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있는 자리
마 5:29-30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
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
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
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우리나라는 오른편 자리와 오른 손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리를 말할 때 오른편 자리는 왼편 자리에 비해서 상석입니다. 그래서 정승도 좌의정 보다 우의정이 높은 직급입니다. 행사시 오른 편에 앉는 것도 높은 직급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자리에 신경을 많이 쓰기도 합니다. 또 우리나라는 오른 손을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왼손잡이를 못하게 하였습니다. 왼손잡이는 어쩐지 어설프게 보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경에서도 오른 편, 오른 손 이야기가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오른편 자리와 오른 손에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은총의 자리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는 하나님의 오른 손으로 붙들림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오른 손에 붙잡힘 그것 자체가 복이고 은혜입니다. 창세기 48:14절을 보면 야곱이 손자인 요셉의 두 아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안수를 했습니다. 그때 야곱은 작은 손자에게 오른 손을 얹고 큰 손자에게 왼손을 얹고 기도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손을 바로잡으려 했지만 야곱은 그렇게 기도를 마쳤습니다. 그 결과 장자권이 작은 손자에게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오른 손이 능력의 손이고 복을 주는 손입니다. 그래서 시편 17:7절을 보면 “주께 피하는 자들을 오른 손으로 구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편 73:23절에서는 “주께서 나를 오른 손으로 붙드시나이다” 하고 고백하였고 시편 60:5절을 보면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오른손으로 건지시고 구원하시고 응답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41:10절을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나는 네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구원하실 때는 모두 오른 손으로 구원하시고 안수할 때에도 오른 손으로 했습니다.
우리들이 부름 받은 것도 모두 주님의 오른 손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오른 손에 붙들려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최상의 복이고 은혜입니다. 한 해 동안 무엇보다도 주님의 오른 손에 붙들려 인도받고 살아가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순종의 자리
신앙생활에서 아주 필요한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순종의 요소입니다. 순종의 생활을 하려면 결단이 필요합니다. 결단력이 있을 때 순종의 삶이 가능해집니다. 내가 신앙인으로서 순종의 삶을 이루려면 지혜와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순종의 삶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전도서 10:2절을 보면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어리석은 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다”고 했습니다. 순종자는 늘 오른편에 있습니다. 그 오른편은 주님이 계신 자리입니다. 그런데 불순종자는 언제나 왼편에 있습니다. 그 자리가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자리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주님께 나의 의지를 순종시키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삶에는 이 순종의 삶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33절을 보면 “양은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라고 했습니다. 오른편은 순종의 사람이 있을 자리입니다. 그리고 왼편은 불순종자가 있을 자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양은 순종자의 모형이고 염소는 불순종자의 모형입니다.
요한복음 21:6절을 보면 제자들이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그때 그곳에 주님이 오셔서 “오른 편에 던져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순종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밤새 그물을 던진 사람들이 오른편 왼편 얕은 곳 깊은 곳에 던져보지 않았겠습니다. 이제는 너무 지쳐서 고기가 잡힌다 해도 귀찮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 말씀에 순종하여 또 다시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그물 가득히 잡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른 편은 순종이 요구되는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오른 편은 복을 받는 자리이고 은혜를 입는 자리이고 그물 가득히 잡히는 자리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삶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삶은 순전히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의지와 주장과 생각을 드리는 삶입니다. 때로 내 뜻이 옳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때로 내 생각이 옳게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수지맞고 일이 성사되고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이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님의 뜻에 비추어 보니까 그것은 할 일이 아닙니다. 수지가 맞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때 그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판단될 때 그것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용기의 삶, 그 삶이 순종의 삶입니다.
순종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이런 것입니다. 제자들이 밤새 그물을 이곳저곳 다 던져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한 마리도 잡히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치고 피곤해 졌습니다. 이제는 잡힌다 해도 귀찮습니다. 그래서 그물을 씻고 철수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오셔서 오른 쪽에 한 번 더 던져 보라고 하십니다. 그때 보통 사람들이라면 “다 해 보았습니다, 던져보아도 소용없습니다”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밤새 그물을 던진 사람이 오른 쪽 왼쪽 던져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다 해보았습니다, 해도 소용없습니다”가 아니고 “말씀에 의지하여 한 번 더 던져보겠습니다” 그것이 순종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종에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때 그물 가득히 잡히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른편은 “순종의 자리”입니다. 신앙의 삶은 100% 순종의 삶입니다.
승리자의 자리
오른 편은 승리자가 앉는 자리입니다. 에베소서 1:20절을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 오른 편에 앉히셨다”고 하였습니다. 또 히브리서 1:3절을 보면 “주께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을 만합니다. 왜냐하면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온갖 고난을 다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당연히 하나님 우편에 앉아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절을 보면 “주께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승리자는 오른 편에 앉습니다. 오른편은 승리자가 앉는 자리이고 실패자가 앉을 자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을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우편은 면류관이 주어지는 자리입니다. 순교자들이 앉을 자리가 오른편 자리입니다. 헌신자들이 앉을 자리가 오른편 자리입니다. 승리자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여기 면류관이 바로 오른편 자리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최대의 목표는 이 오른편이어야 합니다. 그 목표 때문에 오늘 헌신하고 수고하고 믿음을 지키고 인생을 바치고 때로는 목숨까지도 바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른 편에 영광이 있고 상급이 있고 면류관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이런 목표가 있기를 바랍니다.
책임 있는 자리
본문을 보면 “오른 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른 눈이 너로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실제로 찍어버리고 빼어버리라는 말이 아니고 세상을 책임 있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즉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는데 장애가 되고 방해되고 신앙생활 하는데 방해되는 일들이 있으면 과감하게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책임 있게 살려고 하면 자꾸만 내 마음에서 방해되는 요소들이 꿈틀거립니다. 그것이 요령이고 꾀이고 거짓이고 수단입니다. 이것들이 자꾸만 나를 유혹합니다. 오늘 우리나라는 가장 시급하게 극복하여야 할 것이 이 정직성의 회복입니다. “적당히”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제는 과학의 세계에 까지 적당이의 문화가 침투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찍어버리는 것이고 빼어 버리는 것입니다.
때로 취미가 신앙 생활하는데 방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취미도 과하면 영적생활 하는데 폐가 되고 장애가 됩니다. 그것도 과감하게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또 술이 신앙생활을 크게 방해합니다. 실제로 술은 영적생활 하는데 막심한 방해를 합니다. 자꾸만 결심을 흔들리게 합니다. 술에 자주 취하는 생활을 해서는 신앙생활 그리고 절도 있는 삶이 방해를 입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그것조차도 과감하게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결단의 생활이고 찍어버리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서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후회가 없고 부끄러움이 없고 실패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니면 예수님이 욕을 먹습니다. 전도도 못하면서 걸림돌 역할만 하게 됩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니면 비난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른편 자리를 빼앗기게 됩니다. 그러면 다 빼앗기게 됩니다. 자리도 빼앗기고 영광도 빼앗기고 빛도 빼앗기고 은총도 다 빼앗기게 됩니다.
그래서 자릿값을 해야 합니다. 양질의 과수원에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러면 좋은 포도열매가 열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가 좋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포도나무가 무사하겠습니까. 2,3년 기다려 보았다가 뽑아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 자릿값을 해야 합니다. 대통령이 자릿값을 못하면 아무리 일국의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장관도 자리 값을 못하면 곧 물러나야 합니다. 장로는 장로의 자리 값을 해야 합니다. 권사는 권사의 자리 값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자리 값을 해야 합니다. 모두 그 수준에서 자리 값을 하고 이름값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의무이고 자질이고 능력입니다. 값을 못하게 되면 마침내 찍혀 버리게 됩니다.
엊그제 사학수호 결의대회를 했습니다. 지금 사학개정법 때문에 사학이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영락교회에 7천여 목회자들이 모여서 수호대회를 열고 모두 걸어서 시청 앞까지 시위를 벌렸습니다. 저는 생애 처음으로 그 시위대에 끼어서 걸어 보았습니다. 지금 사학이 처한 여건이 너무 위기이기 때문에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사학은 1.7% 정도가 비리학교로 연루되어 있고 나머지 98% 학교들은 비교적 건전하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립학교를 공립화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정권이 사회주의에서나 가능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독재정권 때도 없었던 일을 지금 감행하고 있습니다.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보면 사외 이사제도를 두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사외이사를 두게 되면 종교가 다르고 사상이 다른 사람들이 들어올 확률이 높습니다. 교사회에서 선출하고 학부모회에서 선출해서 선발하게 되어 있으니 그곳에 지금 한창 문제가 되어 있는 전교조가 들어 올 수도 있습니다. 전교조는 친북성향입니다. 반미성향입니다. 그리고 반기독교 적입니다. 사립학교 중 종단에서 세운 사립학교들은 치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단에서 세운 사립학교들이 평준화 이후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제는 더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사유재산의 공립화가 문제가 아니라 설립목적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 것입니다.
지금 정부에서는 마음먹고 우리사회를 좌경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4대 법안을 통과시키려 안달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 법안이 언론법의 개정입니다. 이제 언론은 완전히 장악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법안이 역사바로세우기입니다. 그 결과 반국가 사범을 영웅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애국지사들을 흠집 내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미전향 장기수들이 영웅으로 떠받들림을 받고 있고 모두 전사로 의사로 양심수로 민주화 인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세 번째 법안이 사립학교 법 개정입니다. 이 법이 시행되면 이 땅의 사립학교들은 몇 년 안에 좌경화된 교사들의 손에 넘어갈 것입니다. 학교 이사에 사외이사 한 두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이사 가운데 한 두 사람 이질적인 사람이 들어와 이사회의 결과를 승복하지 않고 끝까지 이의를 걸면 문제학교로 인식되어 학교장은 파면되고 관선 이사들이 들어 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학교는 설립이념이나 설립자들의 손에서 순식간에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오늘의 사립학교들이 부정이 있으면 현재의 법으로도 얼마든지 징계가 가능하고 바로 잡을 수 있는 수단이 있음에도 이사제도의 개정으로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보안법이 있습니다. 조만간에 이 법안도 통과시키고 말 것입니다. 이미 정부 내 요직은 반한 친북인사들로 배치가 끝난 상태입니다. 군의 주적 개념은 이미 없어진지 오랩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주적이 누군지도 모르고 저 군인들이 복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공수사기능이 축소되었습니다. 문제는 야당입니다. 야당이 국회 안에서 효과적으로 이를 막지 못하고 기회를 다 놓치고 나서 시대에 한창 뒤떨어진 장외투쟁을 벌리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야당을 믿고 있는 이 시대의 국민들의 모습이 얼마나 한심스럽습니까.
이런 때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이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약점을 보이면 안 됩니다. 몇 명의 기독인들이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돈 때문에 눈이 멀거나 부정해서 사학을 운영하는 바람에 이렇게 전국적으로 빌미를 주어 난리를 피우고 있습니다. 한사람이 문제입니다. 그 한사람 때문에 전체가 불이익을 당하고 욕을 먹고 빛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어느 시대나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금년은 이 말씀을 생각하며 살았으면 합니다. 전도서 10:2을 보면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어리석은 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오른 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그리고 네 눈이 너로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고 했습니다.” 눈과 팔을 가지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 보다 불구로 천국에 가는 것이 낫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그 시대를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살면, 금년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기록에 남을 만한 그런 한해가 되도록 살아가십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힙 입고 주님의 오른 손에 붙잡혀 힘 있게 살아가는 한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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