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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잠 11:1-6)

by 【고동엽】 2022. 1. 24.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잠 11:1-6)


잠언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정신적인 양식이 되는 교훈들만을 묶어 놓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특별히 사람들을 유혹하는 함정이 많고, 덫이 많고, 미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람들이 잠깐 한눈을 팔면 영락없이 걸려 넘어지거나, 함정에 빠지기 아주 쉬운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의 사람들에게 잠언은 삶의 지혜를 줍니다 여기 보면 많은 함정과 덫을 피해 갈 수 있는 방법과 비결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만 봐도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몇 가지 삶의 지혜로운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네 가지 삶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원리는 정직한 삶입니다.

 

이것은 아마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또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영원히 불변하는 지고의 삶의 지표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느 시대에도 이 원리를 사람들에게 요구할 것입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잠11:1)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거짓을 싫어하시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속이는 저울을 싫어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세상의 사람들에게 정직을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무너지면 그 세상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는 거짓이 너무나 많습니다. 가는 곳마다 보면 거짓투성이입니다. 이 땅 어디를 가도 거짓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리와 언제나 대립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거짓이 많은 세상을 살다 보니까 본의 아니게 우리들의 의식 속에는 이 거짓에 대한 피해 의식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물건을 살 때는 의례히 "이것 진짜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물으면 뭘 합니까? 가짜를 가짜라고 말하는 장사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속이고 나서도 마음 아파하지 않고 속고 나서도 그렇게 속상해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속고 속인 것이 한두 번이 아닌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불성실한 생활 습관입니까?
우리들의 언어 습관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음미해 보면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말이 연결이 안 됩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재미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헷갈립니다. 장난 같기도 하고, 진짜 같기도 햇 헷갈려 하는 그 모습을 보는 재미로 부모들은 예사로 말을 합니다 또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가면서 주사 놓지 않는다 해놓고 가서는 붙들고 찔러 버립니다. 이런 경우가 어디 한두 개입니까?
아버지가 아이를 데리고 목욕탕엘 갔습니다. 아버지가 탕에 들어가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 시원하다." 그럽니다. 그 말을 듣고 어린 아이도 따라서 시원한 물에 의심 없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시원한 물입니까? 이 아이가 또 헷갈립니다. 그래서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지금 즐겨 쓰고 있는 말의 습관입니다. 매사가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속이고서도 미안해 하지 않고, 속고 나서도 분해 하지 않고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여기서 하나의 문화가 생겨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 두루뭉수리 문화일 것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 모호한 문화, 즉 두루뭉수리 문화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들에게 보다 분명한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옳고 그름을 보다 분명히 하는 그런 삶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고르시고 선택하실 때는 이 기준을 적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으로 사울을 선택하셨는데 그때 그를 선택하신 기준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가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오라고 사울에게 임무를 주니까 사울은 사흘 동안 나귀를 찾느라고 땀을 흘리며 각지를 돌아다니며 헤매었습니다. 한 시간쯤 돌아다니다가 없다고 하면 그만일텐데 사울은 사흘 동안 나귀를 찾느라고 밥을 굶어 가면서 돌아다녔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나귀를 찾아 돌아단는 그의 그 진실된 모습을 눈여겨 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생각하십니다. "저 사울에게 내 백성을 맡겨도 되겠구나, 이 사람이라면 내 백성을 맡길 수 있겠구나"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초대 임금으로 사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저울을 속여서 부당 이득을 취하는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 무슨 일을 안심하고 맡기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잠깐동안 돈을 벌어들일는지 모르지만 큰 돈을 벌어들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돈을 어디서 벌어들일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일생 저울추나 속여 먹고 살아가는 그 범주를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렇게 살면 일시적으로는 돈을 조금 벌어들이겠지만 결국 좀 멀리 보면 상실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일시적인 것에 눈이 어두워지는 사이에 영원한 것을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일시적인 유혹에 너무 매여서 살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너무나 큰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속이는 저울을 싫어한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오늘 현대인들에게 당부하시는 삶의 첫 번째 원리입니다.

 

두 번째 원리는 겸손한 삶입니다.

 

2절 말씀을 보면 "(잠11:2)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인사 잘하고, 예의 바르고, 공손하면 겸손하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겸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겸손은 "자기를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헬라 사람들은 이 명제에 대해서 아주 깊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은 특별히 아테네의 델포이 신전 벽에 큰 글씨로 "너 자신을 알라"고 썼다고 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모르면 교만해집니다.
로마서 12:3절을 보면 "(롬12:3)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고 살라"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겸손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죄 중에서 가장 큰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죄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가장 큰 죄라 했고 또 성겨은 그것을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거드름이나 피우고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다니는 그것이 교만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만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모두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는 피조물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피조물이 어떻게 창조주 앞에서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있을 수 있습니까? 예배라는 말이 "그 앞에 엎드린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이를테면 겸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피조물임을 모르고 그 앞에 엎드릴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별짓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짓을 하는 것은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못할 짓이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교만입니까? 그러니 그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래서 2절을 보면 "(잠11:2)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신앙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겸손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쓰실 때는 그런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원리는 신의의 삶입니다.

 

4절을 보면 "(잠11:4)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의리는 죽음을 면케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재물은 심판의 날에 무익하지만 신의는 그날이 되면 유익합니다. 세상에서도 지조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거나 신의가 있는 사람은 위기를 맞이했을 때 구원을 받습니다.
사람의 값은 신의에 있습니다. 신용이 있는 사람, 그 사람이 값이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신용을 잃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참 값이 없습니다. 존귀함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과는 사람들이 상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그쯤 되면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의가 없어져서 그렇습니다.
오늘 서구 사회에서는 이 신의를 가장 큰 재산으로 인정합니다. 그 사회에서는 신용을 잃고 신의를 상실하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미국에 이민을 가서 사는 성도님 한 분은 교통 사고로 어린 딸을 잃고나서 경황 중에 카드 결제일을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불성실자로 판명되어서 그 뒤로 신용을 회복하느라고 굉장히 고생을 했습니다. 사정을 해도 통하지가 않습니다. 설명을 해도 인정되지가 않습니다. 오늘 서구 사회는 이 신용에 대해서 얼마나 엄격한 사회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단테는 배신을 가장 큰 죄라고 했습니다. 단테는 신곡이라는 책을 보면 배신자들을 모조리 지옥 중에서도 가장 최하층에 가두어 놓고 가장 중죄인 배신자들은 모조리 지하 9층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곳에 보면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 하며 시저를 배신한 브루투스, 카시우스를 거기다 가두어 놓았습니다.

여러분 신의가 없는 사람에게는 무슨 일을 안심하고 맡길 수가 없습니다. 그가 무슨 일을 책임 있게 해낼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성경이 신의를 강조하는 이유는 세상에서 신의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서도 신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사람에게도 신의가 없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서 무슨 신의가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신의가 없는 사람은 신앙도 깊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도 일종의 신의 있는 생활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나의 창조주로, 예수님을 나의 주로 믿는다"고 고백을 했으면 신의 있게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쁘거나, 한가하거나 신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의 있는 신앙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신앙에서 무슨 힘이 나올 것이며 무슨 뜻인들 솟아 나오겠습니까?
오늘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가장 큰 약점이 있다면 이 신의가 적다는 것입니다. 모두 약고, 타산적이고, 야무지고, 사람을 이용할 줄만 알았지 믿을 만한 사람이 적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아무리 그렇게 발버둥치게 살아도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리는 환란 때에 죽음을 면케 한다"고 한 것입니다.

 

네 번째의 원리는 불성실의 결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정직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구원을 얻으려니와 사특한 자는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필귀정입니다. 불의는 멀리 보면 반드시 무너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불의한 자가 일시적으로는 번영을 누리고 호화로운 삶을 살아갈는지 모르지만 세월이 가면 반드시 무너집니다. 또 그래야 합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인천 북구청 사건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그 많은 돈을 쏙쏙 빼 먹을 때 얼마나 달콤했겠습니까? 옛말에 얻어 먹는 밥보다 훔쳐 먹는 밥이 더 맛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 오래 앉아 있으면서 보이지 않게 돈을 빼내서 집을 사고, 땅을 사고, 놀러 다니고, 즐기고 하는 동안 얼마나 재미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재미였겠습니까? 그 일이 언제고 그렇게 계속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렇게 생각을 했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고 그것은 오늘의 말씀을 망각한 행동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심판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악이 잠시 형통하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악도 잠시는 승리할 수 있고,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의인도 고난을 받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우리가 시험을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시편 73편은 아삽이라는 사람이 썼는데 그 사람도 그렇게 해서 실망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시73:2)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불의한 사람이 형통하는 것을 보고, 불의한 사람이 죽을 때도 편안히 죽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아주 불의한 사람도 세상에서 번영도 하고, 성공도 하고, 출세도 하고, 죽을 때도 편히 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반드시 번영이라고 하고, 출세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악은 결국 무너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멀리 보고 살아야지 지금 현재만을 보고 살면 시험받을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에 너무 개의치 말고 오늘을 살되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옛사람이 "진인사 대천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삼국지를 보면 제갈량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천하의 모사꾼 제갈량이 적과 싸우는데, 꼭 성공하리라고 믿고 온갖 모사를 다해서 화공 작전을 짜 놓았는데 그만 그 밤에 생각지도 하지 않은 소낙비가 와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누구도 제갈량이 그렇게 쉽게 패하리라고는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때 제갈량이 한 말이 있습니다. "모사 재인하되 성사 재천이니 진인사 대천명이라." 일의 도모는 사람이 하되, 성패의 가름은 하늘이 하니, 사람은 그 할 바를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릴지니라. 얼마나 옳은 판단입니까?

우리는 오늘을 살되 너무 약게 살지도 말고, 너무 성공에 사로잡혀서 거짓을 사용하거나 수단을 쓰지도 말고, 일의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내 할 일 다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살면 믿음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용기가 생기는 법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이렇게 살기만 하면, 우리들의 삶과 미래와 운명과 영혼까지도, 하나님이 책임을 지시고,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삶입니다. 어떤 면에서 신앙의 삶은 단순한 생활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거기에 손을 쓸 필요도 없고, 재주를 부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원칙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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