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모델
빌 3:17-18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
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우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자신뿐 아니고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추천하니 그도 본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교만한 자세가 아닙니다. 당시는 이단이 성행하였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유혹도 아주 강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빌립보에 거짓 선지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흔들렸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은 나처럼 예수의 복음을 귀하게 여기며 확신 있게 살아가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강조했습니다. 신앙적인 초보단계를 극복하고 영적으로 성숙한 신자가 되고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이 강해도 신앙을 굳게 지키고 인간적인 조건을 자랑하는 당시 풍조에 휘말리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당시 바울 같은 신앙의 본이 있었다는 것이 축복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런 본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시대나 본뜰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위인들이 본 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위인전을 많이 읽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위인들을 본을 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받는다”라는 말을 “본뜬다"는 말입니다. 옛날 어머니들이 무명옷을 해 입고 살 때 무명천을 놓고 그 위에 본을 놓고 잘라내서 옷을 만들었습니다. 그 본을 오늘은 모델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이런 본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본을 멘토라고도 합니다. 본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인생의 본
인생의 본은 위인들이고 모범자들 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난을 겪고 각고 끝에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인생에 하나의 본이 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그런 위인을 스타라고 했습니다. 별을 스타라고 하는데 위인은 별처럼 떠 있으면 됩니다. 별이 높은 하늘에 떠 있기 때문에 사막에서나 바다 끝에서 길을 잃었어도 별만 보면 방향을 찾을 수 있듯이 위인은 그 시대에 있음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모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위인들로 링컨을 말하고 이순신을 말하기도 합니다.
링컨은 숫한 어려움과 가난 그리고 실패 속에서도 끝까지 도전해서 마침내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이순신은 사심 없이 군인으로 때로는 백의종군하면서 나라를 지켰고 나라를 먼저 생각했던 위인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수세기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인생의 모델로 지칭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위인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아브라함 같은 사람을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신앙지도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 시대마다 본이 있어야 합니다.
삶의 본
사람이 그 삶의 모습이 아주 진지하고 순전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삶의 모델이고 본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슈바이처를 그런 삶의 본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슈바이처는 자라나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상당한 도전을 주었습니다. 그는 그 좋은 기득권과 재능과 입지적인 조건들을 다 버리고 고난의 길을 자초해서 아프리카로 들어가 일생을 인류애를 가지고 희생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삶의 모습을 이야기 하기는 쉽고 말하기는 쉬워도 그런 삶을 살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인류애를 가지고 아프리카를 위해서 헌신의 삶을 살아가다가 죽어 부인과 함께 오늘의 봉고 땅 람바레네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슈바이처가 운영하던 병원에 어느 날 흑인 중병자가 입원을 했습니다. 그 병자가 늘 “나는 곧 죽는다”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기쁨도 생동감도 잃은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병원에 입원했지만 살아난다는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병원 창문 너머로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밭에서 어느 노인이 일을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거룩해 보였고 성스러워 보였습니다. 저 노인은 누구 길래 저렇게 성스럽게 보일까 하고 보다가 자세히 살펴보니까 그 노인이 다름 아닌 지금 자기를 치료하고 있는 그 병원의 원장 슈바이처였습니다. 그 순간 이 병자의 마음에 큰 신뢰와 믿음의 기운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확신하기를 “저 사람이라면 나를 고칠 수 있겠구나, 저 의사라면 나의 운명을 맡겨도 고쳐낼 수 있겠구나”하는 믿음이 마음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뒤로부터 자신의 마음에서 스스로 병이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마음속에서 자연 치료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참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삶의 모습으로 얼마든지 세상에 메시지를 줄 수 있습니다. 특히 그 시대를 살아가는 위인들은 그 시대에 상당한 메시지를 줍니다. 그래서 위인이 있는 사회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사회에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있고 위인이 있고 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업의 본
오늘은 돈만 벌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려고 합니다. 그런 세상은 흔들리기 쉽습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경제도 어느 정도 성장되었고 국력신장도 어느 정도 이루어 놓았는데도 여전히 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살벌하고 속임이 많고 변칙이 많은 것입니다. 이런 때에는 어느 모델이 될 만한 기업가나 재벌이 나서서 본이 되어 준다면 그 영향이 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큰 재벌이나 기업인이 적어서 문제입니다. 그런 때에 김동수 장로 같은 기업가가 있다는 것도 다행입니다. 양심적으로 회사를 경영하고 직원들에게 복지를 향상시켜서 애사심을 갖도록 하고 사세를 건실하게 키워가는 것도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사례입니다. 우리교회 이종활 집사님도 큰 사업을 하고 있는데 김동수 장로님의 사업철학을 듣고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해서 스스로 교회에 찾아와 등록하기도 했습니다. 하나의 사업가로서 본이 되어주었다는 말입니다.
한국의 경제전문가들이 한국에서 가장 존경하는 기업가로 꼽은 사람이 유한양행의 유일한씨입니다. 그는 1896년 평양에서 8남매 중 맏이로 태어납니다. 1904년 9살 때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미국에서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마칩니다. 그때까지 그 이름이 “유일형”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나이가 어렸지만 조국 한국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이름을 “유일형”에서 “유일한”으로 바꿉니다. 그의 뜻을 듣고 그 아버지가 그 네 동생들 이름도 모두 “형”자 돌림에서 “한”자 돌림으로 바꿉니다.
그리고 1926년 31세 때 귀국하여 일제치하의 고국 실정을 목격하고 교수직을 맡기로 왔지만 계획을 바꾸어 민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유한양행이라는 기업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약품을 만들어 유항양행을 일으켜 놓고 1936년에 회사를 전문경영인에게 맡겨놓고 사재를 털어 1954년 교육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때 만든 교육기관이 유한공고와 유한대학입니다. 그리고 그는 총 주식 40%를 공익단체에 기증하고 자신의 소유주식을 사회에 환원하고 1971년 3월 11일 76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세상을 떠날 때 나머지 지니고 있던 집까지 공익재단에 기부하고 빈손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자 20년 뒤(1991년) 그의 딸 유재라 씨가 미국에서 숨을 거두면서 그의 재산도 유한재단에 다 기부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그래서 4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유일한이라는 사람을 사람들이 지금도 잊지 않고 가장 기억에 남는 기업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 분이 별이고 스타이고 모델입니다. 그래서 지금 기업인들 가운데서 유일한처럼 되어 보자하고 철학을 세우고 뜻을 이루기 위해서 힘쓰고 있는 기업인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삼성그룹이 그런 역할을 해 주어야 합니다. 삼성이 그런 역할이나 모델이 되어 주면 이 나라의 많은 기업인들이 보고 배우고 기준삼아 반듯하게 기업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말로는 초우량 기업이라고 하면서도 모질게 기업이익만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국가나 사회에 크게 공헌하면서도 일반적으로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업이 그 정도가 되면 개인차원을 넘어서 공익을 생각해야 하고 국가를 생각해야 하고 이 사회에 미치는 공적 위치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스타가 되고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익만 추구하고 자기 값을 못하니까 원성을 듣고 지탄을 받는 것입니다. 근래에 와서 하도 원성이 많고 지탄을 하니까 고민 끝에 얼마 전에 어쩔 수 없이 8천억 원이라는 막대한 돈을 내놓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항복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그 정도의 돈을 사회에 환원할 생각을 가지고 정도를 걸었더라면 이 세상에 미치는 공감도가 얼마나 크고 기타 기업들이 그 본을 그대로 따랐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해야 할 때 안하니까 어쩔 수 없이 막대한 돈을 내놓고도 공감도 얻지 못하고 빛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나 재능 그리고 달란트나 물질을 적절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다 몰수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물질을 적기에 나누지 않으면 나중에는 억지로 내놓게 됩니다. 그 때에는 내 놓고서도 명분도 잃고 돈도 잃고 빛도 잃게 됩니다.
삼성만 그런 것이 아니고 미국의 재벌 록펠러도 처음에는 아주 무자비했다고 합니다. 록펠러 하면 무자비한 기업사냥꾼, 냉혹한 독점 석유재벌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사회적으로 지탄받고 반독점법 위반혐의로 대법원으로부터 재벌해체명령을 받았을 때 록펠러가 프레더릭 게이츠라는 목사를 만납니다. 게이츠 목사가 록펠러에게 “이 돈을 적절하게 활용하지 않으면 당신과 당신의 손자들이 돈에 치여 죽을 날이 올 것”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고 그때부터 기부에 나섭니다. 그래서 시카고 대학을 짓고, 록펠러재단을 설립해서 30억 달러를 출연하고 1920년 미국이 대공항에 빠져갈 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지어 국가에 헌납했고 2차 대전이 끝난 후 UN이 탄생할 때 뉴욕 시내의 땅을 구입하여 UN부지로 기증했습니다. 그래도 너무 악명이 높아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그 돈 가지고 선행한다 해도 그 부를 쌓으려 저지른 만행을 보상받을 수 없다“고 까지 악담을 했다고 합니다.
자선가 카네기도 처음에는 냉혹한 자본가였고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돈을 번 사람입니다. 그런데 54세 때 중병을 앓고 난 뒤 “재산을 안고 죽으면 천국에서 명패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고 자선에 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미국과 영국에 3천개의 도서관을 지어주었고 카네기재단을 만들어 1.8억 달러를 출연하고 카네기홀, 카네기 멜론대학을 건립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진정한 모델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우리는 그 시대의 기준이고 모델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점을 인식하고 살아갈 때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
또 우리 주위에 신앙적인 모델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꾸만 흔들리는 시대에 일반 신앙인들이 그 모습을 본떠 살게 됩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아주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 4:9).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은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에 대해서 확신과 열정과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본 받으라고 강조합니다.
신앙인에게는 이런 자신감이 중요합니다. 신앙인의 멋이 이 자신감입니다. 사도바울이 얼마나 자신감 있는 신앙인입니까. 그의 신앙고백의 글들을 보면 하나같이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의 달려갈 일을 마치고 믿음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였노라”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
이것이 자신감이고 확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복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살아가는 나를 본받으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부목사들인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보라고 했습니다. 신앙인에게는 이 자신감이 제일가는 자본입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멋이 있습니다. 사업가 코카콜라 사장이 어느 날 TV에 나와 대담하다가 팔뚝을 걷어 보이면서 “지금 내 몸속에는 코카콜라가 흐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코카콜라 회사가 급성장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장의 그 자신 있는 태도가 듣는 이들로 하여금 믿음을 주었고 공감을 주었고 감동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일 싫어하는 소리가 “--하는가 봅니다”라는 말입니다. “지금 밖에 비가 오는가 봅니다” 하고 시적으로 표현하는 방송인들이 있는데 그렇게 하면 시적인지는 모르나 ”지금 밖에 비가 오고 있는데“ 뭐가 ”오고 있는가 봅니다” 입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주님의 은혜로 살아온 것 같습니다” 하고 기도하는분도 있습니다. “무슨 같습니까” 입니까. “주의 은혜로 살아왔습니다”입니다. 전도할 때 “예수 믿어보시지요, 그러면 천국에 간답니다” 그래 가지고 누가 그 말을 믿고 누가 예수를 믿겠습니까. “예수 믿으세요 그래야 천국에 갑니다,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그래야 분명한 복음제시 입니다. 복음은 분명한 것입니다.
어떤 주당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주님은 나를 언제나 감동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늘 나를 행복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때로 나로 하여금 용기 있게도 하시고 나로 유쾌하게도 하십니다. 나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여기 주는 술주자(酒)입니다. 주당도 술에게 이런 확신을 가지고 고백하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앙인이 그렇게 자신감 없이 살아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신앙인 여러분, 우리 신앙인의 최대의 자본은 자신감이고 확신입니다. 신앙인이 가장 멋이 있을 때가 언제냐 하면 이렇게 확신 있는 자신의 신앙을 만 천하에 들어내 놓을 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만 천하에 그의 신앙을 아주 자신 있게 고백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복음에 확신 있게 살아가는 나를 본받아 흔들림 없이 믿음 안에서 살아가라” 그 말입니다. 얼마나 자신 있는 태도입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멋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는 이런 신앙의 모델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먼저 믿은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이 참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 시대에 신앙의 모델이 될 수 있고 기준이 될 수 있고 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의 힘이 세상을 섬기고 헌신하고 서로 도우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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