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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리와 역설의 진리! (엡 3:8-9)

by 【고동엽】 2022. 1. 26.

순리와 역설의 진리! (엡 3:8-9)

 


신학자 가운데 칼 바르트라고 하는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미국을 방문해서 여러 신학교에서 강연을 하였는데 그때 한 학생이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지금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가장 큰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곳에 모여 있던 많은 학생들이 그 박식하고 유명한 노 학자로부터 아주 거창하고 깊고 심오하면서도 복잡한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를 하고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 이 노 학자가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그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모여 있던 많은 학생들이 그 대답이 너무나 쉽고 너무나 단순해서 한편으로는 실망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과연 진리는 그렇게 평범한 것이로구나 하고 새로 깨달았다고 합니다. 참진리는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원래 진리는 단순한 데 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에는 대체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순리적인 진리이고 또 하나는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첫째는 순리적인 진리입니다.

 

심는 자만이 거두고 심지 않은 사람은 거둘 수가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순리적인 진리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않은 사람은 가을에 가서 거둘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씨를 뿌린 만큼만 수확기에 가서 거두게 되고, 씨를 뿌린 종류대로 거두게 됩니다. 육신의 씨를 뿌린 사람은 육신의 열매를 거두고, 영적인 씨를 뿌린 사람은 영적인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육신적인 씨를 뿌린 사람이 영적인 열매를 거둘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옛부터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서 팥 난다고 했습니다.

인생에는 이 같은 인과 응보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원인에는 반드시 결과가 주어집니다. 노력의 씨를 뿌린 사람은 행복의 열매를 거두게 되고, 나태의 씨를 뿌린 사람은 어김 없이 실패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이것이 순리적인 진리입니다. 여기에는 무슨 해설이나 이론이나 변명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심지 않은 사람은 그 누구도 거둘 수가 없습니다.
요즘 가난한 아프리카의 난민들에게 미래를 위해서 곡식을 나누어 주면서 땅에 씨를 뿌리고, 가꾸라고 했다 합니다. 그래야 배고픔을 면할 수 있다고 누누이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 모두가 당장 배가 고프니까 땅에 뿌릴 씨앗을 모두 먹어 치웠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이러는 한 소망은 없습니다. 오늘 심어야 내일에 가서 거두게 되는데 오늘 심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소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순리적인 진리입니다.

 

둘째는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성경을 보면 순리적인 진리보다 역설적인 진리가 더 많이 나와 있습니다. 진정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느끼고, 깨닫고, 추구하여야 할 것은 모두 이 역설의 진리입니다. 신앙의 깊은 모습은 모두 역설적인 진리로 표현되어 나옵니다. 이 역설의 진리 가운데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신앙이 깊어질수록 나 자신의 존재는 더 작아지는 신비로움"입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사람이 성장하고 동물이 성장하면 그 몸집이 커지고 부피가 커집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성장하면 부피가 커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에서는 반대입니다. 신앙이 깊어지고 믿음이 성숙해지고 자라게 되면 내가 커지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나 자신이 더 작아지고, 더 왜소해지고, 더 무능해 보이고, 더 보잘것없게 보이는 체험을 합니다. 이것이 역설의 진리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을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유행가 가운데 그런 노래가 있습니다. "그대 앞에만 서면 왜 나는 작아지는가." 아마도 그대가 보잘것없고 존경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 앞에 서 있는 내가 작아질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크게 보이고, 돋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내 앞에 서 있는 그대가 다름아닌 존경과 사랑과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까울 것이 없는 내 남자이다 보니 그 앞에 선 나는 작아 보이는 것입니다.

또 사람이 지식이 깊어져서, 깊은 학문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그 사람은 더 자신이 있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빈약성을 더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지식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고민이 더 많아지는 법이고 갈등이 더 심해지는 법입니다. 오히려 지식을 어설프게 가지게 되면 더 교만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 앞에 우뚝 서 있는 하나님의 존재가 커 보이면 커 보일수록, 그 존재가 위대하게 보이면 위대하게 보일수록, 나의 존재는 더 왜소하게 보이고, 무능하게 느쪄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것이고, 할 말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나는 죄가 없습니다." 그러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분은 아직 하나님 앞에 서 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 앞에 서서 눈부시게 비춰 오는 그 빛에 반사된 나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앞에 서서 자신의 왜소함을 느껴 보지 못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설악산 울산바위를 가 본적이 있습니다. 그 바위가 얼마나 크게 보였던지 지금까지 내가 상상하던 그 어떤 바위보다도 엄청나게 컸습니다. 그 앞에 서 잎는 내가 그 바위에 압도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의 존재가 너무나 왜소하게 보였고, 너무나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마음속에서 그 바위에 대한 경외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내가 옛날 사람이었다면 그 바위 앞에 엎드려 절이라도 했을 것 같았습니다. 자연 숭배는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고, 성령에 이끌려 삼층천까지 가서 천국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신앙은 완벽하리만큼 깊어졋고 원숙해졌습니다. 그때 그가 한 고백이 있습니다. "나는 이제 다 컸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이제 완전하다"는 말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5:9에서 말하기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그랬습니다. 본문에서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15에서는 "모든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나 자신의 왜소함을 더 느끼게 하고, 자신이 더 보잘것없게 느껴지게 하는 힘,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역설의 진리입니다.

또 역설의 진리는 "버리면 버릴수록 더 많이 늘어나는 신비로움"입니다.
수학 공식으로 보면 내 주머니에 든이 들어가면 들어간 만큼 늘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신앙에서는 버릴수록 더 늘어나는 신비로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부르는 찬송에 보면 "움켜 잡으면 없어지고, 쓰고 빌려 주면 풍성해져 땅 위에 가득 차네"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것이 역설의 진리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오병 이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어린 아이가 가지고 왔던 도시락을 빼앗겼습니다. 그것은 그 아이에게 있어서는 굉장한 손해입니다. 그런데 결가를 보면 손해가 아닙니다. 빼앗겼기 때문에 모두가 배불렀고, 자기 자신도 배가 부르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배부름은 모든 사람이 굶고 있는데 나만 배부른 것이 아닙니다. 나도 배불러야 하지만 모두가 배불러야 그게 진정한 배부름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역설의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사람입니다. 예수 때문에 젊은도, 가정도, 인생도 모두 잃어버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잃은 것이 아닙니다. 그 결과 사도 바울은 모두를 얻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잃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더 만족해 했고, 기쁨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께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 진정한 기쁨을 얻었던 사람입니다.
그데반은 예수 때문에 죽어 갈 때 가장 행복함을 느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웃으며, 기뻐하며, 자신을 돌로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죽어 갔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그러므로 이것을 역설의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태국에 가 보니까 그 나라는 이미 기독교 역사가 250년이나 된 나라였습니다. 우리보다 기독교 역사가 배나 깊습니다. 그런데도 태국의 기독교 勢는 아주 보잘것이 없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 나라는 이제 겨우 100년ㅇ 경과했을 뿐인데도 그 교세가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많은 이유 가운데 아주 중요한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나라에 순교자가 많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신앙 사수를 위해서 피흘린 사람이 우리 나라에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썩기만 해도 100배의 결실을 얻는다고 했는데 그 핏값이 그냥 없어져 버리고 말았겠습니까? 그런데 태국에는 신앙 사수를 위해서 순교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썩은 밀알이 없는데 무슨 결실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진정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가려고 하면 이 오병 이어 사건에서 보듯이 내 도시락을 빼앗기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기적도 없고, 많아지는 신비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진리는 버려야 얻어지는 역설의 진리입니다.

 

또 역설의 진리는 "약해질수록 강해지는 신비로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역설의 신비입니다. 사람이 몸이 튼튼해야 좋은 생각과 건전한 정신이 생기고 힘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서는 반대로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더 강해지는 신비로움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언제 가장 강해지고 하나님과 가장 가까워지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사람이 위험 수위에 도달할 때입니다. 사람은 위험 수위에 도달해야 비로소 지금까지 의지하고 있던 것들을 모두 버리게 됩니다. 그때서야 그렇게 소중하게 느꼈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고는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사람은 강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위인들을 보십시오. 위인들은 대부분 이 위험 수위를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 위험 수위를 겪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믿고 있었던 것들을 다 버리고 하나님을 발견하고 만나서 위인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유명하다는 목회자들을 보십시오. 모두 이 위험 수위를 만난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 위험 수위를 겪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 과정들을 겪는 동안 모두 강한 사람들이 되어서 유명한 목회자들이 된 것입니다.
어느 신학대학 학장을 지낸 신학자 한 분이 수년 전에 남산 야외 음악당에서 부활절 날 예수님 부활에 대해서 소리 높여서 설교를 했습니다. 기자들이 그 설교를 들을 때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평소 부활 신앙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기자들이 "부활을 믿습니까"하고 물으니까 "글쎄요"하고 대답했다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폐병으로 사경을 헤맸습니다. 소생 가능성이 전무한 상태까지 갔습니다. 생을 포기해야 할 지점까지 도달했습니다.
그때 그분이 사경 중에서 하나님을 만납습니다. 그리고 "글쎄요"하며 긴가 민가 하던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그때 그분이 성령의 치료를 받고 기적같이 나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분이 복음에 대해서 얼마나 뜨거운 사람이 되었고, 얼마나 신앙이 확실한 사람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 지경이 되었는데 뜨거워지지 않고 배깁니까? 사람은 모두 이렇게 약해져야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역설의 진리인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들이 신앙 안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이 우리 배후에 계시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문제 될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제일 겁나는 문제가 죽는 일인데 그 문제가 해결되었는데 그 밖의 일이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그렇게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인생도 허비하고, 청춘도 바쳐 버리고, 개인적인 행복까지도 모두 빼앗기고 나서 그렇게 행복해 할 수 있었던 것이 모두 이 힘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역설의 진리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앞에서 더 작아지는 체험의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것이 복 중의 복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모든 것을 빼앗김으로써 풍요로움을 맛보는 축복도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것이 진정 풍요로움입니다. 또 세상에서 약함으로써 주 안에서 강해지는 축복도 체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진수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나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사람"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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