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자마다! (요 3:16-18)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 가운데서 가장 큰 은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너무나 유명해서 우리들이 모두 어려서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온 말씀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 구절만은 모두 기억할 정도로 이 구절은 유명합니다.
그래서 성경 주석자들은 이 구절을 가리켜서 "복음서 중의 복음서" 또는 "작은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신. 구약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복음의 진수"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만큼 이 말씀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 그런 말씀입니다. 여기서 믿음과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구원"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이며 복음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믿음을 말할 때는 다음의 몇 가지가 선행되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관계성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여기서 "저"는 물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관계되지 않고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구원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여러 종류의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욕망과 소원성취를 목적으로 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을 흔히 기복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 신앙은 욕망이나 목적을 성취하려고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믿음은 아닙니다. 그래서 본회퍼라는 신학자는 이 같은 믿음을 "싸구려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또 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믿음도 있습니다. 마음의 평안이나 얻고 심리적인 위안이나 얻어 보자 해서 믿는 신앙입니다. 이것도 성경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신앙이고 극히 수양적인 믿음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과 관련성이 없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예수님과 관계될 때에만 그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태중의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탯줄과 연결되어 있을 때만 생명을 유지하고 영양을 공급받게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태아가 탯줄에서 떨어지면 끝장입니다.
피아노를 보십시오. 피아노의 생명은 줄입니다. 피아노가 겉에서 보면 화려하고 윤기가 나고 빛이 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속에 들어 있는 줄입니다. 그 피아노가 아무리 값이 비싸고 화려해도 모든 줄이 붙어 있어야 할 곳에 붙어 있어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고 값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관계성입니다.
가끔 보면 집안 식구들끼리 싸우다가 "나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속이 상하니까 하는 말이겠지만 이 말처럼 무책임한 말이 없습니다. 어떻게 나만 죽으며 그만입니까? 내가 자살해서 죽으면 당장 가족들이 고통을 당하는데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까? 나는 나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관계성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관계성을 말할 때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합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아무리 극상품이라고 할지라도 줄기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 잘났다고 줄기에서 떨어져 나가면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시골에서 고구마를 캘 때가 되면 땅속에서 고구마가 커서 땅이 갈라지고 흙이 수북하게 올라옵니다. 그때 갈라진 곳을 파면 큰 고구마가 튀어 나옵니다. 그때 줄기를 잡고 쑥 뽑으면 여러 개의 고구마가 한꺼번에 주렁주런 매달려서 뽑여 나옵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 것이 하나 있습니다. 분명히 줄기를 잡아당겼는데 고구마 여러 개가 한꺼번에 뽑혀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것은 모든 고구마들이 죽기에 단단히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줄기를 잡아당기니까 여러 고구마들이 함께 뽑혀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관계성입니다.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모두 예수의 생명 속에 연합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우리가 있고, 우리가 있는 곳에 예수님이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누리는 축복을 우리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그가 부활했으니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영광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영광을 받을 것이고, 그가 승리했으니 우리도 승리할 것이고, 그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우리도 세상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주님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3장에서 보면 "(골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것이 모두 관계성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과 관계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나의 목자로,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본문이 말하고 있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간혹 보면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처럼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선을 행하고, 구제를 하며, 진실하게 살아 보려고 힘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신앙인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되려고 노력했고,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힘쓰는 것일 뿐이며, 예수를 하나의 모델로 생각하고 모방하는 것이지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드이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에서 이 관계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식하는 일입니다.
"(요3:16)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게 해서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그 같은 예수를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우선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면 믿음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값이 비싼 물건을 소유하고 있어도 그것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고 살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아주 비싼 보석 반지가 있는데 그것을 어디에 놓아 두었는지 알 수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값이 비싼 최신 기계를 수입해 들여 왔어도 그 기계를 만질 줄 모르면 그것은 쇠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여기 "안다"는 말은 머리로 기억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은 체험한다는 말입니다. 가령 성경을 뜻도 모르면서 머리로만 많이 기억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성경을 가장 많이 외운 사람이 불행하게도 영등포 교도소에 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는 신약성경을 모두 외우고 시편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웠다고 합니다. 성경을 그렇게 많이 외웠어도 그 말씀이 그에게 별로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체험이 수반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베드로가 "(요6:68)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하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곧 체험입니다. 이같은 체험이 있으니까 그를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같은 체험이 없는 사람은 미련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구도의 길에서 떠나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반드시 이 같은 체험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이는 "과학의 근거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우주선에 사람을 태워서 달 나라로 쏘아 올립니다. 그때 우주선에 태워져 달 나라로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별로 긴장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선이 다시 지구로 무사히 돌아올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학조차도 믿음에 기초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같은 이치는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 높이 올라가서도 편안히 잠을 잡니다. 왜냐하면 이 비행기가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들이 기차를 타고 그 좁은 레일 위를 마구 달리면서도 단잠을 잡니다. 그것도 믿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좋은 믿음입니까? 그래서 요한복음 "(요1:12)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고 했습니다. 어떻게 믿습니까? 알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고로 믿음은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무지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무지가 죄라고 했습니다. 모르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무지하면 세상을 살아가기가 더 힘이 듭니다.
같은 길을 걸어가도 느낌이 갈 때 다르고 올 때 다릅니다. 갈 때는 모르는 길을 가게 되니까 더 멀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올 때는 아는 길을 오기 때문에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알고 살아가고, 또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나를 아는 길이고, 세상을 아는 길이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는 길입니다. 특히 나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문제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는 일이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영접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주제입니다. 믿음은 알고, 인식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알고 인식한 바를 마음 깊이 영접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받아들엿 나의 주님으로 고백해야 하고, 나의 주님으로 체험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알고, 믿고, 체험을 해서 영접을 하게 되면 맨 먼저 변화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목적의 변화입니다. 나 중심에서 예수 중심으로 목적이 변화됩니다. 또 소속이 바뀌는 변화가 오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도 목적은 그대로 있고 방법만 바뀌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령 무당을 찾아다니며 복을 달라고 하던 대로 이곳저곳을 헤메다가 마침내 교회로 들어와서 그 목적 그대로 복을 달라고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목적은 그냥 있고 방법만 바뀐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알고, 믿고, 영접을 했으면 분명히 목적도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의 개념도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복으로 알고 살았지만 목적이 변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 진정한 것만을 복으로 알고 살았지만 목적이 변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 진정한 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야 그 예수 그리스동에게 나의 삶 전체를 위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삶 뿐만 아니라 나의 인생도, 심지어는 나의 영혼까지도 그에게 위탁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5:16절에서 말씀하기를 "(고후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를 알고 가치관이 바뀌고 나니까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전에는 모두 겉 모양만 보고 판단하고, 값을 매기고, 그 중요성을 말하던 사람이 예수를 알고 나서 목적이 바뀐 후에는 보는 관점이 달라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겉 모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속을 보고, 인격을 보고, 내용을 보고, 삶의 질을 중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외모를 보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중심에 예수가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에는 관계성이 전제되어야 하고, 알고 난 후에는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좋은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 모두는 주님과 연관되어 주님이 누리는 축복을 함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부활하신 주님을 꼭 붙잡고 주님과 함게 승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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