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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 7:13-14)

by 【고동엽】 2022. 1. 26.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 7:13-14)

 


마태복음 5, 6, 7장을 일컬어서 산상 수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셔서 보화와 같은 말씀으로 가르치셨다고 해서 산상 보훈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를테면 보석 가운데서도 핵심이 되는 보석이 다이아몬드인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도 이 마태복음 5, 6, 7장이 핵심이 되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톨스토이는 이 말씀이 너무 좋아서 미치다시피 탐독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소중하게 읽히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산상 수훈의 특징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슫도인들에게 삶의 원칙을 제시해 주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질 생활 철학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활 의식과 생활 방법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마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좁은 길로 가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은 마태복음 5, 6, 7장에서 말씀하신 내용대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생활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에 소금과 빛이라.
형제를 미워하거나 형제를 향하여 욕하지 말라.
네 사지가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성한 몸으로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거든 먼저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모두 좁은 길을 가는 신앙인의 생활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한결같이 행하기도 어렵고, 지키기도 어렵고, 수고와 희생과 땀이 요구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길을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좁은 문"이라고 했고,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이 길을 가려면 몇 가지 각오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갈등입니다.

 

신앙 생활은 엄밀히 말하자면 평안의 생활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고민이 많은 생활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싸움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언제나 자기와 싸워야 하고, 욕망과 싸워야 하고, 육신과 싸워야 하는 생활입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언제나 자꾸만 정도에서 이탈하려는 욕망이 들어 있습니다. 질서를 깨 보려는 욕감이 들어 있고, 타락해 보고 싶은 속성도 들어 있고, 거역해 보고 싶은 마음도, 어떤 기본적인 틀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욕망도 인간의 본성 속에는 들어 있습니다.
이 같은 욕망과 싸워서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 본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바로 좁은 길을 가는 생활입니다. 그러자니까 그 길을 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넗은 길은 사람들이 가기가 아주 쉽습니다. 거기에는 재미도 있고, 평안함도 있고, 굳이 갈등을 느끼며 싸울 필요도 없는 그런 길입니다. 주어진 대로 그냥 즐기며 가면 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경고합니다. 그 길은 넒어서 가기는 재미있고 쉽지만 그 길은 결국 멸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하기를 "너희는 좁은 길로 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길을 가려고 하면 갈등을 각오해야 합니다.

 

둘째는 청빈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되 좁은 길을 가려고 하면 이 청빈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양심껏 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위로 하늘을 향하여 떳떳하고 아래로 땅을 향하여 떳떳하게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사람이 정도를 걸어가며 살아가기가 그만큼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했고, "좁은 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좁은 길을 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생활을 하는 중에 가장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융통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융통성 없이 살다 보면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양심껏 살고, 믿음을 그대로 지키며 살자면 우선 돈을 제대로 벌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양심껏 살아가지고는 돈이 많이 벌어지지가 않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청빈을 각오해야 합니다. 가난이 무서운 사람은 이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그저 넓은 길을 가면서 적당히 편법도 쓰고, 적당히 얼버무려 나가며 살아야 부자가 될 수 있고, 세상에서 적당히 입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처세술이고 이 시대의 성공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적당히 살아가려고 합니다. 적당히 속이기도 하고, 편법도 쓰고, 적당히 얼버무려 가며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야 손쉽게, 이 세상을 편안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보면 개중에는 청빈을 감수하고 수고도 감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적당히만 하면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고 입신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과감히 거부하고 청빈을 감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바로 이 같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지탱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청빈을 감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고독입니다.

 

사람이 잘 살아가다가도 "나는 혼자다"라는 생각이 들 때 고독을 느낍니다. 사람은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 될 때 사람들은 고독을 느끼게 됩니다.
넓은 길로 가면 그곳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기도 쉽고 재미도 있고 편하기도 하니까 사람들이 모두 넓은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는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 길에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사람들은 수고롭게 좁은 길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길은 언제나 외로운 길이고 고독한 길입니다. 그래서 이 길을 가려고 하면 고독을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독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죄수를 독방에 가두기도 하는데 그것은 특별 대우가 아닙니다. 죄인 중에서도 중죄인을 독방에 가두어 놓습니다. 그것은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미치도록 외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노인들을 보십시오. 상대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화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혼자입니다. 손자들도 노인들을 싫어합니다. 이것이 미칠 일입니다. 할 일도 없고, 사람도 없고, 언제나 집에서 혼자입니다. 그래서 종종 아파트에서 노인들이 자살을 해서 죽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오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좁은 길을 걸어가려고 하면 이 고독을 감수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아 보십시오. 원칙대로 살아 보려고 힘써 보십시오. 얼마나 고독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따돌림을 당하고, 외면을 당하고, 불이익을 당합니다. 그것을 감수할 각오가 없으면 이 길을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라는 사람이 좁은 문이라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 책 속에서 여주인공이 이렇게 독백을 합니다.
"주여, 주께서 내게 보이신 그 길은 너무나 좁습니다. 그래서 두 살밍 나란히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길은 홀로 가야 하는 고독한 길입니다. 이 길은 고독을 감수할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넷째는 자기 부정입니다.

 

좁은 길을 가려면 자기도 부정해야 합니다. 길이 너무 좁고 문이 너무 좁아서 뚱뚱한 사람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짐이 많은 사람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문을 통과하려면 먼저 자기 감량을 해야 합니다. 이 말은 자기를 비하해야 한다는 말이고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즘 공직자들의 재산 공개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공개하기를 꺼려 하고 있습니다. 재산이 너무 적어 공개되는 것이 부끄러워서가 아니고 너무 많아서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재산이 많은 사람도 공직을 맡을 수 있었고 부정을 한 사람도 공직에 앉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 길이 갑자기 좁아지다 보니까 아무나 공직에 앉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요즘 몇 명의 장관들이 예전과 같이 그 문을 통과하려다 도중 하차하고 말았습니다. 그 좁은 문을 통과하기에는 너무나 몸집이 크고 하자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체중을 조절하다 보니까 많이 가진 사람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흠을 만들어 가면서까지 돈을 벌고, 남 모르게 즐거운 사생활을 영위하면서 이런 길을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사적인 즐거움을 포기하고 이 길을 가든지, 사적인 즐거움을 소유하려면 장관 좀 하라는 제의가 와도 "나는 이대로 그냥 살겠다"하고 스스로 포기해야 하는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이 공직의 길을 가는 데도 자기 축소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축소는 자기 부정을 말하고 자기 비하를 말합니다. 이 길은 그렇게 부끄럽게 삶의 몸집이 크거나 자기 하자가 많아서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축소를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그냥 쉽게 오신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철저한 자기 부정이 있었습니다. 하늘 보좌도 버렸고, 영광도 버렸고 변하고 병들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비강(飛降)이라고 합니다.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종의 몸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자기 부정이고 자기 축소입니다.
우리들이 정말 예수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고 제자의 길을 걸어간다고 하면 이렇게 축고되어야 합니다. 자기 확대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래서 이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성 프란체스코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앗시시에서 어느 부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젊어서 그는 사교계의 명사로, 탕아의 우두머리로 뒷골목에서 방탕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방탕을 하면서 살아가던 그가 어느 날 환상 속에서 천사들의 합창 소리를 듣습니다. "은혜받은 자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때 그가 중생을 하게 됩니다. 그 말 한마디에 변화를 받고 새 삶을 살아가다가 나중에는 전도자가 됩니다. 그러고는 모든 것을 버립니다. 방탕 생활도, 환락의 생활도, 세상에 대한 미련도 모두 버립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이제부터 나는 좁은 길을 가련다.' 그 후 그는 문둥병자들에게 찾아가서 입을 맞추기도 하고, 거지들과 함께 구걸을 하기도 합니다. 또 소외자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런 그를 가리켜 후대의 사람들은 "예수가 재현하여 다시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성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를 "성 프란체스크"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런 유명한 기도를 남겼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삼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어둠이 있는 곳에 밝음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인에게는 신앙인이 가져야 할 생활 규범이 있습니다. 신앙인이 가져야 할 생각이 있고, 철학이 있고,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이 좁은 길을 걸어가는 생활이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씁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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