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내용! (잠 17:20-22)
하나님의 최상의 뜻은 사람이 세상을 기쁘게 살아가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실패를 하고, 고난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한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세상을 살되 모두 힘있게 살아가고, 기쁘게 살아가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기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잠언을 통해서 사람들이 세상을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녀야 할 가장 좋은 내용을 몇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실 때에도 그 사람의 삶의 내용을 보십니다. 이 시간 우리의 삶의 내용을 채우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인지 살펴보는 계기가 되도록 합시다.
첫째는 진실성입니다.
20절을 보면 "(잠17:20) 마음이 사특한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진실성이 없는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진실성이 없는 사람이 성공한 예가 없습니다. 그리고 진실성이 결여된 사람이 세상에서 인정을 받은 예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꾼이 필요해서 사람을 고르실 때 가장 먼저 보시는 덕목이 이 진실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으로 사울을 선택하셨는데, 그를 뽑으신 기준을 보면 바로 이 진실성이 첫째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신 것도, 요셉을 선택하신 것도,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도 모두 이 진실성 때문입니다. 진실성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믿음을 줍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믿음을 심어 주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게 되는 삶의 내용입니다.
어떤 환자가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아침마다 창 너머로 보이는 받에서 어떤 노인이 열심히 보리밭을 밟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얼마나 진지하고 성실해 보이는지 참으로 믿음직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까 그분이 바로 지금 자기를 치료해 주고 있는 병원의 원장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이 환자는 성실하고 신뢰할 만한 원장의 모습을 통해서 마음에 안도감이 생기고 믿음이 생겨서 자신의 어려운 병을 거뜬히 고침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실함과 성실한 모습은 자기 자신의 삶의 질을 높여 줄 뿐만 아니라 이웃 사람에게도 이 같은 믿음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언어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은 이 말입니다. 20절을 보면 "(잠17:20)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 했습니다. 이 말은 말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치밖에 안 되는 혀를 통한 말 한마디가 어떤 이에게는 격려가 되고 용기를 주는 역할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올무가 되기도 하고 패역을 갖다 주기도 합니다.
기드온은 말 한마디로서 내란을 막아냈습니다. 그런가 하면 르호보암 같은 이는 말 한마디로서 나라를 둘로 갈라 놓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혀를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이 혀가 사람을 높여 주기도 하고 낮쳐 놓기도 합니다. 이 혀가 사람을 고상하게도 만들고 상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전승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랍비 한 사람이 일꾼을 시켜서 맛있는 음식을 사 오라고 했더니 나가서 혀 고기를 사 왔다고 합니다. 며칠 후에 이 랍비가 그 일꾼에게 이번에는 맛이 없어도 좋으니 값이 제일 싼 고기를 사 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일꾼이 이번에도 혀 고기를 사 오더랍니다.
왜 이것을 또 사왔느냐고 물으니까 일꾼이 대답하기를 "이 혀란 놈은 좋을 때는 무척 좋고 나쁠 때는 또 무척 나쁜 놈입니다." 하더랍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총으로 죽은 사람의 수보다 독설에 의해서 죽은 사람의 수가 더 많다고 합니다.
잠언을 보면 이 혀와 말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람이 말에 신중하면 완전한 사람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말을 하는 데도 골라서 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한번 내뱉어진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말 한마디로서 금이 간 마음은 영원히 치유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잠언은 혀가 패역한 사람은 재앙에 빠진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자식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큽니다. 그런데 자식이라고 해서 다 삶에 뜻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21절을 보면 "(잠17:21)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기쁨을 주기도 하고 보람을 안겨 주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낙을 빼앗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은 이 자식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울 구치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구치소 안에 어느 장로님의 아들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죄를 짓고 들어온 것이 아니고 사형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아버지에게 면회를 좀 오라고 해도 "그 놈은 내 아들이 아니다"하고는 면회를 오지 않고 아들을 잊어버리려고 애를 쓰고 있다고 합니다.
잊으려고 한다 해서 잊어지고 내 아들이 아니라고 말한다 해서 내 아들이 아닌 것입니까? 오죽하면 아버지가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아들인데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내용 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는 이 자식의 문제가 포함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식이 분명히 아비의 면류관이 되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아비에게 있어서 근심 덩어리가 되기도 합니다.
히브리인들의 교훈서인 탈무드에 보면 모두가 이 자녀들에 대한 교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삶의 전부는 아마 이 자식에 대한 열정일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교육이 세계에서 제일 앞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유대인 가족이 조국을 떠나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비록 남의 나라에서 살기는 했지만 아이들에게는 빠짐 없이 히브리인의 교육을 시켰고 또 그렇게 영원히 히브리인으로 커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안식일 날 분명히 교회에 보냈는데 이 아이가 교회를 가지 않고 놀다 들어왔습니다. 남의 나라에까지 와서 사는데 아이들이 히브리인의 정선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여 이 아이를 붙잡고는 얼마나 때렸는지 그만 이 아이가 죽고 말았습니다.
조야의 신문들은 종교 때문에 아이를 죽였다고 대서 특필을 했지만 이 어머니는 당당하게 항변을 했습니다. "오해하지 말라, 우리는 이런 교육으로 2천년 동안이나 흩어져 살았으면서도 히브리인의 혼을 유지하여 왔다." 얼마나 당당합니까? 그러니까 교육 하면 히브리인의 교육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내용 있는 삶을 유지하는 데는 자식이 차지하는 부분이 아주 큽니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는 자식이 면류관이 되기도 하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면류관이 되어 주어야 할 자식이 근심과 걱정을 끼치고 낙을 빼앗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다고 했습니다.
넷째는 화목입니다.
사람이 내용 있는 삶을 유지해 나가는 데는 무엇보다도 화목의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는 모든 것에 조화와 화목을 이루어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잠언 17:1을 보면 "(잠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잠언 "(잠21: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나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가화 만사성"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래야 사람이 비로소 사람 되고 삶이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환경을 보면 그렇지가 못합니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 꼭 있어야 할 화목이 없습니다. 있다는 것이 온갖 불화와 갈등과 금심된 일들만 집집마다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 속이 온전하겠습니까?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것들이 사람을 죽인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 신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 그러나 걱정이나 근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는 이것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말씀 "(잠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즐거움과 화평을 누리고 살 때 사람의 몸에 필요한 강한 저항력이 되는 항원이 몸 속에서 생산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항원이 어디에서 생산이 되느냐 하면 바로 뼈 속에서 생산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면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불화하며 근심 속에서 살게 되면 뼈 속에서 생산되어야 하는 이 힘의 원천이 되는 항원이 말라 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그래서 화목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성경이 자꾸만 우리에게 "기뻐하라, 감사하라, 화목하라"고 하시는 것은 바로 이같은 이치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는 불화하고 싶어서 불화하느냐는 것입니다. 화목하고 싶은데 그것이 잘 안 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들로 하여금 화목하고,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도록 그냥 놔 두지를 않습니다. 이것들을 효과 있게 극복을 하지 못하면 본의 아니게 실패를 하고 실수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반목과 불화와 갈등이 만연해 있는 이 세상을 신앙 안에서 정말로 조화 있고 화목하게 살아가려면 가족 모두가 적지 않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화목을 이루어 살려고 하면 그냥 가만히 있어도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부부가 싸움을 잘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얼마나 사나운지 싸울 때마다 이깁니다. 한번은 싸우다가 부인이 남편의 머리 한 줌을 뽑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머리 한쪽이 훤히 보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화가 날 일이고 엄청난 일입니까? 그런데도 이 남편이 꾹 참고 인내를 합니다. 굉장힌 인내입니다. 그러다가 슬며시 나가더니 머리를 모두 깎아 삭발을 하고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무사하게 후유증 없이 넘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둘 중에 한 사람이 그렇게 노력을 하면 화목해지는 것입니다.
또 어떤 가난한 부부가 사는데 이웃집에서 매일 같이 고기를 구워 먹습니다. 하루는 견디다 못한 이 가난한 집 부인이 남편을 향해서 "나는 저 갈비 냄새 때문에 미치겠다"고 화를 냈습니다. 이 말은 돈을 못벌어 온다는 넋두리입니다. 세상의 남자들은 이런 말에 매우 약합니다. 그래서 부인들은 그런 말을 삼가야 합니다. 생각 없이 내뱉은 말 한마디에 남편들의 마음이 상합니다.
그 말을 들은 이 가난한 집 남편이 슬그머니 나가더니 마스크를 하나 사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아내가 생각하니 어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쓰면 냄새가 안 들어오느냐고 소리를 칩니다. 그랬더니 이 남편이 또 나가더니 이번에는 방독면을 사 가지고 들어옵니다. 그 모습을 보고는 둘이 웃음으로써 위기를 넘겼다고 합니다.
둘이 서로 맞붙어 싸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둘 중에 한 사람이 십자가를 져야 화목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있는 곳에 화평이 있고 구원이 있고 화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못하실 것이 없는 분인데도 사람과 화목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있는 곳에 화평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주위에 왜 화평이 없습니까? 모두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려고만 하지 서로 지려고는 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억울함이 있을 때 누군가가 참고 인내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서로 지려고 하지 않으니 화평이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
여러분, 부디 오래 사십시오. 그리고 건강하십시오. 그러려면 화목해야 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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