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열심! (요 3:16-21)
1.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도 '보시기에 좋았더라'하고 감탄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에덴 동산이라고 했습니다. 에덴이라는 말은 파라다이스 즉 '낙원'이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그곳은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또 그곳에서 사는 생물들도 아름다웠습니다. 그 생물들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 역시 역사상 그런 때가 없을 만큼 평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곳은 부끄러움이 없고, 수치가 없고, 갈등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때는 아름다움과 조화로움과 풍요와 진정한 대화가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하나님이 직접 그곳을 찾아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친교도 하시고, 대화도 하시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런 낙원의 생활은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낙원을 오래 간수하지 못했습니다. 아답과 하와가 저지른 큰 실수 때문에 낙원은 한 순간에 송두리째 깨져서 실낙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이 불화와 갈등입니다. 우선 하나님과의 불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의 하나님이 아니고 두려움의 하나님으로, 심판의 하나님으로, 공포의 하나님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멀리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불화도 시작되었습니다. 온통 갈등과 부조화와 고뇌스러움과 죽음의 위협 등으로 사람들은 갈등에 휩싸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연과도 조화가 깨졌습니다. 자연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가 아니고 독을 품고 피해를 주고 홍수와 가뭄과 재해를 안겨 주었습니다. 또 동물과도 조화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함께 생활하던 동물들도 인간의 적이 되어서 포악해지고, 물고 물리는 원수로 변한 것입니다.
낙원은 이제 만신 창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은 이제 하나님을 향해서 도전하는 존재가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버렸고, 이 세상에는 온갖 죄가 들어왔고, 파괴가 발생했고, 갈등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은 이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주 악하고 흉한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2.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은 더 이상 눈뜨고는 볼 수 없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물로 세상을 깨끗하게 쓸어 버리셨습니다. 그것이 노아의 홍수입니다. 그때 이 세상은 완전히 심판을 받아서 망해 버렸습니다. 사람도, 식물도, 짐승도,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함께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서 심판을 받으니까 세상의 모든 식물도, 짐승도 함께 멸명을 당했습니다. 인간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 모두가 함께 복을 받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모두 마앟고 노아 가족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시대에 노아 가족만은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들로 세상을 새로 시작하셨습니다. 노아는 성결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 만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기대를 가지고 온갖 복을 다 주셨습니다. 창대케 하시고, 벙성케 하셨습니다. 그 자손은 크게 번성해서 많은 무리들이 한곳에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넓은 땅에서 큰 민족을 이루어 살았습니다.
그런데 자손들이 많아지게 되니까 선한 일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 또다시 불의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피속에도 아담의 타락된 피가 그대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타락된 본성은 피를 통해서 유전되어 자손에게 그대로 상속이 됩니다. 사람의 피 속에는 이 죄의 유전 인자가 들어 있습니다.
집집마다 보면 좋지 않은 집안 내력들은 모두 피를 통해서 유전됩니다. 이 노아의 자손들도 무리가 커지고 나라가 커지게 되니까 그 타락된 본성이 작용을 해서 하나님을 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벨탑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바벨탑을 쌓은 의도는 하나님을 대항해서 인간의 의지를 나타내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들의 힘을 과시해서 하늘까지 쌓아 보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들의 그런 행동은 결코 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타락된 인간의 심성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성을 허물어트리십니다. 그리고 바벨탑만이 아니고 사람들까지도 흩어 버리셨습니다. 여러 지역으로, 여러 언어로, 여러 모습으로 그들을 완전히 흩어 버리셨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제2의 심판입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완전히 이질 문화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언어도, 관습도, 문화도, 이해도 모두가 이질적입니다. 거기서 싸움이, 다툼이, 갈등이, 불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저주고 심판입니다.
3. 그 후에 하나님은 세계를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그 시작점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위해 아브라함의 자손들만으로 히브리 공동체를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온갖 축복을 약속하셨고, 그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히브리 백성을 큰 민족으로 키우셨고, 세상의 모든 민족보다 우수하고 뛰어난 백성으로 키우셨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브라함은 순수한 신앙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런 전통은 그의 아들 이삭을 거쳐 야곱과 요셉으로 이어져 갑니다. 그러는 사이에 그 민족도 또다시 거대한 민족으로 발전해갑니다. 그러면서 그 민족도 다시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죄를 짓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곁을 떠나고 그 뜻을 거역하기 시작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내내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갈등 관계가 유지됩니다. 백성들은 우상에 관심을 갖고 하나님의 곁을 떠나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고난당할 때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부르짖기도 하고, 참회도 하지만, 평안이 시작되면 하나님의 곁을 떠나 버립니다. 그리고 우상에게 가서 아첨하고 섬기고 그럽니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서 충고하고, 달래고, 때로는 책망하고 경고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면 잠시 돌아왔다가 다시 우상에게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들의 피와 근본이 타락되어서 그렇습니다. 백성들은 마침내 완악해져서 책망하는 선지자들을 핍박했고, 박해했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끝까지 인내하면서 참으시고 선지자들을 또 보내셨습니다. 죽이면 또 보내고 죽이면 또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은 그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하나님의 곁을 떠나지 못해 안달이었습니다.
4,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십니다.
그 아들을 보내실 때의 마음을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이 그 유명한 요한복음 3:16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 전체를 압축해 놓은 그런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석자들은 이 말씀을 '족음서 중의 복음서'라고 하고 또 '작은 복음서'라고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관심은 온통 세상을 구원하는 데 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고, 멸망시키고,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세상이 심판을 받아서 불바다가 되고, 물바다가 되고, 병들고, 탄식하고, 고뇌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관심은 온통 사람들이 세상을 살되 건강하게 살고, 행복하게 살고, 기쁘게 살아가게 하시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멸망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어떤 흉악한 죄인이든 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세상의 법은 그를 용서치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시고 받아들일 용의와 아량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좀처럼 헤아리기 어려운 하나님의 깊으신 마음입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놀라게 했던 지존파 일당들이 있지 않습니까? 잔인 무도했던 그 흉악한 살인범들이 지금은 아주 차분하게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인육을 먹었다고 큰소리 치건 그 사람이 제일 열심히 예수를 믿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세상이 그들을 버렸고, 이웃이 그들을 버렸고, 심지어는 부모 형제들이 다 그들을 버렸어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 차디찬 감옥까지 찾아가셔서 그들을 용납하시고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어떤 사형수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세상에 있을 때는 성경이라는 책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들어와서 죽음을 얼마 안 남겨 둔 시점에서 나는 세상에 이런 기적 같은 책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렇게 열심히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람이 세상에서 얼마나 잔인하게 살았겠습니까? 얼마나 잔인하게 살았으면 세상의 법이 그를 용서치 않고 사형수로 낙인을 찍어 놓았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감옥 속에까지 찾아가셔서 죽기 전에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같은 하나님의 그 열심 열정 그리고 인간에 대한 미련이 얼마나 강한가를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되 그냥 편안히 왔다 가도록 하신 것이 아니고 기구한 희생의 제물로 보내셨습니다.
우선 태어나시기를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수백년 동안 기다리고 고대하던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데 그 많은 장소 다 놔두고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생애 동안 온갖 무시 속에서 살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얼마나 무시를 당하였습니까?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무시의 극치입니다. 당시 나사렛은 저주받아서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면서 무시를 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제자로부터 배반을 당합니다. 세상에서 자장 가슴 아픈 일이 배반당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배신 중에서도 가장 큰 배신은 스승이 제자로부터 배반당하는 것이고, 상관이 부하로부터 배신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단테가 신곡에서 가장 엄하게 다스린 죄인이 배신자였습니다. 스승을 배신한 가룟 유다와 로마 황제를 배신한 두 부하를 지옥 가운데서도 가장 밑바닥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가슴 아픈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제물로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희생의 극치입니다. 우리들이 십자가를 너무 쉽게 말해서 그렇지 사실 십자가는 우리들이 입에 담기조차 거북하고 흉물스러운 것입니다.
옛부터 사람을 죽이는 사형 방법은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사약을 내려서 죽게 했고, 또 목을 매달아 죽이는 교수형이라는 것이 있고, 단두형, 총살형 등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목에 돌을 매달아 깊은 물에 던져 버리는 사형법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나와 있는 사형법입니다. 예수님이 어린 아이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가서 빠져 죽는 게 낫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죄인 중에서도 흉악한 죄인을 그런 사형법으로 죽였습니다. 죄질이 너무 나빠서 죽은 후에 장례식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아예 맷돌을 매달아 깊은 물에 던져서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보다도 더 지독하게 흉한 사형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십자가 형틀입니다. 이 십자가는 너무나 흉칙해서 당시 사람들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은 십자가라는 말을 입에 담기를 꺼려 했다고 합니다. 옛날 가나안에서는 땅은 생명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신성하게 생각해서 땅을 섬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신앙이 고대 사회에서는 일반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흉악한 죄인은 십자가에서 죽였는데,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때는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높게 매달아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땅에 묻히는 권리도 박탈되어서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공중의 새들이 와서 모두 먹어 치우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신성한 땅에 죄인을 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형법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루터포드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위 몸집은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일을 하고, 새의 날개도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날고, 십자가도 말할 수 없이 무거우나 바로 그것 때문에 천국에 간다.' 얼마나 지당한 말입니까? 십자가는 이렇게 값진 것입니다.
신학자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 교회에게 가장 치명적인 원수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너무나 값싼 은혜만을 구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고 너무 값싼 은혜만을 위해서 힘을 쓰고 싸우고 있다고 개탄했습니다.
또 키에르케고르는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체면이 없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들은 잘 살려고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복을 달라고 철야를 하고, 금식을 하면서 왜 좀더 값비싼 은혜를 구하지 못하고 잠시 후에는 없어져 버릴 값싼 은혜만을 구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십자가가 지닌 이 같은 진정한 뜻을 모르면 무지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이렇게 희생을 시키셨습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미련이나 열심히나 열정이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무감각하고 불응한다면 그 죄가 또한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참고 또 참다가 마지막까지도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 때는 도적같이 오셔서 인정 사정 없이 문을 닫아 버리고 두 번 다시 기회를 주지 않고 멸망받게 하신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생을 향한 애정이고 사랑입니다. 우리는 성탄절만 되면 이 같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열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또다시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다가오는 성탄절에는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되새겨 보고, 또 자신의 몸을 희생하기까지 순종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사랑도 함께 체험해 보는 축복의 기회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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