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망하는 생활
사 40:28-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
질 하여도 곤비하지 아니 하겠고 걸어가도 피곤
하지 아니하리로다.
오늘 설교제목을 “앙망하는 생활“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바라보고 사모하고 그리워하고 앙망함이 있으면 행복 인생입니다. 이것이 없는 인생은 그만큼 무미건조합니다. 세상에 기대가 없고 소망이 없고 앙망하는 삶의 내용이 없는 사람처럼 한심한 사람도 없습니다. 헬렌 켈러라는 분이 귀가 먹고 말을 못하고 보지도 못했던 3중고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앞을 보지 못하니 얼마나 답답합니까“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헬렌켈러가 대답하기를 “육신의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고 기대가 없고 앙망함이 없는 사람이 더 불행하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소망이 있고 기다림이 있고 앙망함이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끊임없이 소망을 주십니다. 또 주님은 우리에게 앙망의 대상이십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서 소망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말씀은 소망의 책이고 비전의 책입니다. 이 성경의 말씀이 지난 2천년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과 희망찬 미래의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까. 죽어가던 사람이 이 말씀을 대하고 살아났습니다. 장래 소망을 잃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이 성경을 통해서 일어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이 말씀은 소망의 말씀입니다. 특히 본문 말씀은 읽기만 해도 신이 나는 그런 말씀입니다. 읽기만 해도 소망이 넘치고 힘이 솟아나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이 말씀을 주신 동기가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붙잡혀 갔습니다. 포로의 삶은 고달픈 생활입니다. 미래가 없는 생활이 포로의 생활입니다. 미래에 기대가 없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내일이 암담한 것이 포로의 생활입니다. 그때 유다백성들은 그 멀리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그날그날을 고달프게 생활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때로 낙심도 했을 것이고 정신적으로 깊이 침체도 되었을 것이고 소망도 잃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불평도 했을 것이고 하나님은 왜 우리를 이렇게 장기간 외면하시고 모른 체 하시는가 하고 탄식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고 낙심하고 불평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 말씀으로 유다 백성들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장차 너희에게 큰 은혜가 임할 것이고 그리고 장차 너희를 위하여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1).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여 외치라, 이제 노역의 때가 끝났고 모든 죄를 사함받았느니라”(2). “말하는 자의 소리여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리라 하라“(6-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더하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 하시나니”(28).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31).
얼마나 소망적인 메시지입니까. 소망은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고난 받고 있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내가 더 좋은 소망을 준비하고 있느니라, 그러니 너희는 곤비치 아니하겠고 피곤치도 아니하겠고 독수리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것 같은 은혜를 입게 될 것이라“하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금년 한해를 이 같은 은혜로 살았으면 합니다. 여기 그 은혜를 몇 가지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회복의 은혜”
본문 29절을 보면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은 참으로 피곤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모두 다 피곤하다고 말합니다. 정신이 피곤하고 육신이 피곤하고 마음이 다 피곤해 합니다. 노동하며 땀을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참으로 고뇌스러운 인생입니다. 그 육체가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하루 종일 땀을 뻘뻘 흘리고 밤이면 골아 떨어져 잠을 잡니다. 그렇다고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일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더 인생이 고달픕니다. 그 보다 더 피곤한 사람은 정신노동자입니다. 정신노동자는 육신 노동자 보다 훨씬 더 피곤하고 고통이 큽니다. 그 보다 더 큰 피곤한 사람은 영적으로 피곤한 사람입니다. 미래가 불투명하고 장래가 불안하고 육체의 종말이 가까워 오는 사람이 당하는 영적인 고뇌와 고통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거기에 유다백성들 처럼 나라를 잃고 미래를 빼앗기고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고통은 더욱 클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이사야 40:29절을 보면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가면 이 능력이 주어진다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왜 그렇게 피곤하냐 하면 하나님을 떠나 살기 때문에 피곤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살면 피곤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하나님 곁을 떠나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유다백성들이 지금 왜 포로로 고난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백성들이 지금 온갖 고난을 다 당하고 피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면 무슨 수가 주어지는 줄 알고 사람들이 하나님 곁을 떠나지 못해서 안달하는데 그 결과 돌아오는 것은 피곤한 삶 뿐 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의 길이 피곤하고 자꾸만 갈등의 요인들만 발생합니다.
여러분, 오늘 미국이라는 나라를 보십시오. 미국이 옛날 신앙이 얼마나 좋았던 나라입니까. 미국이 청교도의 나라가 아닙니까. 돈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새겨 넣은 민족이 미국입니다. 미국의 공공건물 마다 현판으로 십계명을 새겨 세워 놓은 나라가 미국입니다. 그리고 성조기 앞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선언문을 써 놓은 나라가 미국입니다. 추수감사절은 년중 가장 큰 명절로 지키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성탄절이 돌아오면 온 나라가 축제로 지키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그랬던 미국이 오늘 신앙의 깊이가 자꾸만 얕아가고 형식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조상들이 공공건물 앞에 십계명을 새겨 세워놓은 현판을 이제는 자꾸만 제거해버리자는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국기 앞에서 하는 충성 선언문도 제거하자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미국도 그들의 조상 청교도들이 다져놓은 신앙의 기초가 자꾸만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고 미국은 주일의 명칭을 지금까지 400년 동안 4번이나 바꾸었습니다. 처음 미국인의 조상 청교도들이 나라를 지킬 때는 주일을 “거룩한 안식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60년 전부터 주일을 그냥 “안식일”이라고 고쳐서 불렀습니다. 그리고 30년 전부터는 주일을 “일요일”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다가 오늘은 주일을 “위크앤드”(Weekend)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는 오늘 미국인들이 주일생활을 어떻게 지키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주일은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하나님을 앙망하는 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잘 나가던 미국이 오늘 이렇게 피곤한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피곤한 나라가 되었습니까. 가는 곳 마다 삼엄한 경비를 서야 하고 언제 테러를 당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외국에 갈 때에는 늘 긴장해야 하고 사방으로부터 증오와 미움과 견제를 받는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원칙을 지켜 살아가는 삶은 은혜의 삶이고 회복의 삶이고 평안의 삶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앙망하는 삶을 살라고 대 원칙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함이고 평강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면 하나님이 주시는 그 평강의 삶도 따라서 주어질 것인데 그 원칙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니까 모두 피곤한 것이고 갈등이 오는 것입니다. 주일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날입니다. 예배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영향력을 입는 날입니다. 그래서 위로받고 사랑을 힘입고 하나님을 체험하고 피곤한 영혼을 회복하는 날이 주일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피곤한 자에게 회복을 주시는 영이십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피곤한 자에게는 회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새 힘을 주심”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에게는 회복 뿐 아니고 새 힘도 주십니다. 피곤이 회복되면 곧 새 힘이 솟아납니다. 그래서 본문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새 힘을 주신다“(31)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그곳에 회복이 일어나고 새 힘이 주어지고 변화가 일어나고 새 소망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성령의 감화를 입는 살아가는 생활이 은혜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때로 바람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이 바람과 같이 모여 기도하는 곳에 불어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바람이 불면 분위기가 일신되고 새 기운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태풍이 불고 지나가면 공기가 맑아지고 하늘이 맑아지지 않습니까. 여기 이 공간 안에 공기가 가득 차 있는데 이 공기는 오염이 되어 있습니다. 여름 무더울 때의 공기는 탁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오존 주의보가 발령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공기를 마시고 사는 사람들은 정신이 피로해지고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그때 그곳에 강한 바람이 한번 불고 지나가면 아주 맑은 공기로 다시 채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강한 바람과 태풍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바람이 없으면 사람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자살이 많기로 이름난 곳이 런던이라고 합니다. 런던이 왜 자살률이 높은가 하면 안개 때문입니다. 안개가 자주 도시를 덮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항상 우울하고 밝지가 않습니다. 만일 그때 그 도시에 강한 바람이 한번 불고 지나가면 도시를 덮고 있던 답답하게 끼어있는 안개를 몰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바람이 없기 때문에 그 도시가 항상 음산하고 안개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살률이 높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영적 생활에서도 이 바람의 역할이 참 중요합니다. 이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에 새로운 희망이 솟고 각오가 솟고 새 힘이 솟게 됩니다. 그 바람을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하면 예배를 통해서 얻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삶에서 예배가 기초이고 기본입니다. 예배 때 은혜가 주어지고 성령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임재와 내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임재가 내 상한 마음과 찌든 생각을 고치고 치유하고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새 힘을 주신다”(31)고 했습니다.
“능력을”
본문을 보면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 하신다”고 했습니다. 무능한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용기가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있을 때 가장 안정이 되고 만족함이 주어지고 강해집니다. 엄마가 감옥에 있어도 아이에게는 그것이 상관없습니다. 그곳에 엄마만 있으면 그만입니다. 아이에게 있어서 엄마는 가장 큰 배경이고 후원자이고 빽이고 보호자이고 하나님과 같은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언제가 가장 강할 때이고 안정을 찾을 때겠습니까.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하나님과 연결된 삶을 살아갈 때가 가장 능력을 입고 살아갈 때입니다. 그때 영적으로 소망을 입고 힘을 얻게 됩니다.
로드 브라이스(Lord Bryce) 라는 사람이 “어째서 훌륭한 사람들이 대통령이 안 되는가“(Why Great men are not president)라는 책을 썼습니다. 미국 대통령에 입후보한 사람은 대체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단 대통령이 된 후에는 모두 훌륭한 인물이 되는 경우 많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한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대통령이 앉는 자리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자리에 앉으면 시야가 넓어져서 2억 4천만 명의 국민을 바라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를 보는 눈과 안목이 넓어진다고 했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그런 사명을 갖게 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사명감이 고상하고 높을수록 사람은 더 훌륭한 인물이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무능한 사람도 하나님께로 갈 때 큰 인물이 됩니다. 베드로도 어부출신인데 예수께로 갈 때 세계적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마태도 세리였던 사람이 예수께로 갈 때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엘리사는 농부였는데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할 때 큰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 134:2-3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찌어다.” 여기서 말하는 성전을 향하여 손을 드는 삶, 그 삶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된 삶입니다. 거기서 새 힘이 나오고 능력이 주어집니다.
사람은 너무 쉽게 피곤해 하고 지치고 포기하고 쉽게 낙심하기 쉬운 존재입니다. 어제는 천하를 다 얻은 것처럼 고무되어 있다가도 오늘은 또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낙심되어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조그만 일에 고무되고 조그만 일에 낙심하고 실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성령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성령의 은혜는 그렇게 지치고 피곤해 하고 낙심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그 능력은 우리에게 피곤하지 않게 하시고 무능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시고 언제나 새로운 힘을 얻게 하십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살아나게 하시고 죽은 육체가 부활하게 하시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영과 함께 하며 살아갈 때 주어지는 은혜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하지 아니 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것이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근본적인 은혜이고 능력이고 소망입니다. 이 같은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은혜와 소망이 금년 한해를 살아가는 동안 순간 마다 여러분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 그대로 나타나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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