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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발견! (출 3:7-12)

by 【고동엽】 2022. 1. 26.

모세의 발견! (출 3:7-12)

 


성경에 보면 위인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간고할 수 없는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 인물이 바로 모세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모세를 산앙의 한 모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세를 평가할 때 그냥 단순하게 평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를 깊이 알려고 하면 그의 인생 역경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모세는 한때 자기 과신에 빠져서 기고 만장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40년간 궁중에서 살 때 그는 자기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을 만큼 자기 자신에 도취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를 "자기 과신의 때"라고 부릅니다.
그러다가 그는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마침내 그는 살인자가 됩니다. 전과자가 되었습니다. 손에 피를 묻히게 됩니다. 그래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 가서 거기서 그는 자포 자기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40년 동안이나 그는 광야에 살면서 완전히 기가 죽습니다. 그래서 아때를 가리켜서 "자포 자기의 때"라고 부릅니다.
모세의 삶의 이 두 가지 모습은 바로 우리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모두 한때 기고 만장했던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 불가능이 없는 것처럼 설치고, 우쭐대고, 그래서 경거 망동했던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신앙도 필요없었고, 하나님의 도움따위는 불필요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 때가 우리 모두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모두는 모세처럼 실패의 쓴 잔을 마셨습니다. 우쭐거리다가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내가 최고인 줄 알았었는데 그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자포 자기도 해보고, 절망도 해보고, 세상을 비관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모세는 우리와 유사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포 자기하는 인생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과신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좋은 삶의 자세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과신도 아니고 절망도 아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세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교만하지도 않고, 비굴하지도 않은 삶의 자세입니다. 너무 인간적인 자세도 아니고, 너무 신비적이지도 않은 자세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한때 기고 만장하고 자기 과신에 빠져 살다가 사람을 죽이고 나서는 미디안이라고 하는 광야로 고망 가서 그곳에서 40년 동안 완전히 죽습니다. 거기서 지금까지 우쭐대던 것, 과신하던 것, 교만 떨던 것, 하면 다 된다고 맹신하던 것 모두를 땅 속에 묻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자신을 비웁니다. 출애굽기 3:1절을 보면 "양무리를 치더니"라고 했습니다. 누구의 양이냐 하면 내 양도 아니고 장인의 양입니다. 40년 동안 장인의 양을 쳐 주면서 처가살이를 합니다.
모세가 잃게 되기까지 얼마나 고뇌가 컸겠습니다" 과거에 영광이 없었다면 몰라도, 당시는 애굽 문명이 세계 제일인데 그 애굽의 왕자로 있었던 사람이 광야에서 남의 양이나 치면서 40년을 보냈으니 그 고뇌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하루는 양때를 이끌고 호렙산으로 갔습니다. 호렙이라는 말은 "건조한 곳"이라는 말입니다. 이 산을 시내산이라고도 합니다. 주석자들은 모세가 이 호렙산에 자주 갔었다고 말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아직도 모세는 완전히 포기하거나 죽은 것이 아닙니다. 아니는 먹어 가고, 꿈은 실날 같지만 아직 살아 있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미련이 남아서 호렙산으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떼를 많이 썼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렇게 40년을 보냈습니다.

이런 면에서 산 기도가 좋습니다. 가서 지치도록 몸부림도 쳐 보고, 소리라도 크게 질러 보고, 소리 내어 울어도 보고, 얼마나 좋습니까? 오늘 현대인들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마음껏 허심 탄회하게 나를 표현할 장소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솔직하게 나 자신을 내 보일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산에 가서 큰 소리로 기도를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 가서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때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2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비로소 응답이 온 것입니다. 기별이 왔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말씀하십니다.
"(출3:9)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출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 이것이 모세의 소명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떨기나무라는 것은 가시덩쿨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가 고상하지도 않고 볼품도 없는 그런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어떤 주석자는 노예로 곤핍하게 살고 있는 백성들의 고난의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지금 고난받고 있는 백성들을 생각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환상이며 동시에 현실입니다. 불꽃 속에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세야, 고통받고 있는 백성들의 부르짖음이 하늘까지 닿았느니라. 그러니 내가 가서 내 백성을 구원하라."
모세는 그때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다음 세 가지입니다. 이 세가지는 오늘 우리들이 발견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는 고통받고 있는 동족의 발견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자신의 문제에 집착해서 고민하느라고 애굽에서 지금 고통받고 있는 동족의 고통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문제에 급급해서 남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비로소 지금 고통받고 있는 동족을 새롭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때 어머니의 말씀이 머릿속을 스쳐 갔을 것입니다. "너는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너는 커서 고통받고 있는 네 민족을 구원해야 한다." 자라면서 누누이 들었던 말씀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불현 듯 고통받고 있는 동족이 생각난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마땅히 생각하여야 할 것을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자기 자신에 집착해서 살 때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집착해서 살면 남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웃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때는 나밖에는 아무도 보이질 않습니다. 우리집밖에는 어느 집도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그리고 내 아이들만 보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남의 아이들은 피해를 보거나 말거나 돈을 써서라도 내 아이를 학교에 접어넣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 쓰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사는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 땅에 이기주의가 생기는 것입니다.
모세가 지금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나서 비로소 동족을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40년 동안 자신의 문제에 빠져서 자포 가지하고 집착하다 보니까 마땅히 생각하여야 할 고통받고 있는 동족을 잊어버리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자포 자기도 좋은 것이 아니고, 나 자신에게만 집착해서 사는 것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발견입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직접 만나본 일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어머니로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듣기는 했지만 오늘같이 이렇게 직접 하나님을 만나보기는 처음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 묻기를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냐고 물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하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이 말은 시작과 끝이 없는 자존자라는 뜻입니다. 절대 완전, 모든 존재의 근거,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모태 신앙은 장점이 많습니다. 신앙을 상속받았다는 점에서 전통성이 있고, 뿌리가 있고, 역사성이 있습니다. 모태로부터 내가 신앙 안에서 조성되었다고 하는 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그리고 고뇌 없이 신앙을 받아들이는 축복도 있습니다.
그런데 모태 신앙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단점이 있습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을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개념적인고, 습관적인 신앙의 차원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뿌리는 있는데 힘이 없습니다. 다분히 관념적입니다. 체험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용기가 없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확신이 부족하고 감격이 없습니다. 이것이 모태 신앙의 좋지 않은 점입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어머니로부터 귀가 닳도록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듣기는 했는데, 어딘지 모르게 구체적이지 못하고 확신이 없었고, 개념적인 신앙의 차원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모세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되었습니다. 직접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까 신앙이 구체적으로 변했습니다. 힘이 생겼습니다. 자신이 생겼습니다. 능력에 사로잡혔습니다. 이것이 모세가 모세될 수 있었던 분기점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내가 직접 만나지 못하면 신앙 생활이 재미가 없습니다. 주일이 되어도 예배 드리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기쁨이 없습니다. 찬송을 해도 감격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고 나의 앞날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것은 가슴이 메말라서 그렇습니다. 모세는 그날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자기 자신의 발견입니다.

 

하나님이 호렙산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타나셨습니다. 떨기나무가 환한 빛을 발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충만하게 나타났습니다. 모세는 그 빛이 자신에게 비추어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세는 그때 그 빛에 비추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빛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도 추하고, 부끄럽고, 초라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나기 전까지는 세상에 자신이 최고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때 우쭐하기도 했었고, 자기 자신을 과신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비로소 하나님을 알고 그 앞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추하고 남루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니까 용기가 나질 않습니다. 도무지 그 앞에 더 이상 서 있을 용기조차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실상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모를수록 용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치고 자기 자신을 깊이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약간 무지한 사람이 용기가 있고, 뱃장이 있고, 나서기를 좋아하고 그럽니다.
모세가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고는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네가 애굽에 가서 내 백성을 구해 내라." 아마 그전 같았으면 자신 있게 나섰을 것인데 오늘은 전혀 용기가 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정중하게 거절을 합니다. "나는 입술이 둔하여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함께하시겠다고 하시며 끝끝내 모세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참 이상하신 분입니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할 때는 거들떠 보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다가 "나는 할 수 없습니다."하면 또 굳이 끌어내서는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모세가 애굽으로 가서 대역사를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고통받고 있는 동족을 발견했고, 말로만 듣던 하나님을 발견했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모세는 비로소 하나의 성숙한 인간으로 여물어서 고통받고 있는 민족 앞에 당당히 나서서 헌신하는 위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수많은 신앙인들의 모델이 된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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