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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정신의 문화! (창 4:16-26)

by 【고동엽】 2022. 1. 26.

두 정신의 문화! (창 4:16-26)

 


세상에는 두 문화의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 중심의 문화입니다. 이 문화가 나중에는 세속 문화로 발전해서 마침내는 물질 문화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 중심 문화입니다. 이 문화가 경건문화로 발전해서 나중에 정신 문화로 발전했습니다. 이 두 문화는 창세기 때부터 계속해서 흐르고 있습니다. 이 두 문화가 흐르면서 때로는 서로 대치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갈등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보면 세속 문화가 이 땅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이고 인간중심적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한쪽에는 극히 정신적입니다. 거기에 경건이 있고 신앙이 있고 신 중심적인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언제나 이 두 문화가 서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속에도 한쪽은 세속 문화를 따르려고 하는 속성이 들어 있꼬 또 한편에서는 정신문화를 따르려고 하는 마음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의 나의 모습은 경건하고 신앙적인 것 같으면서도 또 어떤 때는 나 자신이 극히 세속적일 때도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아담에게는 두 아들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담이 930세를 살았는데 아들이 둘만 있었겠습니까? 수도 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당시 할 일은 자손을 번식시키는 일이 가장 컸던 시대입니다. 아담에게는 셀 수 없을 만큼 자손이 많았을 것입니다.
다만 성경은 그 많은 자손들 중에서 두 아들만 소개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인간 중심의 대표로서 가인을 소개하고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 중심의 대표로서 아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고 또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인생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미래를 구상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 인간상을 통해서 우리들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 인간 중심의 문화입니다.

 

성경은 인간 중심의 대표로서 아담의 첫 아들인 가인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가인은 철저하게 인간 중심적인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신이란 없습니다. 있는 것은 오직 힘과 무력과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것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발자취를 보게 되면 지극히 인간적입니다. 그리고 현세적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그의 자손대에 가서도 계속해서 그 문화가 그대로 전해져 내려갑니다. 그래서 가인의 후손들을 보면 모두가 세속적이고 인간적입니다. 세속 문화가 대를 이어 존속되어 내려갑니다. 그 자손들의 모습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의 7대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7대손은 그 직업이 농업과 예술과 상공업자들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이 있다면 가인의 후손들은 모두 물질이 풍부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후손들은 물질 문명을 만들어 냅니다.
성경을 보면 가인의 자손을 소개하고 있고, 셋의 자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 그려냐 하면 여기서 성경은 인간 중심의 자손들의 결국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고, 경건 중심의 자손의 끝이 어떤 것인가를 대조해서 보여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먼저 가인의 가계를 보면 별로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특징도 없습니다. 다만 성경을 보면 6대손 라멕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라멕이라는 사람이 세 아들을 낳습니다. 라멕이 세 아들을 낳아 놓고는 각각 이름을 짓는데 그 모습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큰 아들은 이름이 야발인데, "움직이는 자"란 뜻으로 나중에 목축럽의 조상이 됩니다. 둘째 아들은 이름이 유발인데 "피리 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아들이 후에 예술 창시자가 됩니다. 그리고 셋째 아들은 이름이 두발가인인데,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란 뜻입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금속공조합을 설립합니다.
이 세 아들의 이름을 보면 신앙적인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순전히 물질 문명적입니다. 그 시조 가인의 이름이 "대장장이"듯이 그 후손들이 다 그렇습니다. 그 인간적인 분위기가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 갑니다. 아주 지극히 가인의 분위기로 충만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름도 잘 지어야 합니다. 한 가정의 자녀들의 이름을 보면 그 아이들의 이름 속에 그 가문의 정신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들의 마음이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가정의 분위기가 엄숙하다든지, 아무 생각이 없는 가정이라든지, 장난기가 있는 집안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희한한 이름만을 골라서 발표한 것을 보니까 어떤 사람은 아들 이름을 짓는데 "아쿠마"라고 지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악마"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을 들고 와서 호적에 등재하겠다고 하니까 지방 법원에서 거부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버지가 소송을 걸어서 승소해 가지고 기어코 아들 이름을 악마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 이름은 "제왕"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돌림자로 이름을 지었는데 큰 아들 이름은 "원자 폭탄"이라고 짓고, 작은 아들 이름은 "수소 폭탄"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특이한 이름은 "빨주노초파남보"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을 낳아 놓고 이름을 그렇게 지었습니다. 그 자녀들의 이름만 보아도 그 가문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 부모들의 생각이나 정신이 어떤가를 거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니의 6대손 라멕이라는 사람이 아들을 낳아 놓고 찬가를 부릅니다. 이 찬가를 보면 가인의 후예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23절을 보면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이것이 노래의 서두입니다. 여기서 "아내들이여"하고 복수로 아내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다와 씰라여"이것은 라멕의 두 아내 이름입니다. 이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을 보면 더 한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하고 노래합니다. 이 집안이 이렇습니다. 초대 할아버지 가인은 동생을 죽였고, 라멕은 기분 나쁘다고 이웃집 소년을 죽였습니다. 그것을 또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로 지어서 부르고 있습니다.
그 다음이 거 가관입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하고 노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반상입니다. 빈정댐입니다. 이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 중심의 문화를 보면 거기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을 거역하고 신께 방항하고 인간적인 것을 매우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수단을 우선시 하고 목적이 우선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자세에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이 같은 영향은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영향은 자자손손으로 이어져 내려가서 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아주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 중심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게 됩니다.

 

2. 하나님 중심 문화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중심 문화의 대표로 아벨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아벨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자입니다. 아벨을 보면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게 됩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면 모함과 질투와 시기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순교를 할 수도 있습니다.
아벨은 어떤 면에서 보면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는 인류 최초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것도 자연사가 아니고 타살로 죽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형의 손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아담도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자식 때문에 속을 많이 썩었던 사람입니다. 큰 아들은 살인자입니다. 반항아입니다. 문제아입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은 태어나서 얼마 살지도 못하고 피살되어 죽습니다. 그것도 큰 아들의 손에 말입니다.
여기 보면 아벨의 죽음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창피스러운 죽음입니다. 인류 역사상 첫 죽음이 형이 동생을 죽인 죽음입니다. 아버지는 죄를 짓고 낙원에서 쫓겨났고, 큰 아들은 동생을 죽인 살인자로, 작은 아들은 형의 손에 죽었습니다.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역사입니까?
그런데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 죽음은 한편 영광스런 죽음입니다. 두 형제가 하나님께 한날에 각기 제사를 드렸습니다. 형은 곡식단을 가지고 제사를 드렸고, 아우는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그때 가인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동생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도 나처럼 곡식단으로 제사를 드려라." 그때 아벨이 뜻이야 어떻든 "살려달라. 하라는 대로 할테니 죽이지는 말아라"하고 시키는 대로 했더라면 죽는 일까지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그날 무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이 반항했을 것입니다. "나는 죽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는 못한다."고 우겼을 것입니다. 신조를 지키기 위해서 끝까지 고집을 부렸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화가 난 가인으로부터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아벨이 왜 죽었는가 하면 신앙 지조를 지키다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최초의 죽음은 순교의 죽음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아벨의 죽음은 수치스런 죽음이 아니고 지조를 지키다가 순교한 영광스런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모두 끝입니까? 아닙니다. 여기 보면 아주 통쾌한 하나님의 보상의 법칙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이 있었던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화려한 보상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그것이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아벨이 죽자 하나님은 그 보상으로 아담에게 "셋"이라는 아들을 주십니다. 아벨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를 대신한 또 하나의 생명이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이 셋이 커서 아벨을 대신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 셋은 아벨이 그랬듯이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성경을 보면 가인의 자손을 소개했듯이 셋의 자손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셋의 가계는 가인의 가계에 비하면 너무나 대조적으로 아주 경건합니다. 셋은 첫 아들을 낳고서 그 이름을 "에노스"라고 짓습니다.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보면 그 자손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6절)
4대손을 낳고는 그 이름을 "마할랄렐"이라고 짓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자"라는 뜻입니다. 6대손을 낳고는 그 이름을 "에녹"이라고 짓습니다. "순종자"라는 뜻입니다. 한결같이 신앙적인 이름입니다. 7대손을 낳고는 그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짓습니다. "창을 던지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9대손을 낳고는 그 이름을 "노아"라고 짓습니다. 그 뜻은 "안식"입니다. 그 결과 세상이 다 멸망당할 때 노아의 가정만 구원을 받지 않습니까?
이것을 가리켜서 가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전통이고 뼈대고 유산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유산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고 중심에서 중심으로 자자 손손이 이어져 내려가면서 자손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신적인 유산이 진정한 유산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인간 중심의 문화입니다. 이것이 후에 세속 문화를 만들어 냈고, 물질 문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지금 보면 이 문화를 추종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들은 모두 가인의 후예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 중심의 문화가 있습니다. 이 문화는 정신 문화를 만들어 냈고, 경건 문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 문화를 따르는 사람들이 바로 아벨의 후예들입니다. 이를테면 여러분들이 모두 아벨의 후예들입니다.
이 세상은 이 두 문화가 연연히 흐르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이 두 문화를 따를 자유가 있습니다. 세속 문화는 현재는 재미있고 따르기가 쉽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런가 하면 경건 문화는 지금은 인기가 없고 재미가 없고 가는 사람이 좀 여럽다는 것이 흠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선택하는 데는 어디까지나 본인 자신의 자유에 달렸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길을 놓치지 말고 꾸준히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대가 얼마나 인간적이고 유흥적이고 세속적인지 모릅니다. 부모들이 이 길을 가도 자라나는 자녀들이 이 길을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큰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거기에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온 가족이 모두 함께 충만하게 신앙의 결실을 맺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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