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의 고뇌! (롬 7:19-25)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고민이나 고뇌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따라다닙니다. 아마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이런 것들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근심이나 걱정 속에서 살아가도록 운명 지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프라이어라는 사람은 "사람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근심하고, 고민하고, 고뇌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노벨상을 받은 알렉시스 카렐이라는 사람은 "고뇌와 싸우는 방법을 모르는 사업가는 일찍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뇌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베고픔의 고뇌입니다.
이것을 제 1차적인 고뇌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아주 기본적인 문제입니다. 이 배고픔의 문제는 배고파 본 사람이나 알 수 있는 그 어느 문제보다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어린 손자를 데리고 앉아서 옛날 그 배고팠던 시절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얘야, 6,25때 먹을 것이 없어서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아니?" 그러자 손자가 말합니다. "밥이 없으면 빵을 먹지 그랬어요?" 할아버지가 기가 막힙니다. "밥도 없는데 빵이 어디 있니?" 그러니까 손자가 또 말합니다. "빵이 없으면 우유를 먹지 그랬어요?"
이 말을 듣고 할아버지가 화를 냅니다. "이놈아 밥도 없는 판국인데 우유가 어디 있어서 먹는단 말이냐?" 그랬더니 이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는 답답하다면서 "우유가 없으면 라면을 먹으면 될 것 아네요?" 그르더랍니다.
이 아이가 그 베고픔의 심각성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엊그제 어느 목사님 한 분과 함께 이야기를 하던 중에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길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마음속에서 그 근처에 살고 있는 성도 한 분이 불현 듯 생각이 나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정에도 없이 그 성도의 집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집에 들어가 보니까 그 성도가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몸부림을 치며 울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한참을 달랜 후에 그 사연을 들어 보니까 너무나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하더라고 합니다.
이 성도가 임신을 했는데 도저히 아이를 낳을 용기가 나질 않아서 병원에 가서 아이를 지우고 왔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보나마나 자신과 같이 고생이나 하고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살 것이 분명한데 고생은 나 혼자로 족하지 아이한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지우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그렇게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고뇌하면서 울고 있더라고 합니다.
이런 고뇌는 이해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생활고에서 오는 고뇌는 정말 뼈아픈 것입니다.
또 경쟁에서 오는 고뇌도 있습니다.
우리는 입시 생들을 보면서 그런 고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입시 생들이 겪는 고뇌는 참으로 처절합니다. 밤늦게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이고는 또다시 새벽같이 학원을 향해서 가방을 들고 집을 나가야 하는 입시 생들, 저들의 고뇌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한참 클 때인데 고뇌에 짓눌려서 크지도 못하고, 한참 피어오를 때인데도 얼굴에는 윤기도 없고, 웃음도 없고, 그렇게 생활하다가 때로는 견디다 못해서 생을 포기하는 학생도 있으니 이 얼마나 고뇌스런 인생입니까? 이것이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고뇌입니다.
이것이 비단 입시 생들뿐이겠습니까? 직장에서, 사업에서, 사회에서, 치열한 경쟁 속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뛰어야 하는 오늘 현대인들의 고뇌, 그 고뇌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소화가 안 되고, 잠을 편히 잘 수가 없고, 언제나 긴장을 풀 수가 없는 생활, 이것이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고뇌일 것입니다.
그리고 일상적인 고뇌도 있습니다.
사람은 살아간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고뇌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시인 밀턴은 "우리 주위에 탄식이 있고, 눈물이 있고, 한숨이 있는 것은 사람이 살아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언제나 근심과 번민과 남모르는 고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얼굴 속에 모두 이 근심이 주는 어두운 그림자들이 깃들어 있습니다. 거기에 수심이 들어있고, 거기에 근심의 자국들이 그려져 있고, 곱던 얼굴에 주름살들이 접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근심과 고뇌는 사람들의 모습을 아주 추하게 만들어 놓고 볼품없이 말가트려 놓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근심이 머문 흔적들입니다. 그래서 마이언이라는 사람은 "근심은 아름다움을 훔쳐 가는 도둑"이라고 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일소 일노 일로(一笑 一少 一老)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의미 있는 말입니다. 사람이 근심스럽거나 화가 나서 얼굴을 찡그릴 때는 얼굴 근육이 자그만치 64개가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소를 지을 때는 얼굴 근육이 13개밖에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심은 사람의 얼굴에서 가장 중요한 턱을 오그라들개 하고 얼굴에 주름살을 만들어 놓습니다.
사람을 늙고 멋없게 만드는 것은 나이가 아닙니다. 사람이 나이를 많이 먹어 늙었다고 해서 반드시 추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자꾸만 화를 내고 근심과 걱정들로 에워싸여서 살아갈 때, 그것들이 사람을 추하게 만들고 결국에 가서는 그것들이 사람을 좀 먹여서 죽게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한 400년 묵은 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콜롬부스가 처음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는 아주 조그만 묘목이었고, 청교도들이 상륙했을 때는 절반쯤 성장한 나무였다고 합니다. 이 나무가 400년을 살아오는 동안 벼락을 14번이나 맞았고, 수없이 많은 눈사태를 만났고, 수차례의 폭풍우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 나무는 까딱하지 않고 400년 동안을 미국의 역사와 함께 꿋꿋하게 서 있었는데 얼마 전에 이 나무가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하면 딱정벌레가 이 나무에 옮겨와서 파먹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버티는 힘을 잃어가다가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참 어이없는 일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시들지 않고 벼락과 폭풍을 견뎌온 거목이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쉽게 죽일 수 있는 작은 벌레 때문에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근심이나 걱정들을 가리켜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근심은 사람들의 마음속을 파먹는 딱정벌레와 같은 것입니다. 이 같은 고뇌와 근심을 가리켜서 제 2차적인 고뇌 또는 세상 적인 근심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고뇌다운 고뇌도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고뇌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 같은 고뇌에 빠져서 몸부림치는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고뇌 중에서도 가장 큰 고뇌가 무슨 고뇌인지 아십니까? 배고픔의 고뇌도 크고, 경쟁에서 오는 고뇌도 크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서 오는 여러 가지의 고민들도 크지만 그런 것들과 비교도 안 되는 가장 큰 고뇌가 있습니다. 그 고뇌가 바로 영적인 고뇌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고뇌 때문에 밤잠을 설쳐 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시시한 문제를 가지고 밤잠을 설치기도 하고 골몰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 사람이 시시해서 그렇습니다. 사람은 그 사람의 수준에 따라서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슨 고민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차피 고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면 보다 높은 차원의 고민을 했으면 싶습니다. 먹고 입는 물량적이고 가시적인 고민 때문에 잠을 못 이룬다면 그 사람은 그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왕에 잠을 살치고 고민을 해야 한다면 고민다운 고민을 하는 것이 더 좋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운 고민을 해야 합니다.
로마서 9: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롬9:2)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고통은 골육지친이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오는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골육지친은 자기 민족, 자기 동족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민족이 예수를 믿지 않고, 예수를 거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안타까워서 밤잠을 설치며 고민을 한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애국자적인 고민입니다.
이보다 더한 고민은 본문에 나와 있는 고민입니다. 그것이 7:19의 말씀입니다.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는 말입니다. 이것이 고민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고민을 하면서 몸부림을 칩니다. 7:24을 보면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하고 탄식을 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고뇌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고뇌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가 되기 전에는 유대교인이었습니다. 유대교인 중에서도 율법레 아주 열심히 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증오하면서까지 핍박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환상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고는 기독교로 개종을 해서 사도가 됩니다.
예수를 만날 때 그는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신비의 세계에 이끌려 가서 온갖 신비한 하나님의 세계를 직접 목격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능력의 사람이 되어서 그의 손수건만 만져도 질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은 더 이상 경험할 수 없을 만큼 신비적인 체험과 어느 누구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은혜를 받아서 예수를 깊이 있게 알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사도 바울은 신앙적으로 완벽한 사람입니다. 더 이상 성숙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로마서를 써 냅니다. 1장에서 복음의 능력을 말합니다. 2장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버려진 자의 운명을 말합니다. 3장에서 예수 없는 세상을 말합니다. 4장에서는 오직 믿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5장에서 은혜를 말합니다. 6장에서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생활을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러나 7장에 가서는 아주 초보자처럼 솔직한 고백을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갑자기 그답지 않은 아주 부끄러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7:19입니다.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 사도 바울은 그때까지 예수도 직접 만났고, 신비한 체험도 했고, 은혜도 받았고 해서 이젠 다 됐다 하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쯤 되면 나는 완벽한 인간이 되었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데 고민이나 갈등 같은 것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아록 보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내 마음속에서 선을 행하려는 마음과 하나님만을 사랑하려는 은혜로운 마음만 솟아 나와야 할텐데 왜 자꾸만 악한 생각이 솟아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이 고뇌는 1차적인 고뇌나 2차적인 고뇌와는 질적으로 다른 제3의 고뇌입니다. 나도 이젠 이쯤 되면 완벽하다 하고 생각했는데 왜 자꾸만 원치 않는 생각이 내 속에서 솟아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같은 고민을 해보셨습니까? 나는 이미 내 속에 있는 죄의 뿌리가 완전히 뽑혔겠지 하고 생각을 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것이 그냥 있어서 하나님께로 나가려는 나를 자꾸만 다른 길로 가게 하고, 죄의 본능이 내 속에서 자꾸만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24절의 말씀처럼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하고 고민해 보셨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회개를 하고 또 회개를 해도 자꾸만 죄성이 남아서 마음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하다 못해서 비눗물을 한 그릇 마셨습니다. 내 속에 있는 죄성을 모두 씻어내 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방법이 비복음적이긴 하지만 사도 바울이 느꼈던 그 고뇌를 그도 느끼면서 한없이 고민을 하며 몸부림을 치며 고뇌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 3의 고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과 거리가 자꾸만 멀어져 가는 마음 때문에 여러분, 자신을 놓고서 탄식하며 이렇게 고민을 해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한량없이 큰데 그것도 생각 못하고 너무나 뻔뻔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놓고 이렇게 죄송한 마음으로 고민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전도도 못하는 자신을 놓고서, 사랑은 말로만 하고 실천은 하지 못하는 자신을 놓고서, 믿음이 없어서 십일조도 제대로 못하고 살고 있는 자신을 놓고서, 주일 하루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애석해 하고, 고민하고, 마음 아파해 보셨습니까?
더더구나 나는 하나님께 가려고 하고,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자꾸만 마음속에서 악한 생각을 솟아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게 하는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나 때문에 몸부림 치며 고민하고 고뇌해보셨습니까?
여러분은 사도 바울의 고뇌에 찬 고민의 소리를 들으셔야 합니다. 내속에 있는 또 다른 육신적인 내가 아직도 죽지 않고 자꾸만 내 속에서 꿈틀거리고, 고개를 내밀고, 악한 생각을 뿌리고 있는 이 사실에 대한 고민이 우리 신앙인들이 해야 하는 고민입니다. 이것이 제 3의 고민이고 영적인 고민입니다. 이 같은 고민 속에서 고뇌하고, 몸부림 칠 줄 알아야 그 신앙이 더 깊이 있게 다져지고 하나님 앞에 더 솔직하게 나아가 무릎을 꿇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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