그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 사랑을 힘입어서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저는 30년 동안 사랑해야 될 교우님들을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제가 주님의교회에서 목회할 때 강북이 제 집이 있었습니다.
새벽기도에 오기 위해서 알람을 맞춰놓아야 되는데
10년을 살다보면 알람의 배터리가 떨어지는 날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잊어버리고 알람을 세팅하지 않는 날도 있지 않습니까.
제가 깨야 될 시간에
창문밖에서 ‘재철아!’ 하고 부르십니다.
제가 눈을 뜹니다.
알람 시계 배터리가 다 떨어졌습니다.
창문을 열면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깨워주신 것입니다.
어떤 날은 창문을 밖에서 막 흔들어 주십니다.
그 소리에 깹니다.
그 주님의 사랑을 힘입어서 저같이 무능력하고
부족하고 허랑방탕했던 사람이
여러분을 사랑하면서 30년을 목회를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지금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 사랑을 힘입으십시오. 그 사랑 속에 거하십시오.
그 사랑으로
여러분이 사랑해야 될 사람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사랑하십시오.
그 사랑을 힘입어서, 사랑해야 될 사람에게 오늘부터
여러분의 시간을 들이십시오.
사랑해야 될 대상이 지금 비록 여러분의 기대와 예상을 벗어나 있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믿어주셨던 것처럼
무한신뢰하십시오.
그 사람을 바르게 사랑하기 위해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
그 사랑을 무너뜨리려는 외부의 도전에 맞서시고
그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려는
내 자신과 맞서 싸우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가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엮어가는 인생 이야기 책은
멋진 서사책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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