푯대를 향하여! (빌 3:12-16)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좇아 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한번 세워 놓은 푯대를 놓치지 말고 정신차려 좇아 가라는 말씀입니다. 가끔 보면 푯대를 놓치고 일평생을 방황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잠시 한눈을 판 것 때문에 그만 푯대를 놓쳐 보려서 일생을 후회 속에 살아가는 학생도 있습니다. 젊은 시절 한번 발을 헛디딘 것이 그만 평생을 그곳에서 발을 빼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신앙 생활을 잘하다가 어떤 기회에 푯대를 잃어버린 것이 그만 아직까지도 돌아올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참 안타까운 모습들입니다.
우리들도 지금 신앙 안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푯대를 잃어버릴 위험을 언제나 있습니다.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께 붙잡히라고 했습니다.
12절을 보면 "(빌3:12)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안에서 "나는 없고 있다면 오직 예수만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렇게도 자신 만만하게 세상을 살아가게 하였던 비결이고 원동력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듭해서 "너희는 내 안에 있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혼자 있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주님과 함께 연합하라고 합니다.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듯이 주 안에 들어와서 주님과 연합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연합의 능력입니다. 줄기와 가지가 연합할 때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듯이, 무한한 힘과 능력과 자질이 주님과 연합한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헌 연합의 능력을 실험한 예가 있습니다. 소의 힘을 측정해 보니까 소 한 마리가 6톤의 짐을 끌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수학적인 개념으로 보면 소 두 마리가 함께 끌면 12톤을 끌 것이라는 대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소 두 마리가 연합을 해서 짐을 끌게 하니까 32톤의 짐을 끌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 한 마리만 있을 때와 소 두 마리가 함께 있을 때와는 그 능력 면에 있어서는 비교가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합의 신비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나 혼자로서는 무지하고 무능하고 나약해서 6톤의 무게를 움직일 만한 보잘것없는 실력밖에는 안되지만 우리가 주님과 연합할 때는 32톤도 더 되는 무게를 움직일 만한 능력 있는 신앙인으로서 살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연합의 신비입니다. 그때 우리에게는 일생 동안 흔들림 없이 세워 놓은 신앙의 푯대를 향하여 나갈 수 있는 용기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디 그렇습니까? 엉뚱한 데서 힘을 얻으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지식에서 힘을 얻으려고 합니다. 지식도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는 합니다. 그래서 옛부터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아는 것이 힘이다"가 아니고 "가진 것이 힘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오늘날은 확실히 아는 사람보다 가진 사람이 더 위력 있습니다. 그래서 많이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또 많이 가진 사람들이 큰소리를 칩니다.
그런데 톨스토이라는 사람은 견해를 달리 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은 믿는 데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아는 것도, 가진 것도, 어느 정도의 힘을 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매달려만 있을 수 없는 이유는 사람이 늙어서 망각의 시대로 빠지거나 가진 것을 모두 상실하게 되는 날에는 모두를 한꺼번에 잃게 되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주는 힘만이 궁극적인 면에서 힘이 되어 준다는 말입니다.
몰트만이라고 하는 신학자는 2차 대전 때 3년 동안이나 포로로 잡혀서 수용소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3년 동안 자신이 겪은 포로 수용소 생활은 한마디로 말해서 패배와 절망이었고, 날마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뿐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에게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 그 무엇이 힘이 되어 주었겠습니까? 그때는 그에게 모든 것이 "다음"이었습니다.
후에 그가 술회했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가능한 대로 절망에 대한 생각을 마음에서 떨쳐 버리고, 오히려 희망의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면서, 동시에 위를 쳐다보면서 인간의 한계를 넘고 초월한 세계에서 오는 힘을 입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밖에는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무사히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온 후에 심혈을 기울여 정리한 신학 체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인간의 한계를 넘고 초월하는 속에서, 삶의 곤란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일을 바라보며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그는 "역사 속의 희망"이라고 했고, 또 "희망의 신학"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께 붙잡히라고 한 것은 그것만이 궁극적인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주님께 붙잡히는 신앙을 가지고 살 때 그 같은 힘을 얻는 축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둘째는 미래 지향적이 되라고 했습니다.
13절을 보면 "(빌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미래 지향적이 되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 가운데는 예수께서 자기들을 구원해 주셨으니까 자기들은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구원을 받았다는 과거의 경험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 더 진보하고 개선해 나가려는 의지는 전혀 없이 신앙의 오만함과 안일함에만 빠져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간다"고 말했습니다. 이를테면 지금 안일함에 빠져 있지만 말고 앞으로 다려 나아가기를 위해서 계속 노력하라는 권고의 말입니다.
사람이 너무 옛날에 집착하거나 뒤엣 것에 집착하게 되면 발전이 없고 새로움이나 진전된 삶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구원의 성이나 축복의 땅은 뒤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앞에 있습니다. 축복의 땅은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가로질러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라야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이미 출애굽을 했으면서도 애굽을 잊지 못하고, 옛날에 벽돌 구우며, 고기나 얻어 먹던 그때만을 추억하며 생각하는 사람은 축복의 땅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소돔 땅에서 살던 롯의 아내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못해서 그만 구원의 은총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불행입니다.
어떤 결핵 환자가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는 그의 병을 낫게 해주려고 정성을 다해서 치료해 주었습니다. 본인도 자신의 병을 고치려고 최선을 다해서 약을 먹어 가며 치료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사람이 병원으로부터 이제 다 나았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입니까? 이제는 그 동안 못다 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집에 와서 밤새도록 고민을 하다가 약을 먹고 그만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남겨 놓은 유서를 보니까 "이제는 내가 할 일이 없어져서 허탈해서 죽는다"고 쓰여 있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유감된 일입니까? 할 일이 없다니요, 병이 나았으면 일을 해야지요. 신세진 사람들을 위해서도 못다 한 일을 해야 하고, 그동안 남들보다 뒤졌으니 배나 더 노력을 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지 죽기는 왜 죽습니까?
빌립보 교회 신자들이 이렇게 무력증에 빠져 있었습니다. 안일에 빠져서 앞으로 나가려는 노력도 없고, 새로워지려는 의지도 없고, 용기조차도 없었습니다. 다만 옛날에 구원받았다는 그 한 가지 과거사에만 얽매여 가지고는 현재를 만족해 할 뿐 미래를 위해서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 이 말은 "너희가 보기에는 내가 다 이룬 사람같이 보여지겠지만, 나는 아직도 여전히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이렇게 애를 쓰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앙도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도 용기 있는 사람만이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 폴 틸리히라는 사람은 "존재에의 용기"라는 책 속에서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을 해결해 주는 것은 용기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푯대를 향해서 중단 없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앞에 있는 상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14절을 보면 "(빌3:14)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변함없이 신앙의 푯대를 향해서 나가려면 이 상급에 대한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때로 이 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내와 절제와 목적에 대한 의지를 갖게 해줍니다.
88올림픽 때 우리 나라 선수가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을 했는데 그는 뒤에 소감을 말하기를, 뛰는 도중에 고통을 견딜 수가 없어서 차라리 죽고 싶더라는 말을 했습니다. 죽고 싶도록 고통스러웠지만 왜 끝까지 뛰었습니까? 바로 상 때문입니다. 그 상이 그를 뛰게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는 그때 인내하지 못하고 그만 주저앉아 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종종 신앙인을 경주자에 비유를 했습니다. 경주자는 자신이 목표로 하고 있는 푯대를 향하여 방향을 잡아 놓고는 쉬지 않고 뛰어갑니다. 그래야 우승을 할 수 있고, 마침내 승리의 월계관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고전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상급 의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일에 자기를 절제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함부로 목표를 바꾸거나 잃지 않게 해줍니다. 가끔 보면 권투 선수들 중에 생활이 무절제한 선수들이 있는데 그들을 보면 한결같이 선수 생명이 길지가 않습니다. 얼마 못 가서 타이틀을 빼앗겨 버립니다.
그렇지만 주어진 상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는 선수들은 생활에 절도가 있고, 분별이 있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선수로서 생명이 길 수밖에 없습니다.
김활란 박사에 대한 글 가운데 그분이 마지막에 남겼다는 말이 아주 인상에 남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위해서 살았습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분명한 삶입니까? 그러니까 일생 동안 한 번도 흔들림이 없이 오직 한 길뿐인 외곬의 생을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살려고 하면 우선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갈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치리하시는 교회의 이웃 교회에 가서 세례식을 갖기 위해서 자전거를 타고 산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가는데 길가에서 아주 예쁘게 생긴 꿩 새끼들이 놀고 있더라고 합니다. 세례를 베풀기 위해서 가고 있던 이 목사님이 꿩 새끼들을 보고는 그냥 "참 예쁘구나"하고 갈 길이나 갔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그 새끼들이 하도 예뻐서 이 목사님이 자전거를 세워 두고는 한 마리 잡아 보려고 살금살금 따라갔습니다.
그때 꿩 새끼들이 휑 하니 날아가 버렸더라면 또 좋았을텐데 쫓아 가는 만큼 도망을 하는데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렇게 쫓아가다가 보니까 아주 멀리까지 가게 되어 그만 포기하고 돌아와 보니까 누가 자전거를 타고 가 버렸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곳에서부터 이 목사님이 성경책을 끼고는 십리 길을 뛰어가는데 속 마음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앞만 보고 가라 했는데 왜 쓸데없는 것에 관심을 두느냐"하고 자꾸만 꾸짖는 말씀이 들리더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에 도착을 하고 보니까 시간도 이미 지나 버렸고, 온 몸은 땀에 흠뻑 젖어서 보기에도 아주 흉하게 되어서 민망해서 혼났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이렇게 한눈을 팔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값없는 자리로 전락하고 시간을 낭비하게 되고, 가던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을 지낸 아이젠하워가 1945년에 2차 대전을 종결 짓고나서 한 말이 있습니다. "싼 값을 치루고서는 값비싼 승리를 거둘 수가 없다." 얼마나 뜻 깊은 말입니까?
여러분, 주께 붙잡혀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과거는 화려했든지, 아니면 부끄러웠든지 모두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상을 바라보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면류관이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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