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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행복/ 눅 2:22-33

by 【고동엽】 2022. 1. 10.

기다림의 행복

 

 

눅 2:22-33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

 

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여러분, 기다림의 행복이 어떤 것인가 아십니까. 옛날 설날이 다가오면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고 좋았습니까. 설날 당일 보다 설날을 기다리는 1주일 전이 더 좋았습니다. 그래서 설날에 입을 옷을 매만지며 손꼽아 기다리던 기억들이 생각납니다. 그것이 기다림의 즐거움이고 행복입니다. 그런데 막상 설날이 되면 하루가 너무 빠르게 지나버렸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허망하기까지 했습니다.

 

결혼하는 젊은이들은 결혼 당일보다 결혼 날을 받아놓고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이 더 행복하고 좋을 것입니다. 결혼하는 젊은이들은 막상 결혼해서 살면 그날부터 전쟁인줄도 모릅니다.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 동안 금식하기 위해서 굶습니다. 그 때는 먹고 싶은 생각이 절절이 느껴집니다. 그 때는 먹고 싶은 욕구가 얼마나 강렬하게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온갖 유혹이 다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막상 금식을 끝내고 음식을 먹고 나면 또 별 것도 아닙니다. 그때 느끼는 심정은 이것 때문에 그렇게 안달했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기다림, 이것은 참 행복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오직 세상에 대한 사랑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약속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당시 억압받는 삶을 살아가던 유대인들에게는 이 약속은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이제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가 오지 않았느냐” 하고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가 오시기만 하면”하고 모두 큰 기대를 했습니다. 그가 오시기만 하면 모든 고난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 그 기다림의 마음들이 얼마나 뜨겁고 간절했겠습니까. 그때 나라를 걱정하고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던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메시야의 오심을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때 메시야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들 중에 안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36절을 보면 안나라는 여인은 결혼해서 남편과 7년을 살고 사별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혼자된 지 84년 동안 혼자 살면서 메시야가 오시기를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오직 이 여인은 나라를 위해서,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이 땅에 메시야가 오시기를 고대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여인이 결례를 행하기 위해서 성전에 온 아기 예수를 품에 안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날 그에게 주어졌던 감동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리고 또 한사람은 오늘 읽은 본문에 나와 있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도 나라를 걱정하고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밤낮 기도하면서 메시야의 오실 것을 고대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진지하고 경건하게 밤낮 기도했던지 성령으로부터 “태어나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마침내 정결예식을 받기 위해서 성전에 온 어린 예수를 품에 안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때 시므온은 어린 예수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그 말은 “이제는 이 민족의 앞날에 대해서 더 이상 염려 안 해도 되겠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진정한 애국자요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조용히 금식하며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모습이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나라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보면 너무 시끄럽고 요란합니다. 딴에는 나라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떠들겠지만 곁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면 나라사랑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모두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진정 나라를 사랑하고 애국하는 사람들은 자기 할 일을 다 하며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기 시므온이나 안나라는 여인이 진정한 애국자이고 민족을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조용히 성전 지하에 숨어 주의 도래를 기다리며 눈물로 금식하며 기도하기를 “주여 당신이 오실 때가 언제입니까, 언제까지 이 백성이 이렇게 고난을 받고 압박을 받아가며 설움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까”하고 자신의 평안이나 가정의 평안도 포기하고 평생 수절하며 기도하는 그 모습, 그 모습이 진정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진정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염려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진지했으면 성령께서 어느 날 오셔서 “염려하지 말라, 네가 죽기 전에 그를 보게 되리라”하고 계시를 해 주었겠습니까. 정말 열심히, 경건하게 나라를 사랑하고 생각하고 염려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그를 격려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간절한 모습을 외면할 리가 없습니다. 우리들도 열심히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문제는 응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이유는 모두 내 뜻을 위해서 기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전히 나에게 집중된 기도만 하니까 고생하고 수고롭게 금식하며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일 것입니다.

 

 

 

 

여기 이 시므온과 안나가 그렇게 여러 해 동안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약속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임이라” 이 약속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약속입니다. 장차 이 땅에 메시야가 탄생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 메시야가 탄생하면 높은 곳이 낮아지고 억눌린 민족이 자유해지고 어린 양이 이리와 함께 뛰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메시야 오시기를 사람들이 얼마나 기다렸겠습니까. 약속이 있는 사람은 기다리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다림의 행복입니다.

 

아브람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황량한 들판을 걸으면서도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날마다 황량한 들판을 바라보면서도 꿈을 꾸며 살았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혀 기약 없는 수형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지난날에 보여주셨던 꿈들을 생각하며 그 꿈이 언젠가 현실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기다렸습니다. 그것이 약속이 있는 사람의 행복함입니다. 농부들이 씨를 심어놓고 새싹이 나오고 꽃이 피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기뻐하는 마음만큼이나 행복한 것입니다.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때로 주어지는 고난도 기쁘게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집니다. 고난을 기쁨으로 소화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고난을 모두 소망적으로 해결되리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당시의 고난을 잘 이겨냈고 그 고난 속에서도 자존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지배를 받고 살았지만 오히려 로마인을 우습게 바라볼 수 있는 자존심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조상이 그랬듯이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하는 노래를 부르며 살았을 것입니다. 약속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같은 힘이 있고 용기가 있고 행복함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약속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 축복이고 행복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장차 주어질 천국에 대한 약속 때문에 바울이 얼마나 자신만만하게 살아갑니까. 그는 죽음 앞에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약속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당당하고 의연합니까. 그것도 그에게 주어진 약속 때문입니다. 폴리캅이 불에 타 죽어갑니다. 그의 절친한 친구가 와서 “로마황제도 신이라는 말 한마디만 하게, 그리고 죽음을 모면한 다음에 회개하면 하나님이 너의 입장을 참작하지 않으시겠나” 하고 회유할 때 폴리캅은 대답합니다. “그렇게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기 보다는 차라리 의연하게 죽음의 길을 택하겠다.” 그리고 그는 초연한 모습으로 불에 타 죽어갑니다.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옵니까. 그것도 그에게 주어진 약속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약속이 주어진 사람에게는 이런 용기가 주어집니다. 그것이 신앙이 주는 용기입니다. 이 용기가 나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마침내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펼치게 되는 것입니다.

 

엊그제 어느 기사를 보니까 김우경 검사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이 젊은 검사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는 늘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음속에 이 땅의 방황 대는 젊은이들을 위한 어떤 일을 해야 하겠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저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할 일을 해야 하는데” 그리고 그는 오늘 검사의 삶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매일같이 사람을 죄인으로 추궁하고 죄의 올가미를 씌워 재판에 부치는 이 일에 회의가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이 땅의 방황 대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길을 인도해 주는 사역을 위해서 마침내 미래가 창창한 검사직을 버립니다. 모든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그는 그 자리를 새로운 사역을 위해서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출세의 길을 가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판인데 이 분은 용기 있게 그 자리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을 위한 사역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 자리를 용기 있게 버릴 수 있었던 것도 자기에게 주어진 이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속이 있고 기대가 있고 미래가 있다는 것이 이렇게 소중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그것은 약속이 없는 사람입니다. 약속이 없는 사람은 현실에 안주하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이 있는 사람들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며 유대인의 자존심을 지키며 오늘인가 내일인가 기다리며 기도하고 고대했습니다. 그래서 안나와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약속이 없는 사람들은 현실에 매여 살아갔습니다. 당시 로마 치하에서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현실에 충실해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충성하고 온갖 혜택을 받고 현실에 안주해서 살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삭개오 같은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그에게 있다면 오직 현재만 있었습니다. 독립에 대한 생각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동족도 민족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동족에게도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모아서 로마에 바치고 자신은 구전을 챙겼습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동족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완용도 생각해 보니까 조선이 강한 일본으로부터 독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 어디를 보아도 조선이 독립할 기운이 엿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친일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에 절대 충성하고 온갖 혜택을 받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기다림이 없고 꿈을 잃고 기다림의 소망이 없으면 현실주의자가 됩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의 나라에서 포로생활을 합니다. 몇 년간은 돌아가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보니까 돌아간다는 희망은 사라졌습니다. 불가능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중 한 부류는 그래도 우리는 돌아가야 한다는 희망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짐 보따리를 풀지 않고 오늘인가 내일인가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미래를 포기한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판단을 하고 현실주의자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보따리를 풀고 현지인과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사업에 몰두하고 터전을 이루어 안주하며 살아갔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비전을 잃으면 이렇게 됩니다. 사람이 꿈을 잃고 산다는 것은 이렇게 현실주의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도 오늘 이 세상에서 이 꼴이 되어 살아가기 쉽습니다. 신앙인이 천국에 대한 미래와 꿈이 없으면 이렇게 오직 현실에 집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일도 지키지 못하고 현실에 집착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 날 그날이 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해방이 온 것입니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갑자기 어느 날 해방이 왔습니다. 모두 집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때 오늘인가 내일인가 하고 기다리던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짐 보따리를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돌아가면서 그들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얼마나 발걸음 가볍게 고향을 향해서 돌아가겠습니까. 이것이 약속이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약속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땅에 천년 살 것처럼 정착하고 가정을 이루고 터전을 이루어 살던 사람들이 고민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갈 수도 없고 안 갈 수도 없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자니 붙잡는 현실이 너무 무겁습니다. 처자들이 붙잡았습니다. 사업이 그들을 가지 못하게 붙잡았습니다. 힘들게 마련한 집이 그들을 붙잡았습니다. 그렇다고 막상 여기 남으려니 여기는 타향입니다. 여기는 내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정쩡하게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그냥 남아있는 사람들이 흩어진 유대인들, 버려진 자들입니다.

 

예수께서 탄생하리라고 많은 사람들이 약속을 믿고 모두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기다리던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700년 동안 기다리던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는데 아무 징조도 소리도 없이 오셨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그때 하늘에서 천군천사들의 합창소리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고 멀리서 동방박사들이 찾아왔고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찾아 왔습니다. 얼마나 요란했으면 그 멀리서 사람들이 다 찾아왔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조용했습니다. 아무 소리도 징조도 꿈도 없었습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요란하고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요란한 징조가 있었어도 그 소리들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소리만 들리지 않은 것이 아니고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약속이 없는 사람이 불행한 것입니다. 약속이 없으니까 기다림도 없는 것입니다. 이 다음 예수 재림 때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날도 어느 날 갑자기 올 것이 분명한데 그날도 이 같은 현상이 발생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기다림이 무엇이고 약속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시므온과 안나라는 노인들이 매일같이 금식하며 철야하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 땅에 오신 그 예수님을 품에 안아보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모습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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