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욕망, 올무! (딤전 6:17-19)
사도 바울은 옥중에 앉아 있으면서도 밖의 소식을 다 듣고 있었습니다. 지금 에베소라고 하는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황금 만능주의에 빠져서 온갖 추한 모습들이 어지럽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을 있는 요충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교통이 편리했고, 상업이 아주 융숭했던 도시입니다 거기다 지방에 있었던 부자들도 도적때들이 무서워서 모두 도시로 모여들었기 때문에 에베소에는 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내에서도 부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어느 사회든지 물질의 번영을 누리게 되면 사치와 방종과 좋지 않은 사회 병리 현상들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에베소는 사회나 교회나 할 것 없이 사치와 부패와 온갖 병적 현상들로 가득 찬 도시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물질의 번영이 생활의 향상이나 도시 번영으로 발전해 가면 아주 바람직했을텐데 그렇지 않고 배금 사상과 향락 그리고 물질 지상주의로 발전해 갔습니다. 그 결과 에베소 교회는 신앙이 변질되어 갔고, 경건의 모양조차도 사라지게 되었으며, 물질에 탐닉하는 풍조에 빠져 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회는 타락하게 마련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무엇인가 지침을 줄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냥 두었다가는 모든 신앙과 생활이 병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편지를 써 보낸 것이 본문 말씀입니다. 여기 보면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한마디로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돈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에서 내내 돈을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는 지족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했고, 8절에서는 먹고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라고 했고, 9절에서는 욕심이 과하며 시험과 올무와 정욕에 빠진다고 했고, 10절에서는 돈을 사랑하게 되면 결국에는 믿음에서 떠나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돈이 문제입니다. 요즘 신문을 보면 이 세상이 이제 갈 데까지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이 병들었고 너무 많이 오염되었습니다. 돈을 가지고 사람들이 장난을 많이 합니다. 이렇게 돈을 너무 사랑하거나 무절제하게 되면 몇 가지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사람이 한번 물질의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면 무섭게 변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이성도 잃게 되고 신분도 잃게 되고 위치도 잃게 됩니다. 그리고 형제도 소이게 되고, 이웃도, 친구도, 심지어 자신도 속이게 됩니다. 그러고도 고민을 하거나 가슴 아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욕망이 그 자신의 이성을 마비시켰고 눈을 멀게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의 모습들을 보십시오. 해마다 똑같은 유형의 사고들이 터지고 있습니다. 작년에도 똑같은 사건으로 사람들이 봉변을 당했는데 금년에도 같은 사고를 저지르고 봉변을 당합니다. 마치 낚시에 걸려서 다른 물고기가 물 밖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서도 또 입질을 하는 물고기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물고기의 IQ는 0.3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성경은 돈을 지나치게 사랑하게 되면 "침륜에 빠진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침륜이라는 말은 헬라 원문 그대로를 보면 "조금씩, 조금씩 빠져서 마침내는 완전히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는 뜻입니다. 학생도 빠지고, 교육자도 빠지고, 학부모도 빠지고, 학교도 빠집니다. 이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세 번째로, 사람이 물질에 지나치게 탐닉하게 되면 "인간성이 황폐화되어" 버립니다.
성경이 돈에 대해서 강하게 교훈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문제 때문입니다. 사람이 돈을 지나치게 사랑하게 되면 순수성도 잃게 되고, 꿈도, 진실도, 미래도, 모두 상실하고 맙니다.
요즘 오렌지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아는데 모두 심성이 황폐화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이 모두 젊은이들이라는 점입니다. 이 젊은이들은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심성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젊은이들에게는 미래가 있어야 하고, 뜻이 있어야 하고, 이상이 있어야 하는데 이들에게서는 그런 것들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모두 심성이 무섭게 황폐화되어 버려서 그렇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병입니까?
네 번째로, 사람이 돈을 너무 사랑하게 되면 신앙에서도 떠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무서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이 서신을 쓰게 된 근본 이유가 이것입니다. 신앙인이 지나치게 세속에 관심을 갖거나 물질에 집착하다 보면 관심의 초점이 바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의 길에서 떠나게 됩니다
어떤 부부가 미국에 이민을 가서 청소부로 아주 열심히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주일이면 온 가족이 교회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큰 기쁨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돈을 모아 가지고 나중에는 큰돈을 소유하게 되니까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순위가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일도 지키지 않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에 매달렸습니다 이제 신앙은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오직 돈을 버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돈이 모아지는 일에 큰 기쁨을 갖게 되었습니다. 기도하여야 할 사람이 기도하지 않고 새벽 일찍부터 돈을 벌기 위해 뛰기 시작했으니 결국 그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러다 하루는 새벽에 일터로 나가다가 교통 사고를 당해서 입원을 했는데 단 일주일 동안의 병원 비를 지불했는데도 일년 동안 벌어들인 돈이 일순간에 나가 버리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그쯤 해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으면 다행스런 일이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신앙의 길에서 완전히 떠나 버리게 된다면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얼음이 얼어붙은 골짜기에 짐승 한 마리가 죽어 있었습니다. 독수리 한 마리가 공중을 날다가 그것을 보고서는 얼음 위에 내려앉아 한참 동안 포식을 했습니다. 썩은 고기를 먹느라고 정신을 빼앗기다 보니까 날개에 얼음이 달라붙는 것을 몰랐습니다. 배를 채운 후에 이 독수리가 위로 올라가려고 하니까 날개가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이 독수리가 먹을 것에 탐닉하고 있는 사이에 결국 하늘을 날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풍성하게 물질을 벌어서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벌어서 누구보다 앞서가면서 살아가십시오. 그러나 돈으로부터 지배는 당하지 말고 지배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본문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사람이 돈을 효과적으로 지배하지 못하면 이렇게 화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절제의 지혜를 가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절제라는 말은 자기 조절이라는 말입니다. 경기를 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자기 조절을 잘해야 합니다.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자고 싶은 대로 자면 절대로 경기에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음식을 조절해야 하고, 잠도 적절히 조절해야 하고, 마음도 허탄한 생각을 버리고 한곳에 집중시켜 통일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선수 생명이 오래갑니다. 이것이 절재입니다.
미국의 시카고에만 한국인 의사가 400명 가량 있다고 합니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가서 돈은 많이 벌었는데 믿음도 없고,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까 모여서 술 마시고 도박하고 그래서 부부 싸움이 잦고, 해서 이혼하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돈은 벌었는데 확실한 삶의 철학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절제할 능력이 없습니다. 돈은 벌었지만 인격은 없고, 명예는 얻었지만 진실도 없고, 업적은 얻었지만 자기를 조절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불행입니다. 돈은 있는데 정신은 없습니다. 돈은 가졌는데 철학이 없습니다. 돈을 쓰기는 해야 하겠는데 써야 할 곳에 써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부정하게 탕진하는 데 몇 억씩, 몇 천만 원씩 아낌없이 써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경고합니다. "돈을 조심하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
우리는 "물질을 적절히 선용할 수 있어야"합니다. 선용하지 않고 남용하면 책망받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것이 올무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선한 일에 투자하고 나누기를 힘쓰고 동정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문제가 있다면 바로 물질이 선용되지 않고 악용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적절히 사용하지를 않습니다. 온갖 사치하는 일과 악한 일에는 아낌없이 쓰여지고 있는데, 꼭 쓰여져야 할 곳에는 쓰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회가 굉장히 풍요롭기는 한데 보면 어딘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물질을 잘못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생활 철학"입니다.
검소한 정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정말 소중히 알고, 검소하게 오늘 같은 세상을 앞서가며 살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같은 시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범적인 삶의 질을 보여 주며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이 시대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새대의 진정한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존재에 있지도 않고, 영원한 가치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값이 있고 귀하다는 것들을 살펴보십시오. 모두가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보이는 것들은 모두가 잠깐 있는 것들뿐입니다. 잠깐 있는 것들을 위해서, 그것을 목적 삼고, 거기에 투자하고, 그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가치 없는 것임을 우리는 보여 주고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강조하기를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생활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뚜렷한 신앙관이 없으면 별로 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도날드 라빌이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고기 대신 두부를 먹고, 사치스런 가구보다 보통 가구를 쓰고, 고급 옷 대신에 검소한 옷을 입고 그리고 남은 돈은 하나님을 위해서, 복음 전도를 위해서 쓰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생활 철학이 없이는 오늘 같은 세상에서 앞서가며 살아가기란 어렵습니다.
미국 속담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1불로 점심을 먹으면 5시간 유효하고, 1불로 넥타이를 사면 다섯 주를 맬 수 있고, 1불로 자동차 부속을 사면 5년은 사용할 수 있는데, 1불로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면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청교도들이 죽을 위험을 감수하면서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건너갈 때는 이 같은 정신을 가지고 꿈을 이루기 위해서 갔습니다.
"신대륙에 건너 가서는 검소하게 살고, 엄격하게 청빈 생활을 하고, 오직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 보자." 이것이 청교도들의 이상과 꿈이었던 "아메리칸 드림"입니다.
이때 이들이 가장 강하게 영향을 받았던 정신이 마르틴 루터의 "만인 제사장론"과 칼빈의 "세계내적 내핍주의"입니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그리스도인은 현실에서 내핍 생활을 하여야 하며 사치하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직업는 하나님이 주신 신성한 것임을 알고 열심히 일하자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바로 청지기 정신이 싹텃던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열심히 일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다가 일생을 마칠 때에는,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모두 희사하고 갔습니다. 이것은 결국 청교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자랑스런 전통 생활 철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서구 사회가 이룩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를 보면 얼마나 차세적인지 모릅니다. 현실만을 생각합니다. 내 것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너무나 사치를 합니다. 무분별하게 씁니다. 욕망을 위해서만 사용합니다. 온갖 탈세를 하면서까지 자손들에게 물려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니까 그 자손들이 또 그렇게 살아갑니다. 여기서 온갖 문제들이 생기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이 같은 오늘날 우리들을 향해서 사도 바울은 권고합니다.
"부한 자들은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물질에 소망을 두지 말고, 선한 일을 행하고, 나눠주기를 힘쓰고, 동정하는 자가 되라. 이것이 장차 자기를 위해서 좋으니라."
오늘 마음과 정신이 너무 많이 오염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에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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