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결단의 신앙! (창 12:4-5)

by 【고동엽】 2022. 1. 26.

결단의 신앙! (창 12:4-5)


위인들은 보통 범인들과는 다른 데가 있습니다. 우선 생각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고, 용기가 다릅니다. 위인은 실꾸리 얽히듯이 얽힌 역사를 지혜롭게 결단을 내리면서 잘 풀어 나갑니다. 보통 사람들이 머뭇거리고, 우물쭈물하고, 주저할 때 위인들은 빨리 결단을 내리고, 한발 앞서가고, 용기 있게 일어서서 나가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위인이 되려고 하면 우선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런 사람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결단의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몇 번씩 그런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향에서 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하실 때 아브라함은 주저함 없이 단호하게 고향을 떠납니다. 성경을 보면 그때 그의 나이가 75세였다고 했습니다. 사람 나이 75세가 되면 심리적으로 보아서 안정을 추구할 때입니다. 더 좋은 일이 있다고 해도 세삼스럽게 모험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같은 점을 극복하고 과감하게 일어나서 고향을 떠납니다. 거기다 다 늙은 아내와 어린 조카를 데리고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고난의 길인 나그네의 길을 떠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위인됨을 말해 주는 모습입니다.
이와 같은 용기와 결단력은 위인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보다 언제나 한발 앞서 나가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세계의 역사를 보면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시대 조류가 만들어지고, 주도되고, 진행되어 갑니다. 그리고 나머지 대다수 사람들은 언제나 그 뒤를 쫓아가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미래학자들은 장차 우주 정복의 최후 승리자는 미국이 아니고, 소련도 아니고, 앵글로 색슨족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앵글로 색슨족의 의식 구조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세계에 퍼져 있는 영연방을 어린 아이들이 여행을 합니다. 여행을 부모들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고 아이들끼리 여행을 합니다. 그렇다고 부모들이 공항까지 나가서 아이들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집에서 아이들과 헤어지면 그만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여행을 합니다. 그 같은 정복 의지와 모험하는 용기 그리고 과감하게 맡겨 버리는 독립성,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미래 세계의 주인이 되게 하는 요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너무 눈물이 많고, 정이 많고, 노파심도 많습니다. 너무 지나칩니다. 공항에 가 보십시오. 헤어질 때 보면 모두 우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이민을 가는 가족이 있으면 가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너무 울어서 눈이 모두 부어 있습니다. 딸을 시집 보낼 때는 어머니도 울고 딸도 웁니다. 딸이 친정에 왔다 갈 때도 가는 딸도 울고 보내는 어머니도 웁니다.
그러기에 그 밑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이 다음에 커서도 독립심이 약합니다. 부모들이 집도 다 장만해 줍니다. 자녀들이 혼자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독립심과 결단력을 키운 서구의 사람들은 언제나 앞서가면서 살고 우리들은 또 언제나 뒤를 따라가면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터전 위에 이민이나 가서 사는 것이 고작입니다.

이것은 비단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 형제에게 가서 "나를 따르라"하시니까 그들은 즉시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집에 가서 이야기하고, 상의하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라면 그들은 영영 제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다 싶으니까 그 시간으로 따라나서는 그 결단력이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제자가 되게 했고, 사도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요셉이 종으로 팔려 가서 삽니다. 외롭고 고달픕니다. 그런데 여주인이 그를 유혹합니다. 그때 요셉은 외로운 마음에서 누구보다도 쉽게 그 유혹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야 고생도 덜 하고, 주인으로부터 사랑도 받고, 좀 편안히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것을 단호하게 뿌리칩니다.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는 그 순간을 단호하게 결단을 내려서 뿌리치고는 나가 버립니다. 그것이 마침내 요셉을 위인으로 만든 요인이 됩니다. 그때 요셉이 안 되는데 하고 머뭇거리다가 넘어졌더라면 요셉은 그것으로 끝장입니다. 이것은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것을 못해서 불행해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엘리사가 밭을 갈고 있는데 엘리야가 찾아오더니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지금 한창 밭을 갈며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을 보고서 "지금 당장 따라 나서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난 엘리사는 아무 소리하지 않고 집으로 가서 쟁기를 부수고 소를 잡아서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풉니다. 그러고 나서 엘리야를 따라 나섭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엘리야를 따르는 길이 아무리 고달파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두 번째는 공적인 선포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간다"하고 공적으로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놓으면 그 길을 가다가 고달프다고 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결단을 내린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 선지자의 길에 들어서서 끝까지 그 길을 견지해서 스승 엘리야보다 갑절의 일을 하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위인들이나 한발 앞서며 살아간 사람들을 보면 모두 이 같은 결단력이 있었습니다. 난국시에는 앞서 나가는 용기가 있고, 희생이 필요할 때는 기꺼이 그 희생에 동참을 하고, 손해를 보게 될 때는 과감하게 투자를 할 줄 알고, 유사시에는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한참 문제가 되고 있는 공직자들을 보면서 느끼는 점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결단이 있어야 할 때 한결같이 우물쭈물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나서서 적극적으로 앗속을 챙긴 사람들도 다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불을 밝게 켜 보니까 모두 드러난 것입니다.

더 안타까운 일은 그 속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정한 사람들을 추려서 들추어 보니까 그 중 다수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을 더욱 안타깝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모두 유능한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이끌어갈만한 위인들이 되지 못하고 도중 하차한 것입니다.
문제가 있어서 들추어 보니까 뽑혀 올라오는 사람들은 모두 "불신자였다."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세상이 너무 추해서 털고 또 털어 보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시대를 실수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요즘 문제 중의 하나가 흡연 문제입니다. 이것은 좀처럼 끊기가 어려운 모양입니다. 그래서 담배를 끊는 데도 이 결단력이 있어야 끊습니다. 몸에도 좋지 않다던데,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모두 끊고 있는데, 신앙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끊지 못해서 고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끊지 못하고 우물 쭈물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눈물을 흘리며, 후회를 하면서 끊어야 할 때가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것이 우물쭈물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여러분, "폼페이 시의 최후"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한참 연회가 무르 익어 가는 시간에 도시의 뒷산에서 화산이 터져서 용암이 도시로 흘러 들어옵니다. 사람들이 모두 피하여 도시를 탈출하려고 야단들입니다. 그때 어느 여인은 용케도 피신하여 도시를 잘 빠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오다 생각해 보니까 금고 속에 들어 있는 보물들이 생각 났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나오던 길을 되돌아서 사람들을 비집고 집으로 달려갑니다. 가서는 금고를 열고 그 속에 들어 있는 보물들을 끌어 안고 황급히 달려 나오지만 이 여인은 그만 무너져 내리는 건물 벽에 깔려서 한줌 보물들을 가슴에 안고 죽고 맙니다.
여러분, 어렸을 때 마당에서 땅 뺏기 놀이를 해보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한 뼘이라도 더 뺏으려고 안간힘을 다 씁니다. 그래서 많이 뺏으면 좋아하고 내가 뺏기는 날이면 화가 나고 그럽니다. 그러면 뭘 합니까? 날이 어두워지면서 어머니가 밥먹으라고 부르시면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많이 뺏은 아이나 많이 뺏긴 아이나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놓아 두고는 손을 털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 버리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이 같은 결단의 지혜가 없기 때문에 때로 실수를 하게 되고, 세상에 너무 지나치게 미련을 갖다가 실패를 하기도 하고, 너무 과하게 욕심을 내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처럼 다 놔 두고 털고 일어나야 할 때는 다 놔 두고 일어나는 용기도 있어야 하고, 결단도 있어야 하는데, 이 같은 결단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들이 시험에 들어서 때로 고난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여기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부모 없는 조카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가 재산 때문에 싸움을 하게 됩니다. 조카 롯이 삼촌의 재산에 미련을 너무나 많이 갖습니다. 그러다가 재산 때문에 숙질간에 분쟁이 일어 나게 생겼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그 위대한 결단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땅 중에서 가장 좋은 곳을 네가 먼저 택하라. 네가 우편으로 가면 나는 좌편으로 가면 나는 우편으로 갈 것이니 네가 먼저 좋은 땅을 가지고 가라." 아브라함은 여기서 어른답게 조카와 재산 때문에 다투지 않습니다. 가장 좋은 재산과 비옥한 땅을 조카에게 모두 넘겨 주고는 자기는 쓸모없는 황무지 땅을 차지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아마 그는 조카가 버린 황무지 벌판을 바라보면서 조카에 대해서 배반감을 느끼며 인생 무상을 느꼈을 것이고 인생의 비애까지도 느꼈을 것입니다. 아비 없는 자식을 데려다 길러 놓았더니 이렇게 배반하고 그를 떠나 버렸습니다.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때로 이렇게 사람들을 삭막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위로 하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웒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그리스도인은 버려야 할 때는 과감하게 버리고, 미련 없이 떨쳐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보상을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용단을 내리고, 결단을 하고, 그렇게 믿는 생활이 신앙의 생활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부자지간에, 형제지간에, 이웃간에, 친구간에 이 물질 때문에 화를 당하게 됩니다. 물질을 잘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불행을 당하는 사람, 불행을 당한 가정, 불행을 당한 이웃이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비극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신앙적인 요소는 바로 이 결단력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고향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장 내일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라고 하시면 훌훌 털고 나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정작 고향을 나서려고 할 때 그를 붙잡는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우선 안정된 생활이 그를 붙잡았을 것입니다. 그때 그의 나이 75세입니다. 이제 뭘 더 원해서, 무슨 낙을 더 누리겠다고, 다시 고생을 시작하겠습니까? 또 고향이 그를 붙잡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노년에 이르면 떠났던 고향도 다시 찾는 법인데, 다 늙어서, 새삼스럽게 고향을 떠난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친구들과 친척들도 나서서 극구 만류를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길이고, 그것이 옳다고 판단한 이상 아브라함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고향을 떠납니다.
속직히 말하면 왜 고햐에 대한 미련이 없었겠습니까? 그렇지만 과감한 결단력이 그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 같은 결단 있는 행동이 마침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는 이 같은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가 오죽이나 유혹이 많은 시대입니까? 이런 시대에 이 같은 결단력이 없이 어떻게 다 이기고, 어떻게 헤쳐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이 시대는 우유 부단해서는 살아가는 데도 어려움이 많고, 더구나 신앙 생활하는 데에도 유익이 생기지 않습니다. 과감하고도 분명한 자세로 살아가야 모양 있고 내실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롯의 부인을 보십시오. 불붙는 소돔성을 잊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리는 불행을 당했지 않습니까? 뒤를 돌아다보면 안 된다는 경고를 수차 받고서도 그 미련을 끊지 못해서 뒤를 보다가 비극적인 여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보면 현대판 롯의 부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옛날을 잊지 못합니다. 옛날을 과감하게 청산하는 결단이 부족합니다. 그러다가 옛날로 돌아가 버리는 사람도 있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자리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곳에 무슨 신앙의 열매가 열리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위대했던 것은 바로 끊고 맺음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일 때, 그것이 하나님의 지시일 때, 그것이 틀림없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되었을 때, 무서울 만큼 냉정하게 결단 내리고 나아가는 그 행동, 그것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아브라함 되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좀더 분명한 신앙인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면 결단하는 신앙의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보상하시고, 그런 사람의 나아가는 길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